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아포리즘 - 심야총서 11
프란츠 카프카 지음 / 청하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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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순히 카프카의 글모음집은 아니다. 언제라도 월세구박에 밀려 작업공간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소극장 연극판에서 작가 이윤택이 배우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란 새로운 인물상을 창조해서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 카프카와 그 인물들이 드러난다. 카프카의 아포리즘들도 좋지만 이윤택과 극단사람들의 서문과 독서노트도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이 책에도 눈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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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란 무엇인가 동문선 현대신서 6
노먼 솔로몬 지음, 최창모 옮김 / 동문선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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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우리에게 가깝고도 멀다. 가깝다면 그건 바로 영화나 문학에서 자주 재현되는 유대인의 수난이란 소재때문일 것이고, 멀다면 우리가 그렇게 유대인의 수난에 대해 자주 접하면서도 유대교와 유대인이란 것이 도데체 어떻게 형성된 것이며, 어떤 교리와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의 유대인은 과거의 유대인과 별다를 것이 없는가하는 등의 실질적인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개 우리의 유대교에 대한 편견은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동정심이나 부러움 정도이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서구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 대해 갖는 심각한 편견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유대교 인식은 아직도 성서 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중동의 이슬람국가들과 대치하는 강인한 이스라엘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유대교도 역사를 통해 교계 내부에서 다양한 분파와 현대화가 진행되어 왔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모더니즘 건축가로 이름높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유대교 성전을 지었다는 것... 내 경우에는 19세기말 20세기 초 독일 사상가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가 시오니즘운동과 관련된 지식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유대교가 과연 어떤 것인지 정보를 얻고 싶었고, 작은 분량이지만 유용한 가이드가 된 듯 하다. 하지만 좀 더 심도있는 성과물들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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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학교 이야기 살아있는 교육 11
윤구병 지음, 변정연 그림 / 보리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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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일까? 아마도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내보이는 것을 통해서 일 것이다. 삶은 이 두 국면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 과정을 성실하고 진정성있게 해나갈 때 하나의 인간다운 인간이 형성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우리 아이들의 받아들이는 것은 알량한 교과서와 그 참고서들로 제한되고 있으며, 삶의 터전도 건물과 건물 사이, 벽과 벽 사이, 텔레비젼과 워크맨 혹은 컴퓨터 사이에 갇혀 있다. 궁극적으로 받아들임은 감각의 해방과 관련이 있다. 감각이 틀에 박힌 지식이나 억압적 체계 속에 억눌려 있을 때 아이들은 인간이기 보다는 사이보그가 된다. 감각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은 인간교육의 시작이 될 것이다.

두번째로 내보이는 것, 즉 표현활동이다. 이 역시 오늘의 아이들에게 표현이란 형식과 규율에 얽매여 있다. 감각이 해방되지 못했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매마른 영토에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죽은 표상들일 뿐이다. 얼마전 도시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에게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그려보라고 했다. 시골 아이들은 그 약도에 다양한 감각의 경험들을 그려넣었다. 길가다 개구릴 잡는 곳, 쉬어서 이야기나누기 좋은 곳, 어느날 우연히 본 죽은 흰 새를 발견한 곳 등등등... 그 그림에는 이야기가, 느낌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도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각진 길들의 교차선, 그리고 학교까지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학교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문방구나 경찰서 따위들이었다. 끔찍한 세계, 용감한 신세계?

윤구병 선생은 이런 끔찍한 세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몸소 변산공동체를 실험 중이시다. 이 책은 그가 변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받아들이는 것과 내보이는 것의 두 차원에서 현재 아이들 교육의 문제와 나름의 대안들과 경험들을 감동적으로 그려 보여주신다. 그의 궁극적인 교육의 목표는 '건강한 파괴자를 기르는 것'이다. 요즘 디지털 혁명의 시대가 되어서 인지 사람들은 파괴자를 숭배하기 시작했으나 내가 보기엔 그들이 별로 '건강'한 것 같지는 않다. 기껏해야 그들은 감각을 새로 만든 디지털적 체계에 종속시키는 것이지 않은가? 하나의 인간으로 고유한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사유력을 가진 아이를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고, 또 단발마적인 번뜩임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아닐까?

