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순수한 허구이므로, 본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국가, 배경, 도시 등은 모두 사실과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19>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읽으시려는 분들은 주의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앞의 2016년 1월에 올렸던 것인데, 자료가 심하게 훼손되어 수정하는 차원에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한다

선은 악과
관용은 정의와
종교는 정치와...

 <토마스 하디>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닥터(Doctor) 에드워드(Edward)>는 <파라나 강(江)>의 작은 항구(港口)에서 선로(線路)와 황색(黃色)의 크레인(crane)이 있던 곳 중간에 서서 대안(對岸)의 차코(Gran chaco-남아메리카중남부 Andes산맥과 Paraguay강 사이에 펼쳐지는 평원) 지방(地方) 위로 수평으로 길게 펼쳐졌던 우모(羽毛) 같았던 연기(煙氣)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석양(夕陽) 속에 있는 어느 나라 국기(國旗)의 줄무늬 같이 보였는데, 그리고 또 그때, 그 근처에는 <해운회관(海運會館)>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수부(水夫) 한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시각에 그곳에는 자신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엷게 번지는 빛과, 무언가 알 수 없는 식물의 향기 또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에 말려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또 어쩌면 유년(幼年)의 의식(意識)과 미래(未來)에의 희망(希望) 또는 그때는 완전히 잃어버렸던 지난 일의 의식(意識)을 다시 불러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석양(夕陽)의 느낌과도 비슷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로(線路)와 크레인, 그리고 <해운해관>. 그것은 <닥터 에드>가 그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세월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러나 단 하나, 그가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한줄기 연기(煙氣)만이 <파라나 강> 저쪽 편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 새로웠다면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그 <공장(工場)>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처음 왔을 때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때 그가 <파라과이(Paraguay-남아메리카 중남부에 있는 나라. 1811년에 에스파냐에서 독립하였다. 목축과 임업이 발달하였으며, 주민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이고 주요 언어는 에스파냐 어이다. 수도는 아순시온, 면적은 40만 6752㎢)>에서 주(週) 1회 정기선(定期船)을 타고 그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벌써 20년도 더 전(前)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 그는 <아순시온(Asunción-Paraguay공화국의 수도. 필코마요 강이 합류되는 파라과이 강 연안에 위치한 최대의 무역항이며, 유통과 수출의 중심지)>의 선창(船艙)가에서 헤어졌던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작은 배의 좁은 트랩(trap-사다리)에 서서 장신(長身)에다 백발(白髮)을 흩날리면서 기계적(機械的)인 낙천주의(樂天主義)의 어조(語調)로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아들아, 우리 금방 다시 만나자!>

 

 그래서 그때, 그는 1개월 아니면 넉넉잡아서 3개월 정도면 다시 아버지와 재회(再會)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헤어지던 그의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마치 속삭이듯이 <우리 빨리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눕시다...> 라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경의(敬意)를 다했던 태도로 입을 맞췄을 때는, 당시 14세였던 그에게서도 거의 이국적(異國的)이란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히 <영국인(英國人)>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는 <스페인(Spain)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여권(旅券)에 기록된 국적(國籍)을 넘어서, 눈(雪)과 안개에 싸여있는 전설(傳說)의 섬 영국(英國)과, 디킨즈(Dickens, Charles-영국의 소설가, Oliver Twist 등을 썼음)와 코난 도일(Arthur Lgnatius Conan Doyle-Sherlock Holmes로 유명한 작가)이 태어났던 그 섬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10세의 어린 나이에 그곳을 떠났던 그의 아버지가 그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영국(英國)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당신의 양친(兩親) 즉, 그의 조부(祖父)와 조모(祖母)가 사주었다던 그림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런던(London)의 파노라마(panorama)>였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헨리>가 자신이 어렸을 자주 보여주었던 책이었는데, 그 안에는 회색(灰色)의 사진으로 <버킹검궁전(Buckingham Palace)>이라든가 <런던탑(the Tower of London)> 그리고 <2인승마차(馬車)>와 <상자마자(箱子馬車)> 그리고 <긴치마를 입은 숙녀(淑女)>의 사진 등, 많은 사진들이 해설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 바로 직후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망명자(亡命者)의 신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곳은 <망명자(亡命者)들의 천국(天國)>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또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왔던 사람들과 <체코, 폴란드,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망명을 왔던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디킨즈(Dickens)>를 읽기 시작했던 그 어렸을 때부터, 마치 외국인(外國人)이 그 책을 읽는 것처럼, 그 책에 쓰인 것들은 그 당시에도 전부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 그 당시의 그로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또 그것들은 예를 들어서 <집행관(執行官)>이라든가 <장의사(葬儀社)>들, 또는 <올리버트위스트(Oliver Twist)>가 마치 <러시아인>들의 믿음처럼, 그때 그곳에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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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4년


 서역도호(西域都護)와 무기교위(戊己校尉)를 부활시켜서
 후한(後漢)이 직접 서역(西域) 경영을 행했다.(~76년)



 서역도호(西域都護)는, 서역(西域)을 총괄했던 중국의 관명(官名)이었으며, 전한(前漢) 지절(地節) 2년(기원전68년)에 한(漢)에서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던 정길(鄭吉)이 차사(車師)를 굴복시키자 한(漢)은 그를 호선선이서남도(護鄯善以西南道=西域 南道의 감독 역)로 삼았다.

 정길(鄭吉-?~B.C.48)은, 중국 한나라 때의 장군이었고, 선제(宣帝) 때 차사국(車師國)을 쳐서 멸했으며, 흉노의 항복을 받아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역 도호(都護)가 되어서 전한(前漢)의 국세(國勢)를 널리 떨쳤던 사람이었다.(후술 또는 생략)

 ※
차사(車師)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북위(北魏)시대까지 톈산(天山)산맥 동부에 있었던 나라로, 현재의 동(東) 투르키스탄(Turkistan)에 상당하는 곳에 있었던 오아시스도시국가였다.

 그 후, 신작(新爵) 3년(기원전 59년)에 흉노(匈奴)의 일축왕(日逐王)도 항복시킴으로 해서 정길(鄭吉)은 호차사이서북도(護車師以西北道-뜻은 위와 유사함)에 겸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서역(西域)의 남북도(南北道) 두 길을 모두 통괄하게 되어서 서역도호(西域都護-여기서의 都는 크다는 뜻과 전부라는 의미임)라고 칭해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 말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서역도위(西域都尉)는 가관(加官)이었으며, 본관(本官)은 기도위(騎都尉=官秩比2千石)와 간대부(諫大夫=官秩比8百石)였다. 그리고 또 부관(副官)으로서는 부교위(副校尉=官秩比 2千石)가 설치되어 승(丞) 1인과 사마(司馬) 2인, 후(候) 2인, 천인(千人) 2인이 그에 속했다. 그리고 또한 서역(西域) 중앙부의 오루성(烏壘城)에 막부(幕府)를 두고 서역(西域) 36국(國)을 진무(鎭撫)했으며, 또한 제국(諸國)을 호령(號令)했다. 하지만 후한(後漢)에 들어서는 그 힘이 약해져서 자주 폐지와 설치를 반복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당시의 중요했던 西域都護들에 대한 소개이며, 다만 이름만 밝힙니다.

