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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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1 항우(項羽)와의 대결

 그러자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진언(進言)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신(韓信)의 예언(豫言)대로 항우(項羽)에 대한 반란이 속발(續發)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것들을 차례로 진압해가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안(案)을 받아들여서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던 잔도(棧道)를 다 태워 없앴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자신은 밖으로 나갈 의사가 전혀 없음을 항우(項羽)에게 보였던 동시에, 문안편지 같은 순종(順從)의 뜻이 담긴 편지 같은 것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반항의 의사가 전혀 없음을 가장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도 그때서야 안심을 하고는 다음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제(齊)의 전영(田榮)으로 출발했다. 그러자 또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유방(劉邦)은 잔도(棧道) 이전에 사용했던 옛길을 통해서 관중(關中)으로 쳐들어갔고, 그리고는 단번에 장한(章邯) 등을 치고는 관중(關中)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 후, 그곳에다 자신의 사직(社稷)을 세웠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는 원정(遠征)을 갔던 제(齊)에서도 변함없이 성을 떨어뜨릴 때마다 그 주민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제(齊)의 사람들은 더욱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는 제(齊) 공략에 발이 묶여버렸고,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유방(劉邦)은 한층 더 동쪽으로 군(軍)을 전진시켰다. 그리고는 그 도중에 만났던 왕(王)들을 공순(恭順-순순히 복종시킴)시키거나 정복해가면서 점점 더 항우(項羽)의 본거지였던 팽성(彭城)으로 향해갔다.

 6-2
대패(大敗)

 그리하여 기원전 205년, 유방(劉邦)은 자신의 군(軍)에 합류했던 제후(諸侯)들과, 그로 인해서 56만이란 대군(大軍)으로 늘어났던 연합군을 거느리고 팽성(彭城)에 입성(入城)했다. 그러자 한군(漢軍)은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밤낮 성내(城內)에서 연회를 열었고, 여자(女子)들과 노닥거렸다. 그런 한편, 그 소식을 들었던 항우(項羽)는 끓어오르던 분노 속에 3만의 정예부대를 차출해서 서둘러 팽성(彭城)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방심하고 있던 한군(漢軍)을 무자비하게 도륙했고, 그래서 또 그때, 항우(項羽) 군에 의해서 죽은 사람은 10만이 넘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 시체들은 강을 다 막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彭城의 싸움) 그러자 유방(劉邦)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며 탈출했는데, 하지만 그때 그의 부인이었던 여치(呂雉)와 부친(父親) 유태공(劉太公)은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또 그 대패(大敗)로 인해서 그때까지 유방(劉邦)의 편이 되어주었던 제후(諸侯)들도 모두 초(楚)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과 유영(劉盈=惠帝) 그리고 노원공주(魯元公主)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하후영(夏候嬰)은 말을 몰고 있었는데, 그런데 중간에 적들에게 곧 따라잡힐 것 같은 위기가 찾아오자 유방(劉邦)은 차(車)의 무게를 줄일 목적으로 유영(劉盈)과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차에서 밀어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그에 놀랐던 하후영(夏候嬰)이 얼른 내려서 그 둘을 구해왔는데, 그러나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유방(劉邦)은 그런 짓을 했고, 그럴 때마다 또 하후영(夏候嬰)은 그 둘을 구해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아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때, 부모였던 유방(劉邦)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 둘을 희생하려 했다는 것은 유교적(儒敎的)인 윤리(倫理)로 볼 때는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 인물소개

 1.
노원공주(魯元公主) ?-기원전 187년

 유방(劉邦)의 장녀(長女). 생모(生母)는 여치(呂雉). 혜제(惠帝)는 남동생. 소설 등에서는 <노원(魯元)>이라고 쓴 곳도 많지만, 그러나 원래는 <노⋅원공주(魯⋅元公主)>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며, 그 이유는 또 <노(魯)를 화장령(化粧領-시집갈 때 받은 영지)으로 받은 황제의 장녀>가 그 원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원공주(元公主)>라는 말은 나중의 <장공주(長公主=황제의 장녀)>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본명(本名)은 알 수 없으며, 장이(張耳)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와의 사이에 장언(張偃) 그리고 혜제(惠帝)의 황후(皇后)였던 장씨(張氏)가 있었다. 그녀는 패현(沛縣)에서 태어나서 유방(劉邦)이 동란(動亂)에 참가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자 그녀의 어머니 여치(呂雉)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 후는 위 본문에서 기술한대로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졌던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마차로 도주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는, 또 미리 기술한대로 하후영(夏候嬰)의 도움으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후,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자 그녀는 조왕(趙王) 장오(張敖)에게 강가(降嫁-신하에게 시집감)했지만, 그러나 그 장오(張敖)가 모반의 혐의를 받고 후작(侯爵)으로 격하되자 그녀에게도 화(禍)가 닥쳐왔고, 그것은 또 흉노(匈奴)와의 평화교섭 용으로 목돌선우(冒頓單于)에게 그녀가 시집보내질 운명에 처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 또한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았지만, 그러나 또 그때 여치(呂雉)가 나서서 그 일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유방(劉邦) 사후(死後)에 여치(呂雉)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모형(異母兄-배다른 오빠)이었던 제왕(齊王) 유비(劉肥)가 바쳤던 영토의 일부였던 성양군(城陽郡)을 헌상(獻上) 받아 제(齊)의 왕태후(王太后)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녀의 죽음에 관해서는 알 수가 없다.

 2.
여치(呂雉) ?-기원전 180년

 유방(劉邦)의 부인. 혜제(惠帝)의 어머니. 자(字)는 아후(娥姁). 시호(諡號)는
고후(高后=高皇后). 유방(劉邦) 사후(死後) 황태후(皇太后)·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었고, 여후(呂后) 또는 여태후(呂太后)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녀는 <중국 3大 악녀(惡女)>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단부(單父=現 山東省 單縣)의 유력자였던 여공(呂公=呂文叔平)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 당시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던 유방(劉邦)에게 시집을 갔고, 슬하(膝下)에 일남일녀(나중의 惠帝와 魯元公主)를 두었다. 그리고 당시 밖으로만 나돌던 유방(劉邦)을 대신해서 시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함께 가업(家業)인 농업에 힘쓰며 열심히 아이들을 길렀다.(그 사이에 그녀의 여동생이었던 呂須는 樊噲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또 그녀는 바로 그때에 지나가던 노인에게서 <천하를 얻을 귀부인의 상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일설에 의하면, 시황제(始皇帝)가 <東南 쪽에 天子의 氣(運)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유방(劉邦)은 시황제(始皇帝)가 순행을 나왔을 때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하지만 또 이 부분에서는, 유방은 그 시황제의 말 때문이 아니라, 부역을 나갔을 때 인부들이 모두 도망을 가버려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던 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방(劉邦)이 어디에 있든 여치(呂雉)는 금방 찾아냈다고 하며, 그러자 또 그것이 너무도 신기했던 유방(劉邦)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늘에 꿈틀거리는 구름(龍雲)이 있기 때문에 금방 찾아낼 수가 있어요!> 그러자 그 말은 금방 소문이 되어서 퍼져나갔고, 그 때문에 유방(劉邦)에게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와 초한전쟁(楚漢戰爭) 개시 직후에는 패현(沛縣)에서 유방(劉邦)의 가족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같았으며, 그러나 초한전쟁(楚漢戰爭)이 격화되고,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졌을 때, 역시 갑자기 등장해서는 그녀와 유태공(劉太公)은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하후영(夏候嬰)과 자식 둘을 데리고 전격(電擊) 탈출을 감행했으며, 그 후에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유방(劉邦)의 승리로 돌아가고,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자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아서 유방(劉邦)이 친정(親征)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가 많았을 만큼 어수선했고, 그런데다 또 궁중 내에서는 벌써부터 다음 후계자를 둘러싸고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자 그러했던 상황에서 그녀는 유방(劉邦)의 부재 시 뒤를 보좌했고, 그 사이에 또 한신(韓信)이 반란을 모의한 것을 적발해서 소하(蕭何)와 함께 처리하는 등, 여장부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단, 그에는 이견이 있으며, 여치가 한신을 모함해서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 여세를 몰아서 자신의 일족(一族)들과 장량(張良) 등, 중신(重臣)들의 도움을 받아서 당시 황태자의 지위에 올라 있던 유영(劉盈)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以下, 後述)

 그리하여 유방(劉邦)은 탕(碭)으로 가서 군사를 다시 모으고는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하지만 그곳조차 항우(項羽)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는 수하(隨何)에게 명(命)해서 영포(英布)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획책했고, 그 계책은 성공했다.

                                     


<탕산 현의 위치도>


 ※ 수하(隨何) 생몰미상(生沒未詳)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유생, 정치가, 외교관이었고,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알현(謁見-接客)을 맡았다. 기원 전 205년, 유방(劉邦)은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항우(項羽)에게 대패(大敗)했다. 그리고는 겨우 몸만 보존하고는 우(虞=河南 虞城)까지 도망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당시 항우(項羽)의 수하 중 한명이었던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를 회유하기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수하(隨何)가 스스로 그 역(役)을 자청하고 나왔고, 이어서 20명의 종자들만 인솔해서 영포(英布)에게로 향했다. 그는 구강(九江)에 도착하자 우선 태재(太宰-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던 관청의 일종으로, 여기서는 사신을 접객하던 관청을 이름)의 손님 자격으로 영포(英布)와의 회담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가진 회견에서 영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로는 유방(劉邦)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 같이 보이나,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이므로 곧 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항우(項羽)는 포악한데다 현재 적진(敵陣) 너무 깊숙이까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이 다시 재기하게 되면 항우(項羽)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항우(項羽)의 편에 서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또 만약에 이런 때에 당신이 유방(劉邦)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천하는 곧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영포(英布)는 수하(隨何)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록 결정은 그렇게 내렸지만 속으로는 갈등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마침 항우(項羽)로부터 재차 파병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자 수하(隨何)는 영포(英布)에게 결단을 촉구했고, 마침내 영포(英布)는 항우(項羽)의 사자를 죽이고 유방(劉邦)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항우(項羽)는 그 즉시 용차(龍且)와 항장(項莊)을 파견해서 수개월에 걸쳐서 구강(九江)을 공락했고, 그러자 마침내 영포(英布)는 유방(劉邦)에게로 도주했다. 그 후였던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항우(項羽)가 자살하고 천하는 유방(劉邦)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축하연에서 유방(劉邦)은 제신(諸臣)들 앞에서 <수하(隨何)는 썩은 유생(儒生)으로,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는 자이다>라고 폄하(貶下)했다. 그러자 모욕감을 느꼈던 수하(隨何)는 유방(劉邦)에게 이렇게 물었다. <팽성에서 폐하가 졌을 때, 보병 5만과 기병 5천으로 회남(淮南=九江)을 공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유방(劉邦)이 <할 수 없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또 수하(隨何)가 물었다. <그러나 저는 단지 20명의 종자들만 데리고 회남(淮南)으로 가서 영포(英布)를 설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병 5만과 기병 5천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제가 아무 짝에도 쓸 모가 없다니, 그것은 도대체 무슨 뜻에서입니까?>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그를 인정하고 호군(護軍)중위(中尉)의 직(職)을 내렸다.