요즘 가끔씩 인사동에 가면 변산공동체에서 난 먹거리로 음식을 해주는 집들을 만난다. 그러면 다시금 이 책이 떠올려준 당연한, 그러나 절실한 교훈들을 문뜩 떠올리곤 한다. 나도 언젠가는 내려가리라. 컴퓨터나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경쟁에서의 승리, 빠른 두뇌회전, 주도면밀한 인간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이 유토피아에 참여하고 싶다.

앞에서 좀 부정적인 서평을 읽었다. 하지만 왠지 기능주의적으로 치우친 교육관인 듯 하여 저항감이 생긴다. 윤구병 선생의 교육관은 그런 기능주의적 교육관 이전에 먼저 필요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회에 순응하기 전에 사회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윤구병의 시각은 이상적이지만 옳은 면이 많다고 봐야 한다. 교육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사회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고 참된 의식을 추구하도록 고양된 인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철저하게 기능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를 돌파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은 결단코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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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사 - 학술총서 24
앤서니 앤드류스 지음, 김경현 옮김 / 이론과실천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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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탐구당에서 간행한 키토의 <그리스 문화사>를 이 책을 읽기 이전에 읽은 적이 있다. 마치 하나의 소설이나 르뽀기사를 읽는 듯한 흥미진진한 서술이 아주 매력적인 책이었다. 나는 그것이 키토의 의도적 역량이었음을 무시한 채 거꾸로 그리스인들에 대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리스라는 말만 나오면 우선 집어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문체는 건조하고 대중적이기보다는 학술적이다. 내가 역사학에 대한 식견이 없기 때문에 학술적 성가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중의 흥미에 천착하기 보다는 균형있는 서술에 더 공을 들인 듯 하다. 따라서 나 같은 문외한보다는 역사 전공자들이 필수적으로 익히고 넘어가야 할 책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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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목소리로 - 동녘선서 75 동녘선서 75
캐롤 길리건 지음, 허란주 옮김 / 동녘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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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에 의해 구분된 6단계론을 실제에 적용해보면 대개 도덕적 최고 단계인 6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대개 남성들이었고 여성들은 3단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분석틀을 따른다면 다수의 여성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와 집단의 기존가치에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여성은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해명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사회가 여성들을 그 수준에 묶어놓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수준이란 것이 수준이란 용어를 쓸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은 열등한 단계가 아니라 단지 다른 목소리이며 다른 가치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길리언의 태도는 바로 후자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 3단계란 어떤 특성을 가진 것일까? 그 특성들은 주로 남에게 인정받고 만족을 주기 위해 행위하는 성향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약간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길리건의 표현대로 보살핌의 입장care perspective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퍼스펙티브에서 여성에게 주된 도덕적 문제는 정의의 문제나 권리와 의의무의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의 충돌'의 문제가 된다. 이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은 스스로 채택한 보편적 도덕 원리를 적용하기 보다는 당사자 상호간의 타협과 조화를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소릴 들은 적이 있다. 남자들의 결정방식은 하나, 둘, 셋, 빵!하는삼단논법식의 쾌속결정 방식으로 가는데 반해 여성들은 구체들 하나 하나를 대하면서 천천히 결정을 내려간다고 말이다. 남자들은 어떤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위고하, 인종성별을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정의롭다고 보는 반면, 여성들은 섯불리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고 구체들을 범주화하기 보다는 차이들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차이들과 무리없이 공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 시각이 곧 길리언의 시각과 유사한 듯 하다.

길리언은 여성성의 관계지향성과 남성성의 보편적도덕지향성을 나란히 놓치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생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터득된 어떤 것들이며 각각 장점만큼 단점도 있다. 이 여성성의 측면이란 어쩌면 남성성의 극단화가 다다를 때 부딪히는 자율과 정의가 주는 딜레마에 대처하는 능력이 되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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