 <前漢>

 鄭吉-前(기원전)59年 - 前48年
 韓宣-前48年 - 前45年
 甘延寿-前36年 - 前33年
 段會宗-前33年 - 前30年
 廉褒-前30年 - 前27年
 段會宗-前21年 - 前18年(再任)
 郭舜-前15 - 前12年
 孫建-前12年 - 前9年
 但欽-서력(西曆)1年 - 13年

 

 <新>

 但欽-1年 - 13年-殺
 李崇-13年 - 23年

 <後漢>

 莎車王賢-大都護를 사칭함
 陳睦-74年 - 75年-殺
 班超-91年 - 102年
 任尚-102年 - 106年
 段禧-106年 - 107年



 무기교위(戊己校尉)는, 중국 전한(前漢) 이후의 관직명으로, 서역(西域)을 관리했던 직명이었다. 그리고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에 의하면, 원제(元帝) 초원(初元) 원년(元年)에 설치되었고, 동(同) 서역전상(西域傳上)에서는 차사(車師) 전왕(前王)의 토지(高昌)에 둔전(屯田)을 열었다고 한다.

 ※ 둔전(屯田)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했던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했던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가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는 각(各) 궁(宮)과 관아에 속했던 토지로, 관노비나 일반농민들이 경작했으며, 그 소출의 일부를 거두어 들여서 경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 예를 열거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둔전답(屯田畓)은 둔전과 둔답을 아울러서 일렀던 말이며

 2. 국둔전(國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자리(戍자리-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를 살던 군사가 경작하여 그 수확을 모두 군자(軍資)에 충당했던 토지였으며, 왜구를 막기 위하여 연해(沿海) 지방에 많이 두었다. 그리고 또 시행과 폐지를 반복했지만, 그러나 세조 6년(1460)에 토지제도의 하나로 확정하였다.

 3. 그리고 관둔전(官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 두었던 둔전(屯田)으로, 본래는 군자(軍資)에 보충하려고 두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관아의 일반경비나 수령의 사사로운 수입이 되는 등 많은 폐해가 있었다.

 4. 영둔전(營屯田)은 조선시대에 각 영문(營門=軍門)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나라에서 지급했던
둔전이며

 5. 영문둔전(營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각 군병 아문(軍兵衙門)에서 소유했던 둔전이었고

 6. 아문둔전(衙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두었던 둔전이었으며

 7. 궁둔전(宮屯田)은 각 궁(宮)에 속했던 둔전(屯田)

 8. 그리고 역둔전(驛屯田) 또는 역(驛)둔토(屯土)란 것도 있었고

 9. 가호둔전(家戶屯田)은 고려말기에,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가호에도 씨앗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한 다음, 가을에 몇 배를 거두어들였던 것을 말했다.

 아무튼, 속관(屬官)으로서 상기(上記)와 같게 승(丞), 사마(司馬) 각(各) 1명과 후(候) 5명을 두었으며, 질석비(秩石比=官秩比)는 600석(石)이었다. 그리고 그 명칭의 유래는 한서(漢書)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십간(十干) 중 갑을병정경신임계(甲乙丙丁庚辛壬癸)들은 각각의 방위를 가지지만, 그러나 무(戊)와 기(己)는 가리키는 방위가 없으므로, 그래서 마땅히 정주(定住)할 장소를 가지지 않은 교위(校尉)를 그에 비유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무(戊)와 기(己)는 중앙에 위치해서 사방(四方)을 진무(鎭撫)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서역(西域)의 중심에 위치해서 주변을 진무(鎭撫)하는 것에 비유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 등이 있지만, 물론 둘 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서는 <무기(戊己)2교위(校尉)>라고 했고, 그것은 또 무(戊)교위와 기(己)교위 2인을 말했던 것으로, 그래서 그 총칭으로 무기교위(戊己校尉)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

 아무튼, 왕망(王莽)의 시대에 서역(西域)이 배신을 했고, 이어서 열렸던 후한(後漢) 초기에도 그 직(職)은 설치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영평(永平) 1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의 서역(西域) 정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 그래서 건초(建初) 원년(元年)에는 다시 불러 들였다. 하지만 또 그 후였던 영원(永元) 3년에 반초(班超)의 활약에 힘입어서 다시 설치되었다.(後漢書 西域傳) 그러나 또 그 후였던 후한(後漢) 말경에는 서역(西域)과의 교통이 모두 끊어졌다. 그런데 삼국(三國)의 위(魏) 황초(黃初) 3년에 서역(西域)으로부터 사자가 왔고, 그러자 또 그것을 계기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양주(凉州) 자사(刺史)가 그 직을 맡게 되었다.(三国志 文帝紀, 晋書 地理志上)

 ※ 자사(刺史)는

 1. 발해에서는 각 주(州)의 으뜸 벼슬을 말했으며
 2. 고려 때는 성종 14년(995)에 두었던 외관(外官)을 이름.
 3. 그리고 중국 한나라 때는 군(郡)과 국(國)을 감독하기 위해서 각 주에 설치했던 감찰관으로, 나중에 당(唐)과 송(宋)을 거쳐서 명(明)나라 때 없어졌다.
 4. 그리고 중국의 전한(前漢)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때까지 존재했던 관직명으로, 당초에는 감찰의 역할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주(州)의 장관(長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3과 4가 해당되며, 그 중에서도 4가 더욱 가까움.

 87년


 북흉노(北匈奴)의 우류선우(優留鄯于)가 선비(鮮卑)에서 살해 되었고
 그러자 그 땅에 살던 58부(部)의 20만 백성들이 한(漢)에 내항(來降)했다

 88년


 두태후(竇太后)가 임조(臨朝)했다(~97년)

 효문황후<孝文皇后=두의(竇漪)>

 91년


 반초(班超)가 서역(西域) 평정의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102년)

 97년


 감영(甘英)이 반초(班超)의 명(命)을 받아 로마로 파견되었고, 파르티아에 도착했다



 <감영(甘英)> 2

 감영(生没年不詳)은 당시, 대진(大秦)이라고 불렸던 ‘로마(Rome)’에 파견되었던 중국의 대사(大使)였으며, 반초(班超)로부터 로마와의 국교(國交)를 개설할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7만 정도의 규모를 가졌던 반초(班超) 원정군의 일원(一員)이었으며, 일단(一團)의 군을 이끌고 파르티아왕국의 서쪽 경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적어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고대 중국인으로서는 서쪽으로 제일 멀리까지 여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후한서(後漢書=後漢 25-22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 감영(甘英)에게 시켜서 ‘서쪽바다’의 해안과 가는 길에 존재하는 여러 지역들을 둘러보고 오라고 명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그곳까지 갔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지역들에 관한 정보는 ‘산해경(山海經)’조차에도 상세한 기술이 없었다.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으로, 작가와 연대는 미상이며, 뤄양(洛陽)을 중심으로 해서 산맥과 하천 그리고 신화와 전설, 産物 등을 수록했다. 중국의 자연관과 신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5부18권.

