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 정치 상식 사전 Special
김민찬 지음, 김영진 그림 / 미르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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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1996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창 논술과 논증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정치로 이어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정치에 대해서 안다면 뭘 알겠냐마는 주간 시사잡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정치비판적인 에세이들을 신문에서 찾아읽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는데, 그래서인가 뉴스의 내용을 유심히 집중해서 듣다보면 왠지 모르게 스스로 비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답니다.

그 때 지하철 역 안의 작은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변상욱 씨가 쓰신 "언론 가면 벗기기" 라는 책이었습니다. 집에 가다말고 서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책을 이리 저리 뒤적거리며 읽었는데 목차만 봐도 흥미진진한 전개에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사가지고 왔던 기억이 나네요. 몇 번을 읽고 또 읽어 지금은 누렇게 바랜 책이 되어버렸지만, 아직까지도 이 책을 볼 때면 제가 어린 나이에 용돈을 털어 산 몇권 안되는 책 중 하나라는 것과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오릅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20대 후반이 되었지만, 사실상 정치에 대해서는 오히려 훨씬 무관심해져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그 때는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조금만 모르는 내용이 나와버리면 아예 귀를 닫아버리기도 하니까요. 언제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 아니 우리나라가 돌아가는 것에 이렇게 무심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저의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 젊은 층 대부분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우려입니다.


작년 10월 말에 있었던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제가 생애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날입니다. 작년 5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있었던 첫 선거였으니까요. 그런만큼 더 관심을 갖고 따져보게 되고, 후보 두 사람의 발행물이나 공약 등을 확인하게 되더군요. 당연히 나경원 후보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던 선거가 오늘의 박원순 시장님을 만들어내고, 매일 매일 답답하고 가슴아픈 뉴스 헤드라인들 사이사이 들려오는 박원순 시장님의 활약은 소중한 한 표를 드린 저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곤 합니다. 

"더이상 국민은 우매하지 않다"라는 희망을 걸게 해준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지난 4월 11일 2012년 총선을 치룰 때도 분명 깨어있는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거 전이 원래 그렇듯이 이슈도 많았도 진통도 많았기에, 그만큼 높은 관심과 여론을 힘입어 어쩌면 모든 것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 없었는데, 어떤 후보가 당선되었고, 어떤 정당이 우위권을 잡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도 저조한 투표율이 그 이유였습니다.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는 의혹은 그렇다치고 엄연한 국민의 권리를 두 명 중 한명 꼴로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는데, 저 역시 '이렇게 국민이 움직이지 않으니 정치권에서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와서 데모를 하는 것도 아니고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니라 단촐하게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하루 종일 시간을 두고 투표장을 열어두었는데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정말 답이 없는 것 같더군요.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20대 여성의 투표율은 고작 8%에 불구했다고 합니다. 20대 여성으로서 투표를 하신 분들은 대한민국 20대 여성의 8% 안에 드는 상위층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실 수도 있겠네요. 


여기서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할까? 

그리고 여러가지 답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1. 자신에게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2. 정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3. 관심을 가져도 안가져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

4. 스스로도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서

5. 모두 다 꼴보기 싫어서

...


반은 웃자고 써본 이야기지만,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것이 더 씁쓸한 현실입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생활이 힘들어 괴로워하고 있고 그 중 많은 괴로움은 분명히 해결할 수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너무 뿌리가 깊어 다시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나쁜 정치"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해도 우리 스스로가 이런 질문을 생각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자 출간된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 4월 초 출간된 미르북스의 따끈따끈한 신간, "나는 꼼수다 정치 상식사전 Special" 입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꼼수다"라는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전 상당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꼼수다"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판이 목적인 비판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방송이고, 듣는 사람의 눈살을 찌뿌리게 만드는 욕설이나 비방은 그 내용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니까요.

혹시라도 저 같은 망설임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안심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꼼수다"는 이 책의 취지를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식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전작 "나는 꼼수다 정치 상식사전"을 미리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총선과 대선이 있는 "선거의 해" 2012년이 가기 전에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전작에서는 담지 못했던, 특히 선거 전 꼭 알아야 할 깨알같은 지식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비꼬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깨우치기 위한 비판"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고 저자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 책에서는 "내가 더 잘났고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식의 비꼬기는 없습니다. 많은 정치 서적이 이러한 우월감이나 회의적 비관주의에 빠져 읽는 사람 마저 불쾌하게 만드는 것에 반해 "정치 상식사전 Special"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의 기본을 알려주기 위한 본분을 잊지 않고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나갑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심지어 증오하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을까?' 묻게되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수시로 오르내리며 온갖 욕과 상소리를 듣는 이명박 대통령. 하지만 어째서 대통령이 싫으냐라고 묻는다면 명쾌한 답변을 듣기 힘듭니다. 우물쭈물 "그냥 나쁘다"라고 하지 않는다면 얼버무리면서 말도 안되는 추상적인 말을 하곤 하니까요. 실제로 대통령이 비판받아야 할 일들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말 한 마디나 예전의 잘못을 들추어 욕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결국 모두들 싫어하니 나도 싫어하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던간에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국민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비판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고, 얼마만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신빙성과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랄한 건설적인 비판은 세상을 바꾸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근거없는 묻지마 식의 몰아붙이기 비판은 말하는 사람의 입과 인격만 더럽힐 뿐이니까요.


모두가 4대강 산업에 대해 비판하고 욕을 하고 있지만, 정작 4대강 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또한 4대강 사업이 어째서 서민경제에 위협이 되고 대기업에 의한, 대기업을 위한 사업이라고 비판받고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 역시 만나보기 힘들더군요. 비판하는 쟁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이 다 나쁘다고 하니까 함께 욕하는가 하면, 힘든 생활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아닐까요?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간에 쟁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남발하는 비판은 개선으로 갈 수 있는 건설적인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가 과연 무엇이길래? 김민찬 씨는 정치는 야구경기나 드라마같은 하나의 "무대"라고 설명합니다.