 
그러나 영포(英布)는 초(楚)의 무장이었던 용차(龍且)와 싸워서 지고는 유방(劉邦)에게로 도주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군사를 모으면서 영양(榮陽-河南省)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하자 그 주변에 용도(甬道=벽으로 두른 도로)를 쌓았으며, 또한 식료 등 물자를 운반해서 농성(籠城) 준비에 들어갔다.<바로 그 시기에 진평(陳平)이 합류했다>

                                                  


<하남 성>


 그런 한편, 유방(劉邦)은 별동대로 한신(韓信)을 파견해서 위(魏)와 조(趙)를 공격하는 것으로 항우(項羽)의 배후(背後)를 견제(牽制)하게 했다. 그리고 또 도적이었던 팽월(彭越)을 이용해서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급습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04년, 초군(楚軍)의 공격은 더욱 격렬해졌고, 용도(甬道) 또한 파괴되었던 데다, 생필품마저 고갈되어서 한군(漢軍)은 더욱 더 힘들어졌다. 그러자 또 그때 진평(陳平) 나서서 항우(項羽) 군에 이간의 계(離間計)를 걸었고, 그 결과 범증(范增)과 종리매(鐘離昧) 사이를 이간(離間)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또 범증(范增)은 은퇴하고 귀향하던 중,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등창으로 사망했다.

 용차(龍且) ?-기원전 203년

 초(楚)의 무장. 항우(項羽)의 부하. 기원전 206년, 유방(劉邦)이 기병해서 삼진(三秦)을 평정하자 그는 위(魏)의 항타(項他)와 함께 정도(定陶)의 남쪽에서 한(漢)의 관영(灌嬰) 군과 싸워서 패했다.<史記의 번력등관(樊酈滕灌)열전> 기원전 204년, 그는 항성(項聲)과 함께 회남(淮南)을 공격해서 경포(黥布) 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경포(黥布)는 한(漢)으로 도망갔다.<史記의 경포(黥布)열전> 기원전 203년 10월, 한신(韓信)이 임치(臨淄)를 평정하자 항우(項羽)는 그에게 군사 20만을 주어서 파견했다. 그리하여 동년(同年) 11월, 그는 한신(韓信)과 유수(濰水)에서 대진(對陣)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야간(夜間)동안에 유수(濰水) 상류에서 흙 부대를 쌓아 둑을 만들어서 미리 물을 막아 두었다. 다음날 한신(韓信)은 군을 인솔해서 강을 중간쯤 건너다가 용차(龍且)의 공격을 받고 도주했다. 그러자 용차(龍且)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원래부터 네가 겁쟁이인줄을 알고 있었다!>라고 외치면서 한신(韓信) 군을 추격했다. 그러자 적당한 시기에 한신(韓信)은 미리 쌓아두었던 흙 부대를 무너뜨렸고, 그에 용차(龍且)와 그 군은 대부분 수몰(水沒)했다.<史記의 회음후(淮陰侯)열전>

 
팽월(彭越) ?-기원전 196년

 중국 진말(秦末)기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무장. 자(字)는 중(仲). 진말(秦末) 전란(戰亂) 중에 대도적(大盜賊)으로 활약했고, 유방(劉邦) 휘하에 들어간 후에는 후방교란 등 전공을 올렸다. 그는 창읍(昌邑=現在의 山東省 金鄕縣) 사람으로, 젊었을 때는 거야(鉅野)의 소택(沼澤-늪과 못 지역으로, 나중의 梁山泊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에서 어부를 하면서 도적질을 했다. 그러다가 진(秦)의 악정(惡政) 때문에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몇 번에 걸친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서 수령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첫 명령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수령이 된 기념으로 내일 아침에 출진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은 그 본보기로 처형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오합지졸로, 아침은커녕 아예 오후에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약속대로 제일로 지각한 사람을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로는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무렵, 세상은 진승(陳勝)과 항량(項梁) 등의 봉기로 소란스러웠고, 이어서 유방(劉邦)이 초(楚) 회왕(懷王)의 명령을 받아서 함양(咸陽)을 공략하러 가던 중, 위(魏)의 창읍(昌邑)을 공략하게 되자, 그도 유방(劉邦)을 도와서 함께 공략했다. 그 후, 진(秦)은 항우(項羽)에 의해 멸해졌고, 이어서 항우(項羽)는 거성(居城)으로 돌아와서 대진(對秦)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사람들에게 영토를 분배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팽월(彭越)은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구제(舊齊)의 왕족 전영(田榮) 등과 함께 양(梁=舊魏의 땅으로, 開封 주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그때 彭越은 田榮에게서 장군의 印을 받았으므로, 장군의 자격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도 관중(關中)을 공격해서 구진(舊秦)의 영토를 모두 손에 넣고 항우(項羽)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 후, 팽월(彭越)은 양(梁)을 누비며 몇 곳의 도(都)를 공략했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난 항우(項羽)가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그것조차도 격퇴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동쪽으로 진군해서 구위(舊魏)의 왕족이었던 위표(魏豹)를 위왕(魏王)에 앉히자 그때 팽월(彭越)도 재상(宰相)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또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져서 도망을 갔으므로, 그도 그곳에서 도망을 가서 그때부터는 게릴라작전으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게릴라작전을 펼치면서 계속해서 초군(楚軍)의 식량을 불태우는 식으로 괴롭혔고, 그러자 그 효과로 항우(項羽) 군은 늘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까지 힘을 뻗칠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다. 그 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싸움은 최절정에 도달했고, 마침내 광무산(廣武山)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보급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에 서로는 화해하고 일단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장량(張良)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방(劉邦)에게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덮치게 하고, 그리고 팽월(彭越)과 한신(韓信)에게는 두 사람이 공동작전을 펴서 항우(項羽)를 공략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도 한신(韓信)도 그의 말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그때는 劉邦이 그에 대해서 아무런 포상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자 유방(劉邦)은 단독으로 항우(項羽) 군을 상대했지만, 오히려 져버렸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하는 수 없이 한신(韓信)에게는 막대한 포상을 약속했고, 팽월(彭越)에게는 양왕(梁王)에 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두 사람은 전장으로 향했고, 이어서 원군을 얻었던 유방(劉邦)은 해하(垓下)까지 항우(項羽)를 추적해서 멸했다. 그 후, 약속대로 양왕(梁王)이 된 팽월(彭越)은 갖은 영화(榮華)를 다 누렸다. 하지만 그 후로 유방(劉邦)은 점점 더 의심이 많아졌고, 마침 그러했던 때에 북쪽의 대(代)에서 진희(陳豨)가 유방(劉邦)을 배신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친정(親征)을 나서며 팽월(彭越)에게도 출진할 것을 명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병을 핑계로 자신은 나서지 않고 군사만 보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화가 나서 그를 문책했다. 그러자 또 팽월(彭越)은 그 일로 해서 자신이 숙청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자 또 그때 팽월(彭越)의 부하였던 호첩(扈輒)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팽월(彭越)에게 조언했지만, 그러나 팽월(彭越)은 그말도 듣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彭越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라는 중상모략을 유방(劉邦)에게 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를 속여서 잡아들이고는 양왕(梁王)의 지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던 유방(劉邦)도 그러나 막상 그를 대하자 동정심이 생겨서 죽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를 죽이지는 않고 일단 서민(庶民)으로 강등시킨 후, 촉(蜀)으로 보내는 것(일종의 流配)으로 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촉(蜀)은 너무 먼 변경(邊境)이므로, 자신의 고향인 창읍(昌邑)으로 돌아가서 은둔하게 해달라>고 여치(呂雉)에게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자 또 그 앞에서는 유방(劉邦)에게 그렇게 말해주겠다고 한 여치(呂雉)였지만, 그러나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을 대하자 <그는 위험한 인물이므로 살려두면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고, 그 결과로 그는 처형되었다. 그 후, 그의 사체는 여치(呂雉)에 의해서 방부처리로 소금에 절여졌고,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참고: 그러나 소금에 절인다는 것은 食肉은 물론 뼈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하지만 彭越의 경우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또 그 일은 한신(韓信)의 예와 함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예가 되었고, 나중에 영포(英布)의 반란을 부르는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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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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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5. 한왕(漢王)

 그러자 항우(項羽)는 더 이상 유방(劉邦)을 해칠 마음이 없어졌고, 그리고 또한 그 회합의 결과 그를 토벌할 명분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홍문(鴻門)의 회(會)>에 대한 소개이며,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자진(自陣)으로 돌아간 뒤, 곧 바로 배신자 조무상(曹無傷)을 죽여서 그 머리를 진문(陣門)에다 내걸었다. 그 후 항우(項羽)는 함양(咸陽)으로 들어가서 이미 항복을 했던 자영(子嬰) 등, 진왕(秦王) 일족들과 관리 4천명을 몰살했다. 그리고는 또 보물들을 다 빼낸 후, 그 화려했던 궁전들을 전부 다 불태웠으며, 거기다 또 시황제(始皇帝)의 묘를 파헤쳐서 보물들을 다 꺼냈다. 그러자 인심(人心)은 항우(項羽)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고, 그것이 또 유방(劉邦)이 천하를 얻게 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항우(項羽)는 그렇게 하고는 팽성(彭城)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칭했다. 그리고는 또 그때까지 명목상의 왕이었던 회왕(懷王)과 의제(義帝)를 숙청했다. 그 다음,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는 제후(諸侯)들에 대해서 봉건(封建=領地分配)을 실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공평했던 것으로, 그 기준은 공적(功績)에 따랐던 것이 아니라 항우(項羽)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드는가에 따른 기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그 직후에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에게 주어졌던 것도 그에게 보장되었던 약속의 땅 관중(關中)이 아니라, 변방도 거의 오지(奧地)나 다름없었던 서쪽의 한 변경지방이었던 한중(漢中)과 파촉(巴蜀=중국 四川省의 옛 호칭)이었다.

