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배경(背景)>

 한(漢)의 전대(前代)였던 <진(秦)>은 지방 전부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고 직할지배하는 체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한(漢)은 진(秦)의 가혹한 법치주의의 반성과 함께, 긴 시간동안 전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던 점을 고려해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지방과 제후왕(諸侯王)을 봉하는 반독립국을 만들어서 수습하게 하는 제도를 병립했다.(郡國制) 하지만 당시 진(秦) 이외의 <구(舊) 6국(國)> 지역의 사민(士民)들 중에서는 한(漢)의 황제를 진왕(秦王)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소속 제후왕(諸侯王)을 왕(王)으로 해서 과거 6국(國=戰國七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부활을 꿈꾸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후, 한(漢)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대의 선정(善政)으로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그에 자신을 얻었던 한(漢) 조정(朝廷)은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의 권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당시,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은 스스로 그 영지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해서, 중앙(中央)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아져갔던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오(吳)는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과 동화(銅貨=銅錢) 주조로 벌어들였던 막대한 재력(財力)의 배경과 그리고 또 과거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적자(嫡子)였던 유현(劉賢)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景帝)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 등으로 해서 당시, 제후왕(諸侯王)의 의무였던 장안(長安)에의 참근(參勤=出仕하여 왕을 뵙는 일)도 취소하는 등, 독립 색을 아주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경제(景帝)는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차례로 제후들의 영지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 인물소개

 <경제(景帝)>

 전한(前漢)의 제6대 황제로, 5代 文帝의 子. 부제(父帝)와 같이 한(漢)의 기반을 공고히 했고,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그 치대(治世)는 <문경(文景)의 치(治)>라고 상찬(賞賛)되었다. 사기(史記)와 외척세가(外戚世家-不明)에 의하면,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제5자로 태어났고, 위로 4명의 형이 요절했으며, 이어서 생모 두씨(竇氏)가 정실로 승격됨에 따라서 문제(文帝)의 적자(嫡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황태자 시대에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태자 유현(劉賢)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오왕(吳王)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지만 그 일은 문제(文帝)의 정치적인 배려로 수습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 일은 또 나중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157년에 황제에 즉위했고, 정치는 기본적으로 문제(文帝)의 정책을 계승했는데, 그것은 또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儉約)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을 내새웠고, 감세(減稅)를 실시해서 사회의 안정을 실현했다.(당시의 기록에는 인구 9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 시대를 문제(文帝)의 시대와 합쳐서 <文景의 治>라고 칭해졌다.


 ☆ 문경의 치(기원전 180년부터 기원전 141년)

 한초(漢初)에는 진말(秦末) 이래 전란(戰亂)으로 사회경제가 쇠퇴했고, 그래서 조정은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기 위해서 황로치술(黃老治術-黃老思想)을 채용했다. 그리고는 국민 경제력의 휴양(休養=조세를 가볍게 하며 民力을 기르는 일)과 부역(賦役)의 경감(輕減)을 그 목적으로 한 정책을 실행했다. 그리고 문제(文帝)는 농업을 중시해서 몇 차례에 걸쳐서 농상(農桑)진흥을 명했다. 그리고 또 일정한 호수(戶數)에 삼로(三老), 효제(孝悌), 역전(力田)을 선발해서 그들에게 상(賞)을 내리는 것으로 보람을 갖게 하여 농업생산의 향상을 도모했다.

 ○ 漢文帝詔曰: 孝悌, 天下之大順也. 力田, 爲生之本也. 三老, 衆民之師也 라고 하였으니, 차례로 해석하면, 한(漢)의 문제(文帝)가 이르기를, 효제(孝悌)는 천하의 이치에 아주 크게 순응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해석은 효우(孝友) 즉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했던 자를 의미했으며, 역전(力田)은 만물을 살리는 것(生育)이 인간의 근본이란 의미로, 역시 힘써서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당시 그 해 농사를 특별히 잘 지었던 사람이나, 평소 그렇게 이름이 났던 사람을 의미 했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삼로(三老)는 민중의 스승이 되는 사람을 말했던 것으로, 옛날 한(漢)나라 때, 한 고을의 교화(敎化)를 맡아보았던 쉰 살 이상의 노인을 의미했다는 해석과, 또는 노인(老人)을 나이에 따라서 나눈 세 등급으로, 상수(上壽:100살), 중수(中壽:80살), 하수(下壽:60살)로 나눈 것의 총칭(總稱)이 그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제(文帝)의 말을 쫓아서, 앞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됨.

 아무튼, 다음에 또 문제 2년(기원전 179년)과 12년(기원전 169년)에는 전조(田租-논밭에 부과했던 조세)의 반감(半減)을 실시했고, 그 다음 또 문제 13년(기원전 168년)에는 전조(田租)의 전면(全免-전부 면제)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 그와 아울러서 주변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평화정책도 실시했다. 그리고 문제(文帝) 역시도, 그 자신 스스로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래서 궁실 내의 차기의복(車騎衣服-차량과 기마, 의복 등 궁정 내의 경비나 운영에 들어가는 일반적인 물품들) 또한 최저한의 것으로 했고, 그 중에 의복도 과도하게 긴 것은 금지했으며, 유장(帷帳-휘장과 장막)도 자수(刺繡)를 넣지 않는 등, 철저한 검약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한 제국(諸國)에 대한 헌상(獻上)품도 억제를 명했다. 그러자 그 결과, 귀족관료들의 사치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그 말년에는 민중들의 생활은 날로 향상되었고, 그것으로 전한(前漢) 최성기의 기초를 쌓아올렸음과 동시에 또, 그 다음 시대가 되는 무제(武帝)의 흉노원정 때를 위한 물질적인 기초까지 쌓아올리게 되었다.




 <
유비(劉濞) 기원전 215년부터 기원전 154년>

 그는 전한(前漢) 전기의 황족으로, 패현(沛縣) 출신이었고, 오초칠국의 난 수모자(首謀者)였다. 그리고 그는 유희(劉喜=劉邦의 兄)의 장자(長子)로 태어났으며, 아우에 유광(劉廣=德哀侯)이 있었다. 그는 대왕(代王)에 봉건 되었던 부(父)가 대(代)를 공격했던 흉노(匈奴)로부터 도망을 가서 합양후(郃陽侯)로 격하된 후, 패후(沛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유방(劉邦)의 친정(親征) 군에 참가해서 장군으로 종군했다. 그리고는 기병(騎兵)을 인솔하면서 활약했다. 그러자 그 공적으로 그는 당시 전사했던 형왕(荊王) 유가(劉賈)의 후임으로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가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 유방(劉邦)에게 갔을 때의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유방(劉邦)은 이미 그를 왕으로 봉했지만, 그러나 그의 인상에서 모반(謀反)의 느낌을 받고는 그에 불안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예언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년 후에 東南(帝都 長安에서 봤을 때)의 땅(吳의 영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너나 나나 다 같은 혈통인데, 그러므로 무슨 잘못이 있더라도 반란 같은 것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말라!>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도 그의 말을 인정했고, 그 역시 다시 오(吳)로 돌아갔지만, 하지만 그 후에 여치(呂雉)와 여 씨(呂氏)의 전횡(專橫)으로 장안(長安)은 피로 얼룩졌다. 그러나 당시, 그는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휘말리는 일 없이 나라 일에만 신경을 썼고, 더불어서 날이 갈수록 나라는 살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오(吳)에서는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동(銅)과 소금으로 인해서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고,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내리던 조세까지도 모두 면제했으며, 오히려 나라 일에 동원되었던 국민들에게는 품삯까지 지불했다는,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가히 별천지 같은 일이 그곳에서는 벌어졌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듣고 몰려왔던 타국(他國)의 사람들까지 받아들여서 전(錢)을 주조시키는 등, 나라는 점점 더 부강하게 되었고, 이윽고는 중앙(中央)에서조차도 손을 쓰지 못할 만큼 되어갔다. 하지만 그 후, 여 씨(呂氏) 일족이 멸해지고, 문제(文帝)가 즉위했다. 그러자 양상은 점점 바뀌어가서 문제(文帝)는 측근들이 진언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약체화(弱體化)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주로 문제(文帝)와 제위를 다투었던 제(齊) 왕가(王家)를 대상으로 그 정책은 실행되어갔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 장안(長安)으로 부(父) 유비(劉濞) 대신(代理人)으로 왕세자 유현(劉賢)이 참내(參內)를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유현(劉賢)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그런데 그 연회의 여흥(餘興-博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일종의 보드게임) 중에 유현(劉賢)과 유계(劉啓-後의 景帝)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그러자 유계(劉啓)가 그 박판(博板)에서 유현(劉賢)을 박살(撲殺-때려죽임)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 후, 자식의 억울한 죽음과 그 이후에 행해졌던 한(漢) 왕조 측의 부족한 대응에 불만을 품었던 유비(劉濞)는, 당시 제후들의 의무였던 장안(長安) 입조(入朝)를 취소했다. 그러자 또 그 일은 조정(朝廷) 내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 일은 문제(文帝)의 중재(仲裁)로 불문(不問)에 붙여졌다. 그리고 그때, 문제(文帝)는 오히려 유비(劉濞)가 고령이었던 점을 참작해서 참근(參勤)을 면제해 주었고, 지팡이와 사방침(四方枕-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히 기대서 앉을 수 있게 만든 네모난 베개)까지 내리면서 불문(不問)에 붙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안정을 확보했던 오(吳)와 한(漢) 왕조였지만, 그러나 기원전 157년에 문제(文帝)가 죽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것은 또 문제(文帝)의 뒤를 이었던 그 경제(景帝)는 유현(劉賢)을 죽였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으며, 그에 더해서 경제(景帝)는 측근이었던 조착(晁錯)의 적극적인 진언을 받아들여서 제후들의 삭감(削減) 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에 위기감을 느꼈던 유비(劉濞)는 초(楚)와 제(齊)를 끌여 들였고, 그리고는 이윽고 기원전 154년에 <나는 62세에 군사를 일으켰고, 나의 막내는 불과 14세이지만 종군에 동참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62세 이하 14세 이상의 남자들에게는 모두 병역의 의무를 부과한다!>라고 외치고는 20만의 병사들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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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배경(背景)>