"정치도 그렇다. 정치라는 무대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정치란 각본이 잘 따인 한 편의 연극 같기도 하고, 때로는 감동적인 드라마 같다. 물론 진흙탕 싸움과 같기도 하다. 

신인 정치인의 등장은 야구처럼 이번 시즌 어떤 활약을 펼칠까 사뭇 기대를 갖게 한다. 신인이지만 MVP가 되거나 예상을 뒤엎고 강팀을 이기는 이변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관객이 없는 공연과 관중이 없는 스포츠 경기는 망한다. 흥행이 없는 모든 무대는 가치가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프롤로그 중, 6페이지)


정치란 하나의 무대이며, 이 무대는 결국 관객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호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정치의 생리 때문에 우리가 정치를 알아가야 하는 것이며 관심을 가지고 그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나 영화 혹은 연극과는 달리 정치는 그 기준과 결과의 정당성, 경과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항상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깨어있어라! 더 알아야 한다! 라고 이 책은 도전합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악한 정치인들에게 가장 유익한(?) 국민은 바로 아무것도 모르고 양떼처럼 끌려오는 국민들입니다. 때로 양떼 가운데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는 양도 있고 반항하며 메에~ 메에~ 소리지르는 양들도 있지만 거대한 군중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리를 지르는 양이 아니라 못된 양치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깨어있는 양치기입니다. 


"지못미의 정치 현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민 스스로 먼저 나서는 역할이 필요하다." (163페이지)


"세상을 바꿀 힘은 우리 안에 있다 (...) 세상을 향한 분노 대신 정치 참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거창하고 위대한 담론이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 파고드는 문제를 공론화해 생활 정치를 이끄는 노력이 필요하다." (206페이지)


"시민이 시민에게 비판을 제대로 가할 수 있을 때야말로 정치가 자생력을 갖는다." (240페이지)



실망만 가득 안겨준 4.11 총선이 지난 후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라에 대해서 불평을 한다면 꼭 물어보라고. 4월 11일 총선에 참여했는지. 그리고 만약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불평할 자격도 없다고 말해주라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로 웃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기 그지 없더군요. 정치의 "정" 자도 몰랐던 제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뒤 정치에 대해서 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무언가가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 요행을 바라는 것일 뿐,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행동일 뿐이라는 것.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늘어갈 때 비로소 "민주정치"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 많이는 몰라도 이 정도만 자각하고 지켜보기 시작한다면, 이번 대선 때는 저번 총선 때와 같은 실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2012년 말 총선을 앞둔 젊은이들. 청소년들과 대학생들, 그리고 취업에 쫓기며 정치에 관심가질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쉽고 명쾌한 설명을 듣다 보면 어느새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정치 용어들과 중요한 사건들, 현재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슈들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기 시작할 때, 거기서부터 관심이 시작될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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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W. 베란 울프 지음, 박광순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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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우리가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성공하고 싶어서... 참 많은 목적들과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행복해지고 싶어서"의 범주 안에 들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행복하다"는 것만큼 추상적인 것 또한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행복해지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결국 어떻게 해야 "행복"이라는 종착역으로 달려갈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헤매면서 우연히 행복해지기만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행복"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가에 대해 연구되어왔죠. 저도 잘 알지 못했지만 "행복학"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긍정적 심리 접근법은 이미 미국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분야라고 합니다. "행복"이라는 비밀의 정원으로 안내하는 수많은 문들이 있지만, 결국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활에 활용하는가의 여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습니다. 좋은 방법, 효과적인 가르침이라도 사람에 따라 맞고 맞지 않고가 있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방법이라고 해서 내게도 꼭 유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소개할 책은 행복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W. 베란 울프 (W. Beran Wolfe) 의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How to be Happy Though Human?)" 입니다. 1931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스테디셀러인데 이미 1957년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행복을 꿈꾸고 소망하는 당신, 베란 울프 박사가 인도하는 "행복의 길"로 함께 들어가보실까요?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한 베란 울프 박사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알프레드 아들러 박사를 도와 "아들러 심리학"을 정립하기 위해 다시 빈으로 돌아옵니다. 젊은 나이에도 날카로운 통찰력과 탄탄한 지식의 소유자였던 베란 울프 박사는 안타깝게도 35세라는 나이에 사망하게 되는데, 아마도 사고사였을 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짧은 생애를 보내고 간 탓인지, 오스트리아 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미국에서 활동했을 때의 것으로, 아들러 심리학의 주요인물이었던 베란 울프 박사에 대해 독일어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운의 천재가 요절하기 전 우리에게 이 "행복론" 책을 남겼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뛰어난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였던 베란 울프 박사는 수 많은 임상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나가는데, 80년이 지난 오늘 있는 그대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란 울프 박사가 심층적으로 자신 곧 자아를 분석해나가는 것은 때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첨예합니다.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이 짧은 서평 안에 정리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베란 울프 박사가 말하는 행복세계가 무엇인지 그 몇가지 요점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서


대학진학과정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과"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아마 자존감이 부족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자신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일 것이라는 못된 농담인데, 이것은 우리 주위에 널리 퍼진 "심리학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편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자가테스트, 정신분석 등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의 대부분이 호의를 가지고 시도해보려는 사람도 어이없어할만큼 부실하고, 때로는 근거없기까지 한 엔터테인먼트인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베란 울프 박사의 시대에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이비 심리학 연구서들이 한마디로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일반 독자들 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다. 또 심리학의 이름을 빌린, 차마 눈뜨고는 못 볼 야바위 기사가 실린 아주 형편없는 출판물들이 가두에서 빨리고 있다. 약간의 돈과 자기 현시의 소질만 있으면 누구나 심리학자라 칭하며 인간 행동의 소름이 끼치는 측면만을 부각시킨 '심리학 잡지'를 간행할 수 있다." (머리말 중, 11페이지)


