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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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4. 관중입성(關中入城)
그렇게 해서 유방(劉邦)은 서쪽으로 별동대(別動隊)를 인솔해 갔지만, 그러나 그 군세(軍勢)는 항우(項羽) 군에 비해서 질(質)에서나 양(量)에서나 모두가 뒤떨어졌던 것이어서 유방(劉邦)은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야 고양(高陽=河南省 杞縣)이란 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유방(劉邦)은 유자(儒者)였던 력식기(酈食其)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가 대단한 유생(儒生)이라는 말을 듣고 그것이 싫어서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는, 또 여자들에게 자신을 닦게 하면서 그와 대면했다. 그러자 그것을 보았던 력식기(酈食其)는 유방(劉邦)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또 그제야 유방(劉邦)은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이 근처에 있는 진류(陳留)는 교통의 요지인데, 그곳에는 생필품이 충분하므로 그것을 구하시오! 그리고 또 그곳의 성주(城主)는 반진군(反秦軍)을 위협할 생각이므로, 그의 신분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는 이 편에 귀순하도록 설득하시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의 말대로 했는데, 그 결과 유방(劉邦)은 교통의 요지와 막대한 자금까지 피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 력식기(酈食其-?부터 기원전 204년)는, 중국 진(秦)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유생(儒生)으로, 진류고양(陳留高陽) 출신의 사람이었으며, 통칭은 력생(酈生 또는 酈先生)이었다. 하지만 또 <여식기>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라며, 아무튼 그는 가정은 궁핍했지만, 술을 아주 즐겼기 때문에 <고양(高陽)의 주도(酒徒=酒黨)>라고 불렸으며, 그리고 유방(劉邦)과 함께 하면서는 달변(達辯)의 소유자로 알려져서, 주(主)로 다른 집단(세력)들과의 화의(和議)나 교섭(交涉) 등 외교적인 부분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자식으로는 력개(酈疥)가 있었으며, 동생으로는 무장으로 활약했던 력상(酈商)이 있었고, 그리고 조카로는 력기(酈寄)가 있었다. 그는 또 진승(陳勝), 항량(項梁)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누구에게 의탁할지를 고민했지만, 그러나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은거(隱居)했다. 하지만 그 후에 유방(劉邦)이 진류(陳留)를 공격했을 때, 그는 스스로 유방(劉邦)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유방(劉邦)에게 진류(陳留)를 손쉽게 넣게 해주고 광야군(廣野君)에 봉해졌다. 그 후, 같은 세객(說客=遊說客)이었던 육가(陸賈)와 함께 제후들을 설득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 육가(陸賈-생몰미상)는 중국 전한의 학자, 정치가였고, 초나라 사람으로, 고조를 섬겼으며,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씨(呂氏)의 난에는 유씨(劉氏)를 도와서 한나라 왕실을 지켰으며, 저서로는 <신어>와 <초한춘추(楚漢春秋)>가 있었다.
아무튼, 기원전 206년에 그는 유방(劉邦)으로부터 <서위왕(西魏王=魏豹)을 설득할 수 있으면 1만호의 영주(領主)에 봉하겠다>라는 명을 받아갔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그 후에 한신(韓信)이 제(齊)를 공략했을 때, 그는 평화 교섭에 임해서 제(齊)의 성(城) 70여 곳을 귀순시키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공적이 그에게로만 돌아갈 것을 두려워했던 한신(韓信)과 당시 한신(韓信)의 심복이었던 괴통(蒯通)이 독단적으로 제(齊)를 공격해버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화가 났던 제왕(齊王) 전광(田廣)은 그를 삶아서 죽여 버렸다.
★ 위표(魏豹-?부터 기원전 204년)는, 중국 전국시대 후기부터 진대(秦代)의 정치가였고, 위(魏) 왕실의 일족이었으며, 서위왕(西魏王)이었고, 위구(魏咎)의 동생 또는 사촌동생이었던 사람이었다.