 ※ 한중(漢中)

 중국 산시 성(陝西省) 서남쪽, 한수이 강(漢水江) 북쪽 기슭에 있는 지방으로,
쓰촨(四川)과 후베이(湖北) 두 성에 걸쳐 있는 요충지로, 한나라 고조의 근거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래는 現 한중 시와 四川省의 위치도임
 

<한중 시 위치도>

<사천 성의 위치도>

 
 그래서 당시 유방(劉邦)을 <좌(左)쪽으)로 옮긴다>라고 했던 것으로부터 '좌천(左遷)'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그 관중(關中)이란 말에는 단지 '관중분지(關中盆地)'만을 가리켰던 경우와, 통일 이전 진(秦)의 영토 전역을 가리키던 말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고 해서, 그러므로 만약에 후자(後者)의 용법에 따르게 된다면 반드시 유방(劉邦)에게 관중(關中)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아무튼, 거기다 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의 동진(東進)을 저지하기 위해서 관중(關中)을 장한(章邯) 등, 과거 진군(秦軍)의 장군 3명에게 분할해서 지급했다. 그리고 또 당시의 한중(漢中)은 유형지로 생각될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는데, 그래서 또 그곳으로 가려면 <촉(蜀)의 잔도(棧道-험한 벼랑에 낸 길이며,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라고 불렸던 사람 한명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고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유방(劉邦)이 인솔해 가던 약 3만 명의 병사들은 그에 겁을 먹고 대부분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하지만 그때 남아 있던 병사들 또한 동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이 오로지의 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6. 한초전쟁(漢楚戰爭)

 6-1 항우(項羽)와의 대결

 그런데 그 시기에 유방(劉邦)의 진영에 새롭게 참여했던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한신(韓信)>이었다. 그리고 그 한신(韓信)은 원래 항우(項羽) 군에 있었지만, 그러나 항우(項羽)는 그의 재능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유방(劉邦)에게로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또 그는 유방(劉邦)에게 와서도 처음에는 단순한 병졸 또는 하급 장교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때 그의 재능을 간파했던 사람이 또 바로 <소하(蕭何)>였고, 그리고는 그 후, 전술(前述)한 대로 그는 소하(蕭何)의 추천을 받아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 인물소개

 한신(韓信) ?-기원전 196년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었으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중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한신의 모습>


 한신(韓信)은 회음(淮陰=화이인=現 江蘇省 淮安市) 출신으로, 처음에는 집안도 가난했던 데다 스스로의 품행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 마땅한 곳에다 적(籍)을 두지도 못하고 식객(食客)이라거나, 유협(遊俠)이라거나 하면서 건달 같은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강소성>

<회안 시=舊稱 淮陰>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를 업신여겼는데, 그런 이유로 해서 그는 한때 어느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집 주인도 그를 싫어해서 그에게는 식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며칠 동안이나 굶으면서 방랑하다 어느 노녀(老女)를 만나서 며칠 동안 배불리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노녀(老女)에게 진정으로 감사해 하며 다음에 꼭 몇 갑절의 사례를
하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노녀(老女)는 그것을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말을 실천해서 <일반천금 즉, 밥 한 그릇으로 천금을 얻는다>라는 고사를 남겼다. 그리고 또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일화(逸話) 중에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과하지욕의 고사) 어느 날, 그는 마을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런데 그 남자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당신은 키도 크고, 언제나 허리에 검(劍)을 차고 다니지만, 내가 볼 때는 당신은 겁쟁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증명으로, 그 검으로 나를 한번 찔러보라! 하지만 나를 찌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나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아무 말 없이 그 남자의 가랑이를 빠져나갔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또 모두 다 그를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치욕(恥辱)은 한때이나, 뜻(志)은 일생(一生)이다. 여기서 내가 그를 죽인들 무슨 소용이나 있을 것인가? 다만, 원수만 만들게 될 뿐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 발생하자 중국에서는 대규모의 동란(動亂)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기원전 209년 한신(韓信)도 항량(項梁)과 항우(項羽)를 따라다니면서 낭중(郎中)까지 되었지만, 그러나 항우(項羽)는 그가 올렸던 몇 번의 진언도 다 무시했다. 그러자 그에 실망했던 한신(韓信)은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를 떠나서 당시 한중(漢中)으로 좌천(左遷)되어있던 유방(劉邦)에게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연오(連敖=接待係)라는 시시한 직(職)에 맡겨졌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죄를 짓고 동료 13명과 함께 참형(斬刑)에 처할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그는 하후영(夏候嬰)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한왕(漢王)은 천하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가? 어째서 장사(壯士)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는 실수를 범하려는 것인가?> 그러자 그에 흥미를 느꼈던 하후영(夏候嬰)은 그를 유방(劉邦)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유방(劉邦)은 그를 치속도위(治粟都尉=兵站官)에 임명했을 뿐, 그 후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그 직(職)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책임자였던 소하(蕭何)를 만나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곧 그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유방(劉邦)에게 몇 번에 걸쳐서 추천을 올렸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또 바로 그 즈음에, 한군(漢軍)에서는 도망병들이 속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 물론, 그곳은 변경 중에서도 오지(奧地)였던 곳으로, 그래서 당시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장군이란 자들까지도 그곳이 싫어서 도망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회의(懷疑)를 느끼고 있던 한신(韓信)도 결국에는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된 소하(蕭何)가 급히 그를 뒤쫓았다. 그리고는 한신(韓信) 붙잡아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다시 추천을 할 것이니 같이 돌아갑시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직(閑職)이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나도 한(漢)을 버리겠소!> 그렇게 해서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때, 소하(蕭何)마저 없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던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를 오해하던 중 그들이 다시 돌아오자 강하게 힐책했다. 그러자 또 소하(蕭何)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는 도망을 간 것이라 아니라 바로 저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장군들이 도망갔을 때는 꿈쩍도 않고 있다가, 하필이면 저 자가 도망을 갔다고 하니 그렇게 급히 달려갔는가?> 그러자 또 소하(蕭何)가 이렇게 답을 했다. <네, 그것은 저 사람이야말로 국사무쌍(國士無雙)으로, 타(他) 잡장(雜將)들과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계실 생각이라면 몰라도, 만약에 그렇지 않고 언젠가 이곳을 떠나서 천하를 다툴 생각이시라면, 저 사람은 그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마침내 유방(劉邦)은 소하(蕭何)의 진언(進言)을 들어주었고, 이어서 한신(韓信)을 전군(全軍)을 지휘하는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했다.


 ★ 국사무쌍(國士無雙)은 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선비(또는 신하)를 말함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후대(厚待)에 응해서 곧 바로 한중(漢中)의 북쪽에 있는 관중(關中)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책략을 말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항우(項羽)는 강하지만, 그러나 그 강함은 약해지기 쉬운 것이다. 즉, 항우(項羽)의 용맹함은 부인(婦人)의 인(仁)이요, 필부(匹夫)의 용(勇)일 뿐으로, 그는 스스로만 강할 뿐, 부하들을 중(重)하게 여기지 않는다든지, 은상(恩賞)을 내리는 것에 인색하다. 그러므로 유방(劉邦)이 그런 항우(項羽)의 역(逆)을 이용하면 쉽게 천하를 얻을 수 있다.

 ★ 여기서 부인(婦人)의 인(仁)이란 여자들의 의미 없이 구는 상냥함을 의미(실속이 없다)하며, 필부(匹夫)의 용(勇)이란 하찮은 남자의 용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신(韓信)이 항우(項羽)를 평가했을 때 썼던 말이다

 2. 그리고 특히, 항우(項羽)는 처우(處遇)에 대해서 매우 불공평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불만이 아주 많다.

 3. 그리고 이곳의 병사들은 모두 고향인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아주 큰 힘이 될 것이다.

 4.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현재, 관중(關中)에 있는 3진(秦)의 왕(王)들은 20만이나 되던 병사들을 희생시킨 진(秦)의 장군들이므로, 그래서 민심은 이미 그들을 떠났다. 그러나 유방(劉邦)은 전에 그곳에 주둔했을 때 약탈도 하지 않았고, 또한 인기도 매우 많았으므로, 유방(劉邦)이 나서기만 한다면 관중(關中)을 쉽게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몹시 기뻐했으며, 다른 장군들도 그 인사(人事)를 납득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8월, 유방(劉邦)은 드디어 관중(關中)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는 우선 방심하고 있던 장한(章邯) 군을 수공(水攻)으로 격파했으며, 이어서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도 격파했다. 그리고는 그 관중(關中)을 본거지로 삼고, 드디어 항우(項羽)와의 결전에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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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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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4. 관중입성(關中入城)