 한(漢)의 전대(前代)였던 진(秦)은 지방 전부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고 <직할지배>하는 체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한(漢)은 진(秦)의 가혹한 법치주의의 반성과 함께, 긴 시간동안 전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던 점을 고려해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지방과, 제후왕(諸侯王)을 봉하는 반독립국을 만들어서 수습하게 하는 제도를 병립했다.(郡國制) 하지만 당시 진(秦) 이외의 <구(舊) 6국(國)> 지역의 사민(士民)들 중에서는 한(漢)의 황제를 진왕(秦王)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소속 제후왕(諸侯王)을 왕(王)으로 해서 과거 6국(國=戰國七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부활을 꿈꾸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후, 한(漢)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대의 선정(善政)으로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그에 자신을 얻었던 한(漢) 조정(朝廷)은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의 권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당시,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은 스스로 그 영지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해서, 중앙(中央)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아져갔던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오(吳)는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과 동화(銅貨=銅錢) 주조로 벌어들였던 막대한 재력(財力)의 배경과 그리고 또 과거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적자(嫡子)였던 유현(劉賢)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景帝)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 등으로 해서 당시, 제후왕(諸侯王)의 의무였던 장안(長安)에의 참근(參勤=出仕하여 왕을 뵙는 일)도 취소하는 등, 독립 색을 아주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경제(景帝)는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차례로 제후들의 영지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 인물소개

 
문제(文帝-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157년)는, 중국 전한의 제5대 황제로, 성은 유(劉). 이름은 항(恒).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효문 황제(孝文皇帝)였다. 그리고 여씨의 난이 평정된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뒷날, 무제(武帝) 때의 전성기를 구축하는 기반을 닦았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180~기원전 157년이다. 그리고 그는 혜제(惠帝)의 자식으로 여겨졌던 2명의 소제(少帝)를 제외하고, 제3대 황제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또, 그는 유방(劉邦)의 서자(庶子)였으며, 생모는 박 씨(薄氏). 아내는 두 씨(竇氏)였다.

 출생(出
生)

 문제(文帝)의 어머니 박 씨(薄氏)는 원래 전국시대(戰國時代) 위(魏)왕실 출신으로, 진말(秦末)의 동란기 때부터 초한전쟁 초기 무렵에 위왕(魏王)표(魏豹)의 후궁으로 입궁했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때, 허부(許負)라는 관상쟁이가 그녀의 관상을 보고는 <머지않아 황제를 낳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사서(史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박 씨(薄氏)와 유방(劉邦)과의 관계는 위표(魏豹)가 유방(劉邦)에게 붙어서 항우(項羽)와 대적했지만, 그러나 팽성(彭城)의 대패(大敗)를 계기로 반(反)유방(劉邦)의 반란을 일으켰던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한(漢)의 대장군이었던 한신(韓信)에게 다시 패했던 위표(魏豹)는 신분이 서민으로 강등되었고, 이어서 유방(劉邦)에게로 끌려갔는데, 그런데 그때 그 박 씨(薄氏)도 자신의 일족들과 함께 끌려갔다. 그 후, 박 씨(薄氏)는 유방(劉邦)의 후궁이 되어서 잡무(雜務)를 담당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유방(劉邦)의 눈에 띄어서 침실에까지 들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 유방(劉邦)은 그녀를 멀리했는데, 하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유항(劉恒)을 가졌던 상태였다.

 대왕(代王)시대

 그 후, 초한전쟁이 종결되고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성(異姓) 제후왕(諸侯王)들의 처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그때 유항(劉恒)은 조(趙)에 봉해졌던 이모형(異母兄) 유여의(劉如意)의 후임으로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당시, 유항(劉恒)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유방(劉邦)의 신임을 받았던 부관(傅寬)이 재상(宰相)으로 가서 그를 후견했다.
그 후, 유항(劉恒)은 대왕(代王)태후(代王國의 태후)가 되었던 박 씨(薄氏)와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박소(薄昭)와 함께 부임지로 향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또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가 실권을 장악했고, 그리하여 유여의(劉如意) 등 유방(劉邦)의 서자들은 차례로 살해당했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유항(劉恒)만은 난을 피했다. 그리고 또 그 배경에는, 유항(劉恒)의 생모였던 박 씨(薄氏)가 유여의(劉如意)의 생모였던 척 씨(戚氏) 등과는 달리, 유방(劉邦)으로부터 총애를 적게 받았던 것이 그 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이모제(異母弟)였던 조공왕(趙共王) 유회(劉恢)의 측실이 정실이었던 여 씨(呂氏=呂后의 조카로, 呂産의 딸)에게 독살 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유회(劉恢)는 곧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그러자 여후(呂后)는 그 후임으로 유항(劉恒)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유항(劉恒)은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고는 <자신이 현재 흉노와 가까운 지역에 있으므로, 그래서 그 방위에만 전념하고 싶다>라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러자 그 후임은 여치(呂雉)의 조카였던 여녹(呂祿 또는 여록)에게 주어졌다.

 황제 즉위 전후

 기원전 180년 여치(呂雉)가 죽자 여 씨(呂氏) 일족은 모두 숙청되었고, 그 후, 유항(劉恒)이 황위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그에는 또, 당시 정변(政變)에 참가했던 유양(劉襄)과 유장(劉章) 형제는 유방(劉邦)의 서장자(庶長子)라고 생각되었던 유비(劉肥)의 유아(遺兒)로, 여 씨(呂氏) 일족 주멸(誅滅)의 공적으로부터 유양(劉襄)이 황제에 즉위하고, 또 유장(劉章)은 제왕(齊王)에 봉해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 씨(呂氏) 일족이라는 강대한 외척에 의한 전횡(專橫)의 기억이 남아 있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또 일부 황족들이 강한 권력욕을 가진 외척이 있던 제왕(齊王)을 황제로 세우게 되면 또 다시 외척의 전횡이 발생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생모가 몰락한 귀족의 말예(末裔)였으며, 또한 권력욕도 적은 인격자(人格者)라는 평판이 높았던 유항(劉恒)이 옹립되게 되었던 것이었다.(하지만 그에는 또 그가 당시 생존하던 劉邦의 遺兒 중 최 연장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연령순에 의해서 즉위했을 것이란 설득력있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러자 대국(代國)으로부터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는데,
그 이유는 또, 당시 유방(劉邦)과 함께 전란의 세월을 견뎌냈고, 이어서 여치(呂雉) 사후 정변을 일으켜서 여 씨(呂氏) 일족들뿐만이 아니라 황제까지도 폐립시키고 살해했던 그 원훈(元勳)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 후, 황제 즉위의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서 사자(使者)들이 장안(長安)과 대국(代國) 사이를 다섯 번이나 왕복하고서야 간신히 그것은 실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 또 유항(劉恒)이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황제 즉위 반대파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러자 또 그들에게는 장안으로 들어올 때, 단 몇 명의 부하들과 6기(騎)의 마차만 통과를 허락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문제(問題)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또 어떤 때, 문제(文帝)가 법제도개혁에 대해서 중신들에게 하문했는데, 그러자 염미(厭味-아주 불쾌감을 주는 언동 또는 그로 인해 받는 혐오감과 불쾌감)한 내용의 상서(上書)가 올라왔던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또 세월은 흘러서 유방(劉邦)의 원훈(元勳)들도 하나둘씩 정치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때부터 서서히 정권의 주도권을 잡아갔으며, 이어서 착실하게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시정(施政)