<아래 그림은 하남성과 개봉 위치도>


<개봉 시의 위치도>
그런 다음, 유방(劉邦)은 개봉(開封)을 공락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한(韓)으로 가서 당시, 적은 병력으로 고전하고 있던 한왕 성(韓王成)과 장량(張良)을 구원했고, 이어서 한(韓)도 재건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은의(恩義)로 장량(張良)을 객장(客將)으로 빌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또 그 기세로 다시 남양(南陽)을 공략했다. 그러자 그곳의 성주(城主)가 완(宛=河南省 南陽)이란 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래서 유방(劉邦)은 그곳을 포위하고는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때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는 달리 자신에게 항복을 해오는 사람은 그 前의 자격을 그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쓸데없는 전투 같은 것은 치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또 그 때문에 항우(項羽)보다 더 빨리 진군(進軍)을 할 수가 있었고, 그리고 드디어는 관중(關中)의 남쪽 관문인 무관(武關)에 도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 즈음에 조(趙)에서 항우(項羽)가 '진군(秦軍)'의 주력(主力)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진(秦)의 내부에서는 심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또 그때, 시황제(始皇帝) 사후(死後)에, 2세 황제를 괴뢰(傀儡)로 내세우고는 환관(宦官=內侍)이었던 조고(趙高)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패전(敗戰)이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다면 그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고(趙高)는 그래서 우선 2세 황제를 죽였다. 그리고 기원전 207년 유방(劉邦)에게 관중(關中)을 둘로 나누어서 서로 왕(王)이 되자는 밀서를 보냈다.
※ 조고(趙高-?부터 기원전 207년)는,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秦)까지의 환관(宦官)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는 또 처음에 조(趙)의 왕족으로서 태어났지만, 그러나 유년기에 모친(母親)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에 연루(연좌)되어서 궁형(宮刑=去勢)에 처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에는 의문을 가지는 역사가도 많으며, 또한 의심스러운 점도 많다. 그리고 또 실제로 그에게는 염락(閻樂)이라는 사위도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는 진(秦)의 관리를 지내던 중, 죄를 범했거나 해서 그 연좌(連座=緣坐)로 궁형에 처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빈가(貧家)에서 태어나서 많은 가족들을 위해서 스스로 내시(內侍)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또 실제로 그가 언제부터 시황제(始皇帝)에게 시중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등,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불명하지만, 하지만 또 그는 근면했고, 법률(法律)을 잘 알았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의 막내였던 호해(胡亥)의 보좌를 명받았다. 그리고는 그 후, 시황제(始皇帝)의 눈에 들어서 시황제(始皇帝)의 모든 신변잡무를 도맡아했다. 그는 또 시황제(始皇帝)의 다섯 번째 순행에도 참가했으며, 순행도중에 시황제(始皇帝)가 사망하자 이사(李斯)를 끌어들여서 유언을 조작했고, 태자 부소(扶蘇)를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호해(胡亥)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낭중령(郎中令=九卿의 하나로, 宮門을 주관하는 자리)에 취임했다. 그 후에 그는 호해(胡亥)를 궁중 깊은 곳에다 넣어두고는 호화로운 생활에 젖게 만들었고, 자신은 밖에서 모든 정무를 관리해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것은 또 당시, 승상이었던 이사(李斯)조차도 그의 허락 없이는 호해(胡亥)를 만날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가 폈던 정책은 기본적으로는 시황제(始皇帝)의 방침을 계승했던 것이었고, 그리고 또 황제의 권위, 즉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 부심(腐心)했으며, 또 아방궁(阿房宮)의 대규모적인 증축을 실시해서 백성들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했다. 그리하여 그의 공포정치(恐怖政治)는 많은 백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몽념(蒙恬)과 공자(公子) 장려(將閭) 등, 유력자(有力者)들과 불평파(不平派)들을 모두 무고죄(誣告罪)로 죽였다. 그러자 그 후, 진(秦)에서는 간신(奸臣=惡臣)들이 증가했고, 정치에 대해서 불평불만들이 늘어갔으며, 이어서 시황제(始皇帝) 재위 시의 풍부했던 인물들도 점차 고갈되어갔다. 그러자 나라는 곧 원망으로 가득 찼고, 이어서 발생했던 <진승과 오광의 난>을 계기로 전 국토에서는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자 그 사태를 우려해서 대책과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이사(李斯)와 현상유지를 주장했던 조고(趙高) 사이에 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자 조고(趙高)는 이사(李斯)를 중상모략해서 처형하고는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반란의 불길은 전국에서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고, 마침내 장한(章邯)의 군사마저 항우(項羽)에게 패하자 조고(趙高)는 군사의 증원은 커녕 오히려 장한(章邯)에게 그 죄를 물으려고 했으므로, 그에 장한(章邯)은 20만의 군사와 함께 항우(項羽)에게 항복을 해버렸다. 