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잠시 후, 그는 하안(河岸)을 걸어가던 중에 가로등이 켜진 아래 벤치 하나가 있던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책을 꺼냈다. 그 책은 자신의 환자 중 한사람이었던 <호르헤 홀리오 사아베드라(Jorge Julio Saavedra)>란 사람이 썼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사아베드라(Saavedra)> 역시도 정식(正式) 학위(學位)를 가지고 있었던 <닥터>였고, 그것은 또 그 20년 전에 수도(首都)에서 받았던 명예박사(名譽博士) 학위였다.

 하지만 그는 그 책을 볼 때면 한번에 2,3페이지 이상은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책에 등장하는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 사람들>의 면면(面面)들은, 때론 소박(素朴)하거나 때론 영웅적(英雄的)이었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그것이 대체적으로 실제모델이 아닌, 현실감이 조금 떨어지는 인물들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 남()아메리카에서는 <루소(Rousseau, Jean Jacques-1712~1778.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1768~1848. 프랑스의 소설가, 외교정치가. 낭만주의문학의 선구자)><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철학자,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브라질에는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1767~1830. 스위스 로잔 태생의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여 활동한 수필가 겸 정치가)>의 이름을 딴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예사롭지 않은 바람이 바다로부터 불어와서 그렇지 않아도 건조했던 대지(大地)를 마구 휩쓸고 가고 있었고, 그래서 또 그때까지도 살아남아 있던 얼마 남지 않았던 식물들조차도 그 바람은 소금기로 말려죽이고 있었다. 모레노(Moreno)는 그런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때, 그의 아내가 <마테(Mate) ()>를 들고 와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말없이 받아들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미 소개가 되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았던 <디킨즈><코넌 도일>의 글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아베드라>의 글 같은 것에는 솔직히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는 그런 내키지 않는 일도 의사로서의 의무(義務)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 <사아베드라><호텔 내셔널(Hotel national)>에서 정례(定例)의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사아베드라>는 분명히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되었고, 그러면 또 자신은 그에 대해서 무엇인가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위해서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그 책을 읽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지겨워졌던지 그는 책 읽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는 <사아베드라>가 써두었던 헌정사(獻呈辭)를 읽어보았는데, 그 내용은 또 다음과 같았다. 

 <이 책을 친애하는 나의 친구이자, 상담(相談)상대인 닥터(Doctor) 에드워드(Edward)에게 보냄이 나의 처녀작(處女作)으로 내가 언제나 정치적(政治的)인 작가(作家)는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주길 바라며,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이 나의 영감(靈感) 최후의 결과를 보내드리니, 부디 충분히 만끽해주기를 기대함>

 