 그때, 문제(文帝)의 기본적인 정치태도는 유방(劉邦)의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방(劉邦)의 정책을 계승해서 국민 경제력의 휴양(休養)과 농촌의 활성화에
힘썼고, 또 그런 이유로 해서 대규모의 공사는 가급적 자제(自制)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는 궁중에서 누각(樓閣)을 마련하려는 계획이 나왔을 때도 그 경비가 중류(中流) 가정(家庭) 10호(戶)의 자산에 상당하게 되면 알아서 중지할 것을 명했다든지, 그리고 또 자신의 능묘(陵墓) 또한 다른 사람들(父, 兄)의 것에 비해서 소규모로 할 것도 지시했다. 그리고 또한 그 시기에 몇 차례나 감세가 실시되었고, 그리고 또 어떤 해(年)에는 아예 면제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른 稅와 勞役은 제외) 그리고 법제도의 개혁에서는 참수(斬首)와 거세(去勢)를 제외한 육형(肉刑)의 폐지를 실시했다. 그는 또 생모 박 씨(薄氏)에게 효행을 다했으며, 어떤 때는 스스로 음식의 맛보기(毒味=毒見 또는 始味=궁중 등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독이 들었는지를 먼저 확인 하는 일) 역(役)을 맡는다거나 해서 <효행의 황제>라고 칭해졌고, 그것은 또 나중에 <24효(二十四孝)>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
24효(二十四孝)란 중국 원나라 곽거경(郭居敬)이 선정했던 스물네 명의 효행자(孝行者)를 말함.(상세한 것은 차후에 소개하거나 생략함) 우순(虞舜), 전한(前漢)의 문제(文帝), 증참(曾參), 민손(閔損), 중유(仲由), 동영(董永), 염자(剡子), 강혁(江革), 육적(陸績), 당부인(唐夫人), 오맹(吳猛), 왕상(王祥), 곽거(郭巨), 양향(楊香), 주수창(朱壽昌), 유검루(庾黔婁), 노래자(老萊子), 채순(蔡順), 황향(黃香), 강시(姜詩), 왕포(王褒), 정란(丁蘭), 맹종(孟宗), 황정견(黃庭堅)

