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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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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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5. 한왕(漢王)
그러자 항우(項羽)는 더 이상 유방(劉邦)을 해칠 마음이 없어졌고, 그리고 또한 그 회합의 결과 그를 토벌할 명분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홍문(鴻門)의 회(會)>에 대한 소개이며,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자진(自陣)으로 돌아간 뒤, 곧 바로 배신자 조무상(曹無傷)을 죽여서 그 머리를 진문(陣門)에다 내걸었다. 그 후 항우(項羽)는 함양(咸陽)으로 들어가서 이미 항복을 했던 자영(子嬰) 등, 진왕(秦王) 일족들과 관리 4천명을 몰살했다. 그리고는 또 보물들을 다 빼낸 후, 그 화려했던 궁전들을 전부 다 불태웠으며, 거기다 또 시황제(始皇帝)의 묘를 파헤쳐서 보물들을 다 꺼냈다. 그러자 인심(人心)은 항우(項羽)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고, 그것이 또 유방(劉邦)이 천하를 얻게 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항우(項羽)는 그렇게 하고는 팽성(彭城)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칭했다. 그리고는 또 그때까지 명목상의 왕이었던 회왕(懷王)과 의제(義帝)를 숙청했다. 그 다음,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는 제후(諸侯)들에 대해서 봉건(封建=領地分配)을 실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공평했던 것으로, 그 기준은 공적(功績)에 따랐던 것이 아니라 항우(項羽)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드는가에 따른 기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그 직후에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에게 주어졌던 것도 그에게 보장되었던 약속의 땅 관중(關中)이 아니라, 변방도 거의 오지(奧地)나 다름없었던 서쪽의 한 변경지방이었던 한중(漢中)과 파촉(巴蜀=중국 四川省의 옛 호칭)이었다.
※ 한중(漢中)
중국 산시 성(陝西省) 서남쪽, 한수이 강(漢水江) 북쪽 기슭에 있는 지방으로, 쓰촨(四川)과 후베이(湖北) 두 성에 걸쳐 있는 요충지로, 한나라 고조의 근거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래는 現 한중 시와 四川省의 위치도임

<한중 시 위치도>

<사천 성의 위치도>
그래서 당시 유방(劉邦)을 <좌(左)쪽으)로 옮긴다>라고 했던 것으로부터 '좌천(左遷)'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그 관중(關中)이란 말에는 단지 '관중분지(關中盆地)'만을 가리켰던 경우와, 통일 이전 진(秦)의 영토 전역을 가리키던 말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고 해서, 그러므로 만약에 후자(後者)의 용법에 따르게 된다면 반드시 유방(劉邦)에게 관중(關中)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아무튼, 거기다 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의 동진(東進)을 저지하기 위해서 관중(關中)을 장한(章邯) 등, 과거 진군(秦軍)의 장군 3명에게 분할해서 지급했다. 그리고 또 당시의 한중(漢中)은 유형지로 생각될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는데, 그래서 또 그곳으로 가려면 <촉(蜀)의 잔도(棧道-험한 벼랑에 낸 길이며,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라고 불렸던 사람 한명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고 좁은 길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유방(劉邦)이 인솔해 가던 약 3만 명의 병사들은 그에 겁을 먹고 대부분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하지만 그때 남아 있던 병사들 또한 동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이 오로지의 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6. 한초전쟁(漢楚戰爭)
6-1 항우(項羽)와의 대결
그런데 그 시기에 유방(劉邦)의 진영에 새롭게 참여했던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한신(韓信)>이었다. 그리고 그 한신(韓信)은 원래 항우(項羽) 군에 있었지만, 그러나 항우(項羽)는 그의 재능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유방(劉邦)에게로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또 그는 유방(劉邦)에게 와서도 처음에는 단순한 병졸 또는 하급 장교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런데 그때 그의 재능을 간파했던 사람이 또 바로 <소하(蕭何)>였고, 그리고는 그 후, 전술(前述)한 대로 그는 소하(蕭何)의 추천을 받아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 인물소개
한신(韓信) ?-기원전 196년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었으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중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한신의 모습>
한신(韓信)은 회음(淮陰=화이인=現 江蘇省 淮安市) 출신으로, 처음에는 집안도 가난했던 데다 스스로의 품행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 마땅한 곳에다 적(籍)을 두지도 못하고 식객(食客)이라거나, 유협(遊俠)이라거나 하면서 건달 같은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강소성>