 그러자 감영(甘英)은 그 탐험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나라들과 관습 그리고 地勢 등에 관한 것)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분의 기술은 아래와 같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이었던 감영(甘英)을 대진(大秦)으로 파견했고, 그러자 감영(甘英)은 조지(條支=Tiaozhi=현재의 시리아 지역)를 통과해서 안식(安息=Anxi=파르티아)의 서쪽 경계에 있던 아주큰 바다(大海=페르시아 만)에 도착했다>(後漢書88)

 그리하여 그는 로마(大秦)에 관한 보고서도 남기게 되었다지만,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직접 가서 보고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접적으로 얻었던 자료에 근거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진(大秦)을 ‘바다’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비정(比定-일종의 추정)했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그가 쓴 기술의 일부분이다.

 <그 판도(版圖=領域)는 몇 천리(千里-그러나 여기서의 里는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里의 개념이 아니고, 약 5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말함)를 가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400곳도 더 되는 도시들이 그 안에 있다. 그리하여 그 주변 수십(數十)의 소국(小國)들이 그 나라를 따르고 있으며, 도시의 외벽들은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또한 역사제도(驛舍制度)가 확립되어 있고...(중략)... 그리고 소나무와 사이프레스(糸杉)가 자라고 있다>

 그는 또 ‘네르바’에 의한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제위계승(帝位継承)에 대해서도 기술(記述)했고(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서 제위를 물려주었다), 로마인들의 신체와 외견(外見) 그리고
또 그곳에서 생산되던 물건 등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로마의 황제(30~98)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열었다. 재위 기간은 96~98년.

 ※
트라야누스(Trajanus, Marcus Ulpius)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53~117)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으로, 로마제국사상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혔으며, 도로를 건설하여 상업과 교통의 발달을 꾀하였다. 재위 기간은 98~117년.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 나라의 왕(王)은 세습(世襲)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된 사람을 선택해서 왕위에 올리고 있다...그 나라 사람들은 장신(長身)이며, 아주 균형 잡힌 용모(容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중국인(中國人)과 닮았으며, 그것이 또 바로 그 나라를 대진(大秦=Da Qin=아주 큰 秦)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나라의 토지(土地)에서는 많은 금(金)과 은(銀)이 생산되고 있으며, 그리고 야간에 빛을 발하는 보석을 포함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진귀한 보석들도 산출되고 있다...사람들은 다채(多彩)로운 색을 가진 태피스트리(tapestry)나 다마스크를 만들기 위해서 금사(金絲)를 사용해서 자수(刺繡)를 한 옷감들을 재봉한다. 그리고 또한 금(金)으로 도장(塗裝)한 옷감이나 <불에 씻은 옷감(石絲=石綿=아스베스트=아스베스토스(asbestos)>도 만들고 있다>

 
tapestry는,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로, 벽걸이나 가리개 등의 실내장식품으로 사용하며, 일반적으로 날실에는 마사, 씨실에는 양모사나 견사를 쓰는데, 고블랭직이 가장 발달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Gobelins>



 
※ 다마스크(damask)= 피륙의 하나이며, 능직이나 수자직 바탕에 금실과 은실 등의 아름다운 실로 무늬를 짜 넣는데, 주로 커튼이나 책상보 등에 쓴다고 함.

 ※
석면(石綿)은, 사문석(蛇紋石) 또는 각섬석(角閃石)이 섬유질(纖維質)로 변한 규산염(硅酸鹽) 광물이며, 산성이나 알칼리성에 강하고, 열과 전기가 잘 통하지 않아서 방열재, 방화재, 절연용 재료 등으로 많이 씀.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감영(甘英)은 당시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었던 로마를 올바르게 파악했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그리고 아래는 그가 남겼던 기술 중 마지막 부분이라고 추정되는 글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경탄해마지 않을 또한 희귀한 종류의 외국물품들은 모두다 그 나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기원전 50년경의 파르티아 위치도>

 100년


 허신(許愼)이 <説文解字>를 成立시켰다(완성이라고 표현하지 않음)



 <허신(許愼)> 58年?-147年? 또는 30년-124년



 후한(後漢)의 유학자였으며, 문학(文學)학자 그리고 최고(最古)의 부수별(部首別) 한자자전(漢字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작자(作者)로 알려져 있다. 성(姓)은 許. 이름은 신(愼). 자(字)는 숙중(叔重). 출신은 여남소릉(汝南召陵=現 河南省 郾城県), 경서(經書)에 밝았고, 가규(賈逵=22賢 중 1인)로부터 고문학(古文學)을 전수(傳受)받아 고문경학(古文經學)의 대가(大家) 중 1인이 되었다.

 ※ 22현(賢)은, 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21년(647)에 공자묘에 배향 되었던 22명의 현인(賢人)으로, 좌구명, 복자하(卜子夏), 공양고, 곡량적(穀梁赤), 복승(伏勝), 고당생(高堂生), 대성(戴聖), 모장(毛萇), 공안국, 유향(劉向), 정중(鄭衆), 가규(賈逵), 두자춘(杜子春), 마융, 노식(盧植), 정현(鄭玄), 복건(服虔), 하휴(何休), 왕숙, 왕필, 두예, 범녕(范寗)을 이르며,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그에 마융(馬融)은 항시 그를 존경했다고 하며, 세상에서 <오경무쌍(五經無雙)의 허숙중(許叔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 오경이의(五經異義)와 회남홍열간고(淮南鴻烈間詁) 등도 있었지만, 그러나 원래대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중국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했던 자전(字典)으로, 문자학의 기본적인 고전 중 하나이며, 한자 9,353자를 수집하여 540부(部)로 분류했고, 육서(六書)에 따라서 글자의 모양을 분석, 해설하였다. 15권.


 105년


 채윤(蔡倫)이 종이를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채윤(蔡倫)> ? 또는 50년경-121년 또는 121년경

 



 중국 후한(後漢) 때의 환관(宦官)으로, 자(字)는 경중(敬仲). 제지법(製紙法)을 개량해서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보급에 막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계양(桂陽=현재의 湖南省 郴州市) 출신으로, 명제(明帝) 영평(永平) 말년(75년)부터 환관으로 궁정에 등용 되었지만, 그러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장제(章帝) 대에는 소황문(小黃門)에 머물러 있었지만, 화제(和帝) 즉위 후였던 89년에는 중상시(中常侍)로 승진했다.

