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잠시 후, 그는 하안(河岸)을 걸어가던 중에 가로등이 켜진 아래 벤치 하나가 있던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책을 꺼냈다. 그 책은 자신의 환자 중 한사람이었던 <호르헤 홀리오 사아베드라(Jorge Julio Saavedra)>란 사람이 썼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사아베드라(Saavedra)> 역시도 정식(正式) 학위(學位)를 가지고 있었던 <닥터>였고, 그것은 또 그 20년 전에 수도(首都)에서 받았던 명예박사(名譽博士) 학위였다.

 하지만 그는 그 책을 볼 때면 한번에 2,3페이지 이상은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책에 등장하는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 사람들>의 면면(面面)들은, 때론 소박(素朴)하거나 때론 영웅적(英雄的)이었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그것이 대체적으로 실제모델이 아닌, 현실감이 조금 떨어지는 인물들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 남()아메리카에서는 <루소(Rousseau, Jean Jacques-1712~1778.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1768~1848. 프랑스의 소설가, 외교정치가. 낭만주의문학의 선구자)><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철학자,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브라질에는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1767~1830. 스위스 로잔 태생의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여 활동한 수필가 겸 정치가)>의 이름을 딴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예사롭지 않은 바람이 바다로부터 불어와서 그렇지 않아도 건조했던 대지(大地)를 마구 휩쓸고 가고 있었고, 그래서 또 그때까지도 살아남아 있던 얼마 남지 않았던 식물들조차도 그 바람은 소금기로 말려죽이고 있었다. 모레노(Moreno)는 그런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때, 그의 아내가 <마테(Mate) ()>를 들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미 소개가 되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았던 <디킨즈><코넌 도일>의 글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아베드라>의 글 같은 것에는 솔직히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는 그런 내키지 않는 일도 의사로서의 의무(義務)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 <사아베드라><호텔 내셔널(Hotel national)>에서 정례(定例)의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사아베드라>는 분명히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그러면 또 자신은 그에 대해서 무엇인가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그 책을 읽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지겨워졌던지 그는 책 읽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는 <사아베드라>가 써두었던 헌정사(獻呈辭)를 읽어보았는데, 그 내용은 또 다음과 같았다. 

 <이 책을 친애하는 나의 친구이자, 상담(相談)상대인 닥터(Doctor) 에드워드(Edward)에게 보냄이 나의 처녀작(處女作)으로 내가 언제나 정치적(政治的)인 작가(作家)는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주길 바라며,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나의 영감(靈感) 최후의 결과를 보내드리니, 부디 충분히 만끽해주기를 기대함>

 