<회안 시=舊稱 淮陰>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모두 그를 업신여겼는데, 그런 이유로 해서 그는 한때 어느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집 주인도 그를 싫어해서 그에게는 식사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며칠 동안이나 굶으면서 방랑하다 어느 노녀(老女)를 만나서 며칠 동안 배불리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노녀(老女)에게 진정으로 감사해 하며 다음에 꼭 몇 갑절의 사례를 하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노녀(老女)는 그것을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말을 실천해서 <일반천금 즉, 밥 한 그릇으로 천금을 얻는다>라는 고사를 남겼다. 그리고 또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일화(逸話) 중에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과하지욕의 고사) 어느 날, 그는 마을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런데 그 남자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당신은 키도 크고, 언제나 허리에 검(劍)을 차고 다니지만, 내가 볼 때는 당신은 겁쟁이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증명으로, 그 검으로 나를 한번 찔러보라! 하지만 나를 찌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나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아무 말 없이 그 남자의 가랑이를 빠져나갔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또 모두 다 그를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때 그는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치욕(恥辱)은 한때이나, 뜻(志)은 일생(一生)이다. 여기서 내가 그를 죽인들 무슨 소용이나 있을 것인가? 다만, 원수만 만들게 될 뿐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이 발생하자 중국에서는 대규모의 동란(動亂)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기원전 209년 한신(韓信)도 항량(項梁)과 항우(項羽)를 따라다니면서 낭중(郎中)까지 되었지만, 그러나 항우(項羽)는 그가 올렸던 몇 번의 진언도 다 무시했다. 그러자 그에 실망했던 한신(韓信)은 기원전 206년에 항우(項羽)를 떠나서 당시 한중(漢中)으로 좌천(左遷)되어있던 유방(劉邦)에게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연오(連敖=接待係)라는 시시한 직(職)에 맡겨졌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죄를 짓고 동료 13명과 함께 참형(斬刑)에 처할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그는 하후영(夏候嬰)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한왕(漢王)은 천하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가? 어째서 장사(壯士)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는 실수를 범하려는 것인가?> 그러자 그에 흥미를 느꼈던 하후영(夏候嬰)은 그를 유방(劉邦)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유방(劉邦)은 그를 치속도위(治粟都尉=兵站官)에 임명했을 뿐, 그 후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그 직(職)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책임자였던 소하(蕭何)를 만나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곧 그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유방(劉邦)에게 몇 번에 걸쳐서 추천을 올렸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또 바로 그 즈음에, 한군(漢軍)에서는 도망병들이 속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 물론, 그곳은 변경 중에서도 오지(奧地)였던 곳으로, 그래서 당시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장군이란 자들까지도 그곳이 싫어서 도망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회의(懷疑)를 느끼고 있던 한신(韓信)도 결국에는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된 소하(蕭何)가 급히 그를 뒤쫓았다. 그리고는 한신(韓信) 붙잡아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내가 다시 추천을 할 것이니 같이 돌아갑시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직(閑職)이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나도 한(漢)을 버리겠소!> 그렇게 해서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때, 소하(蕭何)마저 없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던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를 오해하던 중 그들이 다시 돌아오자 강하게 힐책했다. 그러자 또 소하(蕭何)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저는 도망을 간 것이라 아니라 바로 저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장군들이 도망갔을 때는 꿈쩍도 않고 있다가, 하필이면 저 자가 도망을 갔다고 하니 그렇게 급히 달려갔는가?> 그러자 또 소하(蕭何)가 이렇게 답을 했다. <네, 그것은 저 사람이야말로 국사무쌍(國士無雙)으로, 타(他) 잡장(雜將)들과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계속해서 계실 생각이라면 몰라도, 만약에 그렇지 않고 언젠가 이곳을 떠나서 천하를 다툴 생각이시라면, 저 사람은 그때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마침내 유방(劉邦)은 소하(蕭何)의 진언(進言)을 들어주었고, 이어서 한신(韓信)을 전군(全軍)을 지휘하는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했다.
★ 국사무쌍(國士無雙)은 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선비(또는 신하)를 말함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후대(厚待)에 응해서 곧 바로 한중(漢中)의 북쪽에 있는 관중(關中)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책략을 말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항우(項羽)는 강하지만, 그러나 그 강함은 약해지기 쉬운 것이다. 즉, 항우(項羽)의 용맹함은 부인(婦人)의 인(仁)이요, 필부(匹夫)의 용(勇)일 뿐으로, 그는 스스로만 강할 뿐, 부하들을 중(重)하게 여기지 않는다든지, 은상(恩賞)을 내리는 것에 인색하다. 그러므로 유방(劉邦)이 그런 항우(項羽)의 역(逆)을 이용하면 쉽게 천하를 얻을 수 있다.
★ 여기서 부인(婦人)의 인(仁)이란 여자들의 의미 없이 구는 상냥함을 의미(실속이 없다)하며, 필부(匹夫)의 용(勇)이란 하찮은 남자의 용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신(韓信)이 항우(項羽)를 평가했을 때 썼던 말이다
2. 그리고 특히, 항우(項羽)는 처우(處遇)에 대해서 매우 불공평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불만이 아주 많다.
3. 그리고 이곳의 병사들은 모두 고향인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아주 큰 힘이 될 것이다.
4.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현재, 관중(關中)에 있는 3진(秦)의 왕(王)들은 20만이나 되던 병사들을 희생시킨 진(秦)의 장군들이므로, 그래서 민심은 이미 그들을 떠났다. 그러나 유방(劉邦)은 전에 그곳에 주둔했을 때 약탈도 하지 않았고, 또한 인기도 매우 많았으므로, 유방(劉邦)이 나서기만 한다면 관중(關中)을 쉽게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몹시 기뻐했으며, 다른 장군들도 그 인사(人事)를 납득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8월, 유방(劉邦)은 드디어 관중(關中) 공략에 나섰다. 그리고는 우선 방심하고 있던 장한(章邯) 군을 수공(水攻)으로 격파했으며, 이어서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도 격파했다. 그리고는 그 관중(關中)을 본거지로 삼고, 드디어 항우(項羽)와의 결전에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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