이쯤 되면 베란 울프 박사가 얼토당토않은 사이비 심리학에 얼마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통 심리학을 알고 이러한 사이비 간행물에 빠지지 않도록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째서 이렇게 심리학에 열광하게 되는 걸까요?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별자리 성격을 믿는가 하면, 21세기 하고도 12년이 지난 오늘 궁합이 맞아야 한다며 결혼하기 전 점집을 찾는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우스운 것은 심리학이 이러한 미개신앙의 연장선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성격 테스트 등을 이용하여 상대를 하나의 틀에 끼워 맞추어 이해하려고 하는 사례 역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 "상대방"에 대해서 분석하고 더 알고 싶어하는 일반적인 트렌드와는 달리, 베란 울프 박사의 행복론은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대방을 분석해서 그 사람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심층적 구조를 파악하여 행복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죠. 언뜻 보면 크게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일상 생활에 적용해보았을 때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베란 울프 박사의 이론을 인정한다면 결국 사람은 주위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위치에 서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하지 못한 이유로 대부분 외부적 조건을 꼽는 우리들의 고민은 결국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충분히 개선 가능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 베란 울프 박사는 인간이 "인간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많은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오류 (베란 울프 박사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습니다만) 는 그것을 자각하기 전까지 행복으로 나아갈 수 없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죠. 결국 고삐 풀린 말처럼 인생이 가는대로 내버려두면 결코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길고도 짧은 책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행복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러 관점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세상의 다른 포유류, 아니, 동물 전체와 비교해서 인간의 아이가 상당히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태어나 몇시간 후 눈을 뜨고 얼마 후부터 스스로 걷고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동물에 비해 인간의 아이는 스스로 걷기까지도, 스스로 먹을 것을 먹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또한 그렇게 움직일 수 있게 된 후에도 부모의 도움 없이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살아남기 힘든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발달은 더디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다른 동물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간의 특성상,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나아가 피할 수 없는 "열등감"이 된다고 박사는 주장합니다.


"인간의 아이만이 생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신의 불완전함을 '경험한다'." (64페이지)


결국 인간은 생태학적으로 열등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등감이 성장과정에 따라 어떻게 개선되고 해결되는지에 따라 성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 형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피할 수 없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노출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주변환경에 훌륭하게 적응하기 위해) 선택하는 하나의 방법 혹은 수단이라고 박사는 주장합니다 (169페이지). 결국 성격 혹은 퍼스낼리티는 은밀한 무의식적인 인생목표가 구체화된 것 (173페이지) 이라고 할 수 있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딱딱하고 날카로운 껍질을 입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개선되어 더이상의 방어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 (혹은 그 방어가 순전히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된 필요없는 행동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충분히 성격의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병이 아니라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한 소심한 태도라고 정의되는 "신경증" (78 페이지) 역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완치될 수 있다고 베란 울프 박사는 확신합니다. 

(이 신경증에 대해서 베란 울프 박사는 충분한 사례와 분석을 위해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지금의 "나 자신"이 된 이유를 하나하나 짚어 분석해보고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는 것이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박사는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렌 울프의 "행복론" 심리학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효과적으로 파헤치는 것입니다.




행복의 궁극은 얼마나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느냐에 달려있다


아티스트라면 모르겠지만, 행복과 예술의 상관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일까? 의문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베렌 울프 박사는 확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사람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20~22페이지) 그 첫째는 "순무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별다른 인생의 목표나 야망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갈 수 있는 소소함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이죠. 두번째는 인생을 하나의 "비즈니스"라고 보는 타입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성공하기 위해서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손해보지 않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 분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취적이고 건설적으로 보이지만, 베렌 울프 박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야 말로 파괴적인 경쟁 체제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성과로 말하는 것의 비인간적인 헛점을 지적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가 지향하는 마지막 세번째 분류는 바로 "예술가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생활 방식을 택하지 않고 동료들의 복리를 위해 그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며 사회에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삶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예술적인 생활 방식이 인간의 행복과 모순되지 않는 유일한 생활방식이라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해져 간다." (22페이지)


즉 이타적인 배려와 사회공헌적 목표 가운데서 진정한 행복을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닥다리 주장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베란 울프 박사는 책을 집필해나가면서 이러한 이타적 생활방식이 결코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이나 강한 자에게 힘없이 눌려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강인한 신념을 가진 이성적이고 성숙한 행위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이러한 예술가적인 접근의 가치를 정하는 척도는 다름아닌 "나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유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가"라고 합니다. 즉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얻는 만족감이 공동체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결론입니다 (295페이지). 이미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 하나의 능력이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대에 이러한 발상 자체가 어떻게, 얼마나 수용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각기각층에서 행해지고 있는 행복도(만족도) 조사의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낡은 구닥다리 같은 방식이 오늘까지도 어느정도 확실히 유효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경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는 비논리적인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효과적인 변명으로 사용되고는 합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했으니 이런 트라우마를 가질 수 밖에 없어!", "내가 이런 것은 모두 그 때의 트라우마 때문이야". 반대로 긍정적인 경우에도 "경험"이라는 것은 상당한 능력 혹은 가치로서 판단되고는 하는데, 베란 울프 박사는 이러한 "경험" 체계를 순식간에 뒤집어버립니다.


"우리는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경험을 만들어낸다." (251페이지)


경험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통각 체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심리적인 면에서 발달되는 기구인 통각 체계는 모든 경험을 예견하고 사전에 검토하는 한편, 모자이크 같은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의 패턴을 동화시키는 데 적합한지를 판단합니다. 즉, 이것은 정신적인 기준이고 자신의 행동 패턴에 동화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모두 피하기 위해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249페이지).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맞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통각 체계를 베란 울프 박사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하는데, 이 거인은 좁은 고개의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침대에 묶고 침대보다 짧으면 팔다리를 늘여 길이를 맞추고, 침대보다 길면 손과 발을 절단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손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되죠. 