 그런데 그 <사아베드라>는 사실 <과묵(寡黙)>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자신을 이상화(理想化)했던 것이 바로 그 책의 주인공인 모레노(Moreno)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그는 <사아베드라>가 자신의 크리스천 이름 중 하나인 <모레노>를 자신의 책 주인공에게 붙여준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때까지 자신처럼 벤치 같은 곳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단 한 번도 봤던 적이 없었다그곳의 벤치들에는 항상 부랑자(浮浪者)들이 마치 제 자리인 양 누워 있었다거나, 어떤 때는 물건을 사서 돌아가던 피곤해 보이던 여자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든지, 또는 가끔씩 연인들이 손을 잡고 앉아 있곤 했던 것만 그는 보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가 책을 밖으로 들고 나와서 그런 벤치에 앉아서 읽던 버릇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또 과거 그의 아버지는 어디를 다녔든 항상 책을 들고 다녔고, 그래서 또 그는 당시 그 고향(故鄕)의 오렌지 향기가 가득했던 대기(大氣) 속에서 <디킨즈>의 전작(全作) <크리스마스캐럴(A Christmas Carol)>을 제외한 전 작품을 독파(讀破)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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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하지만 그가, 그 국경 근처 강(江)가의 조그만 항구 동네로 가려고 결심했을 때, 그 역시도 그곳이 차후에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단지 막연한 느낌과 함께 <그곳으로 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굳이 그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자신의 과거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또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정도로 말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또 어떤 때 그가 알고 있었던 어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을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려는 것은, 가능하면 내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는 또 그때, 그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은 다 어디에다 두고, 한 명의 평범한 여인으로 그저 늙어가고만 있는 듯 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또 그럴수록 과거 <에스탄시아>에서 살았던 때를 잊지 못하고도 있었는데, 그것은 또 그때는 자신의 아버지도 함께였고,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뭔가 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때마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너무도 강렬해져서 가능하면 국경 근처로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으며, 그곳에서 밀항이라도 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그 강가의 조그만 동네를 그렇게 쉽게 선택했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항구를 뒤로 하고 강의 토제(土堤-흙으로 쌓아올린 제방)로 떨어지던 석양을 바라보면서 산책을 이어갔다. 그러자 하늘은 금방 어두워져서 우모(羽毛-깃털) 같았던 연기를 분간할 수도, 대안(對岸)의 토제(土堤) 능선(稜線)을 보는 것도 힘들어져갔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동네와 <차코>를 왕복하던 어떤 배의 등불이 아주 도도하게 남쪽으로 흘러가던 강을 거스르면서 마치 빛이 나는 연필로 천천히 파문(波紋)의 사선(斜線)을 그리듯이 하면서 그가 있던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늘에서는 <오리온(Orion)>의 <삼형제별(세 개의 마리아별)>이 정말로 <로사리오(Our Lady of the Rosary-성모마리아)>의 모습처럼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十字架) 같이 생겼던 것은 그것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그는 문득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사람이 아닌 또 다른 대화상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런 심정을 기탄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하지만 그가 알기로 그 동네에서 영국인은 단 두 명밖에 없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대학(大學)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면서도 자칭(自稱) <늙은 영어선생>이라던 <닥터(doctor) 험프리즈(Humphries)>가 있었고, 그 노인(老人)이 그때 살고 있던 곳은 <호텔 볼리바르(Bolívar)>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사람은 바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명예영사(名譽領事)> <찰리 포트남(Charlie Fortnum)>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몇 개월 전부터 <찰리 포트남>의 부인과 불륜(不倫)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으로 해서, 그 이후로부터는 왠지 <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거북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면 <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 물론 가벼운 <죄의식>에 의해서였는지도 몰랐지만, 하지만 그보다 <찰리>가 자신의 부인의 정절(貞節)을 꼭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더욱 안타깝게 보여서 그랬던 것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또 그 <찰리>는 그의 부인이 임신 초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신체의 부조(不調)로 인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보다는, 그것(임신)이 마치 자신의 대단한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자랑을 하듯 찬사(讚辭)를 늘어놓는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닥터 에드>는 아연해져서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사 님, 그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인지나 알고 그러십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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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그리고 또 그가 14세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왜 그 강(江)에 면(面)했던 고도(古都)의 항구(港口)에서 머물게 되었는지에 대한 동기(動機)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Argentina共和國의 首都이자, 聯邦區)>에서 세월을 꽤 보냈던 후에, 이윽고 그 역시도 망명자(亡命者)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또 그 몸서리칠 정도로의 서류(書類)들과, 질릴 정도로의 관청(官廳) 출입(出入) 등에 시달리면서 그런 것을 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단순(單純)한 <로마(Roma)인>들처럼, 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며, 그래서 또 생활 조건이 어느 정도 복잡(複雜) 기괴(奇怪)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로마인>들은 실제로 <스페인어(語)>가 <로마어(語)>에서 생겨났던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만큼 정말로 단순(單純)한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마치즈모(machismo)> 즉 <남자의 기백(氣魄)> 또는 <남자다움> 또는 <남성(男性)스러움>으로 통용(通用)되던 <남자(男子)의 명예(名譽)>는 <스페인어>로 <미덕(美德)>과 동의어(同義語)였다. 