 그렇게 해서 유방(劉邦)은 서쪽으로 별동대(別動隊)를 인솔해 갔지만, 그러나 그 군세(軍勢)는 항우(項羽) 군에 비해서 질(質)에서나 양(量)에서나 모두가 뒤떨어졌던 것이어서 유방(劉邦)은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야
고양(高陽=河南省 杞縣)이란 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유방(劉邦)은 유자(儒者)였던 력식기(酈食其)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가 대단한 유생(儒生)이라는 말을 듣고 그것이 싫어서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는, 또 여자들에게 자신을 닦게 하면서 그와 대면했다. 그러자 그것을 보았던 력식기(酈食其)는 유방(劉邦)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또 그제야 유방(劉邦)은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이 근처에 있는 진류(陳留)는 교통의 요지인데, 그곳에는 생필품이 충분하므로 그것을 구하시오! 그리고 또 그곳의 성주(城主)는 반진군(反秦軍)을 위협할 생각이므로, 그의 신분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는 이 편에 귀순하도록 설득하시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의 말대로 했는데, 그 결과 유방(劉邦)은 교통의 요지와 막대한 자금까지 피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 력식기(酈食其-?부터 기원전 204년)는, 중국 진(秦)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유생(儒生)으로, 진류고양(陳留高陽) 출신의 사람이었으며, 통칭은 력생(酈生 또는 酈先生)이었다. 하지만 또 <여식기>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라며, 아무튼 그는 가정은 궁핍했지만, 술을 아주 즐겼기 때문에 <고양(高陽)의 주도(酒徒=酒黨)>라고 불렸으며, 그리고 유방(劉邦)과 함께 하면서는 달변(達辯)의 소유자로 알려져서, 주(主)로 다른 집단(세력)들과의 화의(和議)나 교섭(交涉) 등 외교적인 부분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자식으로는 력개(酈疥)가 있었으며, 동생으로는 무장으로 활약했던 력상(酈商)이 있었고, 그리고 조카로는 력기(酈寄)가 있었다. 그는 또 진승(陳勝), 항량(項梁)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누구에게 의탁할지를 고민했지만, 그러나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은거(隱居)했다. 하지만 그 후에 유방(劉邦)이 진류(陳留)를 공격했을 때, 그는 스스로 유방(劉邦)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유방(劉邦)에게 진류(陳留)를 손쉽게 넣게 해주고 광야군(廣野君)에 봉해졌다. 그 후, 같은 세객(說客=遊說客)이었던 육가(陸賈)와 함께 제후들을 설득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 육가(
陸賈-생몰미상)는 중국 전한의 학자, 정치가였고, 초나라 사람으로, 고조를 섬겼으며,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씨(呂氏)의 난에는 유씨(劉氏)를 도와서 한나라 왕실을 지켰으며, 저서로는 <신어>와 <초한춘추(楚漢春秋)>가 있었다.

 아무튼, 기원전 206년에 그는 유방(劉邦)으로부터 <서위왕(西魏王=魏豹)을 설득할 수 있으면 1만호의 영주(領主)에 봉하겠다>라는 명을 받아갔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그 후에 한신(韓信)이 제(齊)를 공략했을 때, 그는 평화 교섭에 임해서 제(齊)의 성(城) 70여 곳을 귀순시키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공적이 그에게로만 돌아갈 것을 두려워했던 한신(韓信)과 당시 한신(韓信)의 심복이었던 괴통(蒯通)이 독단적으로 제(齊)를 공격해버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화가 났던 제왕(齊王) 전광(田廣)은 그를 삶아서 죽여 버렸다.

 
위표(魏豹-?부터 기원전 204년)는, 중국 전국시대 후기부터 진대(秦代)의 정치가였고, 위(魏) 왕실의 일족이었으며, 서위왕(西魏王)이었고, 위구(魏咎)의 동생 또는 사촌동생이었던 사람이었다.

  <아래 그림은 하남성과 개봉 위치도>

<개봉 시의 위치도>


 그런 다음, 유방(劉邦)은 개봉(開封)을 공락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한(韓)으로 가서 당시, 적은 병력으로 고전하고 있던 한왕 성(韓王成)과 장량(張良)을 구원했고, 이어서 한(韓)도 재건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은의(恩義)로 장량(張良)을 객장(客將)으로 빌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또 그 기세로 다시 남양(南陽)을 공략했다. 그러자 그곳의 성주(城主)가 완(宛=河南省 南陽)이란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곳을 포위하고는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때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는 달리 자신에게 항복을 해오는 사람은 그 前의 자격을 그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쓸데없는 전투 같은 것은 치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보다 더 빨리 진군(進軍)을 할 수가 있었고, 그리고 드디어는 관중(關中)의 남쪽 관문인 무관(武關)에 도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 즈음에 조(趙)에서 항우(項羽)가 '진군(秦軍)'의 주력(主力)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진(秦)의 내부에서는 심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또 그때, 시황제(始皇帝) 사후(死後)에, 2세 황제를 괴뢰(傀儡)로 내세우고는 환관(宦官=內侍)이었던 조고(趙高)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패전(敗戰)이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그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고(趙高)는 그래서 우선 2세 황제를 죽였다. 그리고 기원전 207년 유방(劉邦)에게 관중(關中)을 둘로 나누어서 서로 왕(王)이 되자는 밀서를 보냈다.

 ※ 조고(趙高-?부터 기원전 207년)는,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秦)까지의 환관(宦官)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는 또 처음에 조(趙)의 왕족으로서 태어났지만, 그러나 유년기에 모친(母親)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에 연루(연좌)되어서 궁형(宮刑=去勢)에 처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에는 의문을 가지는 역사가도 많으며, 또한 의심스러운 점도 많다. 그리고 또 실제로 그에게는 염락(閻樂)이라는 사위도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는 진(秦)의 관리를 지내던 중, 죄를 범했거나 해서 그 연좌(連座=緣坐)로 궁형에 처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빈가(貧家)에서 태어나서 많은 가족들을 위해서 스스로 내시(內侍)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또 실제로 그가 언제부터 시황제(始皇帝)에게 시중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등,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불명하지만, 하지만 또 그는 근면했고, 법률(法律)을 잘 알았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의 막내였던 호해(胡亥)의 보좌를 명받았다. 그리고는 그 후, 시황제(始皇帝)의 눈에 들어서 시황제(始皇帝)의 모든 신변잡무를 도맡아했다. 그는 또 시황제(始皇帝)의 다섯 번째 순행에도 참가했으며, 순행도중에 시황제(始皇帝)가 사망하자 이사(李斯)를 끌어들여서 유언을 조작했고, 태자 부소(扶蘇)를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호해(胡亥)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낭중령(郎中令=九卿의 하나로, 宮門을 주관하는 자리)에 취임했다. 그 후에 그는 호해(胡亥)를 궁중 깊은 곳에다 넣어두고는 호화로운 생활에 젖게 만들었고, 자신은 밖에서 모든 정무를 관리해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것은 또 당시, 승상이었던 이사(李斯)조차도 그의 허락 없이는 호해(胡亥)를 만날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가 폈던 정책은 기본적으로는 시황제(始皇帝)의 방침을 계승했던 것이었고, 그리고 또 황제의 권위, 즉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부심(腐心)했으며, 또 아방궁(阿房宮)의 대규모적인 증축을 실시해서 백성들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했다. 그리하여 그의 공포정치(恐怖政治)는 많은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몽념(蒙恬)과 공자(公子) 장려(將閭) 등, 유력자(有力者)들과 불평파(不平派)들을 모두 무고죄(誣告罪)로 죽였다. 그러자 그 후, 진(秦)에서는 간신(奸臣=惡臣)들이 증가했고, 정치에 대해서 불평불만들이 늘어갔으며, 이어서 시황제(始皇帝) 재위 시의 풍부했던 인물들도 점차 고갈되어갔다. 그러자 나라는 곧 원망으로 가득 찼고, 이어서 발생했던 <진승과 오광의 난>을 계기로 전 국토에서는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자 그 사태를 우려해서 대책과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이사(李斯)와 현상유지를 주장했던 조고(趙高) 사이에 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자 조고(趙高)는 이사(李斯)를 중상모략해서 처형하고는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반란의 불길은 전국에서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고, 마침내 장한(章邯)의 군사마저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조고(趙高)는 군사의 증원은 커녕 오히려 장한(章邯)에게 그 죄를 물으려고 했으므로, 그에 장한(章邯)은 20만의 군사와 함께 항우(項羽)에게 항복을 해버렸다. 그리하여 진(秦) 제국의 붕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는데, 그리고 또 그 사이의 호해(胡亥)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이 함양(咸陽) 근처까지 진격해 오자 조고(趙高)는 그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반란을 획책했다. 그런데 또 그때 조고(趙高)는 군신(群臣)들이 자신의 말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가지의 시험을 했는데, 그것은 또 이미 앞에서 소개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러던 하루 조고(趙高)는 궁중에 사슴 한 마리를 가져와서는 <이것은 아주 진귀한 말(馬)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호해(胡亥)는 <이것은 사슴이 아닙니까?>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조고(趙高)는 <아닙니다. 이것은 말입니다>라고 하면서 군신(群臣)들을 둘러보며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자 조고(趙高)의 권세를 두려워 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말>이라고 말을 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슴>이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조고(趙高)는 농담이라고 얼버무리면서 그 자리를 접었지만, 그러나 그 뒤에 그때 사슴이라고 답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잡아들여서 죽였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호해(胡亥)도 살해했고, 그 후에는 또 유방(劉邦)과 은밀하게 내통하려다 실패했으며, 이어서 덕망이 높았던 자영(子嬰)을 옹립해서 그 죄들을 모두 호해(胡亥)에게로 돌리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앞서 기술한대로 자영(子嬰)을 데리러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자영(子嬰)은 유방(劉邦)에게 항복을 했고, 그 후 진(秦)은 멸망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것이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무관(武關)을 돌파했다. 그러자 그 후,  조고(趙高)는 자영(子嬰)의 계책에 넘어가서 살해당했다. 그런 다음, 유방(劉邦)은 요관(嶢關)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요관(嶢關)은 진(秦)의 최후의 보루(堡壘)였기 때문에 쉽게 돌파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그때도 장량(張良)은 그 수장(守將)이 상인출신이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가 계산에 아주 밝을 것이란 점을 이용해서 대량의 기(旗)를 겹겹이 세워서 군사가 아주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는 그 수장(守將)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그 계책은 맞아떨어져서 그 수장(守將)은 항복할 것을 약속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주위를 분산시키고 방심시키기 위한 작전일 뿐이었던 것으로, 장량(張良)은 그때 그 성의 병사들이 결사(決死) 항전할 것이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방(劉邦) 군은 그 성으로 들어가자마자 수비대를 불의(不意)의 습격으로 제압했고, 그렇게 해서 요관(嶢關)도 돌파되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유방(劉邦) 군은 거침없이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제 남은 것은 진도(秦都)였던 함양(咸陽) 뿐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진왕(秦王) 자영(子嬰)이 유방(劉邦)의 진영까지 스스로 흰 소복(素服)에다 목에 끈까지 묶은 모습으로 찾아가서는 황제의 증거인 옥새(玉璽) 등을 내밀면서 항복을 구했다. 그러자 또 그때, 유방(劉邦)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자영(子嬰)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함양(咸陽)에 입성했던 유방(劉邦)은 궁전의 미녀들과 재보(財寶)에 눈이 멀 지경이었지만, 그러나 번쾌(樊噲)와 장량(張良)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런 모습에서 유방(劉邦)의 도량과 부하에의 신뢰는 항우(項羽)와 대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것은 그 후의 천하통일에도 아주 큰 작용을 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또 덧붙여서(미리 기술되었지만), 바로 그 때에 소하(蕭何)는 진(秦)의 문서고(文書庫)로 들어가서 법령 등의 서적들을 모두 가지고 나왔고, 그것은 또 나중에 한(漢) 왕조가 성립한 후, 법 제정 등에 아주 큰 도움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5. 한왕(漢王)

 아무튼,
그렇게 해서 패상(覇上=승리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유방(劉邦)은 관중(關中)의 부로(父老-그 동네에서 제일로 연장자의 의미로, 일종의 村長)들을 모아서 <법삼장(法三章)>이란 것을 발표했다.