그리하여 진(秦) 제국의 붕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는데, 그리고 또 그 사이의 호해(胡亥)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이 함양(咸陽) 근처까지 진격해 오자 조고(趙高)는 그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반란을 획책했다. 그런데 또 그때 조고(趙高)는 군신(群臣)들이 자신의 말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한가지의 시험을 했는데, 그것은 또 이미 앞에서 소개가 되었지만, 어쨌든 그러던 하루 조고(趙高)는 궁중에 사슴 한 마리를 가져와서는 <이것은 아주 진귀한 말(馬)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호해(胡亥)는 <이것은 사슴이 아닙니까?>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조고(趙高)는 <아닙니다. 이것은 말입니다>라고 하면서 군신(群臣)들을 둘러보며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자 조고(趙高)의 권세를 두려워 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말>이라고 말을 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슴>이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조고(趙高)는 농담이라고 얼버무리면서 그 자리를 접었지만, 그러나 그 뒤에 그때 사슴이라고 답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잡아들여서 죽였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호해(胡亥)도 살해했고, 그 후에는 또 유방(劉邦)과 은밀하게 내통하려다 실패했으며, 이어서 덕망이 높았던 자영(子嬰)을 옹립해서 그 죄들을 모두 호해(胡亥)에게로 돌리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앞서 기술한대로 자영(子嬰)을 데리러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후, 자영(子嬰)은 유방(劉邦)에게 항복을 했고, 그 후 진(秦)은 멸망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것이 가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무관(武關)을 돌파했다. 그러자 그 후, 조고(趙高)는 자영(子嬰)의 계책에 넘어가서 살해당했다. 그런 다음, 유방(劉邦)은 요관(嶢關)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요관(嶢關)은 진(秦)의 최후의 보루(堡壘)였기 때문에 쉽게 돌파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그때도 장량(張良)은 그 수장(守將)이 상인출신이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가 계산에 아주 밝을 것이란 점을 이용해서 대량의 기(旗)를 겹겹이 세워서 군사가 아주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는 그 수장(守將)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그 계책은 맞아떨어져서 그 수장(守將)은 항복할 것을 약속했지만,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주위를 분산시키고 방심시키기 위한 작전일 뿐이었던 것으로, 장량(張良)은 그때 그 성의 병사들이 결사(決死) 항전할 것이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방(劉邦) 군은 그 성으로 들어가자마자 수비대를 불의(不意)의 습격으로 제압했고, 그렇게 해서 요관(嶢關)도 돌파되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유방(劉邦) 군은 거침없이 관중(關中)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제 남은 것은 진도(秦都)였던 함양(咸陽) 뿐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진왕(秦王) 자영(子嬰)이 유방(劉邦)의 진영까지 스스로 흰 소복(素服)에다 목에 끈까지 묶은 모습으로 찾아가서는 황제의 증거인 옥새(玉璽) 등을 내밀면서 항복을 구했다. 그러자 또 그때, 유방(劉邦)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자영(子嬰)을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함양(咸陽)에 입성했던 유방(劉邦)은 궁전의 미녀들과 재보(財寶)에 눈이 멀 지경이었지만, 그러나 번쾌(樊噲)와 장량(張良)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런 모습에서 유방(劉邦)의 도량과 부하에의 신뢰는 항우(項羽)와 대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런 것은 그 후의 천하통일에도 아주 큰 작용을 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또 덧붙여서(미리 기술되었지만), 바로 그 때에 소하(蕭何)는 진(秦)의 문서고(文書庫)로 들어가서 법령 등의 서적들을 모두 가지고 나왔고, 그것은 또 나중에 한(漢) 왕조가 성립한 후, 법 제정 등에 아주 큰 도움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5. 한왕(漢王)
아무튼, 그렇게 해서 패상(覇上=승리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유방(劉邦)은 관중(關中)의 부로(父老-그 동네에서 제일로 연장자의 의미로, 일종의 村長)들을 모아서 <법삼장(法三章)>이란 것을 발표했다.