 황문(黃門)은 내시(內侍)를 의미하며, 소황문(小黃門)은 내시 중에서도 낮은 직급의 내시를 의미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홍수황문(紅袖黃門)은 붉은 소매와 누런 문이란 뜻으로, 궁녀와 환관을 아울러서 이르렀던 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과거 궁녀의 웃옷에는 붉은 소매가 달려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환관들이 지키던 궁성 안의 작은 문(門)에는 누런 칠을 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기다 성실한 인품과 학문을 좋아했고 또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점 등이 인정되었고, 또한 결벽(潔癖)한 몸가짐 등이 평가되어 97년에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것은 또한 검(劍) 등의 무기류나 여러 가지의 물품들을 제작, 감독, 제조기술 확립 등을 임무로 했던 것이었다.

 105년, 그는 나무의 껍질과 마(麻)의 쓰레기, 못쓰게 된 어망(魚網) 등의 재료들을 이용해서 실용적인 종이를 제조했고, 그것을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그리고 그 제법(製法)은 아주 잘게 부순 재료들을 물에 녹인 후 대나무로 만든 책(簀-格子 板)에다 넣어(담아서) 뜬 후 말리는 공정을 거쳐서 완성시켰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은 아니었고, 당시에는 그와 유사한 수법으로 이미 비단이나 풀솜의 찌꺼기 등을 이용해서 만드는 서(絮)라는 방한(防寒) 등에 이용되었던 염가의 부직포가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가 만들었던 것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그러했던 기술을 집약해서 개선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당시 <종이(紙)>라는 말은 <서(絮)>와 같은 비단찌꺼기 등으로 만든 것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그가 만들었다는 종이는 <채후지(蔡侯紙)>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그것과 구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화제(和帝)로부터 신뢰가 두꺼워져서 유악(帷幄=帷幕=전략회의 등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하던 곳=국가계획을 입안하는 중요한 기관)에도 참가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도 자주 화제(和帝)에게 간언도 했다. 그리고 또 유자(儒者) 유진(劉珍) 등의 고전(古典) 교정 작업도 감독하는 등, 유능한 문신(文臣)으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하지만 105년에 화제(和帝)가 몰(沒)했고, 그 뒤를 이었던 어린 상제(殤帝)도 1년 만에 죽어버리자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던 등태후(鄧太后)는 장제(章帝)의 아들이었던 황태자를 폐하고 청하효왕(淸河孝王)이 되었던 유경(劉慶)의 당시 13세의 아들이었던 유호(劉祜)를 안제(安帝)에 옹립시켰다. 그리고는 섭정(攝政)을 하며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을 병용(倂用)해서 실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 역시도 그 시기였던 114년에는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등태후(鄧太后)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 121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또 안제(安帝)는 내시들의 협력을 받아서 등 씨(鄧氏) 일족의 숙청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또 그렇게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던 중, 안제(安帝)는 자신의 부(父)였던 유경(劉慶)이 황태자를 폐(廢)했던 사건을 조사시켰는데, 그러자 조모(祖母)였던 송귀인(宋貴人)이 무고(巫蠱-巫術로써 남을 저주함)를 행했다는 중상모략을 받아서 자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또 당시(82년) 그 송귀인(宋貴人)의 주저(呪詛)가 사실이었다고 보고를 했던 자가 바로 그 소황문(小黃門)이었던 채윤(蔡倫)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자 안제(安帝)는 그에게 정위(廷尉=형벌담당장관)에 출두하라고 칙명을 내렸다. 하지만 또 당시,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사대부(士大夫)에게는 예(禮)를 지켜서 형벌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는 관례가 있었고(禮記), 그래서 그 칙명을 받들었던 사자는 독약을 함께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갔다. 그러자 그는 공순(恭順)했고,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그것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도 결국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러나 그가 사망했던 연월(年月)에 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등태후(鄧太后)가 사망했던 121년 이후의 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현재 호남성(湖南省) 계양(桂陽) 교외에는 그의 묘라고 전해지는 장소가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1950년대에 그 현(縣)에서 수복(修復)작업을 하던 중 그 무덤 안에서 맷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그가 종이를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는 억측도 난무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은 지금까지도 진위가 불명하다.

 아무튼, 그는 종래부터 제지법의 발명자였다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전한(前漢) 대(代)의 유적에서 식물섬유로 만든 종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가 이미 상용(常用)하고 있던 그 기술을 집약해서 통합했던 것일 뿐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법을 정립했던 개량자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전한(前漢) 대의 종이란 청동제의 거울을 포장했던 포장지였을 뿐이었으며, 문자를 기록했던 종이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계속해서 개량되었고, 그러자 그 후, 그의 제자였던 좌백(左伯)이란 사람이 좌백지(左伯紙)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종이는 개량과 보급을 거듭하며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윽고는 이슬람을 거쳐서 서양에까지 전파되어 서양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또, 그는 중국에서는 <종이의 수호신>으로까지 숭배되었고, 이후 학자였던 '마이클 할트(Michael H. Hart)'란 사람은 <역사를 만든(창조한) 100인>에서 그를 일곱 번째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할트'는 그 제1위로 '마호메트'를 그리고 제2위는 '뉴턴'을 그리고 제3위는 '예수'로 올려 놓았다.

 107년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다시 폐지되었고, 한(漢)과 서역(西域)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123년


 반초(班超)의 아들 반용(班勇)이 서역장사(西域長史)가 되었고
 선(鄯)과 고창(高昌)이 한(漢)에 복속(服屬)했다




 <
고창(高昌)>

 5~7세기에 동(東)투르키스탄의 투루판분지에 있던 나라로, 전한(前漢) 시대에 이주했던 한인(漢人)의 자손들이 투르크계 토착민을 제압하고 세웠던 식민지 왕조였지만, 640년에 중국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高昌 古城 유적>

 148년



 파르티아 출신의 안세고(安世高)가 한(漢)의 낙양(洛陽)으로 와서 불전(佛典)의 번역에 종사했다




 <안세고(安世高)> 生沒未詳 또는 ?-?170년 정도

 후한(後漢) 대에 서역(西域)에서 왔던 역경승(譯經僧)으로, 자(字)는 세고(世高)였다. 그리고 원래 그는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의 태자(太子)였지만, 왕위를 백부(伯父)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출가수도에 뜻을 두어서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 후, 환제(桓帝) 대 건화(建和) 2년(148년)에 수도 낙양(뤄양=洛陽)으로 와서 입궐, 알현했고, 그 후 20년 동안 역경(譯經)을 행해서 30부(部)에 달하는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그러자 후세에 승(僧) 우(祐)는 그를 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한다.

 <그는 폭넓게 경전을 공부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비달마(阿毘達磨)에 정통(精通)했다. 그리고 또 선(禪)에 관한 경전도 암송했으며, 그 강요(綱要)도 거의 다 이해하고 있었다>(出三藏記集 卷 13)

 ※ 아비달마(阿毘達磨)는, 불전(佛典) 중에 경전을 해설하거나 주석한 논(論)을 이르는 말로, 교법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임.

