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삶은 보존이 아니라 연소다.
충만은 아름다움이다.

보존(혹은 축적)은 충만과 서로 직접적 연관이 없다. 충만을 위해 축적을 추구하는 것은 영원히 실패할 도박일 뿐이다. 단지 축적은 소모와의 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충만과 관계한다.

충만은 오직 그 충만이 소비되는 순간에만 나타난다.

충만과 소모의 관계는 금기와 위반의 관계만큼이나 직접적이고 동시적이다. 금기는 위반을 전제하고, 위반은 금기를 조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충만은 소모를 전제로 하며, 소모는 충만을 조장한다. 이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국을 경험하게 된다.

보존만으로 치우친 삶은 생명력을 죽여버린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좀비적 삶이다. 거꾸로 연소만으로 치우친 삶은 생명력이 넘치는 만큼 생명력을 고갈시킨다. 죽음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삶이다. 맹목적 타살이나 자살로 끝난다.

인문학과 예술은 삶의 이 양면성, 즉 축적과 소모의 이중성을 간파하고 그 적절한 균형점을 찾기 위해 끝없는 모색을 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삶은 지나치게 '보존'으로만 기울어져 있다. 이것이 인문학이나 예술분야가 맥을 못추고, 오직 실용적 지식과 배설적(그래서 결국 실용적 삶으로 처절하게 복귀하도록 돕는) 일원적(一元的) 문화만이 판치게 하는 사회문화적 배경이다.

근대의 합리화는 지속적으로 삶의 타나타노스적인 측면을 배제해 왔고(이는 프로이드, 사드, 푸코 등이 발견한 배제의 매커니즘이다) 그로인해 근대적 삶 속에서는 삶의 한 축이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게 떠오른 부분은 어둠에 묻힌 부분에 의존한다) 우리는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서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근대의 삶은 가속적으로 밝은 영역의 시스템에 의해 빈틈없이 갇혀 버리며,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시스템을 실제로 결정하는 어두운 부분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분명 그 어두움이 밝음과 한데 뒤얽혀 밝음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어둠과 밝음의 이중적 운동(요철의 존재론), 치명적인 얽힘과 긴장, 그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대해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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