 ※ 법삼장(法三章)이란, 중국 한나라 때, 고조가 진나라 때의 가혹한 법을 없애고, 단 세 가지의 죄만을 정했던 법으로, 그 내용은 또 사람을 죽이는 자는 같이 죽고,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자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그 후에 유방(劉邦)의 인기는 단번에 높아졌고, 이윽고는 <만약에 유방(劉邦)이 왕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법삼장(法三章)>이란 말은 후세에 간편한 법률을 나타내는 법(法) 격언이 되기도 했는데, 아무튼 또 그 무렵에, 동쪽에서는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을 향해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어떤 사람의 <당신이 먼저 관중에 들어왔지만, 만약 항우가 관중으로 또 들어온다면 그 공적을 모두 그에게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문을 닫고 이대로 있게 된다면, 당신은 이대로 관중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그 관중(關中)을 지키기 위해서 관중(關中)의 동쪽 관문이었던 함곡관(函谷関)에다 병사들을 파견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마치 유방(劉邦)이 이미 관중(關中)의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격분해서 영포(英布)에게 그곳을 깨부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관중(關中)으로 들어와서 40만의 군사로 유방(劉邦)을 멸하려고 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유방(劉邦)의 부하였던 조무상(曹無傷)이란 자가 그 기회를 이용해서 항우(項羽)에게 이렇게 아첨을 했다. <패공(沛公-劉邦)은 관중의 왕위를 노리는 한편, 진왕 자영을 재상으로 삼고, 관중의 보물들을 독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조무상(曹無傷)은 명사로 쓸 때는, 남을 참소하는 소인(小人)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유래는 위의 내용과 같이 유방이 항우와 대립했을 때, 유방을 헐뜯으며 죄가 있는 것처럼 항우에게 고해바쳤던 사람의 이름이 조무상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더욱 격노했는데,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또 바로 그때, 항우(項羽)의 숙부였던 항백(項伯)이 유방(劉邦)의 진중(陣中)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항백(項伯)은 이미 기술한대로, 일찍이 장량(張良)에게서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혜를 갚아줄 생각으로, 당시의 위기적 상황에 있었던 유방(劉邦) 군으로부터 장량(張良)을 구출해내려고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또 이미 기술한대로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을 버리고 혼자서만 살아남는 것을 거절했고, 그러자 또 항백(項伯)은 장량(張良)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유방(劉邦)과 만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이하, 鴻門의 會 참조>

 ※ 홍문지회(鴻門之會-기원전 206년)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외곽에서 가졌던 회견의 고사(故事)이며, 초한전(楚漢戰)의 서막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날 아침, 유방(劉邦)은 홍문(鴻門)에 있던 항우(項羽)를 방문했다. 그러나 호위 군사는 모두 진외(陣外)로 물려져서 본영(本營)에는 유방(劉邦)과 장량(張良)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우선 항우(項羽)에게 겸손하게 사죄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들은 진(秦)을 토벌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사이로, 장군은 하북(河北)에서, 나는 하남(河南)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또 본의 아니게 이번에는 내가 먼저 관중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개 소인배가 하는 말에 현혹이 되어서 우리들의 그런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항우(項羽)가 이렇게 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부하인 조무상(曹無傷)이 가르쳐준 것이요!> 잠시 후, 연회가 시작되었고 그러자 항우(項羽)와 항백(項伯)은 동쪽으로 향하는 윗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범증(范增)은 그때 남향으로, 그리고 또 유방(劉邦)은 북쪽, 장량(張良)은 서향으로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범증(范增)은 연회 도중에 항우(項羽)에게 눈짓을 해서 유방(劉邦)을 베어버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때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이 계속해서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으므로, 유방(劉邦)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자 범증(范增)은 세 번이나 신호를 더 보냈는데, 하지만 그래도 항우(項羽)는 그에 응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했던 범증(范增)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항장(項莊)을 불러서 축하의 칼춤이라면서, 검무(劒舞)를 추면서 유방(劉邦) 가까이까지 가서 죽일 것을 명했다. 그러자 항장(項莊)은 범증(范增)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그때 장량(張良)의 눈치를 읽었던 항백(項伯)이 갑자기 나타나서 항장(項莊)의 칼춤 맞상대가 되면서 그의 시도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그러던 중 또 장량(張良)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서 진외(陣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번쾌(樊噲)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그에 노했던 번쾌(樊噲)가 단번에 연석으로 뛰어들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전승(戰勝)의 흥을 돋우는 춤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니 그만두게 해주십시오!> 그리고는 항우(項羽)를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며 서있자 그에 검무(劍舞)는 중지되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호걸 상에 감탄해서 큰 잔이 넘칠 정도로 술을 부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번쾌(樊噲)는 그것을 받아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가 술을 한잔 더 권했는데, 그러자 또 번쾌(樊噲)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찌 술을 거절하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진왕(秦王)의 폭정 때문에 진(秦)에 등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회왕(懷王)은 제장(諸將)에게 이르기를 먼저 함양(咸陽)에 들어간 사람이 왕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다 또 패공(沛公)은 먼저 함양(咸陽)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보물도 약탈하지 않고 장군(項羽)의 도착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저 함곡관(函谷関)에 군사를 배치시켜둔 것도 모두 도적들을 막고 또 비상 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은상(恩賞)도 받지 못했는데,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면, 진(秦)의 꼴을 따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자 항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 정도의 깊은 생각이라면 여기에 앉아도 좋다!> 그 후, 유방(劉邦)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항우(項羽)는 진평(陳平)에게 유방(劉邦)을 불러올 것을 명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유방(劉邦)은 번쾌(樊噲)와 함께 홍문(鴻門)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러자 또 그때 장량(張良)은 기치를 발휘해서 <패공(沛公)이 자리를 뜬 것은 술이 너무 취해서 실수를 할지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라고 둘러대고는 그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주고는 장량(張良) 역시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해서 회(會)도 다 끝이 났고, 그러자 장량(張良)이 두고 갔던 선물을 보고 있던 항우(項羽)에게 범증(范增)이 격노했다. 그리고는 그 선물을 검으로 깨서 부숴버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번에 유방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필시 천하는 그의 손으로 들어갈 것이고, 우리는 머지 않아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런 한편, 유방(劉邦)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자마자 항우에게 중상모략을 했던 조무상을 죽여버렸다.

 
영포(英布-?부터 기원전 195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구강왕(九江王)이었으며, 전한(前漢)초기의 회남왕(淮南王)이었고, 통칭은 경포(黥布)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六=現在의 安微省 六安縣) 출신의 사람으로, 젊었던 시절, 하루는 점을 보러 갔는데, 그 점쟁이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은 머지 않아 형벌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그 후에는 왕이 될 것이요!>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는 실제로 형벌을 받게 되었고 또 자청(刺靑=文身=과거에는 죄인들에게 印字를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죄인의 표시인 그 죄명을 문신한 것을 말함)까지 새기게 되자 몹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왕이 될 일만 남았다!> 그 후, 진말(秦末)의 동란기(動亂期)에 그는 친구들과 시국(時局)을 논하다가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는 당시 진(秦)의 번양(番陽) 현령(縣令)이었던 오예(吳芮)와 제휴했고, 그 딸을 취했다. 그 후 그는 항량(項梁)의 휘하에 들어가서 당양군(當陽君)을 사용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항량(項梁)이 죽은 후에는 항우(項羽)에게 의탁했다. 그리고 항우(項羽)와 함께 반진(反秦)전쟁에 종군하면서 그 선진(先陣)으로 궂은일들을 많이 처리했다.(항복했던 진군이 반란의 기미를 보이자 20만 명을 생매장시킨 일 등)그 후,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의 부하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바로 그 직후에 항우(項羽)의 명을 받아서 당시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져 있었던 의부(義父) 오예(吳芮)와 함께 의제(義帝)를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로부터 그는 항우(項羽)와 사이가 나빠져서 제(齊)의 반란과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들려왔던 항우(項羽)의 구원요청도 거절하고 병을 칭하며 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팽성의 싸움 후 그는 유방(劉邦)이 보냈던 세객(說客) 수하(隨何)에게 설득당해서 유방 편에 서서 참전했지만, 그러나 항우(項羽)가 보냈던 항성(項聲) 용차(龍且) 군에 대패해서 유방(劉邦)에게로 망명했다.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항우(項羽)가 죽자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고 전한(前漢)이 성립했을 때 그는 회남왕(淮南王)에게 봉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렵부터 유방(劉邦)과 여치(呂雉)에 의해서 이성(異姓) 제후왕(諸侯王)들이 차례로 숙청되었다. 그것은 또 기원전 196년 봄에는 한신(韓信)이, 그리고 여름에는 팽월(彭越)이 반란을 계획했다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던 것이 그것이었는데, 거기다 또 팽월(彭越)의 시체는 그 일부가 소금에 절여져서 본보기로 영포(英布)를 비롯했던 제후왕(諸侯王)들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그에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던 영포(英布)는 반란을 계획했다. 그런데 또 그때, 자신의 가신이었던 비혁(費赫)이란 자가 그러한 사실을 유방(劉邦)에게 밀고했고, 그러자 또 영포(英布)는 어쩔 수 없이 동년 가을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처음에는 친정(親征)왔던 유방(劉邦)까지 화살로 상처를 입히는 등(유방은 결국 그 상처 때문에 사망했다) 기세를 올렸지만,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영포(英布) 군은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영포(英布)는 자신의 처(妻) 형제였던 장사왕(長沙王)·오신(吳臣)에게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되는 것이 싫었던 오신(吳臣)은 영포(英布)에게 같이 월(越)로 도망가자고 꾀었다. 그러자 그것을 믿었던 영포(英布)는 파양(鄱陽)까지 갔지만, 그러나 그곳 현지의 사람에게 살해당했다.(이유는 알 수 없음) 그리고 그때가 기원전 195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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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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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3. 거병(擧兵)