 그런데 그 <사아베드라>는 사실 <과묵(寡黙)>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자신을 이상화(理想化)했던 것이 바로 그 책의 주인공인 모레노(Moreno)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그는 <사아베드라>가 자신의 크리스천 이름 중 하나인 <모레노>를 자신의 책 주인공에게 붙여준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때까지 자신처럼 벤치 같은 곳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단 한 번도 봤던 적이 없었다그곳의 벤치들에는 항상 부랑자(浮浪者)들이 마치 제 자리인 양 누워 있었다거나, 어떤 때는 물건을 사서 돌아가던 피곤해 보이던 여자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든지, 또는 가끔씩 연인들이 손을 잡고 앉아 있곤 했던 것만 그는 보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가 책을 밖으로 들고 나와서 그런 벤치에 앉아서 읽던 버릇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또 과거 그의 아버지는 어디를 다녔든 항상 책을 들고 다녔고, 그래서 또 그는 당시 그 고향(故鄕)의 오렌지 향기가 가득했던 대기(大氣) 속에서 <디킨즈>의 전작(全作) <크리스마스캐럴(A Christmas Carol)>을 제외한 전 작품을 독파(讀破)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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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하지만 그가, 그 국경 근처 강(江)가의 조그만 항구 동네로 가려고 결심했을 때, 그 역시도 그곳이 차후에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단지 막연한 느낌과 함께 <그곳으로 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굳이 그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자신의 과거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또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정도로 말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또 어떤 때 그가 알고 있었던 어떤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을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려는 것은, 가능하면 내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는 또 그때, 그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은 다 어디에다 두고, 한 명의 평범한 여인으로 그저 늙어가고만 있는 듯 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또 그럴수록 과거 <에스탄시아>에서 살았던 때를 잊지 못하고도 있었는데, 그것은 또 그때는 자신의 아버지도 함께였고,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뭔가 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때마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너무도 강렬해져서 가능하면 국경 근처로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으며, 그곳에서 밀항이라도 해서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러 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가 그 강가의 조그만 동네를 그렇게 쉽게 선택했는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항구를 뒤로 하고 강의 토제(土堤-흙으로 쌓아올린 제방)로 떨어지던 석양을 바라보면서 산책을 이어갔다. 그러자 하늘은 금방 어두워져서 우모(羽毛-깃털) 같았던 연기를 분간할 수도, 대안(對岸)의 토제(土堤) 능선(稜線)을 보는 것도 힘들어져갔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동네와 <차코>를 왕복하던 어떤 배의 등불이 아주 도도하게 남쪽으로 흘러가던 강을 거스르면서 마치 빛이 나는 연필로 천천히 파문(波紋)의 사선(斜線)을 그리듯이 하면서 그가 있던 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늘에서는 <오리온(Orion)>의 <삼형제별(세 개의 마리아별)>이 정말로 <로사리오(Our Lady of the Rosary-성모마리아)>의 모습처럼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십자가(十字架) 같이 생겼던 것은 그것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그는 문득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사람이 아닌 또 다른 대화상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런 심정을 기탄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하지만 그가 알기로 그 동네에서 영국인은 단 두 명밖에 없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대학(大學)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으면서도 자칭(自稱) <늙은 영어선생>이라던 <닥터(doctor) 험프리즈(Humphries)>가 있었고, 그 노인(老人)이 그때 살고 있던 곳은 <호텔 볼리바르(Bolívar)>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사람은 바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인 <명예영사(名譽領事)> <찰리 포트남(Charlie Fortnum)>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몇 개월 전부터 <찰리 포트남>의 부인과 불륜(不倫)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으로 해서, 그 이후로부터는 왠지 <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거북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하면 <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또 물론 가벼운 <죄의식>에 의해서였는지도 몰랐지만, 하지만 그보다 <찰리>가 자신의 부인의 정절(貞節)을 꼭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더욱 안타깝게 보여서 그랬던 것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또 그 <찰리>는 그의 부인이 임신 초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신체의 부조(不調)로 인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보다는, 그것(임신)이 마치 자신의 대단한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자랑을 하듯 찬사(讚辭)를 늘어놓는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닥터 에드>는 아연해져서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사 님, 그 아이의 아버지가 도대체 누구인지나 알고 그러십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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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그리고 또 그가 14세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왜 그 강(江)에 면(面)했던 고도(古都)의 항구(港口)에서 머물게 되었는지에 대한 동기(動機)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Argentina共和國의 首都이자, 聯邦區)>에서 세월을 꽤 보냈던 후에, 이윽고 그 역시도 망명자(亡命者)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또 그 몸서리칠 정도로의 서류(書類)들과, 질릴 정도로의 관청(官廳) 출입(出入) 등에 시달리면서 그런 것을 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단순(單純)한 <로마(Roma)인>들처럼, 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며, 그래서 또 생활 조건이 어느 정도 복잡(複雜) 기괴(奇怪)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로마인>들은 실제로 <스페인어(語)>가 <로마어(語)>에서 생겨났던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만큼 정말로 단순(單純)한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마치즈모(machismo)> 즉 <남자의 기백(氣魄)> 또는 <남자다움> 또는 <남성(男性)스러움>으로 통용(通用)되던 <남자(男子)의 명예(名譽)>는 <스페인어>로 <미덕(美德)>과 동의어(同義語)였다. 그래서 <용기(勇氣)>라든가 <견인불발(堅忍不拔-굳게 참고, 견뎌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같은 말은 실제로는 그런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아버지도 외국인(外國人)으로서 그 <남자의 명예>란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당시 날로 증대(增大)되고 있었던 <파라과이> 국경(國境)의 위험(危險)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그곳으로 갈 결심을 했던 것인지도 몰랐는데, 그것은 또 그때, 그 항구(港口)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그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를 전송하기 위해서 그 항구에 도착했던 것은 그때와 거의 마찬가지로 석양(夕陽)이 내려앉으려고 했을 때였고, 그 후에 두 사람은 시끄러운 남부(南部)의 수도(首都)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정치적인 데모> 때문에 출발이 몇 시간 지연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곳에는 마치 빵가루를 바른 듯했던 화장(化粧) 회칠(灰漆)의 식민지풍의 집들이 강변의 도로가에 줄지어 서있었고, 연인(戀人)들은 벤치에 앉아서 서로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던 <나부(裸婦)의 상(像)>이라거나, 흔해빠진 <아일랜드인>의 이름을 붙였던 어느 제독(提督)의 흉상(胸像), 그리고 청량음료(淸凉飮料) 판매대 위에나 놓일 법했던 아주 크고 잘 익은 어떤 과일 같이 컸던 외등(外燈) 등, 그때까지 그가 전혀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마치 <평화의 상징>처럼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그곳의 고층빌딩과, 교통장해와, 패트롤카들과, 구급차들의 사이렌소리와, 말에 올라탄 영웅들의 조상(彫像)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졌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자격(資格) 있는 의사(醫師)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 북부(北部)의 작은 마을로 가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당시, 그 수도(首都)에서의 친구들과 찻집에서 알았던 사람들 그 누구도 그가 왜 그 북부(北部)의 작은 마을로 가려는 지에 대해서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턱대고 <그곳은 날씨가 덥다>거나 <습도가 높아서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를 해댔고, 무엇보다 <그런 무료한 곳에서 견뎌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들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는 폭력사건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는 무료한 곳>이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미소(微笑)로만 답을 했을 뿐이었는데, 그것은 또 일단 그런 결심을 한 후에는 그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그 미소는 마치 그의 아버지가 희망을 품었을 때 지었던 미소와도 같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헤어진 후, 꽤 긴 시간동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편지는 단 한통뿐이었다. 그리고 그 봉투에는 <자신과 어머니 두 사람 앞>이라고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글자는 <아내와 아들>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식적으로 투함(投函)되어서 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파트의 문 밑 틈으로 누군가 밀어서 넣어져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와 그의 어머니가 그곳으로 갔던지 4년째나 되었을 때의 어느 날 저녁, 세 번째로 봤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런 지나간 영화가 <리바이벌> 되는 것을 놓치는 법이 없었는데, 그것은 또 아마도 그런 옛날 영화나, 거기에 출연하는 옛날의 <스타>들을 보고 있으면, 그 시간만은 내전(內戰)이라거나, 위험(危險)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역시,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었던 <클라크케이블>과 <비비안 리>도 탄환(彈丸)이 날아다니던 그 전화(戰禍) 속에서 용감하게 빠져나오는 훌륭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편지의 봉투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고, 겉봉투에는 <직송의뢰(直送依賴)>라는 글자가 함께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직송(直送)을 했던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며, 다만 편지를 보냈던 곳이었던 듯 <에스탄시아(estancia-아르헨티나의 온대초원 pampas에 있는 대목장 등, 또는 라틴아메리카나 에스파냐어 권에서의 광대한 목장이나, 농장을 의미함)>라는 고딕체의 글자가 겉봉투에 화려하게 인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의 편지지도 일반편지지가 아닌, 그냥 선이 그어져 있던 공책을 아무렇게나 찢어서 쓴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은 항구(港口)에서 헤어졌을 때와 같이 온통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대충은 또 <사태(事態)는 이제 곧 마무리 될 것이므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는 등의 글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쓴 날짜는 쓰여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또 그 <희망(希望)>이란 것도 그 편지가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모두 끝났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그래서 또 그와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혔는지, 아니면 어느 자신들이 모르는 곳에서 사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었는데, 어쨌든 그 편지의 마지막에는 <스페인 식>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무사히 지내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서 아주 큰 위안(慰安)이다.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헨리(Henry)로부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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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순수한 허구이므로, 본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국가, 배경, 도시 등은 모두 사실과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19>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읽으시려는 분들은 주의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앞의 2016년 1월에 올렸던 것인데, 자료가 심하게 훼손되어 수정하는 차원에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한다