※ 법삼장(法三章)이란, 중국 한나라 때, 고조가 진나라 때의 가혹한 법을 없애고, 단 세 가지의 죄만을 정했던 법으로, 그 내용은 또 사람을 죽이는 자는 같이 죽고,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자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그 후에 유방(劉邦)의 인기는 단번에 높아졌고, 이윽고는 <만약에 유방(劉邦)이 왕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법삼장(法三章)>이란 말은 후세에 간편한 법률을 나타내는 법(法) 격언이 되기도 했는데, 아무튼 또 그 무렵에, 동쪽에서는 항우(項羽)가 관중(關中)을 향해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어떤 사람의 <당신이 먼저 관중에 들어왔지만, 만약 항우가 관중으로 또 들어온다면 그 공적을 모두 그에게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문을 닫고 이대로 있게 된다면, 당신은 이대로 관중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그 관중(關中)을 지키기 위해서 관중(關中)의 동쪽 관문이었던 함곡관(函谷関)에다 병사들을 파견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마치 유방(劉邦)이 이미 관중(關中)의 왕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격분해서 영포(英布)에게 그곳을 깨부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관중(關中)으로 들어와서 40만의 군사로 유방(劉邦)을 멸하려고 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유방(劉邦)의 부하였던 조무상(曹無傷)이란 자가 그 기회를 이용해서 항우(項羽)에게 이렇게 아첨을 했다. <패공(沛公-劉邦)은 관중의 왕위를 노리는 한편, 진왕 자영을 재상으로 삼고, 관중의 보물들을 독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조무상(曹無傷)은 명사로 쓸 때는, 남을 참소하는 소인(小人)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유래는 위의 내용과 같이 유방이 항우와 대립했을 때, 유방을 헐뜯으며 죄가 있는 것처럼 항우에게 고해바쳤던 사람의 이름이 조무상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더욱 격노했는데,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또 바로 그때, 항우(項羽)의 숙부였던 항백(項伯)이 유방(劉邦)의 진중(陣中)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항백(項伯)은 이미 기술한대로, 일찍이 장량(張良)에게서 은혜를 입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혜를 갚아줄 생각으로, 당시의 위기적 상황에 있었던 유방(劉邦) 군으로부터 장량(張良)을 구출해내려고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또 이미 기술한대로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을 버리고 혼자서만 살아남는 것을 거절했고, 그러자 또 항백(項伯)은 장량(張良)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유방(劉邦)과 만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이하, 鴻門의 會 참조>
※ 홍문지회(鴻門之會-기원전 206년)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외곽에서 가졌던 회견의 고사(故事)이며, 초한전(楚漢戰)의 서막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날 아침, 유방(劉邦)은 홍문(鴻門)에 있던 항우(項羽)를 방문했다. 그러나 호위 군사는 모두 진외(陣外)로 물려져서 본영(本營)에는 유방(劉邦)과 장량(張良)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우선 항우(項羽)에게 겸손하게 사죄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들은 진(秦)을 토벌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사이로, 장군은 하북(河北)에서, 나는 하남(河南)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또 본의 아니게 이번에는 내가 먼저 관중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개 소인배가 하는 말에 현혹이 되어서 우리들의 그런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항우(項羽)가 이렇게 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부하인 조무상(曹無傷)이 가르쳐준 것이요!> 잠시 후, 연회가 시작되었고 그러자 항우(項羽)와 항백(項伯)은 동쪽으로 향하는 윗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범증(范增)은 그때 남향으로, 그리고 또 유방(劉邦)은 북쪽, 장량(張良)은 서향으로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범증(范增)은 연회 도중에 항우(項羽)에게 눈짓을 해서 유방(劉邦)을 베어버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때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이 계속해서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자신을 부추기고 있었으므로, 유방(劉邦)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자 범증(范增)은 세 번이나 신호를 더 보냈는데, 하지만 그래도 항우(項羽)는 그에 응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했던 범증(范增)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항장(項莊)을 불러서 축하의 칼춤이라면서, 검무(劒舞)를 추면서 유방(劉邦) 가까이까지 가서 죽일 것을 명했다. 그러자 항장(項莊)은 범증(范增)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그때 장량(張良)의 눈치를 읽었던 항백(項伯)이 갑자기 나타나서 항장(項莊)의 칼춤 맞상대가 되면서 그의 시도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그러던 중 또 장량(張良)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서 진외(陣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번쾌(樊噲)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그에 노했던 번쾌(樊噲)가 단번에 연석으로 뛰어들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전승(戰勝)의 흥을 돋우는 춤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니 그만두게 해주십시오!> 그리고는 항우(項羽)를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며 서있자 그에 검무(劍舞)는 중지되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호걸 상에 감탄해서 큰 잔이 넘칠 정도로 술을 부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번쾌(樊噲)는 그것을 받아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가 술을 한잔 더 권했는데, 그러자 또 번쾌(樊噲)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찌 술을 거절하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진왕(秦王)의 폭정 때문에 진(秦)에 등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회왕(懷王)은 제장(諸將)에게 이르기를 먼저 함양(咸陽)에 들어간 사람이 왕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다 또 패공(沛公)은 먼저 함양(咸陽)에 들어왔지만, 그러나 보물도 약탈하지 않고 장군(項羽)의 도착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저 함곡관(函谷関)에 군사를 배치시켜둔 것도 모두 도적들을 막고 또 비상 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은상(恩賞)도 받지 못했는데,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면, 진(秦)의 꼴을 따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자 항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 정도의 깊은 생각이라면 여기에 앉아도 좋다!> 그 후, 유방(劉邦)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항우(項羽)는 진평(陳平)에게 유방(劉邦)을 불러올 것을 명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이미 유방(劉邦)은 번쾌(樊噲)와 함께 홍문(鴻門)을 빠져나간 뒤였다. 그러자 또 그때 장량(張良)은 기치를 발휘해서 <패공(沛公)이 자리를 뜬 것은 술이 너무 취해서 실수를 할지도 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라고 둘러대고는 그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주고는 장량(張良) 역시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해서 회(會)도 다 끝이 났고, 그러자 장량(張良)이 두고 갔던 선물을 보고 있던 항우(項羽)에게 범증(范增)이 격노했다. 그리고는 그 선물을 검으로 깨서 부숴버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이번에 유방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필시 천하는 그의 손으로 들어갈 것이고, 우리는 머지 않아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런 한편, 유방(劉邦)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자마자 항우에게 중상모략을 했던 조무상을 죽여버렸다.