"'통각 체계'는 경험을 모두 밀어 넣을 수 있는 침대이다. 자신의 패턴에 딱 맞지 않는 경험이면 잡아당기거나 잘라 내 딱 맞도록 그 형태를 바꾸어버린다." (254페이지)


팔다리를 늘이고 잘라내는 것 만큼이나 끔찍한 이론입니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여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 입력된 패턴에 따라 왜곡된 기억 혹은 현상일 뿐, 객관성에 있어서는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죠. 전체적으로 사람에 대해, 사람의 본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베렌 울프 박사의 주장들 중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인간의 경험 체계를 뒤흔들어놓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나 주관적이고 제멋대로인 통각 체계를 발전시켜 행복에 이르는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참된 행복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취미나 활동에 맞추어 통각 체계를 넓히는 데 있다" (256페이지)


즉, 우리가 우리의 통각 체계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넓혀갈 때에 보다 넓은 것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베란 울프 박사의 이론을 그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임상실험 결과나 제 주변에서 경험한 사례를 비추어보면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 - 아마 저도 포함될지도 모릅니다 - 은 자신이 아는 것 (혹은 원하는 것) 만 이해하려고 하기 마련이니까요.




비무장지대 가족, 그리고 성


각박하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비무장지대라고 할 수 있는 "가족". 하지만 이런 가족의 범주 역시 베란 울프 박사의 비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아니, 반대로 베란 울프 박사는 바로 이러한 가족들의 왜곡된 인식과 몇 대에 걸친 잘못된 교육으로 수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마지막 안식처, 도피처가 되어야 할 가족이 어떻게 불안과 노이로제를 일으키는 문제의 집단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베란 울프 박사는 이것이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가족의 참된 목적은 자식들이 사회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성적으로 성숙된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가족은 사회적인 감정을 시험해 보는 곳이고, 사회적인 협조성을 기르는 곳이기도 하다. 가족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가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성숙과 정신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준비와 시험의 장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 오늘날의 가족의 모습은 이제는 악명 높은 가부장적인 문화의 유물일 뿐이다." (330페이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사회를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로 나갈 수 없도록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베란 울프 박사의 걱정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는 40살이 넘어서도 매일 집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남성의 경우나 어머니의 과잉보호로 인해 신경증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딸의 사례도 소개합니다. 또한 우리의 주위에서도 "자식이 웬수다"라고 푸념하면서도 그 굴레를 끊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면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애증의 관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경로를 통해 사회에 적응하고 부모의 도움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는 시기를 놓친 자식들은 결국 신경증이나 우울증, 조울증 등으로 발전하게 되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부모를 의지하면서도 원망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부모와의 관계가 이렇듯 왜곡되고 나면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도 큰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정신적 불안감에 휩싸여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베란 울프 박사는 경고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회를 위해 준비시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죠. 그는 육체적 근친상간을 법으로 제한하고 타부시 하는 것처럼,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근절되어야할 정신적 근친상간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333 페이지). 




알고 싶지 않았던 것, 하지만 알아야 하는 것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베란 울프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을 갈망하고 행복을 향해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박사의 글은 자칫 냉소적인 비판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마지막 덮는 그 순간까지 원하던 위로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를 권유하는 것은 행복은 결국 노력하는 것,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란 울프 박사는 행복으로 가는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길이 실제로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할지, 아니면 또다른 곳으로 인도할지는 결국 받아들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을 것입니다. 베란 울프 박사가 제시한 길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하나뿐인 정도는 아닙니다. 또한 첫 출간과 오늘 사이의 오랜 세월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베란 울프 박사가 자신의 환자들과 이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듯이, 독자 역시 비판적으로 책을 읽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 많은 책들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통해 결국 행복을 찾은 독자들도 - 그것이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란 울프 박사의 책이 그 수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행복의 근원, 즉 행복으로 가는 길을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서 찾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철학자도 아닌 심리학자가, 그것도 겨우 서른살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이런 책을 집필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지극히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베란 울프 박사. 인간이기 때문, 인간이라서 한계에 부딫힐 수 밖에 없지만 그 난관을 직시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을 계발하는 법을 담은 이 책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생각해보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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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식 휴먼스피치 -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기술
박영찬 지음 / 시그마북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누군가에게 말을 하거나 글로 써 보내는 것은 가장 널리 알려진 - 그리고 널리 사용되는 "소통의 기법" 중 하나이지만, 말과 글만큼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을 말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하는지에 따라 확실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죠. 어떠한 목적과 이유로 인해 선택한 소통의 방식이 오히려 오해를 일으켜 역효과를 내버리는 것. 누구라도 한번쯤은 경험해본 아쉬운 경험이 아닐까요? 가깝게는 가족 혹은 연인과의 관계에서, 멀게는 직장, 동호회 혹은 어떠한 다른 모임에서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게 될 때에 우리는 "소통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데일 카네기 (1888~1955) 는 미국의 작가이자 커뮤니케이션 강사입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 《데일카네기 성공대화론》, 《데일카네기 자기관리론》, 《데일카네기의 1%성공습관》, 《데일카네기 나의 멘토 링컨》, 《화술 123의 법칙》 등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책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가 강사로서 그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 것은 1912년 YMCA 에서 대화 및 연설 기술에 대해서 강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그 때까지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던 "소통의 기술"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 깨달은 인식이 퍼지게 되면서 약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에도 카네기의 이름을 딴 연구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이 "한국 카네기 연구소 (www.carnegie.co.kr)"에서는 카네기 프레센테이션 코스, 리더쉽 세미나, 최고 경영자 코스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 "카네기식 휴먼스피치"의 저자 박영찬 씨 역시 한국 카네기 연수고에서 데일카네기최고경영자(CEO) 코스, HIP (프레젠테이션) 코스, 카네기리더십 코스, 경영전략 코스, 세일즈 코스, CR/EDC 및 대학생 글로벌 리더십 과정, 그리고 청소년 리더십 코스를 강의하는 카네기식 교육전문가로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데일 카네기의 리더십 노하우를 전파해왔다고 합니다. 수 년간의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카네기식 휴먼스피치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감에 있어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소통이 없이 하루를 사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때로는 몇몇 사람과, 때로는 많은 사람과 소통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소통을 한다"는 개념을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뜻은 영어의 문법과 단어 등을 잘 알고 있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맞는 표현일까요? 한국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언어를 할 수 있는 것과 소통하는 것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하며 우리가 우리의 소통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이 이 책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당신의 껍질 속에서 나오십시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다름아닌 "저자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냐"는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자신넘치고 유머러스하며 곤경이 닥치거나 곤란한 상황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위기에 대처해나가는 모습.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나랑은 정말 다른 사람이군. 저런 재주가 있다니 참 좋겠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나요? 남들 앞에 나서려고 하면 괜히 입이 마르고 심장이 뛰기 시작해 결국은 머리가 하얘진 상태로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다시 자리로 돌아온 에피소드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럴 때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나는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 이런 건 딱 질색이야. 어떻게 잘 넘겼으니 괜찮은 것이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더라도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다음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에 직장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참 골치아파질 때가 많습니다. 조금 자신을 계발시켜보겠다고 책을 읽으려고 하더라도 너무 자신과는 동떨어진 이미지에 차라리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 박영찬씨는 누구보다도 그런 고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역시,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에는 스피치와는 너무도 동떨어져있던 사람이기 때문이죠.