 그것은 또 장량(張良) 스스로도 지도자로서의 자질(資質)은 부족(不足)하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병법(兵法)을 다양한 인물들에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방(劉邦)을 만나자 그는 장량(張良)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러자 '장량'은 그에 감격했고, 그래서 <패공(沛公)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까지 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후,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의 작전(作戰) 대부분을 입안(立案)하게 되었으며, 유방(劉邦)은 또 그 장량(張良)의 말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 마침내 천하(天下)까지 손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의 관계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넘어섰던 것이었다>라고 후세의 사람들은 평가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또 그 무렵, 경구(景駒)는 항량(項梁)에게 패했고, 그 결과로 항량(項梁)은 새로운 반진군(反秦軍)의 두령(頭領)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구초(舊楚) 회왕(懷王)의 손자를 데려와서 초왕(楚王)에 옹립했으며, 그의 조부(祖父)를 승계해서 그를 회왕(懷王)이라고 부르게 했다.(그러나 나중에 項羽에 의해서 義帝로 칭해짐) 그리고 또 유방(劉邦)은 항량(項梁)의 세력(勢力) 하(下)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어서 항량(項梁)의 조카였던 항우(項羽)와 함께 진군(秦軍)과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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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소개

 1. 항우(項羽) =
항적(項籍) 기원전 232년-기원전 202년

 진말(秦末)기 초(楚)의 무장이었고, 진(秦)에 대한 반역군의 핵심이 되어서 진(秦)을 멸했으며, 일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재위 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이라고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후부터 유방(劉邦)과 다투게 되었고(楚漢戰爭), 그러자 또 당초에는 압도적으로 우세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인심(人心)을 얻지 못하고 점차 열세가 되어서 전쟁에 패하고 죽었다. 그의 성(姓)은 항(項), 이름은 적(籍), 자(字)는 우(羽)였으며, 이하(以下)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항우(項羽)로 기록함. 항우(項羽)는 초(楚)의 장군이었던 항연(項燕)의 손자였으며, 그 항 씨(項氏)는 또 대대로 초(楚)의 장군 가(將軍家)였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숙부 항량(項梁)에 손으로 키워졌다. 그러나 또
사기(史記)에 의하면 <항우(項羽)는 글을 배웠어도 잘 기억하지 못했으며, 검술(劍術)을 배웠어도 실력이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항량(項梁)은 화를 냈다고 했는데, 하지만 정작 그는 <글이란 자신의 이름만 쓸 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검술을 배워서 한명만 상대해야 한다는 것은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만 명(萬名)을 상대로 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항량(項梁)은 몹시 기뻐하면서 그에게 병법(兵法)을 가르쳤는데, 그런데 또 그는 그 대충만 이해하게 되면 더 이상은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성인(成人)이 되자 신장이 8척(尺=약 184센티)이나 되었고, 괴력(怪力)까지도 소유했다. 그리고 진말(秦末)기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그도 항량(項梁)을 따라서 회계(會稽)로 들어갔고, 그리고는 당시 그곳의 군수였던 은통(殷通)과 그 외 수십 명의 관리들을 혼자서 다 처리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복종했고 항량(項梁)은 군수가 되어서 반란군에 참가했다. 그 후 항량(項梁)이 장한(章邯)에게 져서 사망하자 항우(項羽)는 그 복수로(그때는 이미 章邯은 떠나고 없었지만) 장한(章邯)이 한때 머물렀던 정도성(定陶城)으로 들어가서 그 주민들을 모두 몰살시켜버렸다. 그 후 항량(項梁) 사후(死後) 초군(楚軍)의 지휘를 누가 맡을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그 결과 항량(項梁)에게 자중을 진언했고, 또 제(齊)의 사자(使者)에게 항량(項梁)의 전사(戰死)를 예견했다던 송의(宋義)가 그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 후 송의(宋義)는 조(趙)의 장이(張耳)와 진여(陳余)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서 조(趙)로 군사를 보냈지만, 그러나 그는 진군(進軍)을 안양(安陽)까지로만 해버렸다. 그러자 항우(項羽)가 나서서 계속해서 진군해야 한다고 직소(直訴)했지만, 그러나 송의(宋義)는 <진(秦)이 조(趙)와 싸워서 약해졌을 때 친다!>라는 작전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에 납득을 할 수 없었던 항우(項羽)는 그를 죽여버리고 그때부터 실질적인 초군(楚軍)의 총대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제(齊)의 재상(宰相)이 되기 위해서 미리 떠났던 송의(宋義)의 아들 송양(宋養)까지도 뒤쫓아 가서 죽여 버렸다. 그 후 항우(項羽)는 함양(咸陽)을 향해서 북진(北進)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는 함양(咸陽)으로 가던 도중 거록(鉅鹿)을 포위하고 있던 진(秦)의 장한(章邯)이 인솔하던 20만이 넘는 대군과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거록(鉅鹿)의 낙성(落城)은 시간의 문제라고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조(趙)를 구원하러 왔던 각국의 군(軍)은 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우선 진군(秦軍)의 식료운반(보급, 병참)부대를 덮쳤다. 그러자 진(秦)의 대군은 곧 기아에 시달리며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 다음 항우(項羽)는 강을 건넌 후에 병사들에게 3일분의 병량(兵糧)만 주고는 남아있던 물자들과 함께 타고 갔던 배를 모두 물에 가라앉혀 버렸다. 그리고는 이어서 왕리(王離)의 군을 포위해서 장한(章邯)과의 연결을 끊었던 것과 동시에 장한(章邯)을 쳐서 대승했다. 그리고 왕리(王離)를 포획하는 것으로 해서 그 잔당들을 모두 없앴다. 그러자 진(秦)의 장군이었던 섭간(涉間)은 자살했다. 그 싸움에서 수(數)에서 열세였던 초군(楚軍)은 일당십(一當十)으로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전과(戰果)로 해서 각국은 항우(項羽)에게 복속했고, 그러자 항우(項羽)는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로도 항우(項羽)는 秦과 싸워서 연전연승했다. 그러자 결국 장한(章邯)도 항복했고, 그것으로 秦과의 싸움은 끝났다. 그런데 그때 항우(項羽)가 포획했던 포로들은 20만이 넘었는데, 그런데 그 포로들이 폭동의 기색을 보였으므로 항우(項羽)는 그들을 모두 모아서 신안(新安)이라는 곳에다 묻어버렸다.(다만,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만, 章邯 2 참조) 그 후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유방(劉邦)이 들어가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자 자신의 공적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항우(項羽)는 분을 참지 못하고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하술(下術)과 같이 '유방(劉邦)'은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이하, 後術 또는 省略함)

 
2. 항장(項莊-生沒不明)은, 초(楚)의 장군으로, 항우(項羽)의 사촌동생(조카라고 쓴 곳도 있음). 홍문(鴻門)의 회(會) 때, 범증(范增)이 검무를 추다가 기회를 봐서 유방(劉邦)을 죽일 것을 명했지만, 항백(項伯)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리고 <항장무(項莊舞)>는 그때의 상황을 극화한 무극으로, 조선 고종 10년(1873)에 평안도 선천 지방에서 유행하던 것을 궁중정재(宮中呈才-대궐 안의 잔치 때 벌이던 춤과 노래)로 만들었다고 한다.

 
3. 범증(范增-?부터 기원전 204년)은, 진말(秦末)기 초(楚)의 항량(項梁)과 항우(項羽)의 참모였고, 항우(項羽)에게서는 아부(亞父)로 불릴 정도로 경애(敬愛)되었던 인물이었으며, 거소(居巢) 출신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스스로 항량(項梁)을 찾아갔다.(당시, 그는 이미 70세 전후) 그리고는 <과거 초나라의 회왕 자손을 초왕에 옹립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의 말에 따랐다.(전술부분 참고) 그 후, 그는 계속해서 항량(項梁)과 함께 했던 것으로 생각되며(史記에서는 懷王 옹립 후부터 鴻門의 會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회왕지약(懷王之約) 후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 그때 이미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 있던 유방(劉邦)이 별 전리품(戰利品=일종의 약탈행위 등)도 챙기지 않고 있던 것을 보고는 <유방(劉邦)에게는 천하(天下)의 야망(野望)이 있다>라고 하면서 항우(項羽)에게 그를 죽일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前術한대로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자 범증(范增)은 몹시 분해하며 유방(劉邦)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릇을 깨부수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수자(豎子),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참고: 수자(豎子)는 풋내기나 애송이 등, 남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항우(項羽)를 의미함. 그리고 그 의미는 항우(項羽)의 우유부단(優柔不斷)으로 인해서 유방(劉邦)을 죽이지 못했으므로, 항우(項羽)와는 큰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는
뜻임.

 
아무튼 그 후, 항우(項羽)가 진(秦)을 멸망시키고 제장(諸將)들을 봉건(封建)했을 때, 범증(范增)은 또 <유방(劉邦)은 위험한 인물이므로 멀리 쫓아버려라>고 항우(項羽)에게 충고를 해서 유방(劉邦)은 변방이었던 한중(漢中)으로 쫓겨 갔는데, 그것이 좌천(左遷)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범증(范增)은 전술(前述-陳平 참조)했던대로 진평(陳平)의 계략에 빠져서 낙향하다 분을 삭이지 못하던 중, 등창으로 사망했고, 그것이 기원전 204년이었다.