 아무튼, 문제(文帝)는 박 씨(薄氏)를 존중해서 무고죄로 주발(周勃)이 체포되었을 때도 박 씨(薄氏)에게 질책을 받고 주발(周勃)을 석방해 주었으며, 흉노 친정에 대해서도 신하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박 씨(薄氏)의 설득으로 원정을 중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이후, 그는 정적(政敵)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제후왕(諸侯王)들과도 원만하게 지냈으며, 그 예로는 또, 원래대로라면 무사(無嗣-후사가 없음) 단절되는 경우나, 모반을 일으키면 폐립(廢立)시키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히려 <황제의 혜택>이란 명목으로, 굳이 그 혈연 자(血緣者)들까지 구해 와서 그 영지를 분할시켜서는 그 제후의 지위를 보전시키는 노력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중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하지만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때 반란을 일으켰던 제후왕가들이 의사통일에 곤란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또 조기진압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그러했던 문제(文帝)의 정책은 유방(劉邦)이나 여치(呂雉)에 비해서는 다소 뒤떨어졌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만 또 그 시대에는 민중과 사회가 모두 안정되었으며, 그래서 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창고에는 다 먹지 못해서 부패한 식료품들이 넘쳐났다>거나 <엽전(葉錢)을 묶는 끈이 다 썩어서 계산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는 등의 일화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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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유비(劉肥-?부터 기원전 189년)는, 전한(前漢)의 황족이었고, 제왕(齊王)이었다. 시호(諡號)는 도혜왕(悼惠王), 유방(劉邦)의 서장자(庶長子), 생모는 조(曹)씨(氏)였다. 기원전 201년,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모반의 죄를 짓고 멸하자, 그 영지는 한(漢)의 종실(宗室-劉氏一門)에 돌아갔다. 그리고 유비(劉肥)는 제왕(齊王)에 봉해졌으며, 역전(歷戰)의 장군이었던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을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196년,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劉邦)이 친정(親征)에 나섰다. 그러자 유비(劉肥)는 조참(曹參)을 부장(部將)으로 해서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종군했다. 기원전 195년, 유방(劉邦)이 사망하자 유영(劉盈)이 즉위해서 혜제(惠帝)가 되었고, 그러자 유비(劉肥)의 입장이 미묘(微妙)하게 되었다. 기원전 193년, 유비(劉肥)는 장안(長安)으로 불려가서 혜제(惠帝)와 여후(呂后)가 열었던 연석(宴席)에 참석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그에게 형 대접을 해주기 위해서 상석(上席)에 앉혔는데, 그러자 여후(呂后)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에게 독을 넣은 술을 주었다. 하지만 앞서 밝혔던 대로 그것은 혜제(惠帝)의 기지(機智)로 해서 무사히 끝이 났고, 그러자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던 유비(劉肥)는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영지(領地) 중 성양군(城陽郡)을 여후(呂后)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에게 양도하고 싶다는 의견을 여후(呂后)와 혜제(惠帝)에게 올렸다. 그러자 여후(呂后)의 마음이 풀렸고, 그것으로 그는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기원전 189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의 자식들<長子 哀王・劉襄과 次子 朱虚侯・劉章(城陽景王)>은 여치(呂雉) 사후(死後)에 여(呂)씨(氏) 일족(一族) 타도(打倒) 때, 아주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어서 계속될 기원전 154년에 일어났던 <오초칠국지난(吳楚七國之難)> 때, 모반(謀反)을 일으켰던 7명 중 4명이 그 유비(劉肥)의 자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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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제홍(少帝弘)은, 전한(前漢)의 제4대 황제였고(그러나 歷代 황제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휘(諱)는 홍(弘)이지만, 원래는 산(山)이었고, 상산왕(常山王)으로 승격되었을 때, 의(義)로 개명했다. 그는 혜제(惠帝)와 후궁(後宮) 사이에서 태어났던 자식으로, 처음에는 양성후(襄城侯)에 봉해졌다. 그런데 그 후에 상산왕(常山王)이었던 유불의(劉不疑)가 사망하자 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또 그 후에 자신의 형이었던 소제공(少帝恭)이 여치(呂雉)에게 살해당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그 후, 여후(呂后)가 사망하자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그러자 소제홍(少帝弘)도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대왕(代王)이었던 유항(劉恒-文帝 후술)이 즉위하기 바로 직전에 그는 하후영(夏侯嬰)에 의해서 궁 밖으로 추방된 후, 소부(少府-九卿의 하나로 황실의 잡무 등을 처리했다)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유항(劉恒)이 즉위하기 위해서 장안(長安)으로 들어왔을 때, 같은 형제였던 상산왕(常山王) 유조(劉朝-軹侯), 회남왕(淮南王) 유무(劉武-壷関侯) 등과 함께 독살되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원래 모두 여치(呂雉)가 비밀리에 궁으로 데려왔던 아이들이었다고 했으며, 그래서 혜제(惠帝)의 친자식들이 아니었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에 대한 진상(眞相)은 현재 불명(不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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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제공(少帝恭)은, 전한(前漢)의 제3대 황제였고(역시,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일반적으로 이름은 공(恭)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에서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그 역시, 혜제(惠帝)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혜제(惠帝)가 죽고 난 후, 장황후(張皇后-노원공주의 딸)에게서 태어났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치(呂雉)의 지지를 받아서 즉위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세상에 장황후(張皇后)의 자식으로 공표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생모였던 후궁은 살해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가 장성했을 때, 그런 사실을 알고는 여치(呂雉)를 몹시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후환을 두려워했던 나머지 그를 유폐(幽閉)시켰으며,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면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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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呂産-?부터 기원전 180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이었고, 여치(呂雉)의 일족으로, 여치(呂雉) 시대에 여왕(呂王), 상국(相國)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치(呂雉)의 오빠였던 여택(呂澤)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여택(呂澤)은 또,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으며, 그러다가 기원전 205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패했을 때, 유방(劉邦)은 그 여택(呂澤)의 진영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01년에, 여택(呂澤)은 주여후(周呂侯)에 봉해졌으며, 그 3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그에게 영무후(令武侯)란 시(諡)를 내렸으며, 그 후는 여산(呂産)의 형이었던 여대(呂臺)가 이었다. 그 후, 혜제(惠帝)가 죽자(기원전 188년) 여치(呂雉)는 불안해졌다. 그런데 그때, 진평(陳平) 등이 여대(呂臺), 여산(呂産), 여록(呂祿) 등에게 남북(南北)군(軍)의 군권을 가지게 하라고 여치(呂雉)에게 조언했고, 그러자 여치(呂雉)는 불안에서 벗어났다. 기원전 187년, 여후(呂后) 원년에 여산(呂産)은 문후(汶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해, 여후(呂后)는 여(呂)씨를 왕으로 만들 것을 생각했고, 그러자 먼저 여산(呂産)의 아버지 여택(呂澤)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追尊)한 후, 대신들에게 여대(呂臺)를 왕으로 봉하게 하라는 진언을 하게 만들어서, 그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에 봉했다. 여후(呂后) 6년, 기원전 182년, 여왕(呂王) 여대(呂臺)를 이었던 여가(呂嘉)가 무슨 일로 폐위되자, 그 자리를 여산(呂産)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 유방(劉邦)의 아들이었던 양왕(梁王) 유회(劉恢)를 조왕(趙王)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자리(梁王)를 여산(呂産)에게 주었다. 그리고 또, 여산(呂産)의 딸을 유회(劉恢)에게 시집보냈다. 하지만 여산(呂産)은 양왕(梁王)이 되고나서도 봉국(封國)으로 가지 않고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당시의 황제였던 소제홍(少帝弘)의 스승을 맡았다. 그리고 그 후에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제왕(齊王)이었던 유양(劉養)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여산(呂産)은 관영(灌嬰)에게 그것을 진압하라고 시켰는데, 그러나 관영(灌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진평(陳平) 등의 꾐에 빠졌던 여록(呂祿)이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제후들의 의심에서 벗어나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산(呂産)을 급히 궁전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여산(呂産)이 궁전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되었던 조참(曹參)의 아들 조줄(曹窋)이 그 사실을 주발(周勃)에게 전했고, 이어서 여록(呂祿)은 북군(北軍)의 지휘권을 주발(周勃)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또 그때, 여산(呂産)은 궁까지 달려왔지만, 그러나 위위(衛尉-九卿의 하나로, 宮門을 수위하던 병사들을 관할했음)에게 제지당해서 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때, 유장(劉章-朱虚侯)이 약 천 명정도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여산(呂産)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여산(呂産)은 도망을 갔는데, 그러나 결국 낭중령부(郎中令府)의 변소에서 살해되었다. 그러자 여(呂)씨들은 한꺼번에 무너졌으며, 그 후에 유항(劉恒)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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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록(呂祿-?부터 기원전 180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여치(呂雉)의 일족이었으며, 조왕(趙王), 상장군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치(呂雉)의 오빠였던 여석지(呂釋之)의 아들이었고, 그 여석지(呂釋之)는 또 유방(劉邦)과 함께 종군했다. 그리고 그 후에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풍(豊)으로 돌아가서 유태공(劉太公)을 모시라는 명을 받았다. 그 후, 여석지(呂釋之)는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지만, 그러나 그 9년 후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강후(康侯)라는 시(諡)가 내려졌으며, 건성후는 그의 자식 여칙(呂則-呂祿의 형)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 여칙(呂則)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뒤는 여칙(呂則)의 동생이었던 여종(呂種)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여록(呂祿)은 자신의 딸을 제왕(齊王)이었던 유양(劉養)의 동생,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에게 시집보냈다. 그 후, 기원전 187년, 여후(呂后) 원년에 여록(呂祿)은 호릉후(胡陵侯)에 봉해졌고, 기원전 181년에는 여후(呂后)가 진평(陳平) 등의 청원을 받아서 조왕(趙王)이 되었으며, 여석지(呂釋之)는 조소왕(趙昭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그 후, 기원전 180년에 여후(呂后)의 병이 깊어지자 여록(呂祿)은 상장군이 되었고, 북군(北軍)을 장악했다. 