선은 악과
관용은 정의와
종교는 정치와...

 <토마스 하디>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닥터(Doctor) 에드워드(Edward)>는 <파라나 강(江)>의 작은 항구(港口)에서 선로(線路)와 황색(黃色)의 크레인(crane)이 있던 곳 중간에 서서 대안(對岸)의 차코(Gran chaco-남아메리카중남부 Andes산맥과 Paraguay강 사이에 펼쳐지는 평원) 지방(地方) 위로 수평으로 길게 펼쳐졌던 우모(羽毛) 같았던 연기(煙氣)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석양(夕陽) 속에 있는 어느 나라 국기(國旗)의 줄무늬 같이 보였는데, 그리고 또 그때, 그 근처에는 <해운회관(海運會館)>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수부(水夫) 한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시각에 그곳에는 자신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엷게 번지는 빛과, 무언가 알 수 없는 식물의 향기 또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에 말려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또 어쩌면 유년(幼年)의 의식(意識)과 미래(未來)에의 희망(希望) 또는 그때는 완전히 잃어버렸던 지난 일의 의식(意識)을 다시 불러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석양(夕陽)의 느낌과도 비슷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로(線路)와 크레인, 그리고 <해운해관>. 그것은 <닥터 에드>가 그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세월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러나 단 하나, 그가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한줄기 연기(煙氣)만이 <파라나 강> 저쪽 편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 새로웠다면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그 <공장(工場)>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처음 왔을 때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때 그가 <파라과이(Paraguay-남아메리카 중남부에 있는 나라. 1811년에 에스파냐에서 독립하였다. 목축과 임업이 발달하였으며, 주민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이고 주요 언어는 에스파냐 어이다. 수도는 아순시온, 면적은 40만 6752㎢)>에서 주(週) 1회 정기선(定期船)을 타고 그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벌써 20년도 더 전(前)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 그는 <아순시온(Asunción-Paraguay공화국의 수도. 필코마요 강이 합류되는 파라과이 강 연안에 위치한 최대의 무역항이며, 유통과 수출의 중심지)>의 선창(船艙)가에서 헤어졌던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작은 배의 좁은 트랩(trap-사다리)에 서서 장신(長身)에다 백발(白髮)을 흩날리면서 기계적(機械的)인 낙천주의(樂天主義)의 어조(語調)로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아들아, 우리 금방 다시 만나자!>