 그리고 다음은 그의 주요한 한역(漢譯) 경전으로, 간단히 소개만 합니다.

 安般守意経/ 陰持入経/ 大道地経/ 人本欲生経/ 四諦経/ 八正道経/ 転法輪経/ 阿毘曇五味経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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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3년


 두고(竇固)가 북흉노(北匈奴)를 공격해서 호연왕(呼衍王)을 쳤고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다



 두고(竇固-?부터 88년)

 자(字)는 맹손(孟孫)이며, 부풍군(扶風郡) 평능(平陵) 출신의 사람이었고, 명문(名門) 두(竇)씨 가문에서 출생해서, 아버지였던 두융(竇融)의 공적에 의해서 광무제(光武帝)의 딸 열양공주(涅陽公主)와 결혼했지만, 그러나 명제(明帝) 시대에 일시 실각(失脚)했고, 그 후에 다시 흉노(匈奴) 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북방(北方)과 서역(西域)정책에 성공했던 공적으로 장제(章帝)시대에도 고관(高官)을 역임했으며, 반초(班超)를 발굴해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천산(天山)산맥을 넘어서 원정해서 대승리를 거둔 후한(後漢)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대부호로도 알려졌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아주 검약한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도왔던 인물이었다.

 

<반초의 진군 圖>



 
반초<班超-32년부터 102년(建武9년-永元14년)>

 그는 중국 후한(後漢) 때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였으며, 자(字)는 중승(仲升)이었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동생이었고, 31년간이나 서역<西域-Xinjiang Weiur-현재의 新疆(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근처>에서 머물면서 당시, 흉노(匈奴)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西域)의 국가들을 정복했고,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세력권을 파미르지방 동서(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그를 칭해 <연함호발(燕頷虎髮)>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부(父)는 반표(班彪). 여동생은 반소(班昭)였으며, 일가(一家)는 역사가의 집안이었다. 자(子)는 三男 반용(班勇) 등이 있었다.

 반소(班昭-45년?부터 117년? 또는 49년부터 120년)는, 중국 후한(後漢)의 작가(作家) 또는 시인(詩人)이었고, 중국 최초의 여성역사가였다. 그리고 일명(一名) 희(姬), 자(字)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었고, 부풍안륙(扶風安陸=湖北省) 출신의 사람이었다.


<晩笑堂竹 荘畫傳에서>



 그녀는 역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14세에 조세숙(曹世叔)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에 남편이 죽자 그녀의 재명(才名)을 전해들은 화제(和帝)의 초청으로 궁중으로 들어갔고, 그 후, 후궁(後宮)들과 후비(后妃)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조대가(曹大家)로 불려졌다. 그 후, 오빠였던 반고(班固)가 투옥되어 한서(漢書)를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8표(八表) 천문지(天文志)를 자신이 써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으로는 <여계(女誡) 7장(章)>과 <속(續) 열녀전(列女傳)> 2권도 그녀가 선정(選定)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녀 자신의 저서로는 조대가집(曹大家集)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부(辭賦)에 길이 남을 부(父) 표(彪)의 <북정부(北征賦)>에 답해서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문선(文選)>에 수록된 한대(漢代) 여성작가들 중에서 제일로 손꼽혔다고 한다.

 
사부(辭賦)는, 중국의 초사(楚辭) 형식에 의거한 산문에 가까운 운문(韻文)을 말하며, 서정적 시(詩)인 사(辭)와 서사적 시(詩)인 부(賦)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곧 시문(詩文)을 이른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중심으로 해서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고, 궁전의 장관(壯觀)이나, 도성의 번화함 그리고 사냥의 호쾌함 등을 노래했다.

 ○
문선(文選)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시문집(詩文集)으로, 전(全) 30권. 춘추전국시대부터 양(梁)까지의(약 천년) 문학자 131명이 썼던 부(賦)와 시(詩) 문장(文章) 800여 작품을 37장르로 분류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거의 안제(安帝)시대였던 원초(元初) 연간(年間) 114년에서 119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때가 향년(享年) 70여세였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한다.


 아무튼, 그는 형 반고(班固)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명제(明帝)의 칙명(勅命)에 의해서 두고(竇固)의 흉노토벌군이 조직되자 그도 참전했다.
그 후, 그가 선선국(鄯善國)에 사자로 갔을 때, 그 나라는 처음에는 그를 환대하더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분위기가 나빠졌다. 그래서 알아본즉, 그곳에는 흉노(匈奴)의 사자도 함께 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때문에 몹시도 두려워 하던 부하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不入虎穴焉得虎子!-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새끼를 얻을 수 없다!> 그 다음,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서 무작정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숫자는 불과 36명뿐이었다. 그리고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았는데,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기습을 받았던 때문이었던지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대로 흩어졌고, 그들은 대승(大勝)했다. 그 후에도 그는 그 근처에 있던 흉노(匈奴)들을 모두 토벌했고, 그리하여 서역(西域)의 남쪽은 완전히 후한(後漢)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75년(永平 18년)에 명제(明帝)가 죽었고, 이어서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그들에게 귀환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또 한군(漢軍)이 철수하면 그곳은 당연히 흉노(匈奴)들의 차지가 될 것이었고,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 한(漢)에 협조를 했던 사람들은 몰살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자 또 그때,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서역(西域)의 왕들과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서 울며불며 매달렸고, 그러자 그는 결국 그곳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 91년(永元 3년), 그는 흉노(匈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구자(龜茲)를 토벌했고, 이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


<구자 위치도 - 중앙>


 그 다음 또 97년(永元 9년), 그는 부하였던 감영(甘英)을 사자로 보내서 대진(大秦=로마제국)과 조지(條支=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국교(國交)를 요구하려 했지만, 감영(甘英)은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 감영(甘英-생몰불상)은, 중국 후한(後漢)의 무장으로, 영원(永元) 9년(97)에 반초(班超)의 명을 받아서 대진(大秦)으로 가기 위해 서역(西域)을 거쳐서 시리아에 도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 중국에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전했다.(후술)

 아무튼 또 100년, 그는 서역(西域)에서 체류한지 31년 만에 한(漢)나라 땅이 그리워져서 조정(朝廷)에 귀국 탄원서를 냈다. 그러자 102년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고, 이어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없었던 서역(西域)은 다시 흉노(匈奴)의 독무대가 되었고, 그러자 또 한(漢)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아들이었던 반용(班勇) 등을 파견해서 다시 그곳을 회복해보려 했지만, 그러나 그 후로도 그가 있던 당시만큼의 세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반고<班固-32년부터 92년(建武8年-永元4年)>

 중국 후한(後漢) 초기의 역사가, 문학자.
 자(字)는 맹견(孟堅). 반초(班超)의 兄이었다.