그래서 <용기(勇氣)>라든가 <견인불발(堅忍不拔-굳게 참고, 견뎌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같은 말은 실제로는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아버지도 외국인(外國人)으로서 그 <남자의 명예>란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당시 날로 증대(增大)되고 있었던 <파라과이> 국경(國境)의 위험(危險)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그곳으로 갈 결심을 했던 것인지도 몰랐는데, 그것은 또 그때, 그 항구(港口)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를 전송하기 위해서 그 항구에 도착했던 것은 그때와 거의 마찬가지로 석양(夕陽)이 내려앉으려고 했을 때였고, 그 후에 두 사람은 시끄러운 남부(南部)의 수도(首都)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정치적인 데모> 때문에 출발이 몇 시간 지연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곳에는 마치 빵가루를 바른 듯했던 화장(化粧) 회칠(灰漆)의 식민지풍의 집들이 강변의 도로가에 줄지어 서있었고, 연인(戀人)들은 벤치에 앉아서 서로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던 <나부(裸婦)의 상(像)>이라거나, 흔해빠진 <아일랜드인>의 이름을 붙였던 어느 제독(提督)의 흉상(胸像), 그리고 청량음료(淸凉飮料) 판매대 위에나 놓일 법했던 아주 크고 잘 익은 어떤 과일 같이 컸던 외등(外燈) 등, 그때까지 그가 전혀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마치 <평화의 상징>처럼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그곳의 고층빌딩과, 교통장해와, 패트롤카들과, 구급차들의 사이렌소리와, 말에 올라탄 영웅들의 조상(彫像)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졌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자격(資格) 있는 의사(醫師)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 북부(北部)의 작은 마을로 가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당시, 그 수도(首都)에서의 친구들과 찻집에서 알았던 사람들 그 누구도 그가 왜 그 북부(北部)의 작은 마을로 가려는 지에 대해서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턱대고 <그곳은 날씨가 덥다>거나 <습도가 높아서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를 해댔고, 무엇보다 <그런 무료한 곳에서 견뎌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는 폭력사건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료한 곳>이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미소(微笑)로만 답을 했을 뿐이었는데, 그것은 또 일단 그런 결심을 한 후에는 그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그 미소는 마치 그의 아버지가 희망을 품었을 때 지었던 미소와도 같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헤어진 후, 꽤 긴 시간동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편지는 단 한통뿐이었다. 그리고 그 봉투에는 <자신과 어머니 두 사람 앞>이라고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글자는 <아내와 아들>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식적으로 투함(投函)되어서 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파트의 문 밑 틈으로 누군가 밀어서 넣어져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와 그의 어머니가 그곳으로 갔던지 4년째나 되었을 때의 어느 날 저녁, 세 번째로 봤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런 지나간 영화가 <리바이벌> 되는 것을 놓치는 법이 없었는데, 그것은 또 아마도 그런 옛날 영화나, 거기에 출연하는 옛날의 <스타>들을 보고 있으면, 그 시간만은 내전(內戰)이라거나, 위험(危險)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역시,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었던 <클라크케이블>과 <비비안 리>도 탄환(彈丸)이 날아다니던 그 전화(戰禍) 속에서 용감하게 빠져나오는 훌륭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편지의 봉투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고, 겉봉투에는 <직송의뢰(直送依賴)>라는 글자가 함께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직송(直送)을 했던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며, 다만 편지를 보냈던 곳이었던 듯 <에스탄시아(estancia-아르헨티나의 온대초원 pampas에 있는 대목장 등, 또는 라틴아메리카나 에스파냐어 권에서의 광대한 목장이나, 농장을 의미함)>라는 고딕체의 글자가 겉봉투에 화려하게 인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의 편지지도 일반편지지가 아닌, 그냥 선이 그어져 있던 공책을 아무렇게나 찢어서 쓴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은 항구(港口)에서 헤어졌을 때와 같이 온통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대충은 또 <사태(事態)는 이제 곧 마무리 될 것이므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는 등의 글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쓴 날짜는 쓰여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또 그 <희망(希望)>이란 것도 그 편지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모두 끝났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그래서 또 그와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혔는지, 아니면 어느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사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는데, 어쨌든 그 편지의 마지막에는 <스페인 식>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무사히 지내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서 아주 큰 위안(慰安)이다.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헨리(Henry)로부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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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순수한 허구이므로, 본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국가, 배경, 도시 등은 모두 사실과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19>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읽으시려는 분들은 주의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앞의 2016년 1월에 올렸던 것인데, 자료가 심하게 훼손되어 수정하는 차원에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한다