"스피치란 훈련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정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대학생 시절, 나의 최고 소망은 그저 말 좀 잘해보는 것이었다. [...] 그렇지만 언감생심, 사람들 앞에만 서면 까닭 없이 몸이 오그라들고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중언부언했던 끔찍한 기억들만 떠오른다," (프롤로그 중, 7페이지)


"서울에서 가장 높다는 남산타워에 올랐지만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싶어 타워를 빠져나온 후 남산 정상을 찾아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제발 말 좀 잘하게 해주세요! 제발 용기 있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물론 시작부터 용기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집중하게 되자 점차 높아지더니 급기야 영화 속 스승의 말대로 악을 써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얼굴이 축축해 만져 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고, 그 후련함으로 나의 몸은 벅차올랐다. 그동안 말 못한 서러움과 부담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프롤로그 중, 8페이지)



이 정도면 저자 박영찬씨가 얼마나 간절하게 자신의 성격을 극복하고 가지지 못했던 것을 열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으례 굳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가장 부족한 부분에 도전하여 결국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우리 역시 스스로 한계를 도전하는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소통하기





예전에는 지인들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 혹은 편지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면, 21세기 하고도 12년이 지난 지금은 셀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듣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하면, 다양한 SNS를 통해 그의 성향, 취미 그리고 주변인물들의 동향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수 많은 (때로는 불특정다수의) 사람들과 서로 소통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소통의 세계가 이렇게 시끄러워진만큼 진정한 소통을 하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블로그를 운영하고, 누구나 SNS를 사용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누구나 웹 상의 공간을 만들어 자신을 PR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왠만한 "정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러한 세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자는 백 년 가까이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데일 카네기의 가르침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에 맞지 않는, 구닥다리 같은 발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훌륭한 가르침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timeless)" 는 말이 실감 날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하고 문화도 변했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죠. 예나 지금이나 (경우에 따라 많은 개체 차이가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서로 소통하기를 갈급하고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친교의 욕구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좋아해주기를 바란다." (172 페이지)


하지만 모두가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욕구를 어떻게 하면 충족시킬 수 있지 알지 못한다면 결국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 많은 인간관계가 이러한 장벽에 부딫혀 산산조각이 나곤 하죠. "성격차이"니 "문화차이"니 많은 변명으로 그 원인을 대체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소통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소통의 방법이 다양해진 만큼 더욱 더 올바른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소통 방법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을 반영한 "스피치", 즉 "연설"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연설이라니, 나와는 정말 관련 없는 일이잖아!'라고 성급하게 결론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연설은 곧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설명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장소와 취지 그리고 외부적인 요인에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이 기술이 우리 일상 가운데서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이란 "사랑을 바탕으로 청중을 배려하고 공감하려는 소통의 능력"이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154 페이지). 바로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 책 제목인 "휴먼스피치"의 핵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서 소통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 즉 휴머니티를 가미시키는 것이죠. 저자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인간적인 면이 없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면"은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과 관심 그리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의 인격 양상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내가 뭐라고 했어!




아무리 멋진 생각이라도,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아무리 획기적인 아이디어라도 이해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차라리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으면서 "나는 참 훌륭한 사람인데"라고 되뇌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소통의 어려움"은 어떠한 "변명거리"가 되어버리곤 합니다. '나는 훌륭하지만 말이 서투르고 사람들에게 나서기 힘들어서 이러고 있다' 라던가 '멍청한 세상이 나의 진짜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 등... 분명히 억울하고 화가나는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은 양쪽의 책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편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더 발전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건설적이라는 것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두 내 탓이오"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결과를 분석하면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루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리더들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300쪽이 넘는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저자 박영찬씨가 지금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끊임없이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과 의지로 인한 지금의 성공은 그에게 당연한 상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소통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회사의 CEO건, 연구원이건, 가정주부건, 아티스트건,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교사건, 학생이건, 경비실 수위건 소통을 피해갈 수 있는 삶의 위치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연습과 경험으로 쌓인 소통의 능력은 확실히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호존중과 이해 그리고 배려를 전제로 하는 "휴먼스피치"는 비단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점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우리들의 모습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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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안단테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수연 옮김 / 에이미팩토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언어 중 하나라는 독일어.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문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문장 하나를 만드려면 생각해야 할 것이 한 두개가 아니랍니다. 그 때문에 초보들에게는 독작하는 것이 부담스러울뿐더러 혹시라도 창피당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을거에요. 게다가 영어와는 달리 독일어의 동사는 후치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듣지 못하면 엉뚱하게 오해할 수도 있답니다. 듣고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자신이 스스로 말하려고 하면 더 난감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점점 (어학원 다닐 돈이 없었는지라 사실상 야매로) 독일어에 익숙해지면서, 독일 특유의 유머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흔히들 무뚝뚝하고 유머라고는 모를 것 같은 독일 사람들을 비꼬며, "독일 사람들은 오후 5시가 되면 웃으러 간다"라고들 합니다. 너무 무뚝뚝하고 고지식해서 웃는 것에도 시간을 정해놓는다는 농담인데, 그렇게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유의 고지식함이 오히려 유머로 승화된 것이 바로 독일식 유머인 것 같아요.