그리고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자신의 딸을 소제홍(少帝弘)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후에 유양(劉養)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평(陳平)의 명령을 받았던 자신의 친구(酈奇)로부터 <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封國)으로 돌아가서 대신들과 제후들의 의심을 풀라>는 설득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제(齊)의 낭중령(郎中令-九卿의 하나로, 궁전의 掖門 수위를 담당했다)이었던 가수(賈壽)가 반대를 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여산(呂産)의 내용과 같으며, 여록(呂祿)도 그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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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유영(劉盈=惠帝)은, 전한(前漢)의 제2대 황제였고, 생년은 기원전 210년과 기원전 213년 2가지의 설이 있으며, 몰년(沒年)은 기원전 188년, 재위기간은 기원전 195년부터 기원전 188년까지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의 아들이었으며, 여치(呂雉)의 아들,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앞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되었거나, 자료가 없으므로 생략하며, 그 후에 유방(乳房)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는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과 달리 그는 온화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항상 유방(劉邦)의 노여움을 샀다. 그래서 유방(劉邦)은 척(戚)씨(氏)의 아들이었던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는데, 그러자 여치(呂雉)가 자신의 일족들과 장량(張良) 등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해주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그는 황제에 즉위했지만, 그러나 정치는 여치(呂雉)의 몫이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혜제(惠帝)의 유력(有力)한 정적(政敵)이었던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와 그의 생모 척(戚)씨 등을 살해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치(呂雉)의 잔학했던 만행에 충격을 받았던 혜제(惠帝)는 그때부터 정치를 방기(放棄)하기 시작했고, 주색(酒色)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23세(또는 26세라는 설도 있음)에 사망했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온화하고 나약한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많은 중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劉邦)이 자주 친정(親征)을 나갔을 때도 그는 그 자리를 잘 지켜냈던 면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여치(呂雉)가 유여의(劉如意)를 죽이려고 기도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 유여의(劉如意)와 함께 침식(寢食)을 하면서 유여의(劉如意)를 지켜내려고 노력했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그에 의해서 상석(上席)을 차지했던 서장자(庶長子) 유비(劉肥)에게 여치(呂雉)가 독배(毒杯)를 내렸을 때도 그는 그 잔을 자신이 마시겠다고 했던 등(그러자 呂雉가 당황해서 그 잔을 엎질렀고, 그래서 劉肥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약 또는 좋은 의미의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사기(史記)는 기록했다. 그리고 또 한서(漢書-恵帝紀)에서는 시황제(始皇帝) 시대부터 계속해서 내려왔던 분서(焚書)를 중단시켰던 것은 유방(劉邦)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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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戚)씨(氏) 또는 척부인(戚夫人-?부터 기원전 194년)은, 진(秦)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로, 유방(劉邦)의 측실이었으며, 유여의(劉如意)의 생모였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의(懿)였다고 하며, 상체를 뒤로 크게 젖히는 초무(楚舞-초나라의 춤)를 잘 추었고, 유방(劉邦)이 원정 중이었을 때는 유방(劉邦)과 함께 장기(將棋-將棊)도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기원전 208년경 초한전쟁 중에 유방(劉邦)을 만났고, 그 후에 총애를 받아서 유여의(劉如意)를 생산했다. 그러자 그 후에 유여의(劉如意)는 대왕(代王), 이어서 조왕(趙王)에 봉해졌고, 황태자가 유력시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또 그녀가 유방(劉邦) 친정(親征) 시에 자주 그런 뜻을 유방(劉邦)에게 간청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마음이 흔들렸고, 유영(劉盈)과 달리 활발한 성격이었던 유여의(劉如意)를 주목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신들에 의해서 좌절되었고, 거기다 장량(張良)이 유영(劉盈)에게 조언을 해서, 전에 유방(劉邦)도 초빙에 실패했던 당시의 유명했던 학자들이 스스로 찾아왔던 것이 결정적이 되어서 유방(劉邦)은 그 뜻을 접게 되었으며, 그러자 유여의(劉如意)는 조왕(趙王)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은 결국 여치(呂雉)를 화나게 했다. 그래서 기원전 195년에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는 그 보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선, 여치(呂雉)는 그 척(戚) 씨를 잡아와서 영항<永巷-죄지은 여관(女官-궁녀 등)들을 가두었던 감옥>에 감금했고, 매일 콩을 찢는 벌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영항가(永巷歌)>였다고 한서(漢書)는 기록했다. 아무튼, 그 후에 여치(呂雉)는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던 유여의(劉如意)를 독살(毒殺)했고, 그 결과를 척(戚)씨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격노했던 척(戚)씨는 재빨리 격자(格子) 사이로 손을 내밀어서 여치(呂雉)의 팔을 잡았고, 그리고는 깨물어버렸다. 그러자 여치(呂雉)가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 또 간수(看守)가 달려와서 그 척(戚)씨를 떼어냈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척(戚)씨의 팔이 골절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화가 났던 여치(呂雉)는 그녀의 양손을 자르라고 명했는데, 그러자 또 척(戚)씨는 그 상태에서 다리를 들어서 여치(呂雉)의 배를 힘껏 차버렸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그 고통을 못 이겨서 비틀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다리까지 잘라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또 그녀가 여치(呂雉)를 쏘아보았는데, 그러자 또 여치(呂雉)는 그녀의 눈을 뽑아버리라고 했고, 이어서 음약(瘖藥-벙어리로 만드는 약)을 먹여서 목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그러자 나중에 그녀는 청각(聽覺)까지도 잃게 되었다. 그 후, 척(戚)씨는 변소에 넣어졌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소개되었으므로 생략하며, 그러자 또 그것을 직접 목격했던 혜제(惠帝)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그 후로 정무(政務)를 방기하게 되었고, 요절(夭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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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의(劉如意-?부터 기원전 195년)는,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이었고, 유방(劉邦)의 서자(庶子-第三子)였다. 그리고 생모는 척(戚)부인이었으며, 시호(諡號)는 은왕(隱王), 생년(生年)에 관해서는 기원전 207년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모 척(戚)씨는 유방(劉邦)이 패공(沛公) 시절이었을 때, 항량(項梁) 아래에서 종군(從軍)을 하다가 정도(定陶)란 곳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는 한눈에 빠졌다고 하며, 그 결과 유여의(劉如意)가 태어났다. 그 후, 기원전 198년에 그는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며, 그 후에 조왕(趙王)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여의(劉如意)의 암살을 두려워했던 유방(劉邦)이, 과거 자신을 꾸짖었던 적이 있었던 주창<周昌-유방(劉邦)에게 충성을 다했다가, 나중에 항우(項羽)에게 살해되었던 주가(周苛)의 종형제(從兄弟)>을 신임해서 그를 조(趙)의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그 후, 유방(劉邦)이 사망하자 여치(呂雉)는 그를 죽이려고 몇 번이나 기도했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주창(周昌)이 나서서 그 위기를 모면시켰는데, 그러나 기원전 195년 겨울에 여치(呂雉)가 다시 그를 장안(長安)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또 그때, 혜제(惠帝)는 여치(呂雉)의 속셈을 알고는 그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 혜제(惠帝)가 마침 사냥을 나갔던 날, 여치(呂雉)는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했다. 그러자 혜제(惠帝)는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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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周苛-?부터 기원전 204년)는, 전한(前漢) 초기의 부장(部將)이었고, 패(沛) 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에 자신의 종제(從弟)였던 주창(周昌)과 함께 진(秦)의 사수(泗水)군(郡)에서 졸사(卒史)를 하고 있었지만, 유방(劉邦)이 거병하자 사수(泗水)군수(郡守) 감(監)을 격파하고 유방(劉邦) 밑으로 들어갔으며, 주가(周苛)는 식객(食客)이 되었다. 그 후,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그는 최초의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으며, 기원전 204년 여름에 유방(劉邦)이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에게 포위당하자, 유방(劉邦)은 기신(紀信)의 계책으로 탈출에 성공했고, 그때 주가(周苛)는 위왕(魏王) 표(豹)와 한왕(韓王) 신(信) 등과 함께 형양(滎陽)을 수비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에 항우(項羽)가 기신(紀信)을 태워죽이고 압박해서 들어오자 주가(周苛)는 위왕(魏王) 표(豹)가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주장하고는, 나머지 사람들과 모의해서 그 표(豹)를 죽였는데, 그때가 가을 8월이었다.(史記의 秦楚之際月表에 의함) 하지만 그 형양(滎陽)은 1개월 정도밖에는 버티지를 못했고, 그러자 주가(周苛)등은 포로로 잡혔다. 그러자 항우(項羽)가 그에게 <자기 밑에 들어오면 상장군에 임명하고, 봉읍(封邑) 3만 호(戶)를 내리겠다!>라고 회유했지만, 그러자 또 주가(周苛)는 오히려 항우(項羽)에게 <당신이 하루빨리 한(漢)에 항복하지 않으면, 그때는 당신이 포로가 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은 유방(劉邦)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라고 매도(罵倒)했기 때문에, 항우(項羽)는 그를 삶아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그 후, 유방(劉邦)은 주창(周昌)을 그의 후임으로 삼았고, 천하통일 후에는 그 공적을 인정해서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景侯)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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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창(周昌-?부터 기원전 191년)은, 주가(周苛)의 종제(從弟)였고, 그 앞의 내용은 주가(周苛)와 같다. 그리고 그 후에 주가(周苛)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을 때, 그는 중위(中尉)가 되었고, 그 후였던 기원전 204년에 주가(周苛)가 항우(項羽)에게 살해당하자 그는 주가(周苛)의 후임이 되어서 항시 유방(劉邦)을 따라다니면서 항우(項羽)와 싸웠다. 그리고 그 공으로 기원전 201년에는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과 함께 열후(列侯)에 봉해졌으며, 분음후(汾陰侯)가 되었다. 그는 또 직언(直言)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품을 가졌었고, 그래서 또 소하(蕭何)는 물론이었고, 조참(曹參) 등도 그를 존경했다. 그리고 또 한 예로, 일찍이 유방(劉邦)이 연회(宴會)를 열었을 때, 그가 상주(上奏)할 일이 있어 찾아갔는데, 그런데 그때, 유방(劉邦)이 척(戚)씨를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보고 그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따라가서 그를 붙잡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는 나를 어떤 주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걸(桀-夏 최후의 帝)이나, 주(紂-殷 30대 최후의 帝) 같은 주군(主君)이십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웃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그를 경계하게 되었다고 한다(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함). 그리고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도 그는 강력하게 말렸다는데, 그런데 그는 원래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는 너무 화가 많이 나서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지만, 어쨌든 그때 그는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를 했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웃으면서 그의 뜻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여치(呂雉)는 그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감사해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유방(劉邦)은 자신이 죽고난 후에 유여의(劉如意)가 어찌될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던 하루, 어사(御史)였던 조요(趙堯)가 다음과 같이 유방(劉邦)에게 간언했다. <여후(呂后)와 대신(大臣)들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조왕(趙王)의 승상(丞相)으로 삼으십시오!>