 

 그래서 그때, 그는 1개월 아니면 넉넉잡아서 3개월 정도면 다시 아버지와 재회(再會)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헤어지던 그의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마치 속삭이듯이 <우리 빨리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눕시다...> 라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경의(敬意)를 다했던 태도로 입을 맞췄을 때는, 당시 14세였던 그에게서도 거의 이국적(異國的)이란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히 <영국인(英國人)>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는 <스페인(Spain)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여권(旅券)에 기록된 국적(國籍)을 넘어서, 눈(雪)과 안개에 싸여있는 전설(傳說)의 섬 영국(英國)과, 디킨즈(Dickens, Charles-영국의 소설가, Oliver Twist 등을 썼음)와 코난 도일(Arthur Lgnatius Conan Doyle-Sherlock Holmes로 유명한 작가)이 태어났던 그 섬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10세의 어린 나이에 그곳을 떠났던 그의 아버지가 그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영국(英國)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당신의 양친(兩親) 즉, 그의 조부(祖父)와 조모(祖母)가 사주었다던 그림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런던(London)의 파노라마(panorama)>였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헨리>가 자신이 어렸을 자주 보여주었던 책이었는데, 그 안에는 회색(灰色)의 사진으로 <버킹검궁전(Buckingham Palace)>이라든가 <런던탑(the Tower of London)> 그리고 <2인승마차(馬車)>와 <상자마자(箱子馬車)> 그리고 <긴치마를 입은 숙녀(淑女)>의 사진 등, 많은 사진들이 해설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 바로 직후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망명자(亡命者)의 신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곳은 <망명자(亡命者)들의 천국(天國)>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또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왔던 사람들과 <체코, 폴란드,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망명을 왔던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디킨즈(Dickens)>를 읽기 시작했던 그 어렸을 때부터, 마치 외국인(外國人)이 그 책을 읽는 것처럼, 그 책에 쓰인 것들은 그 당시에도 전부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 그 당시의 그로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또 그것들은 예를 들어서 <집행관(執行官)>이라든가 <장의사(葬儀社)>들, 또는 <올리버트위스트(Oliver Twist)>가 마치 <러시아인>들의 믿음처럼, 그때 그곳에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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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4년


 서역도호(西域都護)와 무기교위(戊己校尉)를 부활시켜서
 후한(後漢)이 직접 서역(西域) 경영을 행했다.(~76년)



 서역도호(西域都護)는, 서역(西域)을 총괄했던 중국의 관명(官名)이었으며, 전한(前漢) 지절(地節) 2년(기원전68년)에 한(漢)에서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던 정길(鄭吉)이 차사(車師)를 굴복시키자 한(漢)은 그를 호선선이서남도(護鄯善以西南道=西域 南道의 감독 역)로 삼았다.

 정길(鄭吉-?~B.C.48)은, 중국 한나라 때의 장군이었고, 선제(宣帝) 때 차사국(車師國)을 쳐서 멸했으며, 흉노의 항복을 받아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역 도호(都護)가 되어서 전한(前漢)의 국세(國勢)를 널리 떨쳤던 사람이었다.(후술 또는 생략)

 ※
차사(車師)는, 중국 한(漢)나라 때부터 북위(北魏)시대까지 톈산(天山)산맥 동부에 있었던 나라로, 현재의 동(東) 투르키스탄(Turkistan)에 상당하는 곳에 있었던 오아시스도시국가였다.