선은 악과
관용은 정의와
종교는 정치와...

 <토마스 하디>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닥터(Doctor) 에드워드(Edward)>는 <파라나 강(江)>의 작은 항구(港口)에서 선로(線路)와 황색(黃色)의 크레인(crane)이 있던 곳 중간에 서서 대안(對岸)의 차코(Gran chaco-남아메리카중남부 Andes산맥과 Paraguay강 사이에 펼쳐지는 평원) 지방(地方) 위로 수평으로 길게 펼쳐졌던 우모(羽毛) 같았던 연기(煙氣)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석양(夕陽) 속에 있는 어느 나라 국기(國旗)의 줄무늬 같이 보였는데, 그리고 또 그때, 그 근처에는 <해운회관(海運會館)>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수부(水夫) 한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시각에 그곳에는 자신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엷게 번지는 빛과, 무언가 알 수 없는 식물의 향기 또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에 말려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또 어쩌면 유년(幼年)의 의식(意識)과 미래(未來)에의 희망(希望) 또는 그때는 완전히 잃어버렸던 지난 일의 의식(意識)을 다시 불러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석양(夕陽)의 느낌과도 비슷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로(線路)와 크레인, 그리고 <해운해관>. 그것은 <닥터 에드>가 그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세월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러나 단 하나, 그가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한줄기 연기(煙氣)만이 <파라나 강> 저쪽 편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 새로웠다면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그 <공장(工場)>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처음 왔을 때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때 그가 <파라과이(Paraguay-남아메리카 중남부에 있는 나라. 1811년에 에스파냐에서 독립하였다. 목축과 임업이 발달하였으며, 주민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이고 주요 언어는 에스파냐 어이다. 수도는 아순시온, 면적은 40만 6752㎢)>에서 주(週) 1회 정기선(定期船)을 타고 그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벌써 20년도 더 전(前)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 그는 <아순시온(Asunción-Paraguay공화국의 수도. 필코마요 강이 합류되는 파라과이 강 연안에 위치한 최대의 무역항이며, 유통과 수출의 중심지)>의 선창(船艙)가에서 헤어졌던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작은 배의 좁은 트랩(trap-사다리)에 서서 장신(長身)에다 백발(白髮)을 흩날리면서 기계적(機械的)인 낙천주의(樂天主義)의 어조(語調)로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아들아, 우리 금방 다시 만나자!>

 

 그래서 그때, 그는 1개월 아니면 넉넉잡아서 3개월 정도면 다시 아버지와 재회(再會)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헤어지던 그의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마치 속삭이듯이 <우리 빨리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눕시다...> 라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경의(敬意)를 다했던 태도로 입을 맞췄을 때는, 당시 14세였던 그에게서도 거의 이국적(異國的)이란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히 <영국인(英國人)>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는 <스페인(Spain)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여권(旅券)에 기록된 국적(國籍)을 넘어서, 눈(雪)과 안개에 싸여있는 전설(傳說)의 섬 영국(英國)과, 디킨즈(Dickens, Charles-영국의 소설가, Oliver Twist 등을 썼음)와 코난 도일(Arthur Lgnatius Conan Doyle-Sherlock Holmes로 유명한 작가)이 태어났던 그 섬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10세의 어린 나이에 그곳을 떠났던 그의 아버지가 그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영국(英國)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당신의 양친(兩親) 즉, 그의 조부(祖父)와 조모(祖母)가 사주었다던 그림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런던(London)의 파노라마(panorama)>였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헨리>가 자신이 어렸을 자주 보여주었던 책이었는데, 그 안에는 회색(灰色)의 사진으로 <버킹검궁전(Buckingham Palace)>이라든가 <런던탑(the Tower of London)> 그리고 <2인승마차(馬車)>와 <상자마자(箱子馬車)> 그리고 <긴치마를 입은 숙녀(淑女)>의 사진 등, 많은 사진들이 해설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 바로 직후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망명자(亡命者)의 신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곳은 <망명자(亡命者)들의 천국(天國)>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또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왔던 사람들과 <체코, 폴란드,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망명을 왔던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디킨즈(Dickens)>를 읽기 시작했던 그 어렸을 때부터, 마치 외국인(外國人)이 그 책을 읽는 것처럼, 그 책에 쓰인 것들은 그 당시에도 전부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 그 당시의 그로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또 그것들은 예를 들어서 <집행관(執行官)>이라든가 <장의사(葬儀社)>들, 또는 <올리버트위스트(Oliver Twist)>가 마치 <러시아인>들의 믿음처럼, 그때 그곳에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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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166년


 대진(大秦=로마)의 왕 안돈(安敦)이 사자를 보내왔다



 후한서(後漢書) 권 88 열전(列傳) 78 <서역(西域) 대진(大秦)>

 [至桓帝延熹九年, 大秦王安敦遣使自日南徼外獻象牙, 犀角, 瑇瑁, 始乃一通焉]

 해석해보면...

 [환제(桓帝) 연희(延憙) 9년(166년)에 대진(大秦)의 왕 안돈(安敦=안톤)이 파견했던 사자가 일남군(日南郡)을 방문해서 상아(象牙)와 서각(犀角), 대모(玳瑁)를 헌상했다]

 이며...

 그리고 위, 안돈(안톤)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였거나 또는 그 선대(先代)의 황제였던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안토니우스>란 음을 묘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86-161

 로마의 황제. 관리의 지위를 안정되게 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는 등, 관대하고 온건한 통치를 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161년이며, 상세한 것은 차기 또는 생략함.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

 로마의 황제.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였고, 제국 동쪽과 도나우 강 양쪽의 변경 방어에 힘썼으며,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서 전장의 참호 속에서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재위기간은 161년-180년이며, 이하 상세한 것은 차기 또는 생략함.