 참고: 어사(御史)는 진(秦)과 전한(前漢) 때의 관직명이었으며, 부(副)재상(宰相)이었던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소속되었고, 정원은 45명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5명은 시어사(侍御史)로 불리면서 궁전 안에서 근무했으며, 두 사람의 승(丞) 중, 한사람이었던 어사중승(御史中丞)의 통솔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30명은 어사대부(御史大夫)의 관청에서 근무했으며, 녹봉은 600석(石)이었고, 백관(百官)의 일을 관리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주창(周昌)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는데, 그러자 주창(周昌)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항의했다. <저는 처음부터 폐하(陛下)만 모셔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데, 그런데도 어찌하여 다른 사람들은 다 놔두고, 하필이면 저를 그곳으로 보내서 버리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나 역시도 그것이 좌천(左遷)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그러나 조왕(趙王)을 생각하면 그 적임자가 당신밖에는 없으니, 힘들겠지만 나의 인사(人事)를 따라주게!> 그러자 그는 그것을 승낙했고, 자신의 후임으로 조요(趙堯)를 추천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는 유여의(劉如意)를 죽이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주창(周昌)은 유여의(劉如意)에게 칭병(稱病)하고 여치(呂雉)의 말을 따르지 말라고 간언했다. 그러자 또 여후(呂后)는 주창(周昌)을 먼저 불러올렸다. 그런 다음에 유여의(劉如意)를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유여의(劉如意)를 독살했고, 그러자 주창(周昌)은 그 후로 칭병(稱病)하면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기원전 191년에 그는 사망했고, 그러자 그에게 도후(悼侯)라는 시(諡)가 내려졌으며, 그 뒤(列侯)는 그의 아들 애후(哀侯)가 이었다. 하지만 분음후(汾陰侯)는 그 아들() 의(意) 대(代)에 죄가 있었기 때문에 몰수되었다.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은 그를 <나무와 돌 같이 실직(實直-정직하고 성실함)했던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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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시무(柴武-?부터 기원전 163년)는, 전한(前漢) 때의 인물이었고, 유방(劉邦)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군이었다. 성(姓) 시(柴)와 진(陳) 두 성(姓)이 전해져오고 있으며, 그래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서는 시무(柴武)와 진무(陳武) 두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그는 진(秦) 말,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설(薛)이란 곳에서 병졸 2500명을 거느리고 장군이 되었다. 그 후, 나름대로 활약을 하다가 기원전 205년에 한(漢)의 지휘 하로 들어갔고, 제(齊)와 싸워서 공적을 올렸다. 그 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는 주발(周勃)과 함께 유방(劉邦)의 후방을 지켰으며, 유방(劉邦)이 황제가 된 후였던 기원전 201년에는 열후(列侯)에 봉해져서 극포후(棘浦侯)가 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왕(韓王) 신(信)이 흉노로 도망을 갔다가, 흉노 군을 이끌고 한(漢)으로 침범해왔을 때, 유방(乳房)은 시무(柴武)에게 신(信)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시무(柴武)는 신(信)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 한(漢)에 귀순할 것을 독려했지만, 그러나 신(信)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싸우게 되었고, 그 결과 시무(柴武)는 흉노 군을 격파하고 신(信)을 처형했다. 그 다음 여후(呂后)8년이었던 기원전 180년, 드디어 여후(呂后)가 사망하고 쿠데타가 일어나서 여(呂)씨(氏)는 몰살되었다. 그러자 문제(文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때, 시무(柴武)는 대장군의 자격으로 문제(文帝)를 맞이했다. 문제(文帝) 즉위 직후, 그는 그때까지도 한(漢)을 따르지 않고 있었던 남월(南越)과 조선(朝鮮)을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문제(文帝)는 그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고, 이어서 기원전 177년, 제북왕(濟北王)이었던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文帝)는 그에게 토벌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대장군의 자격으로 출진해서 반란군을 격파했으며, 그러자 유흥거(劉興居)는 포로로 잡혔던 후에 자살했다. 그 후, 기원전 174년, 시무(柴武)의 아들이었던 시기(柴奇)가 유장(劉長)의 반란계획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서 주살(誅殺)당했다. 그 때문에 기원전 163년에 시무(柴武)가 사망했어도 극포후(棘浦侯)는 상속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 후에 단절되었다. 하지만 시무(柴武)에게는 강후(剛侯)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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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여(藺相如-생몰불상)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조(趙) 혜문왕(惠文王)의 신하였고, <완벽(完璧)>과 <문경(刎頸)의 교(交)> 고사(故事)를 남겼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를 평하기를 <문무지용(文武知勇)의 장(將)이었다>라고 상찬(賞讚)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 열전(列傳)>에 의하면, 처음에 그는 혜문왕(惠文王)의 환관(宦官)이었던 무현(繆賢-정확한 이름을 찾지 못해서 일단 무현으로 표현함. 그러나 목현, 료현, 규현 등, 다양하게 표현한 곳이 많으므로, 참고바람)이란 자의 객인(客人)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현(繆賢)은 생몰불명의 사람으로, 전국시대 조(趙)나라 사람이었고, 기원전 280년경에는 환자령(宦者令-內侍令)이라는 환관(宦官)들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보물이었던 <화씨(和氏)의 벽(璧)=和氏之璧으로, 완벽귀조(完璧歸趙-중국에서 부르는 말) 고사(故事)의 연유가 되었던 것이며,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다는 희귀한 구슬을 말함>을 조(趙)의 혜문왕(惠文王)이 손에 넣었을 때, 진(秦)의 소왕(昭襄王)이 그 말을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진(秦)의 15성(城)과 그것을 바꾸고 싶다...> 그러자 조왕(趙王)은 그에 대해서 군신(群臣)들과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런데 그 의견에서 <만약에 그 벽(璧)을 진(秦)에 주게 되면 진(秦)은 그 벽(璧)만 취하고 성(城)은 주지 않을 것이므로, 조(趙)는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의견과 <하지만 그 벽(璧)을 진(秦)에 주지 않으면, 진(秦)은 그것을 구실로 해서 조(趙)를 공격해올 것이 자명하다>라는 의견 등으로 해서 그 의논은 쉽게 결정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다 또 그 답을 진(秦)에 전해줄 사자(使者)조차도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무현(繆賢)이 나서서 인상여(藺相如)를 그 사자(使者)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했다. 그러자 조왕(趙王)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무현(繆賢)이 이렇게 답을 했다. <제가 일찍이 죄를 지었을 때, 연(燕)으로 도망을 가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의 객인(客人)인 인상여(藺相如)가 그것을 반대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왜 연(燕)으로 가려는 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 내가 왕을 모시고 국경으로 가서 연왕(燕王)을 만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연왕(燕王)이 나의 손을 잡고는 나와 교제하기를 원한다고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연(燕)으로 도망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
그러니까, 현재 조(趙)는 강국(强國)이며, 연(燕)은 약소국입니다. 그리고 그때, 연왕(燕王)이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은 당신이 조왕(趙王)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그 연(燕)으로 도망을 간다면 연왕(燕王)은 오히려 당신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고, 그것은 또, 그 일로 해서 연(燕)이 조(趙)로부터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된다면 또, 당신은 오히려 그곳에서 체포되어서 조(趙)로 다시 돌려보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연(燕)으로 도망가는 대신 자수를 하시고, 그리고는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받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말을 따랐고, 그러자 또 그 결과로 왕께서는 저의 죄를 용서하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가 용기와 함께 지모(智謀)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 그 자를 사자(使者)로 추천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인상여(藺相如)를 불러서 이렇게 물었다. <진(秦)의 왕이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해왔는데, 내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겠는가?!>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대답했다. <진(秦)은 현재 조(趙)보다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진(秦)이 그 벽(璧)만 취하고 성(城)을 우리에게 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일단 조(趙)에서 그것을 거절하게 되면, 그것은 진(秦)에 구실을 주는 것이 되고(趙에 罪가 있다는 뜻), 하지만 또 진(秦)이 그 벽(璧)을 취하고서도 성(城)을 넘기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秦)에 무리(無理)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때는 오히려 秦이 道理가 없게 된다는 뜻). 그러므로 일단 그 벽(璧)을 진(秦)에 넘겨주고, 진(秦)에 그 무리(無理)의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혜문왕(惠文王)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사자(使者)로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만약에 적당한 사람이 없다면 저라도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진(秦)이 그 약속을 지킨다면 저는 그 벽(璧)을 진(秦)에 넘겨주고 올 것이고, 그러나 진(秦)이 그 약속을 어긴다면, 저는 그 벽(璧)을 조(趙)로 온전히(完璧) 다시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를 사자(使者)로 결정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을 가지고 서향(西向)해서 진(秦)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진(秦)에 도착했을 때, 진왕(秦王)은 장대<章臺-옛날, 중국의 장안(長安) 서남쪽 한편에 있었다던 누대(樓臺). 그러나 여기서는 궁전의 누대(樓臺)를 의미함> 전상(殿上)에서 그를 맞이했고,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을 진왕(秦王)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또 진왕(秦王)은 그것을 한번 살펴보고는 자기 옆에 있던 시녀(侍女)들과 시종(侍從)들에게 돌려보게 했다. 그러자 그것을 돌려봤던 시녀와 시종들이 만세(萬歲)를 부르면서 축하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지켜봤던 인상여(藺相如)는 진왕(秦王)이 그 대가로 성(城)들을 넘겨줄 마음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벽(璧)에는 흠(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것을 왕에게 가리켜 보이겠습니다> 그러자 진왕(秦王)이 시종에게 시켜서 그것을 인상여(藺相如)에게 반환하게 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그것을 받아들고 큰 기둥 뒤로 돌아가서 진왕(秦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벽(璧)은 천하의 보물이기 때문에 진왕(秦王)은 5일간 재계(齋戒)한 후에 취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고 진왕(秦王)이 이것을 강제로 취하려든다면, 저는 이 벽(璧)과 함께 저의 머리를 기둥에 부딪혀서 깨어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진왕(秦王)은 그것을 강제로 취할 수는 없겠다고 판단해서 인상여(藺相如)의 뜻대로 5일간 재계(齋戒)할 것을 약속했지만, 그러나 인상여(藺相如)는 그 진왕(秦王)이 5일간 재계(齋戒)를 한 후에도 성(城)을 돌려줄 마음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이 데려왔던 종자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조(趙)로 다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신의 용기와 지략(智略)으로 그 벽(璧)을 완전하게(完璧) 조(趙)로 다시 반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현(繆賢)에 대해서 더 알려진 것은 없으며, 인상여(藺相如)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싶으신 분은, 史記列傳 二巻 廉頗・藺相如 列伝 第二十一을 참조바랍니다.

