비판 : 근대형성기에 대한 미시적 접근의 한계

빈약한 실증 빈곤한 해설...구성주의에 포획된 과거

2003년 11월 13일   강성민 기자

근대 형성에 관한 미시적 탐구들이 젊은 국문학자를 중심으로 활발하다.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가 펴낸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刊)는 1920년대 초반 이 땅을 물들인 연애사건들을 추적했으며,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소명출판 刊)은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이 새로운 국가에 무엇을 채울 지 상상하고 실천했던 모습을 주목했다.

'연애의 시대'는 올초에 출간된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지음) 및 김진송 씨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이상 현실문화연구 刊)의 계보를 잇는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몸과 욕망의 근대를 끌어당긴다는 데 있다. 신문잡지의 잡스러운 사건사고와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을 통해 당시 대중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앎을 보충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지난 1999년 '딴스홀…'의 이런 시도는 신선했고, 그 안에 담은 근대의 실물들 또한 '근대적 자기인식'의 다른 측면에 대한 충분한 응답이 돼줬다.

 *1928년 조선일보에 실린 '모던걸의 장신운동'이란 삽화. 여성들의 몸치장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의 두 책은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다. '연애의 시대'는 '戀愛'라는 박래품이 조선반도에 불어닥친 과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자료확보의 미흡과 그에 따른 해석의 빈곤을 초래하고 있다. 저자가 특히 추적하는 것은 기생과 여학생, 가정부인들의 삶에 나타난 변화다. 3·1운동 이후 급격히 늘어난 교육열풍으로 거리를 온통 여자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신문에는 이들 '신여성'에 대한 당혹스러운 관람기가 실리기 시작하더니, 신여성과 서울로 유학온 유부남과의 불륜이 대대적으로 퍼지면서 조선반도는 연애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연애편지라는 새로운 소통방식, 독서를 통한 연애의 내면화, 비극자살로 인한 삶과 죽음의 관념에 나타난 변화는 이 지점에서 던져볼 수 있는 질문들이고 저자 또한 챙기고 있는 주제들이다.

식민지 근대를 읽어내는 편향성

하지만 이 책엔 중요한 게 하나 빠져있다. '재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이 줄 수 있는 재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애의 치마밑을 긴장되게 엿보고 조선팔도 구석구석을 헤집는 博覽의 교차점에서 생길 만한 것이다.

이 책은 근대에 '연애'라는 근사한 거푸집을 덮어 씌울뿐 전혀 잘 빠진 결론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신문 사회면의 표면을 계속 미끄러져나가면서, 어디서 한번 본듯한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이미 일본에서 수없이 다뤄온 연애개념의 수용경로를 모방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신문읽기의 한계가 아닐까.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刊)이 '文化史' 서적으로서 자신의 경쟁력을 온갖 공문서, 비밀문서, 증언 등을 통해 확보한 점은 유명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신문'만' 읽고 쓰는 글은 결코 풍부해질 수 없는 것이다. 

3편의 중편논문을 모아 낸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에 오면 부작용이 더하다. '위생담론과 신체에 대한 인식틀의 변환', '전쟁서사와 국민국가의 프로젝트', '꿈-서사의 민족담론과 계몽의 수사학' 등 그 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프로젝트라는 문제설정부터 문제다. 일본이라면 이런 문제설정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국민국가를 통해 동아시아 제국으로 성장하고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심을 세웠고 실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고작 10여년의 애국계몽기 동안 그런 소망을 품어봤고, 이후는 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이 책은 그런 역사적 맥락과 전혀 상반되는 건국의 흥분감을 내내 연출한다. 안해도 되는 연구를 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계몽지식인들의 국가기획이, 해방 이후의 건국기획과 맺는 연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에서 국민국가 프로젝트를 살펴야 하는가. 다만 당시 지식인들이 그렇게 근대를 내면화했고, 그게 지식인 주체구성의 한 형식이었다고 말하면 충분한가. 당시 지식인들은 과연 그토록 치밀하게 지도를 그리듯 근대를 준비했을까. 근대적 매체의 마술에 의해 계몽된 건 지식인이었을까, 대중이었을까.

이 책의 첫번째 글은 신체를 위생적으로 관리해 국가에 적합한 국민을 생산키 위한 계몽의 실천과 그에 따른 여러 인식의 변화를 추적한다. 소제목은 '질병의 발견, 위생의 정치학', '구습의 타자화, 서구적 매너의 형성', '욕망포획과 정절의 내면화', '훈육되는 신체와 정신' 등으로 흘러간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과도한 구성주의적 용어들이다. 로고스 패러다임을 깨려고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어렵게 발명해낸 그 전략적 용어들이 여기선 거의 자동녹음기처럼 연발되고 있어서 낯이 뜨거울 정도다. 특히 국가 안에 국민을 '배치'한다는 식의 용어들은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 지도 대충 짐작이 갈 만큼 식상함을 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

무비판적 同人主義 문제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글의 전반에 등장하는 주체와 타자,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구별이 전혀 현실 고려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가령 신체를 통제하는 생체권력의 형성을 말하는 부분은 전근대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있다. 근대적 교육, 인구조사 등을 통해 파놉티콘이 형성된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유교적 신체규율이 엄연히 있었다. 최소한 그 두개의 규율을 다른 것으로 보려면 서로 치밀하게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것은 가볍게 생략될 뿐이다.

治道(깨끗한 거리)를 위생적 신체와 일치시키는 은유적 논의전개 방식은 글을 흐름화하지 못하고, 끝없이 분절시키고 있다. 이것은 근대성 연구의 후발주자로서 외국의 선행연구자들의 관점을 일종의 '선입견'으로 갖고 연역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니 강박이 생긴다. 앞의 글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삶은 기획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에서 서구이성에 포섭되지 않는 미적 주체의 기획논리를 발견하자는 과도한 의욕 말이다. 물론 그런 식의 기획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과연 그게 우리 삶의 본질이었을까.

이들 연구자들이 수시로 참조하는 일본 근대의 탈전통과 문명의 재배치는 국가권력의 구체적 실천과 당대 지식인들의 긴밀하고도 거대한 연계 아래서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중요한 차이는 왜 무시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볼 때 최근 근대에 대한 미시적 탐구서들은 구체성을 잃고 수입개념에 갇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성 연구의 '同人主義'에서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현재 국민국가, 계몽근대에 대한 연구자 집단은 상호간의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상호인용은 충분히 하지만 서로의 견해에 대한 메타견해나 비판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마치 일심동체인 것처럼 똑같은 주제와 소재, 관점과 기술법으로 앞으로 밀고 나가기만 한다. 과연 이런 식의 학문접근이 성찰성과 객관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갈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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