 





 그리고 또, 로마 측의 사서(史書)에서는 사자를 파견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그리고 그 헌상 품이었다는 것도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나온 물건이었던 것 등으로 미루어서, 그래서 아마도 당시 로마의 상인 누군가가 자신을 로마황제의 사자라고 속이고는 중국과의 무역을 기도(企圖)하려고 그렇게 했던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될 뿐이다. 그리고 또한, 그 일남군(日南郡)이란 곳은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중부 도시 <후에> 부근에 있었던 후한(後漢)의 군(郡)이었다.
그리고 또, 상아(象牙)는 코끼리의 엄니이며, 서각(犀角)은 코뿔소의 뿔, 그리고 대모(玳瑁) 또는 대모갑(玳瑁甲)은 바다거북의 껍질을 의미한다.


 166년


 당고(黨錮)의 금(禁)이 일어나다



 당고(黨錮)의 금(禁)=당고지화(黨錮之禍)

 후한(後漢) 말기에 일어났던 탄압사건으로 <당고(黨錮)의 화(禍)>라고도 한다. 그리고 당시, 환관(宦官) 세력에 비판적이었던 청류파(淸流派) 사대부(士大夫=黨人) 등을 환관들이 탄압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많았던 것이 금고형(禁錮刑=그러나 현대의 금고형과는 다른 것으로, 그때의 금고형은 관직에서 추방하는 것과 出仕를 금지시켰던 것을 말했다)에 처해졌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건은 166년<연희(延熹)9년>과 169년<건녕(建寧)2년> 2번에 걸쳐서 발생했는데, 그래서 앞의 것을 <제1차 당고(黨錮)의 금(禁)>, 뒤의 것을 <제2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뒤에 쓰게 될 삼국지(三國志)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배경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면, 그러니까 후한(後漢)의 화제(和帝)가 두헌(竇憲) 등을 배제(排除)하려 했던 환관(宦官)들을 등용한 이후, 그 환관들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갔다. 그러자 그들은 곧 자신들의 이권(利權)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그리하여 외척들이 전횡(專橫)을 했던 때 이상으로 오직(汚職=瀆職)이 만연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러했던 상황에서 일부 사대부(士大夫=豪族)들은 스스로를 청류파(淸流派)라고 이름을 짓고는 도당(徒黨)을 조직했고, 그리고는 환관 또는 그들과 결부되었던 세력들을 탁류파(濁流派)라고 매도하면서 공공연하게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불붙기 시작했던 사대부(士大夫)들과 환관(宦官)들의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하게 발전해갔는데, 그리하여 또 166년, 사례교위(司隷校尉)였던 이응(李膺)과 태학(太學)의 학생이었던 곽태(郭泰) 그리고 고표(賈彪) 등, 이른바 청류파(淸流派)라고 자칭했던 일단(一團)의 무리들이 조정(朝廷)으로 몰려가서 중상시(中常侍)의 전횡을 비판하며 그 죄상(罪狀)을 고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중상시(中常侍) 등이 <黨人들이 조정을 비방했다>라는 역공(逆攻)을 받아서 오히려 체포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그들은 호족(豪族)들의 구명(求命)운동으로 인해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는 종신(終身)금고(禁錮) 형에 처해졌으며, 그리고 여기까지가 제1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제2차의 禁은 169년에 일어났으며, 그래서 그에 대해서도 설명을 조금 하면, 당시 외척이었던 두무(竇武)와 청류파(淸流派)의 당인(黨人)이었던 진번(陣蕃) 등이 결탁을 해서 환관들을 배제하려 거병했지만, 그러나 그 거병은 실패했고 이어서 두무(竇武)는 자살했다. 그러자 다시 그 관련자들에게 탄압이 내려졌고, 그러자 그것을 제2차 당고(黨錮)의 금(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176년에는 그 금(禁)이 당인(黨人)들의 일족(一族)에까지 확대되었는데,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황건(黃巾賊)의 난(亂)이 발생하자, 그들이 그 난에 가담할 것이 두려웠던 한(漢) 조정으로부터 그 금(禁)이 풀리게 되어, 그에 그 금(禁)은 종결되었다.