 아무튼, <화씨(和氏)의 벽(璧)>에 대한 고사(故事)와 <완벽(完璧)>에 대해서는 무현(繆賢)에서 소개한 것을 참조바라며, 하지만 또 그것과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어쨌든 또 다른 내용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인상여(藺相如)는 그렇게 해서 진(秦)의 수도였던 함양(咸陽)으로 들어가서 진(秦)의 소양왕(昭襄王)과 대면했다. 그리고는 그 벽(璧)을 헌상하자 소양왕(昭襄王)은 그것을 살펴보고는 자신의 총희(寵姬)들과 군신(群臣)들에게 돌려가면서 보게 했다. 하지만 그 태도로 보아서 성(城)을 조(趙)에 넘길 마음이 없다고 판단했던 인상여(藺相如)는 그 벽(璧)에는 작은 상처가 하나 있는데, 그래서 자신이 그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하고는 벽(璧)을 다시 돌려받았다. 그런 다음에는 그 옆에 있던 기둥으로 달려가서 그 기둥에 기대고는 관(冠)이 추켜올려지고, 몹시 노(怒)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노발충관(怒髮衝冠)의 어원(語源)이 되었던 상황으로, 노하여 일어선 머리카락이 관을 추켜올린다는 뜻이며, 몹시 화가 난 모양을 이르는 말> <조(趙)에서는 진(秦)을 의심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그러자 조왕(趙王)은 진왕(秦王)을 믿고 저를 이곳으로 보냈소! 그리고 진왕(秦王)이 5일간 몸을 정갈히 한 후에 이것을 전하라고 했소! 그런데도 진왕(秦王)은 너무나도 무례하게 이 벽(璧)을 취급했소! 그러므로 나는 이 벽(璧)과 함께 내 머리를 이 기둥에 찧어서 깨어버릴 것이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당황해서 지도를 가져오라고 신하들에게 시켰다. 그리고는 그 15개 성(城)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인상여(藺相如)를 달래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 소양왕(昭襄王)이 여전히 성(城)을 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인상여(藺相如)는 일단 소양왕(昭襄王)이 그 벽(璧)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 또는 예의로 5일간 재계(齋戒)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이 그에 따랐는데, 그러자 그는 그 사이에 자신이 데려왔던 종자(從者)에게 그것을 들려서 비밀리에 조(趙)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고, 그 자신은 그곳에 남아서 그 종자가 조(趙)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 5일 후, 재계(齋戒)를 마쳤던 소양왕(昭襄王)이 그에게 벽(璧)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이미 그 벽(璧)은 조(趙)로 다시 돌려 보내졌다고 말을 하고는, 그 이유는 진왕(秦王)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그 15성(城)을 지금이라도 넘겨준다면 조(趙)는 그 벽(璧)을 다시 돌려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또 무례를 범한 자신에게는 사죄(死罪)를 내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군신(群臣)들은 인상여(藺相如)를 죽일 것을 진언했는데, 하지만 그의 강담(剛膽)에 감탄했던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죽인들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차라리 조(趙)의 원망만 살뿐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는 또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결정을 했으며, 인상여(藺相如)는 후한 대접을 받고 무사 귀국했다. 그리하여 그의 지혜와 용기는 세상이 칭송하게 되었고, 특히 그 막강 진(秦)을 상대하면서도 한발도 물러섬이 없었던 그의 태도와 함께, 약속했던 대로 그는 그 벽(璧)을 완벽(完璧)하게 지켜냈으며, 그에 더해서 조(趙)의 체면까지도 세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79년에, 진(秦)으로부터 혜문왕(惠文王)에게 민지(黽池-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양국의 우호를 축하하자는 뜻의 초대가 왔다. 그러나 그때, 그 민지(黽池)는 당시 진(秦)의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만일의 경우에 왕을 구원하기 힘들다는 의미로, 왕이 직접 그곳으로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것은 또 그 화씨(和氏)의 벽(璧) 사건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처럼, 진(秦)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후에도 진(秦)은 자주 조(趙)를 침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조(趙)에서는 그에 대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때, 염파(廉頗) 등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또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왕이 그 자리에 나가지 않는다면 진(秦)은 조(趙)가 약하고 비굴하다고 생각해서 더욱 거만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또 제후들조차도 조(趙)를 깔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왕이 인상여(藺相如)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도 염파(廉頗) 등의 말에 동조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시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만약에 내가 30일 안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태자를 왕위에 올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신하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 자리에 나갈 것을 결심했고, 그렇게 해서 일행은 민지(黽池)로 갔다. 그리고 이윽고 축연이 열리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이렇게 말을 했다. <조왕(趙王)께서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양국의 우호를 축하하기 위해서 비(琵-琵琶)를 한번 연주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그 뜻을 흔쾌히 받아들여서 비(琵) 한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소양왕(昭襄王)이 기록관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라고 시켰다. <진왕(秦王)이 조왕(趙王)에게 비(琵)를 연주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들어도 진(秦)이 조(趙)를 신하 취급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진(秦)에서는 연석(宴席)에서 부(缻=缶=우리나라 타악기의 하나로, 진흙으로 구워서 화로같이 만든 것. 아홉 조각으로 쪼개진 대나무 채로 변죽을 쳐서 소리를 냄. 그러나 秦의 것도 같은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缻)를 소양왕(昭襄王)에게 주면서 이렇게 또 말을 했다. <그러므로 왕께서도 양국의 우호를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이 부(缻)를 한번 두드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그때, 진(秦)에서는 분명히 그런 풍습이 있었지만, 그러나 또 중원(中原) 제국(諸國)에서는 그런 것을 천(賤)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인상여(藺相如)의 그런 행위는 진왕(秦王)에게 무례를 범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소양왕(昭襄王)은 몹시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인상여(藺相如)는 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저와 왕의 거리는 대충 다섯 보(步)정도! 그러므로 저의 목을 베신다면 그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秦王이 덮어쓴다는 뜻으로, 秦王의 몸이 더럽혀진다는 의미)> 그리고는 또 넌지시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저는 여기서 왕과 함께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협박을 했다. 그러자 그 기백(氣魄)에 압도당했던 진왕(秦王)은 망설임 없이 부(缻)를 한번 두드렸다.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인상여(藺相如)는 재빨리 기록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국사(國史)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오! 조왕(趙王), 진왕(秦王)에게 부(缻)를 두드리게 했다!> 그리고는 또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왕 덕분에 이 축연은 더욱 의미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그 후에 진(秦) 신하 한명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 왕(秦王)의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의미로 귀국(貴國-趙)의 15성(城)을 헌상함이 어떻겠습니까?>