 그런데 그때 항량(項梁)은 진군(秦軍)을 여러 번 물리쳤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사람이 갑자기 오만해져서는 결국에는 진군(秦軍)을 얕보다가 장한(章邯)에게 패해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유방(劉邦) 등은 원정(遠征)을 갔던 곳에서 군(軍)을 되돌려서 당시, 새롭게 반진군(反秦軍)의 근거지로 되어있던 팽성(彭城=江蘇省 徐州市)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또 그때 항량(項梁)을 죽이고 기세가 올라있던 장한(章邯) 군은 북쪽으로 진로를 바꾸고는 조(趙)를 공격해서 조왕(趙王)의 거성(居城)이었던 거록(鉅鹿)을 포위했기 때문에 조(趙)는 초(楚)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 거록(鉅鹿縣)은 하북성(河北省) 형대시(邢臺市)에 위치하는 縣이며,
형대시(邢臺市)는 중국(中國) 하북성(河北省) 남부(南部)에 있는 도시(都市)로, 구명(舊名)은 순덕(順德)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경한철도(京漢鐵道)를 따라서 석가장(石家莊)과 한단(邯鄲)의 중간(中間)에 있으며, 대행산맥(大行山脈)의 산록에 발달(發達)한 도시(都市)이다.


<형대 시의 위치도>

 

 그러자 회왕(懷王)은 송의(宋義)와 항우(項羽) 그리고 범증(范增)을 장군으로 삼고 조(趙)에 주력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주력군은 조(趙)에 있던 진군(秦軍)을 파(破)하고 함양(咸陽)으로 쳐들어가게 했던 한편 유방(劉邦)에게는 따로 별동대(別動隊)를 주어서 서쪽을 돌아 함양(咸陽)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면서 또 그때 회왕(懷王)은 소위 <회왕지약(懷王之約)>으로 <제일 먼저 관중(關中-咸陽을 중심을 했던 一帶)에 들어간 사람에게 그 땅을 줄 것이다>라는 약속을 했다.(이하, 項羽의 인물소개 참조)

 ※ 關中의 위치도(陜西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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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인물 소개>

 ※ 장한(章邯) 2

 그리고 그는 오광(吳廣)을 살해했던 전장(田臧)과 이귀(李歸) 등을 토벌했으며, 등설(鄧說)을 파했고, 제(齊)왕이었던 전담(田儋)과 그 부장(部將)이었던 주시(周市)를 임제(臨濟)에서 전사(戰死)시켰으며, 위(魏)왕이었던 위구(魏咎)를 분신자살시켰고, 허(許)에 있던 오서(伍徐)마저도 격파했다. 거기다 또 2세 황제로부터 원군으로 지원받았던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와 합세해서 진승(陳勝)의 본거지였던 진(陳)을 공격해서 기원전 208년에는 진(陳)의 서쪽에 있던 장하(張賀)의 군을 격파했고, 그것으로 진승(陳勝)을 패주시켰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반란군을 이끌고 있던 항량(項梁)을 패주하는 것처럼 사지(死地)로 유인한 후 야습(夜襲)을 감행(敢行)해서 죽였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조(趙)의 반란군을 공략했을 때는 최초로 수도 한단(邯鄲)을 파괴했으며, 그 다음으로 왕이(王離)와 소각(蘇角) 그리고 섭간(涉間)에게 시켜서 조(趙)왕(王)과 장이(張耳)가 농성하고 있던 거록(鉅鹿)을 포위하게 했다. 하지만 기원전 207년, 원군으로 달려왔던 항우(項羽)에게 소각(蘇角)이 전사했으며, 이어서 섭간(涉間)도 자결했고, 왕이(王離)는 포로가 되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져갔다. 거기다 또 항우(項羽)는 장한(章邯)의 군대 목전까지 진격하는 등, 진군(秦軍)은 연패(連敗)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을 수도로 보내서 황제의 지시를 청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역으로 궁중(宮中)의 부패와 조고(趙高)의 모함을 받아서 가족들이 모두 처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장한(章邯)은 사마흔(司馬欣)에게 <공(功)을 세워도 죽고, 공을 세우지 않아도 죽는구나!>라고 탄식하고는 은허(殷墟)에서 군사들과 함께 항우(項羽)에게 항복을 해버렸다. 하지만 또 그때, 항우(項羽)는 장한(章邯)과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동예(董翳)를 받아주기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들이 데려왔던 군사가 20만을 넘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초군(楚軍)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을 우려했던 항우(項羽)는 거짓으로 야습(夜襲)을 받은 것처럼 하고는 그 혼란했던 틈을 타서 진군(秦軍)을 단애(斷崖)로 유인했으며, 그리고는 전부 전락사(轉落死)시켜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3명은 나중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진(秦)의 백성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세 사람은 초군(楚軍)에 흡수되었고, 이어서 진(秦)이 멸망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사장(師將) 격이었던 범증(范增)은 항우(項羽)에게 <진인(秦人)의 통치는 진인에게 맡겨라!>고 조언했고,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세 사람을 각 왕(王)으로 세웠으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 동예(董翳)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참고바라며, 아무튼 또 항우(項羽)가 그렇게 했던 데는 한중(漢中)의 유방(劉邦)을 감시할 목적과 파촉(巴蜀)의 변경을 그들이 죽을 때까지 지키게 할 목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초(楚)의 그러니까, 일종의 항우(項羽)의 꼭두각시들이었을뿐만 아니라, 그 옹립되었던 경과 또한 진(秦)의 백성들을 몰살시키고 섰던 자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인사(人事)는 진인(秦人)들의 증오만 불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로 기원전 206년에는 유방(劉邦)의 장군 한신(韓信)이 이끌었던 부대가 관중(關中)으로 침입했을 때도, 촉(蜀)의 잔도(棧道)를 부흥한다는 명목으로 진창(陳倉)을 비밀 리에 지나갔으며(暗渡陳倉), 거기다 진인(秦人)과 함께 사전에 한신(韓信)이 미리 수배해두었던 한(漢)의 첩자가 은밀하게 그곳으로 인도해서 상대방이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그러자 또 장한(章邯)이 그 진창(陳倉)까지 나가서 맞섰지만 패배했으며, 다시 호치(好畤)에서도 패배, 그 다음에는 폐구(廢丘)에서 농성을 하면서 저항했지만, 하지만 기원전 205년이 되자 동생 장평(章平)이 포로로 잡혔고, 그리고 또 폐구(廢丘) 역시도 수공(水攻)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장한(章邯)은 자살했다.

 ♣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36계(三十六計) 중의 제8계(第八計)를 응용했던 것으로, 그 뜻은 <비밀리에 또는 은밀하게 진창(陳倉)으로 지나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여기서의 진창(陳倉)은 지명(地名)이다. 그리고 제8계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데 <示之以動, 利其静而有主. 益動而巽> 이것을 또 대충 해석을 해보면, 시위(示威)행위(行爲), 위장(僞裝)을 적(敵)에게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아군의 주력부대를 숨긴다. 그런 다음에는 움직임을 크게 하고(誇張), 그 여세를 몰아간다. 즉, 그 전체는 풍뇌익(風雷益)의 형상이며, 그리고 또 풍뇌익(風雷益)은 천둥소리 같은 굉음의 상태, 또 즉, 바람이 위에 있어 천둥(雷)의 세력을 더해가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말은 원래는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渡陳倉)>이었는데, 그것은 또 당시 관중(關中)에 있던 장한(章邯)을 한신(韓信)이 공격했을 때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던 말로, 대체적으로는 <촉(蜀)의 잔도(棧道)를 수리해나가면서 그 뒤편으로는 은밀하게 군사를 진창(陳倉)으로 향하게 한 후, 관중(關中)을 기습한다>라고 하는 위장공작과 기습작전을 아울러서 표현했던 전술(戰術)을 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촉(蜀)의 잔도(棧道)는 현재에도 전장(全長) 200km가 넘는다고 하며, 그래서 또 일찍이 이태백(李太白)도 <촉도(蜀道)난(難)-촉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구나 운운. 자세한 것은 본인의 글 한시의 산책을 참고 바람>을 노래했으며,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길로,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을 말한다. 그리고 또 보충으로, 현재의 중국어에서 그 암도진창(暗渡陳倉)이란 말은, 남녀의 밀회(密會)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므로, 사용하실 분은 조심해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 항백(項伯-?부터 기원전 192년)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전한(前漢) 초기에 걸쳐서 활약했던 정치가였고, 무장이었다. 그리고 자(子)에 항수(項睢-劉睢)가 있었고, 항우(項羽)의 숙부였으며, 항연(項燕)의 아들이었고, 항량(項梁)과는 형제였다. 그리고 또 참고로, 한서(漢書)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백(伯)은 자(字)였고, 이름은 전(纏)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초(楚)의 명문(名門)이었던 항(項)가(家)에서 출생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223년에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서 초(楚)가 멸망하자(王翦에 의해서) 그 후로 그는 각지를 떠돌면서 전전(轉轉)하다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옛 친구였던 장양(張良)을 찾아가서 자신의 신변을 의탁했다. 그 후, 시황제(始皇帝)가 죽었고, 그러자 항량(項梁)이 항우(項羽)와 함께 회계(會稽)에서 거병했는데, 그때 그도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좌윤(左尹-춘추시대 楚의 官名으로, 右尹과 함께 令尹을 보좌했던 직이었다)이 되어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의 행군(行軍)에 참가하면서 항우(項羽)를 보좌했다.(뒤의 본문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으므로, 中略함) 그 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사이가 나빠졌을 때, 항백(項伯)은 옛날에 입었던 은혜를 생각해서 장양(張良)에게 도망을 권고했지만, 그러나 장양(張良)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이어서 <홍문지회(鴻門之會)>가 열렸고, 항백(項伯)은 유방(劉邦)을 도왔다. 하지만 그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또 <해하(垓下)의 싸움>으로 추측되는 싸움 후에는 유방(劉邦)에게 귀순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홍문지회(鴻門之會)에서의 공을 인정해서 인척관계를 맺었던 것과 동시에 그를 사양후(射陽侯)에 봉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유방(劉邦)은 <항(項)성(姓)은 유(劉)씨(氏)의 세상에서는 결코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며, 그래서 또 나중에 항백(項伯)은 유(劉)씨(氏)를 사용할 것을 허락받아서, 이름을 유전(劉纏)으로 개명했다. 그 후, 그는 기원전 192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의 아들이었던 수(睢)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였던 기원전 186년에 그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봉지(封地)를 잃고 말았다.