 하지만 또 그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압되자 십상시(十常侍)를 시작으로 했던 환관들과 당시 외척이었던 하진(何進)과의 사이에서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환관들은 그 하진(何進)을 모살(謀殺)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하진(何進)을 죽인 것에 격노했던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등의 군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던 것으로 해서 그들은 모두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환관과 외척의 권력투쟁은 공도동망(共倒同亡)의 형태로 종결되게 되는데, 하지만 또 그 틈을 타서 낙양(洛陽)을 점거했던 동탁(董卓)에 의해서 후한(後漢)의 왕조는 통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하다



 십상시(十常侍)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영제(靈帝) 시대에 전권을 장악했던 환관의 무리를 이름.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중심으로 하운(夏惲), 곽승(郭勝), 손장(孫璋), 필람(畢嵐), 율숭(栗嵩), 단규(段珪), 고망(高望), 장공(張恭), 한회(韓悝-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한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참고 바람), 송전(宋典) 그 12명의 중상시(中常侍)를 가리켰으나, 하지만 그 어림수(槪數)로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환관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상에서 권력을 쥐게 되었던 것은 환제(桓帝) 때, 외척이었던 양기(梁冀)의 배척에 공을 세웠던 단초(單超)와 서황(徐璜) 그리고 구원(具瑗)과 좌관(左悺) 그리고 또 당형(唐衡) 그 5명을 중용하며 그들을 <5후(侯)>라고 불렀던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단초(單超)가 죽어버리자 오만했던 5후(五侯)도 실각했다지만, 하지만 또 그 후의 영제(靈帝) 때 후람(侯覽)과 조절(曹節) 그리고 왕보(王甫)란 자가 또 나타나서 당고(黨錮)의 금(禁) 등 무수한 정쟁(政爭)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의 권세는 하늘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에 여남원 씨(汝南袁氏) 같은 명문(名門)에서도 원사(袁赦)와 같은 환관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후람(侯覽)은 자살했으며, 왕보(王甫)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하지만 조절(曹節)만은 181년까지 살아남아서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조절(曹節) 사후(死後)에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렸던 환관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이 기록상으로 확인되고 있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당시 영제(靈帝)의 총애를 흠뻑 받으면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도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의 권력은 실로 엄청나서 당시 그 두 사람에게 황제는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고까지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들은 자신의 일족들을 지방관(地方官) 등, 모든 요직에 앉혔으며, 백성들을 마구 착취했고, 그러자 또 그런 것을 걱정하던 사람들을 잡아들여서는 정신이상자로 몰아서 처벌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여강(呂强)이나 장균(張均) 같은 양식(良識)있던 인물들이 그들을 탄핵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십상시(十常侍)의 모략으로 처벌되었다. 그러자 또 그들의 권세에 힘을 입어서 관직을 얻으려던 사람들이 그들의 문전에 줄을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또 그때, 그런 어수선했던 틈을 타서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했다. 그러자 환관들 중에서 봉서(封諝)란 자 같은 내통자가 나와서 환관들의 세력은 축소되었다. 그런데다 또 그 후, 외척에서 나왔던 대장군 하진(何進)이 십상시(十常侍)를 필두로 했던 환관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진(何進)은 영제(靈帝)가 죽자 영제(靈帝)에게서 총애를 받았던 환관 건석(蹇碩)을 살해했으며, 이어서 환관의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서 군세(軍勢)를 모으려고 했지만, 하지만 또 장양(張讓) 등이 하태후(何太后)를 이용해서 함정으로 그를 유인한 뒤 살해하고는 그 난국을 수습했다. 하지만 또 그때, 이미 전술한대로 하진(何進)의 죽음을 듣고 격노했던 원소(袁紹) 등이 궁중으로 난입했고, 이어서 환관들과 그 세력들을 거의 다 몰살했다. 그런데 또 그때, 장양(張讓)과 단규(段珪)는 황제였던 유변(劉弁)과 한(漢) 최후의 황제가 되는 유협(劉協)과 함께 도망을 쳤는데, 그러나 뒤쫓아 오던 추격 군을 뿌리칠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리하여 강에 투신해서 자살했으며, 그때가 189년이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는 그 두 황제를 보필하겠다고 나섰던 동탁(董卓)이 십상시(十常侍)를 대신해서 권력을 잡게 된다.

 아무튼 그 후, 후한(後漢)으로부터 선양(禪讓)했던 위(魏)가 세워졌고, 그러자 환관들의 작태를 뼈저리게 경험했던 그들은 더 이상 내시에게는 권한을 주지 않는 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그 십상시(十常侍)를 張譲, 趙忠, 封諝, 段珪, 曹節, 侯覧, 蹇碩, 程曠, 夏惲, 郭勝 10명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曹節과 侯覧은 張譲과 趙忠이 나타나기 이전에 王甫 등과 함께 권력을 누렸던 환관이었다.