 

독일식 유머의 큰 특징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코 "시니컬한 말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토당토 않게 시니컬하게 말을 던지는가 하면 이상한 (하지만 은근히 납득가는) 논리로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 이것을 얼마나 교묘하게 해내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천재였던 베토벤이 남긴 많은 편지들을 읽어보면 괴팍하기로 소문난 이 악성 역시 그러한 투박함 속에 유머러스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 넝마주이 남작아,

자네 눈이 나쁜게 차라리 고맙군.

앞으로는 가끔 내가 유쾌한 기분일 땐, 그 기분 좀 잡치지 말아주게나.

어제만 해도 츠메스칼 도마노베치스식 개똥철학을 듣고 나니 무척 울적해졌어. 악마에게나 잡혀가게."

(1798년 츠메스칼 남작에게 보낸 편지)

 

글로만 읽으면 마치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만 베토벤과 츠메스칼 남작은 무척이나 각별한 사이였으며, 베토벤은 그에게 이런 장난스런 편지를 줄곧 보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편지는 이렇습니다.

 

"크리스티네,

내 초상화에 대한 얘기를 어제 들었소. 당신이 이 일을 좀 더 신중하게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것을 F를 통해 되돌려준다면, 그 불유쾌한 B나 왕얼간이 요제프가 중간에 끼어들어 나를 골탕먹이는 일에 사용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그렇다면 정말 짜증나는 일이 아니겠소. (중략)

신문사에 글을 내어 이제부터 내 승낙 없이는 어떠한 화가도 내 초상화를 그릴 수 없도록 하겠소. (중략)

안녕, 악마가 당신을 데려가길."

(1798년 크리스티네 제라르디에게 보낸 편지)

 

마음에 들지 않는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난 베토벤이 쓴 편지입니다. 개인적으로 베토벤의 편지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편지 중 하나네요. 뭔가 화가 난 상황에서도 욕지거리를 하거나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펴부어대는 것, 독일 사람들의 큰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독일식 유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오늘 소개할 책에서 도저히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유머이기 때문입니다. 저자인 호어스트 에버스 (Horst Evers) 씨는 스스로를 "베를린의 스토리텔러"라고 소개하는 독일의 카바레티스트 (우리나라의 "카바레"와 혼동하시면 큰일입니다^^ 고유의 장르인 카바레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클릭! 해주세요^^) 이자 작가입니다. 전통적인 카바레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에서는 에버스 씨 같은 카바레티스트의 인기나 영향력은 정치인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인기 카바레티스트의 경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많은 반향이 일어나고는 하니까요.

 

 

 

저자 Horst Evers씨

 

 

"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안단테" (원제: Für Eile fehlt mir die Zeit - 직역하면 "서두르기엔 시간이 없군"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는 에버스 씨의 따끈따끈한 신간입니다. 원본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생생한 번역에 읽는 내내 정말 유쾌하고 즐거웠답니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적어나가는 형식의 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나름의 기승전결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가끔은 기발하고 가끔은 재미있지만 가끔은 "제발 이 일은 현실이 아니길!" 이라고 외치게 되는 재앙같은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면서, 이것이 과연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인지 아니면 재미를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가 현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에버스씨가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겪은 경험담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다른 사람의 위선을 비웃으면서 우리 자신도 고수하는 위선의 가면들, 불공평한 현실에 대처하는 불공평한 우리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비판에 마음 상할 일이 없는 것은 아마도 그의 지나치게 "악의없고 선량한" 접근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놀림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에버스 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인이나 이웃들이지만 이들 역시 에버스 씨의 (때로는 눈물나는) 신랄함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문화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겠네요. 동거녀 (독일어로는 Lebenspartner, 즉, 인생의 동반자라고 한답니다) 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 대해 쓸 때도 뭔가 애틋하거나 미화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마도) 그들의 실제 모습보다 극대화시켜 회화화 한 느낌이 드는 정도니까요.

 

천신만고 끝에 그가 그라사우 (바이에른의 소도시) 에서부터 베를린까지 가지고 온 도자기 접시를 본 그녀의 여자친구가 말합니다.

 

"우웩,뭐가 이렇게 안 예뻐! 당장 지하 창고에 갖다 놔."

나는 내가 아는 절박한 단어들을 총동원해, 일주일 동안 어떻게 이 접시를 끌고 바이에른 주 전역을 돌아다녔는지 설명했다. 그러자 자애로운 여자 친구가 공감하며 말해주었다.

"아...... 그랬구나? 그러면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 몇 개쯤은 대수도 아니겠네. 그런데 잠깐! 이거 무슨 냄새야?"

나는 다시 한 번, 하지만 이번엔 훨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 넓은 바이에른 주의 산골마을들을 이동하는 내내 이 접시를 끌고 다녔고, 그것을 위해 팬티와 티셔츠가 희생돼야만 했다고 알려주었다.

여자친구는 비당하게 말했다. "베를린 장벽을 만들 때도 우린 많은 희생을 치렀고,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투자했어. 그것을 완성하는 데는 분명 7일보다 더 거렸승ㄹ 거야. 그렇지만 그런 이유로 베를린 장벽을 계속 그대로 놔둬야 했을까?"

나는 장시간 설명으로 짐짓 쉰 목소리로, 분단과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장벽이자 민간인 대상의 발포 명령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과 아무런 죄도 없는 '도자기 접시'를 비교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라고 중얼거렸다.