 그 후, 신작(新爵) 3년(기원전 59년)에 흉노(匈奴)의 일축왕(日逐王)도 항복시킴으로 해서 정길(鄭吉)은 호차사이서북도(護車師以西北道-뜻은 위와 유사함)에 겸임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서역(西域)의 남북도(南北道) 두 길을 모두 통괄하게 되어서 서역도호(西域都護-여기서의 都는 크다는 뜻과 전부라는 의미임)라고 칭해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 말의 유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서역도위(西域都尉)는 가관(加官)이었으며, 본관(本官)은 기도위(騎都尉=官秩比2千石)와 간대부(諫大夫=官秩比8百石)였다. 그리고 또 부관(副官)으로서는 부교위(副校尉=官秩比 2千石)가 설치되어 승(丞) 1인과 사마(司馬) 2인, 후(候) 2인, 천인(千人) 2인이 그에 속했다. 그리고 또한 서역(西域) 중앙부의 오루성(烏壘城)에 막부(幕府)를 두고 서역(西域) 36국(國)을 진무(鎭撫)했으며, 또한 제국(諸國)을 호령(號令)했다. 하지만 후한(後漢)에 들어서는 그 힘이 약해져서 자주 폐지와 설치를 반복했다. 그리고 또, 아래는 당시의 중요했던 西域都護들에 대한 소개이며, 다만 이름만 밝힙니다.

 <前漢>

 鄭吉-前(기원전)59年 - 前48年
 韓宣-前48年 - 前45年
 甘延寿-前36年 - 前33年
 段會宗-前33年 - 前30年
 廉褒-前30年 - 前27年
 段會宗-前21年 - 前18年(再任)
 郭舜-前15 - 前12年
 孫建-前12年 - 前9年
 但欽-서력(西曆)1年 - 13年

 

 <新>

 但欽-1年 - 13年-殺
 李崇-13年 - 23年

 <後漢>

 莎車王賢-大都護를 사칭함
 陳睦-74年 - 75年-殺
 班超-91年 - 102年
 任尚-102年 - 106年
 段禧-106年 - 107年



 무기교위(戊己校尉)는, 중국 전한(前漢) 이후의 관직명으로, 서역(西域)을 관리했던 직명이었다. 그리고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에 의하면, 원제(元帝) 초원(初元) 원년(元年)에 설치되었고, 동(同) 서역전상(西域傳上)에서는 차사(車師) 전왕(前王)의 토지(高昌)에 둔전(屯田)을 열었다고 한다.

 ※ 둔전(屯田)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했던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했던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가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는 각(各) 궁(宮)과 관아에 속했던 토지로, 관노비나 일반농민들이 경작했으며, 그 소출의 일부를 거두어 들여서 경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 예를 열거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둔전답(屯田畓)은 둔전과 둔답을 아울러서 일렀던 말이며

 2. 국둔전(國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자리(戍자리-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를 살던 군사가 경작하여 그 수확을 모두 군자(軍資)에 충당했던 토지였으며, 왜구를 막기 위하여 연해(沿海) 지방에 많이 두었다. 그리고 또 시행과 폐지를 반복했지만, 그러나 세조 6년(1460)에 토지제도의 하나로 확정하였다.

 3. 그리고 관둔전(官屯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 두었던 둔전(屯田)으로, 본래는 군자(軍資)에 보충하려고 두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관아의 일반경비나 수령의 사사로운 수입이 되는 등 많은 폐해가 있었다.

 4. 영둔전(營屯田)은 조선시대에 각 영문(營門=軍門)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나라에서 지급했던
둔전이며

 5. 영문둔전(營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각 군병 아문(軍兵衙門)에서 소유했던 둔전이었고

 6. 아문둔전(衙門屯田)은 조선후기에 관아의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두었던 둔전이었으며

 7. 궁둔전(宮屯田)은 각 궁(宮)에 속했던 둔전(屯田)

 8. 그리고 역둔전(驛屯田) 또는 역(驛)둔토(屯土)란 것도 있었고

 9. 가호둔전(家戶屯田)은 고려말기에,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가호에도 씨앗을 나누어 주고 농사를 짓게 한 다음, 가을에 몇 배를 거두어들였던 것을 말했다.

 아무튼, 속관(屬官)으로서 상기(上記)와 같게 승(丞), 사마(司馬) 각(各) 1명과 후(候) 5명을 두었으며, 질석비(秩石比=官秩比)는 600석(石)이었다. 그리고 그 명칭의 유래는 한서(漢書) 백관공경표상(百官公卿表上)의 안사고(顔師古) 주(注)에 의하면, 십간(十干) 중 갑을병정경신임계(甲乙丙丁庚辛壬癸)들은 각각의 방위를 가지지만, 그러나 무(戊)와 기(己)는 가리키는 방위가 없으므로, 그래서 마땅히 정주(定住)할 장소를 가지지 않은 교위(校尉)를 그에 비유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무(戊)와 기(己)는 중앙에 위치해서 사방(四方)을 진무(鎭撫)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서역(西域)의 중심에 위치해서 주변을 진무(鎭撫)하는 것에 비유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 등이 있지만, 물론 둘 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서는 <무기(戊己)2교위(校尉)>라고 했고, 그것은 또 무(戊)교위와 기(己)교위 2인을 말했던 것으로, 그래서 그 총칭으로 무기교위(戊己校尉)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

