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식의 위기 1 대우학술총서 구간 - 사회과학(번역) 28
폴 아자르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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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근대 유럽의 정신적 토대를 다진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걸친 지적, 사상적 흐름을 개관한 책이다. 현대의 역사가들이 근대의 기폭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과 그 지적 소용돌이에만 정신이 팔려 간과했던 이전의 유럽인들에게 나타난 의식의 위기들에 주목한다. 그는 이를 위해 고대와 근대의 두 시기 사이에 놓인 35년(1680_1715)을 선택한다. 그는 완연히 각 시대의 성격을 드러낸 시기를 택하기 보다는 두 시대가 혼란스럽게 겹쳐 있는 시기를 택한 것이다.

옛것은 부정되고, 아직 아무것으로도 대체되지 못한 시기말이다. 이런 시대의 독특함에 끌린 학자들은 많다. 루시앙 골드만은 [숨은 신]에서 이런 시대적 정황에 독특하게 반응한 법복귀족들의 '비극적 세계관'을 논하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 시기를 맹렬한 투쟁의 시기였다. 갓 과거의 껍질을 벗기 시작하자 이 새로운 의식들의 전선은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특히 2부의 상상력과 감성의 장이 재미있다.

신이 거세된 세계에서 한편으로는 오직 메마른 이성만으로 싸움을 거는 의식이 있었던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신이 거세된 자리로부터 인간의 감성을 주술적이거나 풍자적인 방식으로 해방시키려는 의식도 있었다. 전설문학이나 모험소설은 요정과 건달을 등장시킨다. 오페라가 전 유럽에서 환영을 받으며 민족적 감성이 전설로 치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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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비평 - 토도로프 저작집 3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김동윤 외 옮김 / 한국문화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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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로프는 오늘날 문학연구의 주류를 형성하는 시각을 200여년 전의 낭만주의적 세계관에서 찾고 있다. 칸트의 미적인 것의 자율성론에 기대는 이 세계관은 '문학이란 문학 자체속에서 목적을 찾아내는 언어'라고 본다. 여기서부터 점차적으로 문학의 성찰에 있어서 진리와 가치에 대한 초월적 모색을 중지하고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문학 전문가들은 문학이 어떤 진리와 가치를 모색하기 위한 도구로 상정하지 않고 오직 문학의 내재적 구조나, 문학과 세계 사이의 역사적 상응관계에만 천착하고자 한다. 전자가 구조주의적 접근이요, 후자는 역사주의적 접근이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름대로 얻고자 했던 소박한 독자들의 태도가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일까?

토도로브는 대신 '대화적 비평'을 이야기한다. 이는 '보편적 가치들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지 않고서도 그 가치들을 미리부터 확보해둔 가치로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가능한 합의의 토대로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진실의 소유가 아니라 진실의 모색을 위한 과정이다. 진실은 도덕적인 것도 부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진실은 가치가 아니다. '진실을 열망하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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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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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은 보존이 아니라 연소다.
충만은 아름다움이다.

보존(혹은 축적)은 충만과 서로 직접적 연관이 없다. 충만을 위해 축적을 추구하는 것은 영원히 실패할 도박일 뿐이다. 단지 축적은 소모와의 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충만과 관계한다.

충만은 오직 그 충만이 소비되는 순간에만 나타난다.

충만과 소모의 관계는 금기와 위반의 관계만큼이나 직접적이고 동시적이다. 금기는 위반을 전제하고, 위반은 금기를 조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충만은 소모를 전제로 하며, 소모는 충만을 조장한다. 이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국을 경험하게 된다.

보존만으로 치우친 삶은 생명력을 죽여버린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좀비적 삶이다. 거꾸로 연소만으로 치우친 삶은 생명력이 넘치는 만큼 생명력을 고갈시킨다. 죽음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삶이다. 맹목적 타살이나 자살로 끝난다.