 참고: 위, 사신(使臣)의 진의(眞意)는, 진(秦)은 조(趙)의 15성(城) 정도는 쉽게 빼앗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전에 조(趙)가 미리 스스로 헌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의미와 함께, 속국(屬國)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하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15성(城)을 강조했던 것은 앞의 그 벽(璧) 건에 대한 앙금을 나타냈던 것이었다.

 그러자 또 그때도 인상여(藺相如)가 나서서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귀국(貴國)에서야말로 우리 왕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도 함양(咸陽)을 헌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신(使臣)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때마다 나서서 자신의 기백과 기치로 문제를 해결했던 인상여(藺相如)는 그 후에 조왕(趙王)과 함께 무사히 귀국했다. 그래서 결국 진왕(秦王)은 그때 조(趙)를 굴복시키지 못했으며, 인상여(藺相如) 덕분에 조(趙)는 진(秦)에 대해서 체면을 세울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인상여(藺相如)는 그 공적으로 해서 상경(上卿-大臣 급)이 되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그런 그의 급진적인 출세를 시기했던 사람은 또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바로 당시에 역전(歷戰)의 용장(勇將)으로 불리고 있던 염파(廉頗)였고, 그래서 또 당시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인상여(藺相如)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한번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라는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또 그는 당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군인으로, 그래서 또 변설(辯舌)만으로 자기보다 위의 자리에 올랐던 인상여(藺相如)가 눈엣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랬는데,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염파(廉頗)와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칭병(稱病)하고 집 안에만 들어앉아있었다든가, 궁(宮)에 들어갈 때도 가능하면 염파(廉頗)가 없던 날을 골라서 입궁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인상여(藺相如)는 거리에서 우연히 그 염파(廉頗)를 목격했고, 그러자 인상여(藺相如)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숨겨서 그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러자 그날 밤에 그가 부리고 있던 종자(從者)들이 인상여(藺相如)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저희들이 일가친척들을 떠나서 당신(上卿)을 모시고 있는 이유는 당신의 고의(高義-두터운 인정과 의리)를 흠모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주신 당신의 모습은 필부(匹夫)에도 미치지 못할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하여, 우리들은 더 이상 당신을 모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은 진왕(秦王)과 염파(廉頗) 중에서 누가 더 무서운가?> 그러자 종자들이 이렇게 답을 했다. <물론, 진왕(秦王)이지요!>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진왕(秦王)을 꾸짖었고 그 신하들을 나무랐다. 그런데도 내가 하물며 염파(廉頗)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리고 또 내가 알기로 현재 진(秦)이 조(趙)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나와 그 염파(廉頗) 장군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와 그 염파(廉頗) 장군이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양호상토(兩虎相討)의 형국이 되어서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다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또 진(秦)이 바라는 것으로, 그래서 나는 개인의 싸움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종자들이 모두 그의 깊은 뜻을 알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그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러자 또 그것은 자연스럽게 염파(廉頗)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했던 염파(廉頗)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인상여(藺相如)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윗도리를 벗고 앉아서 스스로 가시나무로 자신의 등을 때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비천한 자가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당신에게 주었던 모욕에 비하면, 이런 나의 체벌은 오히려 부족한 것입니다!>

 
참고: 위의 고사(故事)로, 그렇게 본심(本心)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속죄(贖罪)하는 것과, 스스로 찾아가서 벌을 받는다는 의미의 육단부형<肉袒負荊-윗옷 한쪽을 벗고, 등에 형장(刑杖-예전에 죄인을 신문할 때에 쓰던 몽둥이)을 지고 간다는 뜻으로, 형장으로 맞아 사죄하겠다는 뜻을 나타냄을 이르는 말> 또는 육담부형(肉担負荊) 또는 부형(負荊)의 어원(語源)이 되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께서 계시기 때문에 바로 이 조(趙)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또 그에 감복했던 염파(廉頗)가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목숨을 버린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인상여(藺相如)가 이렇게 맹세했다. <저 역시, 장군을 위해서라면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그 두 사람은 서로의 경(頸-)을 자른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기로 맹세를 했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이 <문경(刎頸)의 교(交)> 또는 <문경(刎頸)의 우(友)>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진(秦)은 그 두 사람 때문에 조(趙)를 공격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세월이 지나자 인상여(藺相如)는 병이 들었고, 염파(廉頗)는 늙었다. 그리고 왕도 혜문왕(惠文王)에서 효성왕(孝成王)으로 바뀌었는데, 그러자 진(秦)에서는 왕흘(王齕)이란 장군에게 조(趙)를 공격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조(趙)에서는 염파(廉頗)를 대장군으로 해서 진군(秦軍)을 맞았고, 그것이 바로 <장평(長平)의 싸움>이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26 참조바람) 그리고 그 후, 인상여(藺相如)는 병사했고, 염파(廉頗)는 위(魏)와 초(楚)로 망명했다.

 <염파(廉頗) 계속...>

 그 장평(長平)의 싸움 후, 조(趙)의 쇠퇴를 지켜봤던 연(燕)의 왕 희(喜)가 조(趙)를 침공했다. 그러자 염파(廉頗)는 그 노구(老軀)를 이끌고 나가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백향현(柏鄕縣) 북부에서 대승했다. 그리고는 그 기세를 몰아서 연(燕)으로 쳐들어갔으며, 이어서 수도 계(薊)를 포위했다. 그러자 연(燕)은 다섯 개의 성(城)을 조(趙)에 넘겨주고 화해했다, 그러자 진(秦)도 함부로 조(趙)를 침공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또 효성왕(孝成王)은 그 공적을 칭송해서 그에게 위문(尉文)이란 곳을 주면서 신평군(信平君)에 봉했다. 그리고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平原君)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공석(公席)을 그에게 주면서 상국(相國) 대행에 임명했다. 기원전 245년, 염파(廉頗)는 위(魏)를 침공해서 번양(繁陽-지금의 河北省 内黄県)의 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에 효성왕(孝成王)이 사거했고, 그러자 그 자리를 도양왕(悼襄王)이 이었는데, 그러나 그 도양왕(悼襄王)은 염파(廉頗)를 장군 직에서 파면했다.(悼襄王은 태자 때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염파(廉頗)는 자신의 후임이 되었던 악승(樂乘)이란 자를 공격해서 격파했으며, 그 때문에 조(趙)를 떠나서 위(魏)의 대량(大梁-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西北)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그 악승(樂乘)도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그 후, 위(魏)에서는 염파(廉頗)를 신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활약은 없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진(秦)에서는 정(政-나중의 始皇帝)이 즉위해서 강국이 되어 있었고, 그러자 또 조(趙)도 그 표적이 되었다. 그러자 또 조(趙)에서는 다급했던 나머지 염파(廉頗)에게 사자를 보내서 다시 조(趙)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또 평소에 조(趙)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염파(廉頗)는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나 또 그때, 옛날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간신(奸臣) 곽개(郭開)란 자가 모략을 써서 그 사자(使者)를 매수했다. 그러자 그 사자(使者)는 도양왕(悼襄王)이 염파(廉頗)에 대해서 묻자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삼도유실(三度遺失)!>

 참고: 하지만 당시, 염파(廉頗)는 그 노령(老齡)에도 <한번 식사에 두미(斗米-쌀 한 말)와 육(肉) 10근(斤)을 먹고,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랐다>라고 했을 만큼 혈기왕성한 모습을 그 사자(使者)에게 보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 사자(使者)는 곽개(郭開)란 자에게 매수되어서 도양왕(悼襄王)에게 염파(廉頗)가 삼도유실(三度遺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고, 그 뜻은 또 <사자(使者)와 회담 중에 세 번이나 소변을 보기 위해서 화장실로 갔다> 또는 <사자(使者)와 회담 중에 세 번이나 실금(失禁)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도양왕(悼襄王)은 크게 실망해서 그를 포기했다. 그러자 또 염파(廉頗)는 초(楚)로 다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장군에 임명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별 공도 세우지 못하고 수춘(壽春)에서 병몰(病沒)했다. 그러자 그 후, 사마천(司馬遷)은 그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評)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또 소자고사(蘇子古史)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국가(趙)의 주석(柱石)>이라고 평(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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