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54년/ 오초칠국(呉楚七國)의 난(亂) 발발(勃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배경(背景)>

 한(漢)의 전대(前代)였던 <진(秦)>은 지방 전부를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고 직할지배하는 체제인 군현제(郡縣制)를 채용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한(漢)은 진(秦)의 가혹한 법치주의의 반성과 함께, 긴 시간동안 전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던 점을 고려해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지방과 제후왕(諸侯王)을 봉하는 반독립국을 만들어서 수습하게 하는 제도를 병립했다.(郡國制) 하지만 당시 진(秦) 이외의 <구(舊) 6국(國)> 지역의 사민(士民)들 중에서는 한(漢)의 황제를 진왕(秦王)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소속 제후왕(諸侯王)을 왕(王)으로 해서 과거 6국(國=戰國七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부활을 꿈꾸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그러자 그 후, 한(漢)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시대의 선정(善政)으로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그에 자신을 얻었던 한(漢) 조정(朝廷)은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의 권력을 견제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당시, 각지의 제후왕(諸侯王)들은 스스로 그 영지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해서, 중앙(中央)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는 일이 많아져갔던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오(吳)는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과 동화(銅貨=銅錢) 주조로 벌어들였던 막대한 재력(財力)의 배경과 그리고 또 과거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적자(嫡子)였던 유현(劉賢)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景帝)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해당했던 것에 대한 원한 등으로 해서 당시, 제후왕(諸侯王)의 의무였던 장안(長安)에의 참근(參勤=出仕하여 왕을 뵙는 일)도 취소하는 등, 독립 색을 아주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경제(景帝)는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착(晁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차례로 제후들의 영지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 인물소개

 <경제(景帝)>

 전한(前漢)의 제6대 황제로, 5代 文帝의 子. 부제(父帝)와 같이 한(漢)의 기반을 공고히 했고, 선정(善政)을 베풀어서 그 치대(治世)는 <문경(文景)의 치(治)>라고 상찬(賞賛)되었다. 사기(史記)와 외척세가(外戚世家-不明)에 의하면, 경제(景帝)는 문제(文帝)의 제5자로 태어났고, 위로 4명의 형이 요절했으며, 이어서 생모 두씨(竇氏)가 정실로 승격됨에 따라서 문제(文帝)의 적자(嫡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황태자 시대에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태자 유현(劉賢)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이다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오왕(吳王)과의 사이가 나빠졌다. 하지만 그 일은 문제(文帝)의 정치적인 배려로 수습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 일은 또 나중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157년에 황제에 즉위했고, 정치는 기본적으로 문제(文帝)의 정책을 계승했는데, 그것은 또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검약(儉約)의 노력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을 내새웠고, 감세(減稅)를 실시해서 사회의 안정을 실현했다.(당시의 기록에는 인구 9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 시대를 문제(文帝)의 시대와 합쳐서 <文景의 治>라고 칭해졌다.


 ☆ 문경의 치(기원전 180년부터 기원전 141년)

 한초(漢初)에는 진말(秦末) 이래 전란(戰亂)으로 사회경제가 쇠퇴했고, 그래서 조정은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기 위해서 황로치술(黃老治術-黃老思想)을 채용했다. 그리고는 국민 경제력의 휴양(休養=조세를 가볍게 하며 民力을 기르는 일)과 부역(賦役)의 경감(輕減)을 그 목적으로 한 정책을 실행했다. 그리고 문제(文帝)는 농업을 중시해서 몇 차례에 걸쳐서 농상(農桑)진흥을 명했다. 그리고 또 일정한 호수(戶數)에 삼로(三老), 효제(孝悌), 역전(力田)을 선발해서 그들에게 상(賞)을 내리는 것으로 보람을 갖게 하여 농업생산의 향상을 도모했다.

 ○ 漢文帝詔曰: 孝悌, 天下之大順也. 力田, 爲生之本也. 三老, 衆民之師也 라고 하였으니, 차례로 해석하면, 한(漢)의 문제(文帝)가 이르기를, 효제(孝悌)는 천하의 이치에 아주 크게 순응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해석은 효우(孝友) 즉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했던 자를 의미했으며, 역전(力田)은 만물을 살리는 것(生育)이 인간의 근본이란 의미로, 역시 힘써서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당시 그 해 농사를 특별히 잘 지었던 사람이나, 평소 그렇게 이름이 났던 사람을 의미 했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삼로(三老)는 민중의 스승이 되는 사람을 말했던 것으로, 옛날 한(漢)나라 때, 한 고을의 교화(敎化)를 맡아보았던 쉰 살 이상의 노인을 의미했다는 해석과, 또는 노인(老人)을 나이에 따라서 나눈 세 등급으로, 상수(上壽:100살), 중수(中壽:80살), 하수(下壽:60살)로 나눈 것의 총칭(總稱)이 그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제(文帝)의 말을 쫓아서, 앞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됨.