 

 하진(何進)


 하진(何進) ?-광희(光熹) 원년(元年) 8월 29일(189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정치가. 자(字)는 수고(遂高). 남양(南陽=河南省南陽) 완(宛) 출신. 이모매(異母妹)가 황후가 되자 현관(顯官=높은 벼슬)을 역임했고, 대장군이 되었다.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정된 후 전권(專權)을 손에 쥐었으나, 그러나 환관들에게 살해당했다. 부(父)는 하진(何眞).

 그의 하 씨(何氏) 가(家)는 원래 도살 업(屠殺業)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러다가 동도(同郡) 출신의 환관이었던 곽승(郭勝)의 도움을 받아서 이모매(異母妹)가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후, 그녀는 영제(靈帝)의 총애를 받아서 황후가 되었고, 그 영향으로 하진(何進)에게도 영달(榮達)이 주어졌다.

 184년 황건(黃巾)의 난(亂)이 발발하자 그는 대장군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전장에는 일절 나가지 않고 항시 낙양(洛陽)에 머물면서 당시, 전선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장온(張温), 황보숭(皇甫嵩), 주준(朱儁), 노식(盧植), 동탁(董卓), 주신(周慎) 등을 지휘했다.

 그런데 그 무렵, 중앙에서는 영제(靈帝)의 황후 하 씨(何氏)와 영제(靈帝)의 모(母)였던 동 씨(董氏) 사이에서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후, 황건(黃巾)의 난(亂)이 진정되자 영제(靈帝)는 군제개혁을 실시해서 서원삼군(西園三軍=西園八校尉)을 설치했고, 다시 상군교위(上軍校尉)에 대장군 이하를 계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는데, 그러자 동 씨(董氏)와 하 씨(何氏)의 대립은 환관이었던 건석(蹇碩)을 끌어들이는 등 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그러자 또 당시 중군교위(中軍校尉)였던 원소(袁紹)는 하진(何進)에게 적극 협력하면서 건석(蹇碩) 등과 대립했다. 그러자 또 위치가 불리하게 되었던 건석(蹇碩)이 하진(何進)을 살해하려 기도했다는 것으로 해서 곽승(郭勝)을 중심으로 했던 환관들은 건석(蹇碩)과의 사이를 멀리했고, 그러자 또 하진(何進)은 건석(蹇碩)과 동 씨(董氏) 일당을 제거했다.

 그 후, 영제(靈帝)가 몰(沒)했다. 그러자 그때까지의 악정(惡政)을 참고 있었던 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그것은 또 특히 환관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하진(何進)은 자신이 건석(蹇碩)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일도 있었고 해서, 그래서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환관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원소(袁紹) 등 막료(幕僚)들을 모아서 적극적으로 상의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일은 오히려 하(何) 황태후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그러자 또 이번에는 같은 하 씨(何氏)끼리의 대립으로 일이 발전되어갔다.

 그리고 또 그때, 하진(何進)이 하(何) 황태후의 반대를 받고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사이, 원소(袁紹)가 지방의 제장(諸將)들을 도(都)로 불러올리는 것으로 태후에게 압력을 가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식(盧植)과 진림(陳琳)이 반대를 하고 나왔는데, 그러나 원소(袁紹)는 굽히지 않고 재삼(再三) 주장했고, 그 결과 하진(何進)은 그 안을 수용했다. 그리고 또 그때, 조조(曹操)도 그 반대편에 섰다고 왕심(王沈)은 <위서(魏書-그러나 北齊의 魏收가 편찬했던 魏書와는 구별됨>에서 전했지만, 하지만 당시의 조조(曹操)는 아직 정치적인 발언권이 약했던 등으로 해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또 당시 원소(袁紹)가 대장군의 명(命)이라고 속이고는 각지에 지령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러했던 긴박한 정세(情勢) 속에서 원소(袁紹)는 극구(極口) 하진(何進)에게 경솔하게 궁중을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하지만 하진(何進)은 결국 그 충고를 무시하고 아무 생각 없이 궁중으로 들어갔다가 환관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환관들은 천자의 칙서를 위조해서 도내(都內)의 병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 전에 원소(袁紹)가 먼저 거병을 했고, 이어서 환관들은 일소(一掃)되었다.