인문학과 예술은 삶의 이 양면성, 즉 축적과 소모의 이중성을 간파하고 그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끝없는 모색을 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삶은 지나치게 '보존'으로만 기울어져 있다. 이것이 인문학이나 예술분야가 맥을 못추고, 오직 실용적 지식과 배설적(그래서 결국 실용적 삶으로 처절하게 복귀하도록 돕는) 일원적(一元的) 문화만이 판치게 하는 사회문화적 배경이다.

근대의 합리화는 지속적으로 삶의 타나타노스적인 측면을 배제해 왔고(이는 프로이드, 사드, 푸코 등이 발견한 배제의 매커니즘이다) 그로인해 근대적 삶 속에서는 삶의 한 축이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게 떠오른 부분은 어둠에 묻힌 부분에 의존한다) 우리는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근대의 삶은 가속적으로 밝은 영역의 시스템에 의해 빈틈없이 갇혀 버리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시스템을 실제로 결정하는 어두운 부분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분명 그 어두움이 밝음과 한데 뒤얽혀 밝음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어둠과 밝음의 이중적 운동(요철의 존재론), 치명적인 얽힘과 긴장, 그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대해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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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담는 집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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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유독 파벌주의가 심해지는 문학판에서 김화영 교수는 올곧게 독립적으로 자기 길을 걸어온 문학자로 이름이 높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것은 얼마전 티브 독서프로에서 이문열씨의 소개때문이기도 했고, 예전에 민음사에서 기획한 <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 실린 김화영 선생의 [책, 독서, 교육]이란 글에 매료된 이유이기도 했다. 거기서 다양한 이들의 독서와 책에 대한 어쩌면 기행적인 이야기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내 나름대로 나의 독서생활에 심리적 에너지를 충전시키주는 좋은 꺼리가 되기도 했었다.

이 산문집에서 유독 나의 신경을 모은 것은 츠베탕 토도로브에 대한 소개였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본격적으로 유럽에 소개한 동유럽 출신의 문학비평가인 토도로브의 이론은 문학 뿐만 아니라 영화를 위시한 여타 예술분야에서 기초적 이론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화영선생의 글은 토도로브의 학문적 여정을 되밟으면서 다시 진실과 가치의 문제로 회귀하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고, 결국 나로 하여금 토도로브의 후기 저작들을 읽고 싶은 욕망을 키워주었다. 이렇게 또 인연은 만들어진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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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 (1887년 가을-1888년 3월) 책세상 니체전집 20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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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주체개념 비판 및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작업을 통해 실재에 대한 나름의 정합적 해석을 준비하고자 한다. 인식주체는 귀향가고 해석주체가 등장한다. 생성은 초월적인 목적을 갖지 않고, 가상도 아니며, 모든 순간에 가치가 동일한 것으로 제시된다. 이 작업들은 힘에의 의지의 자기 목적적인 작용방식과 보편성 확보를 통해 가능해지며, 이것은 목적론 및 결정론과의 대결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덧붙여 [선악의 피안]에 서 선보인 고통의 철학이 힘에의 의지로서의 삶과 혼합된다. 삶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힘을 추구하며, 의지의 더욱 더 많은 힘의 추구는 기쁨을 불러 일으킨다. 고통은 억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힘의 추구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며, 그런 한에서 강화되어야 한다. 고통과 기쁨은 힘에의 의지의 자기 발전의 필연적 계기로서 그 자체로 의미가 충만하다. 이 점에서 인간 삶의 부정적인 현상이나 우연적이라고 여겨지던 계기들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삭감없이 아무런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긍정하고 싶어하는 니체의 의도다.

이것은 생성으로서의 세계와 인간의 삼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을 요청하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한 면이며,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니체는 부정과 파괴가 아니라 긍정과 건설이라는 예술가적 철학자상으로 나아간다. 문뜩 떠오르는 것은 최근에 국역된 맑스의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다. 운동에 클라니멘이란 우발적 요소를 상정함으로써 유물론을 결정론과 목적론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여기서 엿보인다. 알튀세는 이를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명명했는데, 니체의 '생성의 철학'과 아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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