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학교 이야기 살아있는 교육 11
윤구병 지음, 변정연 그림 / 보리 / 199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일까? 아마도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내보이는 것을 통해서 일 것이다. 삶은 이 두 국면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 과정을 성실하고 진정성있게 해나갈 때 하나의 인간다운 인간이 형성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우리 아이들의 받아들이는 것은 알량한 교과서와 그 참고서들로 제한되고 있으며, 삶의 터전도 건물과 건물 사이, 벽과 벽 사이, 텔레비젼과 워크맨 혹은 컴퓨터 사이에 갇혀 있다. 궁극적으로 받아들임은 감각의 해방과 관련이 있다. 감각이 틀에 박힌 지식이나 억압적 체계 속에 억눌려 있을 때 아이들은 인간이기 보다는 사이보그가 된다. 감각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은 인간교육의 시작이 될 것이다.

두번째로 내보이는 것, 즉 표현활동이다. 이 역시 오늘의 아이들에게 표현이란 형식과 규율에 얽매여 있다. 감각이 해방되지 못했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매마른 영토에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죽은 표상들일 뿐이다. 얼마전 도시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에게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그려보라고 했다. 시골 아이들은 그 약도에 다양한 감각의 경험들을 그려넣었다. 길가다 개구릴 잡는 곳, 쉬어서 이야기나누기 좋은 곳, 어느날 우연히 본 죽은 흰 새를 발견한 곳 등등등... 그 그림에는 이야기가, 느낌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도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각진 길들의 교차선, 그리고 학교까지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 학교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문방구나 경찰서 따위들이었다. 끔찍한 세계, 용감한 신세계?

윤구병 선생은 이런 끔찍한 세계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몸소 변산공동체를 실험 중이시다. 이 책은 그가 변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받아들이는 것과 내보이는 것의 두 차원에서 현재 아이들 교육의 문제와 나름의 대안들과 경험들을 감동적으로 그려 보여주신다. 그의 궁극적인 교육의 목표는 '건강한 파괴자를 기르는 것'이다. 요즘 디지털 혁명의 시대가 되어서 인지 사람들은 파괴자를 숭배하기 시작했으나 내가 보기엔 그들이 별로 '건강'한 것 같지는 않다. 기껏해야 그들은 감각을 새로 만든 디지털적 체계에 종속시키는 것이지 않은가? 하나의 인간으로 고유한 감성과 상상력, 그리고 사유력을 가진 아이를 만든다는 것, 그것은 기술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고, 또 단발마적인 번뜩임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아닐까?

요즘 가끔씩 인사동에 가면 변산공동체에서 난 먹거리로 음식을 해주는 집들을 만난다. 그러면 다시금 이 책이 떠올려준 당연한, 그러나 절실한 교훈들을 문뜩 떠올리곤 한다. 나도 언젠가는 내려가리라. 컴퓨터나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경쟁에서의 승리, 빠른 두뇌회전, 주도면밀한 인간관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이 유토피아에 참여하고 싶다.

앞에서 좀 부정적인 서평을 읽었다. 하지만 왠지 기능주의적으로 치우친 교육관인 듯 하여 저항감이 생긴다. 윤구병 선생의 교육관은 그런 기능주의적 교육관 이전에 먼저 필요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사회에 순응하기 전에 사회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윤구병의 시각은 이상적이지만 옳은 면이 많다고 봐야 한다. 교육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사회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고 참된 의식을 추구하도록 고양된 인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철저하게 기능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를 돌파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은 결단코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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