나의 논리적인 응수에, 여자친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조용히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접시를 지하 창고에 갖다 놓는 동안,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께." (48~49 페이지)

 

단순한 접시를 가지고 그들이 벌이는 논쟁은 엉뚱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합니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념을 가지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 에버스 씨. 아마 그런 그의 모습에서부터 세상의 너무 당연한 일에 "왜?" 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두번째 봄으로 이어지면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이러한 그의 엉뚱한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자신의 딸이 너무 똑똑해질까봐 교육을 방해하는가 하면 옆집 아버지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위키백과를 조작하기도 합니다. 아주 작고 사소해보이는 일도 그에게는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변신하곤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짜증나고, 화나고, 불편한 일들이 오히려 우스운 일들로 바뀌는 것이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작년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 한국의 문화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중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시도 때도 없는 욕설" 이었습니다. 예쁘장한 얼굴의 중고등학생서부터 46단 콤보로 육두문자를 날리는가 하면, 욕설이 섞이지 않은 문장을 찾는 것이 오히려 힘들 정도로 지나친 욕의 일반화는 예나 지금이나 참 불편한 부분입니다. 물론 나름 적응해서 많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독일어권에서는 심한 욕설을 쓰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니컬을 넘어 야유를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가끔 남을 놀리거나 비판하느라 싸우는 것을 보면 창의적이다! 라는 생각마저 들곤 합니다. 개인적인 취향과 문화의 문제이지만 굳이 욕을 하고 싶고 화를 내고 싶은 경우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풀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ㅎㅎ

 

 

 

 

애초에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되도록 많이 적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본의 아니게 이것 저것 이야기하다보니 글이 다시 길어져버렸네요. 하지만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에 지친 당신이라면, 삐딱하게 부지런한 개미들을 비웃는 현대판 베땅이 호어스트 에버스 씨의 책을 읽으면서 잃어버렸던 유머와 여유를 되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동안 그것이 실소이건 폭소이건 아니면 비웃음이건,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바쁘고 각박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자신을 위해 마련할 수 있는 최소한의 휴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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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 살린다 - 젊음의 가능성과 한계, 그 경계선 뛰어넘기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희 옮김 / 명진출판사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매년 입시 철이 다가오고 입시 준비에 바빠지는 입시생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과연 저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자의일까 아니면 타의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의 반 타의 반? 이상한 질문 같지만, 실제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어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빗나간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입시 시험을 치루면서 면접을 할 때 시험관들이 자주 묻는 질문은 "어째서 이 대학 (혹은 학과) 에 지원하게 되었습니까?"라고 합니다. 작곡과 예비과정을 다니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준비해두라는 지도교수님의 말씀에 좀 의아했었습니다. 아니, 국립음대에 시험을 치러 왔으면서 자기가 왜 왔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시험 당일이 되어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이 질문이 결코 누구에게나 "당연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것만으로도 열 명에 일곱 혹은 여덟 명 정도가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하나같이 이 질문이 던져지자마자 우물쭈물 거리면서 결국은 진부하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곤 했답니다. 누가 시켜서 온 입학시험도 아니면서 참 이상한 일이죠?

 

흔히들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단순화시켜 교육의 문제를 논하고는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서는 너무 획일화 되어있다, 너무 주입식이다, 비자율적이고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혹평들이 쏟아져나오고는 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경우, "선진국 어디는 이렇게 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학생들이 이렇다"라는 비교를 근거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물론 확실히 교육방침에 따라서 대단한 차이가 있고, 그것은 학생 대부분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하는 입장에서는 멈추어서거나 고이지 말고 어떻하면 더 발전해나갈까 날마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교육 차이"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방적인 것일까요?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 "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살린다"를 지금 공부를 시작하는 모든 대학 새내기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쓴 젊은 여성 철학가 로랑스 드빌레르는 현재 파리 가톨릭 대학과 파리 예수회 신학원인 상트르 세브르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모두 20개의 "지혜"를 선사하는 이 책은 그녀가 집필한 첫 대중서라고 하는데, 그것이 믿겨지지 않을만큼 그녀의 문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그야말로 쉽고 대중적인 문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독서 경험을 많이 쌓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텐데요 (오늘 뉴스에 의하면 대한민국 청소년의 네명 중 한명은 전혀 독서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만큼 이제 사회에 들어서는 "예비 어른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네요.

 

 

대학에서 배울거라 생각했지만 배우지 않은 것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딛고 대학에 입성한 새내기들. 하지만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부풀었던 마음은 점점 사그라들고 하나 둘 실망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워낙 강력한 주입식 교육을 받았던지라 강압적이기보다는 자발적인 강의 방식에 점점 느슨해지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포괄적인 의무교육을 끝내고 이제 드디어 자신의 전문분야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기인데 오히려 헤이해져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다니 정말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학교나 선생님이 분명히 정해준 것"에 익숙해졌던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와서도 그러한 수동적인 자세를 이어나가고는 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전공을 위해 발전하려고 하기 보다는 "결국 대학 들어와서 배우는 것도 없고 쓸데없는 짓이었어!"라고 푸념하는 것이죠. 드빌레르는 말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에 주력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분수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인색하다." (194 페이지)

 

그녀의 이 짧은 문구는 가슴 깊숙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배우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잘나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알량한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또한 이렇게 올바르지 못하고 잘못된 것만 지적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비판하는 행동 외에는 진취적이거나 건설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드빌레르가 던지는 질문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지혜는 이렇듯 정곡을 찌르면서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따뜻한 설명과 권유를 잊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동안 자만, 자신없음, 게으름, 위선에 가리워있던 자신을 다시한번 성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말이 직선적이라 할지라도 결코 우위에서 던지는 핀잔이 아닌 상냥한 지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일까? - 사춘기 시절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만족하는지 잘 모른다. 그냥 그 순간의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능은 언제나 과도함을 추구한다." (226 페이지)

 

사춘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수 많은 "왜?"라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채워가면서 혼란스러워지는 시기죠.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며, 왜 세상은 이런 것이며, 왜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며…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난관에 봉착한 채, 불안정하면서도 위태로운 정신적 성장통을 피할 수 없는 시기인 사춘기.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20대가 된 지금, 그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상태입니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세계에 "익숙해" 진 상태입니까?