 그는 한서(漢書)의 편찬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문학자로서 <양도부(兩都賦)> 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반표(班彪)도 역사가로서, 반고(班固) 이전에 벌써 65편을 편찬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반고(班固)는 칙명(勅命)에 의해서 부(父)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그리하여 한서(漢書)를 거의 완성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사원(私怨)에 의해서 중상(中傷)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 옥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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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45년


 오환(烏桓), 선비(鮮卑)가 후한(後漢)에 조공(朝貢)했다



 ※ 오환(烏桓)은,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 중국 한(漢)나라 때에 동호족(東胡族) 중, 현재의 내몽골자치구에 존재했던 민족이었으며, 삼국지(三國志) 등에서는 오환(烏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흉노(匈奴)에게 쫓겨서 오환산(烏桓山)으로 물러났다가,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쇠퇴하였고, 그 후 점차로 한족(漢族)을 비롯한 다른 여러 민족들과 융합되었다.

 

<내몽골자치구>



 ※ 선비(鮮卑)는, 기원전 1세기에서 6세기, 중국의 북부에 존재했던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으로, 중국의 이민족이었던 오호(五胡) 중, 고대 북아시아에서 살았던 몽골족과 퉁구스족의 피가 섞였던 유목민족이었다.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싱안링(興安嶺)의 동쪽에서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후한(後漢)의 화제(和帝) 때에는 흉노(匈奴)를 대신해서 몽골지방을 차지하였고, 위(魏)나라 때부터 점차로 중국 본토로 들어왔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모용 씨(慕容氏), 우문 씨(宇文氏), 탁발 씨(拓跋氏) 등으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탁발 씨'는 북위(北魏)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당(唐)과 송(宋) 이후에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동그라미 부분이 鮮卑>

 

 48년


 흉노(匈奴)가 남북으로 분열해서 일축왕비(日逐王比)가 후한(後漢)에 귀순(歸順)했고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가 되었다



 ※ 일축왕비(日逐王比)=해락시축제선우(醢落尸逐鞮單于-?부터 56년)는,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남흉노(南匈奴)의 초대 선우(單于)였고,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손자였으며, 오주유약제선우(烏珠留若鞮單于)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허련제 씨(虛連題氏)였고, 이름은 비(比)였다.

 57년


 왜노국(倭奴國)의 사자가 낙양(洛陽)으로 조공을 왔다
 



 ※ 왜노국(倭奴國=奴国)은, 1세기에서 3세기 전반(前半),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과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나타나는 왜인(倭人)의 나라를 이름이며, 야마토(大和) 時代에 나현(儺縣=나노아가타) 즉, 현재의 福岡市(후쿠오카시) 부근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왜노국(倭奴國)이 후한(後漢)과 외교교섭을 가졌던 것은 아래의 사료(史料)가 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왜노국(倭奴國)의 왕이 후한(後漢)에 조공(朝貢)을 왔다>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사마대국<邪馬臺國(야마타이코쿠)=사마일국(邪馬壹國)>이 위(魏)의 황제에게 사자를 파견했다.

 
사마대국(邪馬臺國)은, 3세기 일본열도에 존재했었다고 여겨지는 나라들 중 하나이며,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는 <親魏倭王 卑弥呼는 그 나라의 여왕(女王)이며, 약 30개의 나라 중 그 중심이 되는 곳에 살고 있다>라고 했다.

 
친위왜왕(親魏倭王)은, 위(魏)의 황제 조예(曹叡)가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여왕이었던 히미코(卑弥呼)에게 서력(西曆) 238년(239년 설도 있다)에 내려주었던 봉호(封號)를 말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왜인조(東夷傳倭人條=魏志倭人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히미코(卑彌呼-175년경부터 248년경)는,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등,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는 왜국(倭國)의 왕(또는 여왕)이었고, 봉호(封號)는 친위왜왕(親魏倭王)이었으며, 후계는 친족이었던 토요(壹興)가 여왕으로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에서는 <邪馬壹國>이라고 썼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邪馬臺國>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사마대국(邪馬台国)이란 통칭은(일본에서) 사마대국(邪馬臺國)의 대(臺) 자(字)를 台 자(字)로 대용한 것이다. 그리고 또 야마대국(耶馬臺國=야마타이코쿠=야바타이코쿠)라고도
쓴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야요이시대(弥生時代=彌生時代)였던 1-3세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왕이 통치했던 여왕국이었다고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원래 남왕(男王)이 통치를 했었는데, 그러나 나라가 성립(1세기 중반기 무렵부터 2세기 초엽)하고(부족으로 봄) 약 7, 80년 후에, 나라 전체에 장기간에 걸친 소란(騷亂)이 발생했다
(소부족들간의 싸움). 그러자 사마대국(邪馬臺國)도 그 영향을 피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자를 왕으로 공립(共立)시킨 후에야 그 소란은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과 함께 통치를 행했는데, 하지만 또 狗奴國(일반적으로 쿠나코쿠라고 읽으며, 당시, 邪馬臺國과는 대립했던 나라)과의 싸움 중에 히미코(卑弥呼)가 죽어버리자(원인불명으로 급사로 추정함) 그의 남동생이 그 자리를 이었지만, 그러나 계속되던 혼란을 억제하지 못해서 다시 토요(壹興)를 여왕에 옹립하자 그 혼란은 수습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와 나중의 야마토 왕권(王權)과의 관계는 모호하며, 그 나라의 위치에 관해서도 제설(諸說)이 있다. 그리고 또 일반적으로 읽기로는 <야마타이코쿠>라고 읽지만, 그러나 그에도 제설(諸說)이 있다.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57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왜노국(倭奴國)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광무제(光武帝)가 그것을 인정하고 책봉(冊封)되었다는 뜻으로 금인(金印)을 하사했다고 한다.

 

 

<금인의 인면>

 


 그리고 그것은 또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어느 농민이 志賀島(시카노시마)에서 발견했고, 그리하여 그것으로 그 왜노국(倭奴國)이 실재(實在)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발견 당시 상태가 너무 좋았다거나, 발견 장소, 발견자 등, 전체적으로 내용이 너무 허술해서 위조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감정한 결과 진품이란 의견이 大勢라고 했지만 그것은 전부 일본인들의 입장일 뿐이다)

 아무튼, 위의 금인(金印)에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새겨진 글자에서 왜(倭)가 되어야 할 글자는 위(委)로 되어있으며, 사람 인(人) 변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또한 그렇게 생략법을 사용하는 것을 감필(減筆)이라고 하지만, 그에도 제설이 있고, 그것으로 일본의 억지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리고 또 아래는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의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後漢書 東夷列傳第七十五>

 <해석>

 건무중원(建武中元) 二年(57年)에 倭奴國이 貢物을 받들어서 朝賀(궁중에서 거행되었던 신년하례)했다. 그리고 사신(使人)은 스스로 자신을 大夫라고 칭했으며, 나라는 왜국(倭國)의 제일 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는 그 뜻을 받아서 인(印)을 하사했다.