 아무튼, 왕망(王莽)의 시대에 서역(西域)이 배신을 했고, 이어서 열렸던 후한(後漢) 초기에도 그 직(職)은 설치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영평(永平) 1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의 서역(西域) 정세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기 때문에, 그래서 건초(建初) 원년(元年)에는 다시 불러 들였다. 하지만 또 그 후였던 영원(永元) 3년에 반초(班超)의 활약에 힘입어서 다시 설치되었다.(後漢書 西域傳) 그러나 또 그 후였던 후한(後漢) 말경에는 서역(西域)과의 교통이 모두 끊어졌다. 그런데 삼국(三國)의 위(魏) 황초(黃初) 3년에 서역(西域)으로부터 사자가 왔고, 그러자 또 그것을 계기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양주(凉州) 자사(刺史)가 그 직을 맡게 되었다.(三国志 文帝紀, 晋書 地理志上)

 ※ 자사(刺史)는

 1. 발해에서는 각 주(州)의 으뜸 벼슬을 말했으며
 2. 고려 때는 성종 14년(995)에 두었던 외관(外官)을 이름.
 3. 그리고 중국 한나라 때는 군(郡)과 국(國)을 감독하기 위해서 각 주에 설치했던 감찰관으로, 나중에 당(唐)과 송(宋)을 거쳐서 명(明)나라 때 없어졌다.
 4. 그리고 중국의 전한(前漢)부터 오대십국(五代十國) 때까지 존재했던 관직명으로, 당초에는 감찰의 역할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주(州)의 장관(長官)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3과 4가 해당되며, 그 중에서도 4가 더욱 가까움.

 87년


 북흉노(北匈奴)의 우류선우(優留鄯于)가 선비(鮮卑)에서 살해 되었고
 그러자 그 땅에 살던 58부(部)의 20만 백성들이 한(漢)에 내항(來降)했다

 88년


 두태후(竇太后)가 임조(臨朝)했다(~97년)

 효문황후<孝文皇后=두의(竇漪)>

 91년


 반초(班超)가 서역(西域) 평정의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102년)

 97년


 감영(甘英)이 반초(班超)의 명(命)을 받아 로마로 파견되었고, 파르티아에 도착했다



 <감영(甘英)> 2

 감영(生没年不詳)은 당시, 대진(大秦)이라고 불렸던 ‘로마(Rome)’에 파견되었던 중국의 대사(大使)였으며, 반초(班超)로부터 로마와의 국교(國交)를 개설할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당시 7만 정도의 규모를 가졌던 반초(班超) 원정군의 일원(一員)이었으며, 일단(一團)의 군을 이끌고 파르티아왕국의 서쪽 경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적어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고대 중국인으로서는 서쪽으로 제일 멀리까지 여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후한서(後漢書=後漢 25-22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 감영(甘英)에게 시켜서 ‘서쪽바다’의 해안과 가는 길에 존재하는 여러 지역들을 둘러보고 오라고 명했다. 그 전까지는 누구도 그곳까지 갔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지역들에 관한 정보는 ‘산해경(山海經)’조차에도 상세한 기술이 없었다.

 
산해경(山海經)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으로, 작가와 연대는 미상이며, 뤄양(洛陽)을 중심으로 해서 산맥과 하천 그리고 신화와 전설, 産物 등을 수록했다. 중국의 자연관과 신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5부18권.

 그러자 감영(甘英)은 그 탐험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나라들과 관습 그리고 地勢 등에 관한 것)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분의 기술은 아래와 같다.

 <화제(和帝) 제(第)9년(기원97년), 반초(班超)는 자신의 부관(副官)이었던 감영(甘英)을 대진(大秦)으로 파견했고, 그러자 감영(甘英)은 조지(條支=Tiaozhi=현재의 시리아 지역)를 통과해서 안식(安息=Anxi=파르티아)의 서쪽 경계에 있던 아주큰 바다(大海=페르시아 만)에 도착했다>(後漢書88)

 그리하여 그는 로마(大秦)에 관한 보고서도 남기게 되었다지만, 하지만 그것은 본인이 직접 가서 보고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간접적으로 얻었던 자료에 근거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대진(大秦)을 ‘바다’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비정(比定-일종의 추정)했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그가 쓴 기술의 일부분이다.

 <그 판도(版圖=領域)는 몇 천리(千里-그러나 여기서의 里는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里의 개념이 아니고, 약 5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말함)를 가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400곳도 더 되는 도시들이 그 안에 있다. 그리하여 그 주변 수십(數十)의 소국(小國)들이 그 나라를 따르고 있으며, 도시의 외벽들은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또한 역사제도(驛舍制度)가 확립되어 있고...(중략)... 그리고 소나무와 사이프레스(糸杉)가 자라고 있다>

 그는 또 ‘네르바’에 의한 양자제도(養子制度)와 제위계승(帝位継承)에 대해서도 기술(記述)했고(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서 제위를 물려주었다), 로마인들의 신체와 외견(外見) 그리고
또 그곳에서 생산되던 물건 등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로마의 황제(30~98)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며 선정을 베풀었고,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열었다. 재위 기간은 96~98년.