 

 

"스무 살에 만난 지혜가 평생을 먹여살린다"가 인생에 입문하는데 있어 소중한 경험이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학업, 성공이라는 통상적인 주제 뿐만 아니라, 20대에게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테마, 연애와 사랑 그리고 인격양성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매우 주관적으로 상대를 보는 건데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이미 사랑이 시들었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객관성은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현명함이다." (20 페이지)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게 어리석고 음흉한 자의 수법이다" (68 페이지)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가 라 로슈푸코를 인용하며 도달하는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오류 중 몇가지만 꼽자면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착한 것"과 "올바른 것"의 혼동일 것입니다. 사실 이 "착하다"는 가치관은 20대뿐만 아니라 인생에 걸쳐 직면하게 되는 트라우마와도 같은데, 특히나 요즘에는 "착하다"라는 말이 "무능력하다"와 거의 동일시되면서 "차라리 못될지언정 절대 손해보아서는 안된다"라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빌레르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력함이나 무능력으로서 표현될 것이 아니라 "자제"라는 능력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란 화내기가 얼마나 쉬운지, 심지어 남을 괴롭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자제하며 선하게 사는 사람이다" (라 로슈푸코 인용, 169 페이지)

 

모두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금방 정글처럼 변할 것이라고 그녀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매일 뉴스 일면을 장식하는 기사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그녀의 이러한 우려가 실제로 이미 대다수 현실이 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총과 칼로 무장하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것은 슬프고도 잘못된 선택일 것입니다. 드빌레르는 이제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져야할 "어린 어른"들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보냅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용망 때문에 분란과 다툼은 끝없이 일어난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180 페이지)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남의 입장이 되어보며 관용과 이해를 배워야 할 나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속된 말로 "나이값을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인생의 새내기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녀가 하고픈 조언일 것입니다.

 

 

20대인 그대가 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프롤로그에서 드빌레르는 어째서 철학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인지 설명합니다. 철학을 단순히 어려운 것, 복잡한 것, 실용성 없는 탁상 공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 그것을 내 생활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지혜로 바꿀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수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아포리즘을 소개하면서 드빌레르는 철학에 담겨있는 "실용의 광맥"에 대하여 말합니다.

 

"철학을 안다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아는 것이고 본질을 알고 나면 더는 그 대상이 두렵지 않다" (프롤로그 중)

 

자신에게 닥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가장 마지막에 떠오르는 것이 "훌륭한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가 아닐까요? 연애에 실패하여 좌절했을 때, 원하는 대학에 몇 년 째 합격하지 못해 실의에 빠졌을 때, 경제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환경이 대단히 특수하며 난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때일 수록 나의 문제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세상이 더욱 더 무례하고 뻔뻔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드빌레르는 철학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 치열하게 고민했던 세상의 모든 철학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그들보다 나중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늦게 태어난 덕분에 그들이 평생을 바치며 이루어놓은 고민의 결과물을 아이스크림처럼 입안에서 녹여먹기만 하면 된다. 내 머리가 소크라테스보다 뛰어날 리 없는데 그와 같은 고민을 평생 머리 싸매고 한다 해서 더 나을게 있을까?" (프롤로그 중)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타의적으로 성장해온 시기를 마치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살아야 할 시점에 다다른 20대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 그리고 방대하고 복잡한 철학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시키며 실용적인 "지혜"로 사용할 수 있는지. 이것이 바로 저자가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선택하고 결정한다

 

"나는 어쩔 수 없었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살면서 이러한 변명을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많이 듣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참 효과적인 변명인데,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 (혹은 상황) 을 개입시키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 정당성만큼이나 비겁한 행동일 것입니다. 드빌레르는 철학자 사르트르를 인용합니다.

 

"상황이 나를 표현한다"

 

결국 내가 그러고 싶었건 그러고 싶지 않았건 그러고 있는 것은 나의 결정이며, 이것이 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죠. 어떠한 조건에서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되어버렸어!"라고 변명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드빌레르는 말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선택에 대한 책임과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노력이 필요하단 뜻이다 (…) 그런데 기권보다 더 나쁜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선택을 유보하는 것이다." (107 페이지)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면서도 "성격적인 단점"이기 때문에 묵인되곤 하는 우유부단함. 그녀는 이 우유부단함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선택이든 기권이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코앞에 닥친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어정쩡한 상태로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선택에 따르겠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기권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하다는 뜻이다. 이는 선택할 능력도 기권할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유보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선택에 모두 내맡기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108 페이지)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남의 선택에 따라 인생을 산 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 (…)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 할 때 기권했거나 다른 이의 선택에 맡긴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말이다." (109 페이지)

 

이것이 아마도 그녀가 이 한권의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결정적인 메세지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할 시간이다. 나의 선택과, 행동과 생각 그리고 미래를 위한 노력까지. 더이상 남에게 좌지우지되거나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기대서거나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진취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할 때다"라는 도전적 메세지. 20대 뿐만 아니라, 나이는 더 들었어도 아직까지 이 숙제를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조언일 것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원하는 학과를 졸업하고 나면 막연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노력해온 학생들에게 이 책은 다소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인생의 선배로서 그들에게 던지고 싶은 충고는 다름아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깨닫는 것이 큰 발걸음이 될 것이다" 입니다. 저 역시 세 개의 학사학위와 하나의 석사학위를 졸업하면서 이런 막연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있다가 실망한 경험이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생이 "같은 것에 대한 지식"을 교육받았다면, 이제 대학생이 된 지금부터는 스스로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발벗고 뛰어나갈 차례입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올바른 방향을 잡은다면 불필요한 시간낭비와 실망을 건너뛰고 보다 힘차게 날개를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내일의 행복 따위는 없다. 행복할거라는 기대감만 있을 뿐이다. 왜냐면 당신은 현재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23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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