 ※ 항량(項梁-?부터 기원전 208년)은 중국 진(秦)대 말기의 무장이었고, 반란군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계승해서 진(秦)에 대한 반란을 획책했지만, 그러나 또 진(秦)의 장군이었던 장한(章邯)에게 져서 죽었다. 그리고 역시, 항우(項羽)의 숙부였으며, 항백(項伯)과는 형제였고,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자칭했던 인물이었다. 항량(項梁)은 원래 역양(櫟陽)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데 부(父) 항연(項燕)이 죽고 나서 초(楚)가 멸망하자, 그는 연좌(連座)제에 의해서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는 당시 옥리(獄吏)였던 조구(曹咎)란 자와 그의 상관이었던 장사흔(長史欣-司馬欣)의 도움을 받아서 목숨을 구했는데, 그런데 또 그 후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복수를 피해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와 함께 오(吳)로 들어갔다.

 
♣ 장사흔(長史欣=司馬欣-?부터 기원전 203년)은 진(秦)의 장군이었고, 관직은 장사(長史-警備를 하는 官廳의 總務部長정도의 직급)였기 때문에 장사흔(長史欣)이라고 불렸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태생이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는 위의 내용대로 항량(項梁)이 포로로 잡혔을 때, 부하였던 조구(曹咎)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항량(項梁)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에는 조고(趙高)의 명을 받아서 장한(章邯)의 부장(副將)으로 종군했으며, 그 결과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을 평정했던 등 공을 세웠지만, 그러나 그 후에 장한(章邯)의 명령으로 조고(趙高)에게 원군을 요청을 하기 위해서 수도였던 함양(咸陽)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옛날 부하였던 자로부터 <조고(趙高)가 자신들을 처형할 것>이란 정보를 전해 듣고는 그 길로 바로 도망을 갔고, 이어서 장한(章邯)의 설득을 받아서 항우(項羽)에게 귀순해서 새왕(塞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 기원전 206년에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장군이 되었던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아서 적왕 동예(翟王・董翳)와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205년에도 수수(睢水)의 싸움에서 또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함께 다시 초(楚)에 항복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3년에는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있었던 조구(曹咎)와 함께 성고(成皋)를 지켰지만, 그러나 또 유방(劉邦)의 군대에 패해서 조구(曹咎),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함께 사수(汜水) 강변에서 자살했다. 하지만 또 사기(史記)의 항우(項羽)본기(本紀)에 <고조(高祖)4년(기원전 203년) 겨울에 성고(成皋)를 지키다 유방(劉邦)의 군대에 패해서 자살했던 인물로 조구(曹咎)와 사마흔(司馬欣) 그리고 장사예(長史翳)>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러나 그 장사예가 적왕 동예(翟王 董翳)였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재 불명(不明)이다.

 
○ 적왕 동예(翟王 董翳-생몰불상)는 진(秦) 말기의 사람으로, 항우(項羽)에 의해서 적왕(翟王)에 봉해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진(秦)의 2세 황제 때, 반란을 진압했던 장한(章邯) 아래서 도위(都尉-秦, 漢 때의 官職名으로, 郡의 軍事를 담당했다)를 지냈다. 그리고 그 후에 장한(章邯)이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그는 장한(章邯)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지만, 결국 항우(項羽)와 싸워서 패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진(秦)를 멸했다. 그 후,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는 관중(關中)을 3분(分)해서 장한(章邯)은 옹왕(雍王)에, 사마흔(司馬欣)은 새왕(塞王)에, 동예(翟王)는 적왕(翟王)에 각각 봉했고, 그리하여 그것을 삼진(三秦)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적왕 동예(翟王 董翳)는 그 중에서 상군(上郡)을 영토로 해서 고노(高奴)를 수도로 정했다. 하지만 그 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삼진(三秦)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옹왕(雍王)의 땅을 평정해서 장한(章邯)을 포위했다. 그러자 새왕(塞王)과 적왕 동예(翟王 董翳)는 유방(劉邦)에게 항복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적국(翟國)을 폐(廢)하고 상군(上郡)으로 돌아갔는데, 그리고 또 그 다음해,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공격해서 수도였던 팽성(彭城)을 점령했지만, 그러나 또 돌아가던 길에 항우(項羽)의 반격을 받아서 대패했다. 하지만 또, 위 장사흔(長史欣)의 내용대로 그들이 그때 자살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 적왕 동예(翟王 董翳)와 사마흔(司馬欣) 등은,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을 공격했을 때, 같이 따라갔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 뒤의 행적은 또 묘연하다.

 
그 후, 항량(項梁)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신망(信望)을 얻었고, 그리하여 진(秦)의 부역(賦役)에 나갈 인부(人夫)들을 배당했다든가, 장례식 등을 주관했던 등, 점점 그 지역에서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 사이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인재 발굴에도 힘썼는데, 그러던 중 기원전 209년에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진승(陳勝)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의 지배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당시 회계(會稽)의 군수(郡守)였던 은통(殷通)이란 사람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선수필승(先手必勝-남보다 앞서 행하면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도 이번 참에 진(秦)에 대한 반란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했소!>라고 하면서, 당시에 또 유력자로 알려져 있던 환초(桓楚)란 사람을 찾아내서 자신과 함께 거사에 동참할 것을 항량(項梁)에게 요청했다. 그리고는 항량(項梁)에게 자신의 장군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었는데,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 환초(桓楚)란 사람이 있는 곳은 자신의 조카인 항우(項羽)밖에 모른다>고 말을 하고는 항우(項羽)를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은통(殷通)과 초대면했던 자리에서 그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군수의 인(印)을 탈취했으며, 그리하여 항량(項梁)은 그때부터 스스로 그곳의 군수가 되었다. 덧붙여서 환초(桓楚)는 그 후에 항량(項梁)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동년(同年) 12월, 진승(陳勝)이 살해당하자 소평(召平)이란 자가 진승(陳勝)의 명이라고 속이고는 항량(項梁)에게 출병을 재촉했다. 그러자 항량(項梁)은 그 명을 받들어서 8,000여명의 정병(精兵)을 인솔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또 가던 도중에 진영(陳嬰)과 경포(黥布) 등의 군대와 합류해서 대군이 되었던 항량(項梁) 군대는 당시, 스스로 진승(陳勝)의 뒤를 이었다면서 초왕(楚王)이 되어 있었던 경구(景駒-楚王의 宗族)와 그 심복이었던 진가(秦嘉)를 공격해서 패주시켰다. 그 후, 반진(反秦) 군(軍)의 영수가 되었던 항량(項梁)은 거소(居巢)로부터 달려왔던 범증(范增)의 말을 받아들여서, 구초(舊楚) 회왕(懷王)의 손자였지만, 당시에는 양치기로 전락해 있었던 심(心=義帝)이라는 인물을 데려와서, 그의 조부와 같은 이름으로 초왕(楚王-懷王)에 옹립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항량(項梁)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으로 자칭하고는 북진해서 진군(秦軍)과 싸웠고 연전연승했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 삼천군(三川郡)의 태수(太守)였던 이유(李由=李斯의 장남)마저 제압하고는 자만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송의(宋義)란 자가 나서서 간언했지만 듣지를 않았고, 이어서 정도(定陶)에서 장한(章邯)에게 패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

 ♣ 송의(宋義-?부터 기원전 207년)는, 진말(秦末)의 사람으로 진(秦)에 반대해서 초(楚)로 가서 항량(項梁)의 휘하에 있었다. 그러다가 항량(項梁)이 죽자 총대장이 되었지만, 항우(項羽)와의 갈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는 항량(項梁)이 연전연승을 하고 교만해하고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이 항량(項梁)에게 조언을 했다. <장수가 몇 번 승리했다고 우쭐해하는 것은 병사들을 겁타(怯惰-겁이 많고 게으른 것)하게 하는 것으로, 그러면 필시 다음에는 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소수의 병사들이 그러합니다만(怯惰), 그러나 현재 진(秦)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단지 그것이 걱정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항량(項梁)은 그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얼마 후에, 송의(宋義)는 사자(使者)가 되어서 제(齊)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제(齊)의 사자(使者)를 만나서 이렇게 충고를 했다. <항량(項梁)은 곧 패하게 될 것이므로, 걸음을 늦추어서 재앙을 피하십시오> 그러자 그 사자(使者)는 그의 말에 따랐는데, 그러자 또 얼마 후에 항량(項梁)은 그의 말대로 장한(章邯)과의 싸움에서 져서 전사했다. 그 후, 그 제(齊)의 사자(使者)는 그때의 일을 초(楚)의 회왕(懷王=義帝)에게 전했다. 그러자 회왕(懷王)은 그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매우 기뻐하면서 그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했다. 그 후, 그는 항우(項羽) 등 여러 장군들을 통솔해서 조(趙)를 구했다. 그러자 그는 그때부터 경자관군(卿子冠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경자(卿子)는 듣는 이를 문어적으로 높여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로, 따로 공자(公子)로 칭할 수 있는 말이었으며, 관군(冠軍)은 상장(上將)의 뜻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그 송의(宋義)를 높여서 불렀던 이름이었다. 아무튼, 하지만 송의(宋義)는 그 도중에 46일간이나 체류를 했고, 그러자 또 병사들은 그러던 중에 내렸던 큰 비 때문에 추위와 기아(飢餓)에 떨어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행군을 재촉하던 항우(項羽)와의 갈등이 있었고, 그리고는 끝내 항우(項羽)의 칼에 살해당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 변명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했고 <송의(宋義)는 제(齊)와 함께 초(楚)에 반란을 꾀했다. 그래서 왕(王)이 비밀 리에 나에게 명을 내려서 그를 죽이라고 했고, 그래서 오늘 내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자 제장(諸將)들은 항우(項羽)를 따랐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의 아들이었던 송양(宋襄)도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의 죄(罪) 10개조(箇條)를 들었을 때, 그 두 번째가 <송의(宋義)를 죽였던 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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