 

 삼국지
 (三國志)


 삼국지(三國志)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국 명대(明代)에 쓰인 것이며, 후한(後漢) 말과 삼국시대를 무대로 했던 시대(時代)소설 또는 통속(通俗)소설을 말한다.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이며, 삼국연의(三國演義),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고도 불린다. 저자(著者)는 정설(定説)이 없으며, 시내암(施耐庵) 혹은 나관중(羅貫中)이라고 알려져 있다.



<삼형제>



 ※ 시내암(施耐庵) ?-?

 중국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작가)였으며, 이름은 자안(子安), 그리고 내암은 그의 자(字)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중국의 유명한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지(水滸志=水滸傳)>와 함께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 <지여(志餘)> 등을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가 정확히 누구였는지 또는 실재(實在)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그리고 또 칠수유고(七修類稿)와 백천서지(百川書志) 등에서는 그가 전당(銭塘=지금의 杭州市)의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상태이다.



<杭州市의 西湖>



 그리고 또 민국(中華民國) 17년에 호서정(胡瑞亭)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그의 태생이 밝혀졌다고 주장을 했고, 그 증거로서 시내암(施耐庵)의 묘지(墓誌)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또 그 묘지(墓誌)에 의하면 시내암(施耐庵)의 본명은 자안(子安)이고, 자(字)는 내암(耐庵)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그는 회안(淮安) 사람으로, 진사(進士)가 되어서 벼슬길에 올랐지만, 그러나 뒤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75세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수호전(水滸傳)과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그리고 평요전(平妖傳) 등을 집필해서 문인(門人=弟子=門下生)이었던 나관중(羅貫中)에게 교정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설(一說)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저자가 시내암(施耐庵)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묘지(墓誌)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묘지(墓誌)의 신빙성(信憑性)에 대해서는 아직도 강한 의문이 있다. 아무튼, 그 후였던 20세기 후반에도 강소성(江蘇省) 흥화시(興化市)에서 그가 살았던 거주지가 발견되었고, 그래서 또 그곳에서 시 씨 족보(施氏族譜)와 시 씨 장문보(施氏長門譜) 등의 자료가 차례로 발견되어 지금까지도 시내암(施耐庵)의 상세한 전기가 전해지고 있다지만,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신빙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나관중(羅貫中) 생몰불명

 중국 원(元) 말과 명(明) 초기의 작가. 그리고 역시 시내암(施耐庵)과 마찬가지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의 편자(編者)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잔당오대사연의(残唐五代史演義) 수당양조지화(隋唐兩朝志話) 등, 수종(數種)의 통속백화소설(通俗白話小説-白話는 중국의 구어체 언어)의 편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산서(山西省) 태원(太原)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으며(録鬼簿続編), 산동(山東省) 동원(東原)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三国志演義-蒋大器序 등), 그러나 절강(浙江省)의 항주(杭州)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七修類稿) 그리고 휘(諱)는 본(本)이며, 관중(貫中)은 자(字-그러나 続文献通考에서는 諱를 貫, 字를 本中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號)는 호해산인(湖海散人-여기서의 散人은 세상을 잊고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文人을 의미하기도 한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수호전(水滸傳)을 편집했다든지(七修類稿에서는 원래 원작이 있었고, 그래서 그가 정리만 했으므로 編했다 라고 기술한다 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또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余)에서는 그가 소설 수십(數十) 종(種)을 편찬(編撰)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현재 그가 편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과 수종(數種)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동(同) 서호유람지여(西湖遊覽志余)에 의하면 그가 통속소설 같은 저질스런 글만 썼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자손 삼대(三代)는
벙어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가중명(賈仲明)의 녹귀부속편(錄鬼簿續編)에서는 그가 희곡(戱曲)도 수십(數十)곡(曲)이나 썼지만, 그러나 사람과 잘 사귀지 못하는 나쁜 성격 때문에 마지막에는 행방불명되어 버렸다고 써두었다. 그리고 또한 청대(淸代)의 속설(俗說)<탑영원집(塔影園集)>과 서병소회수호일백단팔장도제발(徐鈵所繪水滸一百單八將圖題跋)>에서는 원(元) 말의 혼란기에 그가 장사성(張士誠)의 휘하에 있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적벽(赤壁)의 싸움에 대한 묘사는 주원장(朱元璋)과 진우량(陳友諒)의 파양호(鄱陽湖)의 싸움을 모델로 했던 것이었다... 라고 했다. 하지만 또, 그에 관계된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래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많은 강담사(講談師)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서 출판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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