 그 다음, 안제(安帝) 영초(永初) 元年(107年)에 왜국왕(倭國王) 스이쇼우<帥升-야요이시대(彌生時代) 중기에서 후기 사이에 존재했던 왕으로, 소재지는 북 큐슈가 유력하며, 일본역사상 외국 史書에 이름을 남겼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등이 노예(奴隷) 百六十人을 헌상(獻上)하며, 조견(朝見)을 청해왔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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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8년


 왕망(王莽)이 신왕조(新王朝)를 건립했고, 전한(前漢)이 멸망했다



 ※ 적미(赤眉)의 난(亂)은, 신말(新末)과 후한(後漢) 초기, 중국의 신조(新朝)가 멸하고,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후한(後漢)이 일어나기까지의 편의적인 시대구분이 되었던 사건을 말함.

 <왕망(王莽)의 정치>

 왕망(王莽)은 전한(前漢)의 왕위를 찬탈해서 황제에 즉위했고, 그 후 유교적인 입장과 주대(周代)의 치세를 복고한다는 정책 아래 <정전(井田)법>을 모방하여 전국의 전지(田地)를 국유화했으며, 화폐도 새롭게 개주(改鑄)했던 등, 나름대로 새로운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러 했던 정책은 현실성이 전혀 없었고, 거기다 화폐도 자주 개주(改鑄)했기 때문에 경제에 혼란만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지방에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호족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반발도 이어졌다. 그리고 또한 외교정책에서도 과도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해서 흉노(匈奴)와 고구려(高句麗)를 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에는 그 나라들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
적미(赤眉)의 난(亂)>

 그러자 그 즈음에, 여러 가지의 불평을 가지고 있었던 농민들로부터 시작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효시(嚆矢)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랑(낭)사군(琅邪郡) 해곡현(海曲縣=현재의 山東省 青島 부근)에 살고 있던 여모(呂母)라고 불렸던 한 노파였다.


<青島市 현재>


 그녀는 아들은 당시 현청(縣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로 현재(縣宰=현의 장관)에게 붙들려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서력(西曆) 17년, 그에 분함을 이기지 못했던 그녀는 돈을 주고 사람들을 모아서 바다에 나가 있던 현재(縣宰)를 덮쳐서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원한을 풀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그런데 그때 한번 모여졌던 잡군(雜軍)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어서 번숭(樊崇)이란 자를 우두머리로 삼더니, 당시 산동(山東) 각지로 흘러 다니던 유민들을 흡수해서 그대로 <적미(赤眉) 군>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적미(赤眉)란 이름은 당시 적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눈썹을 염료 등으로 칠해서 붉게 물들였는데, 그런 연고로 적미(赤眉) 군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한편 그 <여모(呂母)의 난(亂)>이 조금 지난 후, 다시 왕광(王匡)과 왕봉(王鳳) 등이 녹림산(綠林山=현재의 湖北省 當陽縣)을 근거로 해서 농민들을 흡수했고, 이어서 그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綠林軍의 탄생)


<湖北省>


 하지만 그 후, 그 군(軍)의 내부에서 역병(疫病)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서력(西曆) 21년에 부대는 분열되었다. 그러자 그 결과, 한 무리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하강군(下江軍)으로 불리게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대로 하남성(河南省)의 남양(南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신시군(新市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신시군(新市軍)은 남양(南陽)의 호족이었으며 또한 같은 친척이기도 했던 유씨(劉氏)들과 손을 잡았고, 그리하여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유씨(劉氏)들 중에서는 유수(劉秀)와 그의 형이었던 유연(劉縯) 등이 있었고, 그리고 또 서력(西曆) 23년에는 그 유씨(劉氏)들 중에서 유현(劉玄)을 왕위에 올렸다.(更始帝)


<河南省>


 그러자 왕망(王莽)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또 서력(西曆) 22년에는 왕광(王匡-綠林軍의 王匡과는 同名異人)을 장군으로 해서 적미(赤眉)군의 토벌을 명했지만, 그러나 그 왕광(王匡)은 적미(赤眉) 군에 패했다.(赤眉軍이 눈썹을 붉게 물들였던 것은 바로 이 싸움부터였다고 한다)

 그런 한편, 신군(新軍)은 곤양(昆陽)의 싸움에서도 졌다.(아래 昆陽의 싸움 참조) 그러자 왕망(王莽)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갔다. 그러자 또 그때 누가 다음과 같이 진언을 했다. <옛날부터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는 큰소리로 통곡을 해서 그것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늘을 향해서 큰소리로 통곡을 해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왕망(王莽)은 그 진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어서 통곡소리가 큰 사람들을 모집해서 그들을 관리로 뽑았다.(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함) 그러자 그것을 보고 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러자 결국 왕망(王莽)은 그 반도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광무제(光武帝)>

 왕망(王莽)이 죽은 후, 갱시제(更始帝) 군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장안(長安)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때 장안(長安)으로 몰려 들어갔던 갱시제(更始帝)군은 단번에 타락을 해서 재보를 마구 약탈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연회를 여는 등, 전(前) 시대들과 나아진 모습을 전혀 보여주질 못했다. 그러자 적미(赤米)군은 그에 실망을 해서 앞서 맹세했던 갱시제(更始帝)에게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깼고,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독자의 노선을 걷기로 결의하고는 장안(長安)을 치기로 결정했다.

<現 西安市=長安에 상당>



 그리고 또 그 무렵, 유수(劉秀)는 갱시제(更始帝)와 그 측근들에 의해서 살해 당했던 자신의 형 유연(劉縯)의 일도 있었고 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어 원정도 떠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또 당시, 적당한 장군이 없었던 갱시제(更始帝)군에서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를 다시 불러서는 그에게 하북(河北)을 제압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하북(河北)으로 출병해서 그곳의 호족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당시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이라고 불리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반도들과 고전(苦戰)을 했고, 이어서 서력(西曆) 24년에 왕랑(王郞)을 멸했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에 그는 동마군(銅馬軍)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해서 하북(河北)도 통일시켰다.

 그 다음해, 유수(劉秀)는 황제 위에 올라서 원호(元號)를 건무(建武)로 했으며,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때, 유수(劉秀)의 부하들 중에서는 동마군(銅馬軍)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그는 동마제(銅馬帝)로 불리기도 했다.