※ 영포(英布-?부터 기원전 195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구강왕(九江王)이었으며, 전한(前漢)초기의 회남왕(淮南王)이었고, 통칭은 경포(黥布)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六=現在의 安微省 六安縣) 출신의 사람으로, 젊었던 시절, 하루는 점을 보러 갔는데, 그 점쟁이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은 머지 않아 형벌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그 후에는 왕이 될 것이요!>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는 실제로 형벌을 받게 되었고 또 자청(刺靑=文身=과거에는 죄인들에게 印字를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죄인의 표시인 그 죄명을 문신한 것을 말함)까지 새기게 되자 몹시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왕이 될 일만 남았다!> 그 후, 진말(秦末)의 동란기(動亂期)에 그는 친구들과 시국(時局)을 논하다가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는 당시 진(秦)의 번양(番陽) 현령(縣令)이었던 오예(吳芮)와 제휴했고, 그 딸을 취했다. 그 후 그는 항량(項梁)의 휘하에 들어가서 당양군(當陽君)을 사용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항량(項梁)이 죽은 후에는 항우(項羽)에게 의탁했다. 그리고 항우(項羽)와 함께 반진(反秦)전쟁에 종군하면서 그 선진(先陣)으로 궂은일들을 많이 처리했다.(항복했던 진군이 반란의 기미를 보이자 20만 명을 생매장시킨 일 등)그 후,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의 부하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일설(一說)에 의하면 바로 그 직후에 항우(項羽)의 명을 받아서 당시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져 있었던 의부(義父) 오예(吳芮)와 함께 의제(義帝)를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로부터 그는 항우(項羽)와 사이가 나빠져서 제(齊)의 반란과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들려왔던 항우(項羽)의 구원요청도 거절하고 병을 칭하며 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팽성의 싸움 후 그는 유방(劉邦)이 보냈던 세객(說客) 수하(隨何)에게 설득당해서 유방 편에 서서 참전했지만, 그러나 항우(項羽)가 보냈던 항성(項聲) 용차(龍且) 군에 대패해서 유방(劉邦)에게로 망명했다.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항우(項羽)가 죽자 유방(劉邦)이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고 전한(前漢)이 성립했을 때 그는 회남왕(淮南王)에게 봉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렵부터 유방(劉邦)과 여치(呂雉)에 의해서 이성(異姓) 제후왕(諸侯王)들이 차례로 숙청되었다. 그것은 또 기원전 196년 봄에는 한신(韓信)이, 그리고 여름에는 팽월(彭越)이 반란을 계획했다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던 것이 그것이었는데, 거기다 또 팽월(彭越)의 시체는 그 일부가 소금에 절여져서 본보기로 영포(英布)를 비롯했던 제후왕(諸侯王)들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그에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던 영포(英布)는 반란을 계획했다. 그런데 또 그때, 자신의 가신이었던 비혁(費赫)이란 자가 그러한 사실을 유방(劉邦)에게 밀고했고, 그러자 또 영포(英布)는 어쩔 수 없이 동년 가을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처음에는 친정(親征)왔던 유방(劉邦)까지 화살로 상처를 입히는 등(유방은 결국 그 상처 때문에 사망했다) 기세를 올렸지만,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영포(英布) 군은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영포(英布)는 자신의 처(妻) 형제였던 장사왕(長沙王)·오신(吳臣)에게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되는 것이 싫었던 오신(吳臣)은 영포(英布)에게 같이 월(越)로 도망가자고 꾀었다. 그러자 그것을 믿었던 영포(英布)는 파양(鄱陽)까지 갔지만, 그러나 그곳 현지의 사람에게 살해당했다.(이유는 알 수 없음) 그리고 그때가 기원전 195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