 아무튼, 다음에 또 문제 2년(기원전 179년)과 12년(기원전 169년)에는 전조(田租-논밭에 부과했던 조세)의 반감(半減)을 실시했고, 그 다음 또 문제 13년(기원전 168년)에는 전조(田租)의 전면(全免-전부 면제)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 그와 아울러서 주변의 소수민족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평화정책도 실시했다. 그리고 문제(文帝) 역시도, 그 자신 스스로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그래서 궁실 내의 차기의복(車騎衣服-차량과 기마, 의복 등 궁정 내의 경비나 운영에 들어가는 일반적인 물품들) 또한 최저한의 것으로 했고, 그 중에 의복도 과도하게 긴 것은 금지했으며, 유장(帷帳-휘장과 장막)도 자수(刺繡)를 넣지 않는 등, 철저한 검약을 실시했다. 그리고 또한 제국(諸國)에 대한 헌상(獻上)품도 억제를 명했다. 그러자 그 결과, 귀족관료들의 사치는 행해지지 않았으며, 그 말년에는 민중들의 생활은 날로 향상되었고, 그것으로 전한(前漢) 최성기의 기초를 쌓아올렸음과 동시에 또, 그 다음 시대가 되는 무제(武帝)의 흉노원정 때를 위한 물질적인 기초까지 쌓아올리게 되었다.




 <
유비(劉濞) 기원전 215년부터 기원전 154년>

 그는 전한(前漢) 전기의 황족으로, 패현(沛縣) 출신이었고, 오초칠국의 난 수모자(首謀者)였다. 그리고 그는 유희(劉喜=劉邦의 兄)의 장자(長子)로 태어났으며, 아우에 유광(劉廣=德哀侯)이 있었다. 그는 대왕(代王)에 봉건 되었던 부(父)가 대(代)를 공격했던 흉노(匈奴)로부터 도망을 가서 합양후(郃陽侯)로 격하된 후, 패후(沛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에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유방(劉邦)의 친정(親征) 군에 참가해서 장군으로 종군했다. 그리고는 기병(騎兵)을 인솔하면서 활약했다. 그러자 그 공적으로 그는 당시 전사했던 형왕(荊王) 유가(劉賈)의 후임으로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가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 유방(劉邦)에게 갔을 때의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유방(劉邦)은 이미 그를 왕으로 봉했지만, 그러나 그의 인상에서 모반(謀反)의 느낌을 받고는 그에 불안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예언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50년 후에 東南(帝都 長安에서 봤을 때)의 땅(吳의 영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너나 나나 다 같은 혈통인데, 그러므로 무슨 잘못이 있더라도 반란 같은 것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바보 같은 행동은 하지 말라!>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도 그의 말을 인정했고, 그 역시 다시 오(吳)로 돌아갔지만, 하지만 그 후에 여치(呂雉)와 여 씨(呂氏)의 전횡(專橫)으로 장안(長安)은 피로 얼룩졌다. 그러나 당시, 그는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휘말리는 일 없이 나라 일에만 신경을 썼고, 더불어서 날이 갈수록 나라는 살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오(吳)에서는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동(銅)과 소금으로 인해서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고,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내리던 조세까지도 모두 면제했으며, 오히려 나라 일에 동원되었던 국민들에게는 품삯까지 지불했다는,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가히 별천지 같은 일이 그곳에서는 벌어졌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듣고 몰려왔던 타국(他國)의 사람들까지 받아들여서 전(錢)을 주조시키는 등, 나라는 점점 더 부강하게 되었고, 이윽고는 중앙(中央)에서조차도 손을 쓰지 못할 만큼 되어갔다. 하지만 그 후, 여 씨(呂氏) 일족이 멸해지고, 문제(文帝)가 즉위했다. 그러자 양상은 점점 바뀌어가서 문제(文帝)는 측근들이 진언했던 제후왕(諸侯王)들의 약체화(弱體化)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주로 문제(文帝)와 제위를 다투었던 제(齊) 왕가(王家)를 대상으로 그 정책은 실행되어갔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 장안(長安)으로 부(父) 유비(劉濞) 대신(代理人)으로 왕세자 유현(劉賢)이 참내(參內)를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유현(劉賢)을 위한 연회가 벌어졌는데, 그런데 그 연회의 여흥(餘興-博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일종의 보드게임) 중에 유현(劉賢)과 유계(劉啓-後의 景帝) 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났다. 그러자 유계(劉啓)가 그 박판(博板)에서 유현(劉賢)을 박살(撲殺-때려죽임)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 후, 자식의 억울한 죽음과 그 이후에 행해졌던 한(漢) 왕조 측의 부족한 대응에 불만을 품었던 유비(劉濞)는, 당시 제후들의 의무였던 장안(長安) 입조(入朝)를 취소했다. 그러자 또 그 일은 조정(朝廷) 내에서 문제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 일은 문제(文帝)의 중재(仲裁)로 불문(不問)에 붙여졌다. 그리고 그때, 문제(文帝)는 오히려 유비(劉濞)가 고령이었던 점을 참작해서 참근(參勤)을 면제해 주었고, 지팡이와 사방침(四方枕-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히 기대서 앉을 수 있게 만든 네모난 베개)까지 내리면서 불문(不問)에 붙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안정을 확보했던 오(吳)와 한(漢) 왕조였지만, 그러나 기원전 157년에 문제(文帝)가 죽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것은 또 문제(文帝)의 뒤를 이었던 그 경제(景帝)는 유현(劉賢)을 죽였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으며, 그에 더해서 경제(景帝)는 측근이었던 조착(晁錯)의 적극적인 진언을 받아들여서 제후들의 삭감(削減) 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에 위기감을 느꼈던 유비(劉濞)는 초(楚)와 제(齊)를 끌여 들였고, 그리고는 이윽고 기원전 154년에 <나는 62세에 군사를 일으켰고, 나의 막내는 불과 14세이지만 종군에 동참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62세 이하 14세 이상의 남자들에게는 모두 병역의 의무를 부과한다!>라고 외치고는 20만의 병사들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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