 다음 25년, 적미군(赤眉軍)은 서진(西進)해서 관중(關中)을 공략했다. 그러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던 갱시제(更始帝)군은 적수가 되지를 못했고, 그러자 또 갱시제(更始帝)는 투항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던 적미군(赤眉軍)은 전에 갱시제(更始帝)군들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약탈을 해나갔고, 나중에는 약탈할 물건이 더 이상 없게 되자 동쪽인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 27년, 광무제(光武帝)의 부하 중 등우(鄧禹)가 대패했다. 하지만 또 그때, 등우(鄧禹)와 함께 싸우다 대패했던 풍이(馮異)가 흩어졌던 부하들을 다시 모아서는 재차 싸웠고, 이어서 대승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는 적미군(赤眉軍)의 귀도(歸途)를 막았고, 그러자 적미군(赤眉軍)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그 후, 상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광무제(光武帝)는 차례로 양(梁=河南省)의 유영(劉永), 서(舒=安微省)의 이헌(李憲), 랑사(琅邪=山東省)의 장보(張步) 등, 군웅세력들을 제압했고, 그 다음 36년에는 촉(蜀=巴蜀)의 땅에 성(成=成家)이란 나라를 건국하고 있던 공손술(公孫述)을 멸하고는 전국도 통일했다.

 공손술(公孫述-?~A.D.36)은, 중국 후한(後漢) 때의 무장으로, 字는 자양(子陽)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왕망(王莽)을 섬겼으나, 후에 청두(成都)에서 병사를 일으켜서 파촉(巴蜀)을 평정했고, 이어서 25년에 천자(天子)라고 칭하고 국호를 성가(成家)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뒤에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멸망했다.(후술 또는 생략)

 ※ 그리고 다음은 그
당시의 군웅(群雄)들에 대한 소개이며, 단, 이름만 밝히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邯鄲의 王郎/ 梁의 劉永琅/ 邪의 張歩/ 東海의 董憲/ 楚黎丘의 秦豊/ 漢中의 延岑
 夷陵의 田戎/ 漁陽의 彭寵/ 涿郡의 張豊/ 郾의 尹尊/ 舒의 李憲/ 真定의 劉楊(劉揚)
 淯陽의 鄧奉/ 堵郷의 董訢/ 安定의 盧芳/ 陳倉의 呂鮪/ 河西의 竇融/ 隴西의 隗囂
 巴蜀의 公孫述


 
 ※ 곤양(昆陽)의 싸움(昆陽之戰)은, 중국 신대(新代) 지황(地皇) 4년(西曆 23년 또는 更始1년) 곤양(昆陽=豫州 頴川郡=現 河南省 平頂山市)에서 신군(新軍)과 녹림군(綠林軍) 간에 벌어졌던 싸움이었다.

 서력 8년, 왕망(王莽)은 신(新)을 개국하고 연호(年號)를 초시(初始)로 하며 왕조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가 채용했던 이상주의와 회고(懷古)주의 정책은 당시의 실정과는 맞지가 않아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 반도들 중에서는 적미(赤眉) 군과 녹림(綠林) 군이 가장 강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남양(南陽)의 호족이었던 유현(劉玄)도 녹림(綠林) 군에 가세했고, 그리고 또한 동족(同族)의 유연(劉縯), 유수(劉秀) 형제도 반기를 들게 되어, 녹림(綠林) 군은 곧 농민호족 연합군이 되었다.

 그 후, 유연(劉縯)은 신군(新軍)을 격파했고, 이어서 유현(劉玄)이 황제에 올랐으며, 그리하여 유연(劉縯)은 대사도(大司徒)에 그리고 유수(劉秀)는 태상편(太常偏)장군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신(新)에서는 지황(地皇) 4년(23년) 3월에 유(劉) 형제 등, 갱시(更始)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과 대사도(大司徒) 왕심(王尋)이 100만이라는 군사를 인솔해서 출진했다.(그러나 실제로는 40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년 5월, 왕읍(王邑) 등의 군사들은 영천군(潁川郡)으로 들어갔고, 그러자 장우(莊尤) 등의 잔군(殘軍)들이 그에 합류했다.

 그러자 또 당시 유수(劉秀)가 이끌었던 군사는 불과 수천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일단 곤양(昆陽)성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성내(城內)에는 약 8, 9천정도의 군사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유수(劉秀)는 일단 왕봉(王鳳)과 왕상(王常)에게 성(城)을 맡기고, 자신은 몇 명의 장군 등 13기(騎)만 이끌고서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영천군(潁川郡)으로 가서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 한편, 신(新)의 군영에서는 장우(莊尤)가 유연(劉縯)을 먼저 토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언을 냈지만, 그러나 왕읍(王邑) 등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우선 곤양(昆陽)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왕봉(王鳳) 등이 항복하려 했지만, 그러나 왕읍(王邑)은 그것도 인정하지 않고 더욱 포위망을 굳혔다. 그러자 장우(莊尤)가 다시 상대를 궁서(窮鼠)로 만들지 말 것을 진언했다. 하지만 그 진언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왕봉(王鳳) 등은 신군(新軍)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게 되어갔다.

 그러던 사이 5월 말에는 유연(劉縯)이 완(宛)을 함락했고, 거기다 6월에는 유수(劉秀)가 수천의 원군들을 모아서 곤양(昆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인솔해서 신(新)의 대군이 모여 있던 진영으로부터 불과 4, 5리(里)정도까지 진군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왕읍(王邑)과 왕심(王尋)은 그것을 얕잡아보고 자군(自軍)에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준 다음, 스스로 1만여 군사들을 인솔해서 유수(劉秀) 군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수(劉秀)의 활약에 힘입어서 왕읍(王邑), 왕심(王尋) 군은 참패했다. 그러자 유수(劉秀)는 결사대(決死隊) 3천 명을 인솔해서 곤양(昆陽)성 서쪽의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신(新) 진영의 중핵(中核)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신군(新軍)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거기서 왕심(王尋)이 전사했다. 그리고 또 그곳에 있던 한군(漢軍)도 유수(劉秀) 군에 호응했기 때문에, 그래서 신군(新軍)은 대혼란을 일으키며 패주했고, 그 사이에 왕읍(王邑)은 도망쳤다. 하지만 또 그때, 기후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서 그들은 강풍과 호우(豪雨) 속에서 탈출했고, 그러자 신군(新軍)은 완전하게 붕괴했으며, 이어서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또, 그렇게 도망을 갔던 왕읍(王邑)도 가까스로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그의 곁에 남아있던 군사는 불과 수천 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왕망(王莽)은 살해되었고, 신(新)도 그렇게 해서 멸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신(新)을 멸망시켰던 갱시(更始) 권력 내에서도 금방 주도권쟁탈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또 갱시제(更始帝)에 의해서 유연(劉縯)이 숙청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확인했던 유수(劉秀)는 하북평정(河北平定)이라 칭해지며 그 후로도 스스로 몸을 더욱 낮추는 등, 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는 25년에 황제에 즉위했고, 이어서 한(前漢)을 계승했으며, 이후 다시 통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유수(劉秀)왕조, 즉 광무제(光武帝)왕조로부터 <후한(後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5년


 유수(劉秀=光武帝)가 후한(後漢)王朝를 세우다





<光武帝>

 

 

 

 ※ 설명은 위의 내용으로 대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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