 ※
트라야누스(Trajanus, Marcus Ulpius)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53~117)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으로, 로마제국사상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혔으며, 도로를 건설하여 상업과 교통의 발달을 꾀하였다. 재위 기간은 98~117년.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 나라의 왕(王)은 세습(世襲)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된 사람을 선택해서 왕위에 올리고 있다...그 나라 사람들은 장신(長身)이며, 아주 균형 잡힌 용모(容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은 중국인(中國人)과 닮았으며, 그것이 또 바로 그 나라를 대진(大秦=Da Qin=아주 큰 秦)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나라의 토지(土地)에서는 많은 금(金)과 은(銀)이 생산되고 있으며, 그리고 야간에 빛을 발하는 보석을 포함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진귀한 보석들도 산출되고 있다...사람들은 다채(多彩)로운 색을 가진 태피스트리(tapestry)나 다마스크를 만들기 위해서 금사(金絲)를 사용해서 자수(刺繡)를 한 옷감들을 재봉한다. 그리고 또한 금(金)으로 도장(塗裝)한 옷감이나 <불에 씻은 옷감(石絲=石綿=아스베스트=아스베스토스(asbestos)>도 만들고 있다>

 
tapestry는,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로, 벽걸이나 가리개 등의 실내장식품으로 사용하며, 일반적으로 날실에는 마사, 씨실에는 양모사나 견사를 쓰는데, 고블랭직이 가장 발달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Gobelins>



 
※ 다마스크(damask)= 피륙의 하나이며, 능직이나 수자직 바탕에 금실과 은실 등의 아름다운 실로 무늬를 짜 넣는데, 주로 커튼이나 책상보 등에 쓴다고 함.

 ※
석면(石綿)은, 사문석(蛇紋石) 또는 각섬석(角閃石)이 섬유질(纖維質)로 변한 규산염(硅酸鹽) 광물이며, 산성이나 알칼리성에 강하고, 열과 전기가 잘 통하지 않아서 방열재, 방화재, 절연용 재료 등으로 많이 씀.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감영(甘英)은 당시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었던 로마를 올바르게 파악했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그리고 아래는 그가 남겼던 기술 중 마지막 부분이라고 추정되는 글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경탄해마지 않을 또한 희귀한 종류의 외국물품들은 모두다 그 나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기원전 50년경의 파르티아 위치도>

 100년


 허신(許愼)이 <説文解字>를 成立시켰다(완성이라고 표현하지 않음)



 <허신(許愼)> 58年?-147年? 또는 30년-124년



 후한(後漢)의 유학자였으며, 문학(文學)학자 그리고 최고(最古)의 부수별(部首別) 한자자전(漢字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작자(作者)로 알려져 있다. 성(姓)은 許. 이름은 신(愼). 자(字)는 숙중(叔重). 출신은 여남소릉(汝南召陵=現 河南省 郾城県), 경서(經書)에 밝았고, 가규(賈逵=22賢 중 1인)로부터 고문학(古文學)을 전수(傳受)받아 고문경학(古文經學)의 대가(大家) 중 1인이 되었다.

 ※ 22현(賢)은, 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21년(647)에 공자묘에 배향 되었던 22명의 현인(賢人)으로, 좌구명, 복자하(卜子夏), 공양고, 곡량적(穀梁赤), 복승(伏勝), 고당생(高堂生), 대성(戴聖), 모장(毛萇), 공안국, 유향(劉向), 정중(鄭衆), 가규(賈逵), 두자춘(杜子春), 마융, 노식(盧植), 정현(鄭玄), 복건(服虔), 하휴(何休), 왕숙, 왕필, 두예, 범녕(范寗)을 이르며,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

 그에 마융(馬融)은 항시 그를 존경했다고 하며, 세상에서 <오경무쌍(五經無雙)의 허숙중(許叔重)>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현재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에 오경이의(五經異義)와 회남홍열간고(淮南鴻烈間詁) 등도 있었지만, 그러나 원래대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중국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했던 자전(字典)으로, 문자학의 기본적인 고전 중 하나이며, 한자 9,353자를 수집하여 540부(部)로 분류했고, 육서(六書)에 따라서 글자의 모양을 분석, 해설하였다. 15권.


 105년


 채윤(蔡倫)이 종이를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채윤(蔡倫)> ? 또는 50년경-121년 또는 121년경

 



 중국 후한(後漢) 때의 환관(宦官)으로, 자(字)는 경중(敬仲). 제지법(製紙法)을 개량해서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보급에 막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계양(桂陽=현재의 湖南省 郴州市) 출신으로, 명제(明帝) 영평(永平) 말년(75년)부터 환관으로 궁정에 등용 되었지만, 그러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장제(章帝) 대에는 소황문(小黃門)에 머물러 있었지만, 화제(和帝) 즉위 후였던 89년에는 중상시(中常侍)로 승진했다.

 황문(黃門)은 내시(內侍)를 의미하며, 소황문(小黃門)은 내시 중에서도 낮은 직급의 내시를 의미했다. 그리고 또 참고로, 홍수황문(紅袖黃門)은 붉은 소매와 누런 문이란 뜻으로, 궁녀와 환관을 아울러서 이르렀던 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과거 궁녀의 웃옷에는 붉은 소매가 달려 있었다는 것과 그리고 환관들이 지키던 궁성 안의 작은 문(門)에는 누런 칠을 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거기다 성실한 인품과 학문을 좋아했고 또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점 등이 인정되었고, 또한 결벽(潔癖)한 몸가짐 등이 평가되어 97년에는 상방령(尙方令)이란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그것은 또한 검(劍) 등의 무기류나 여러 가지의 물품들을 제작, 감독, 제조기술 확립 등을 임무로 했던 것이었다.

 105년, 그는 나무의 껍질과 마(麻)의 쓰레기, 못쓰게 된 어망(魚網) 등의 재료들을 이용해서 실용적인 종이를 제조했고, 그것을 화제(和帝)에게 헌상했다. 그리고 그 제법(製法)은 아주 잘게 부순 재료들을 물에 녹인 후 대나무로 만든 책(簀-格子 板)에다 넣어(담아서) 뜬 후 말리는 공정을 거쳐서 완성시켰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은 아니었고, 당시에는 그와 유사한 수법으로 이미 비단이나 풀솜의 찌꺼기 등을 이용해서 만드는 서(絮)라는 방한(防寒) 등에 이용되었던 염가의 부직포가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그가 만들었던 것은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그러했던 기술을 집약해서 개선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당시 <종이(紙)>라는 말은 <서(絮)>와 같은 비단찌꺼기 등으로 만든 것을 의미했으며, 그래서 그가 만들었다는 종이는 <채후지(蔡侯紙)>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그것과 구별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그는 화제(和帝)로부터 신뢰가 두꺼워져서 유악(帷幄=帷幕=전략회의 등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하던 곳=국가계획을 입안하는 중요한 기관)에도 참가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도 자주 화제(和帝)에게 간언도 했다. 그리고 또 유자(儒者) 유진(劉珍) 등의 고전(古典) 교정 작업도 감독하는 등, 유능한 문신(文臣)으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하지만 105년에 화제(和帝)가 몰(沒)했고, 그 뒤를 이었던 어린 상제(殤帝)도 1년 만에 죽어버리자 당시의 정치를 장악했던 등태후(鄧太后)는 장제(章帝)의 아들이었던 황태자를 폐하고 청하효왕(淸河孝王)이 되었던 유경(劉慶)의 당시 13세의 아들이었던 유호(劉祜)를 안제(安帝)에 옹립시켰다. 그리고는 섭정(攝政)을 하며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을 병용(倂用)해서 실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 역시도 그 시기였던 114년에는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등태후(鄧太后)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 121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또 안제(安帝)는 내시들의 협력을 받아서 등 씨(鄧氏) 일족의 숙청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또 그렇게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던 중, 안제(安帝)는 자신의 부(父)였던 유경(劉慶)이 황태자를 폐(廢)했던 사건을 조사시켰는데, 그러자 조모(祖母)였던 송귀인(宋貴人)이 무고(巫蠱-巫術로써 남을 저주함)를 행했다는 중상모략을 받아서 자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또 당시(82년) 그 송귀인(宋貴人)의 주저(呪詛)가 사실이었다고 보고를 했던 자가 바로 그 소황문(小黃門)이었던 채윤(蔡倫)이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러자 안제(安帝)는 그에게 정위(廷尉=형벌담당장관)에 출두하라고 칙명을 내렸다. 하지만 또 당시,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사대부(士大夫)에게는 예(禮)를 지켜서 형벌에까지는 미치지 않게 하는 관례가 있었고(禮記), 그래서 그 칙명을 받들었던 사자는 독약을 함께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갔다. 그러자 그는 공순(恭順)했고,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그것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도 결국 비운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러나 그가 사망했던 연월(年月)에 관해서는 제설(諸說)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등태후(鄧太后)가 사망했던 121년 이후의 일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현재 호남성(湖南省) 계양(桂陽) 교외에는 그의 묘라고 전해지는 장소가 있다고 하며, 그리고 또한 1950년대에 그 현(縣)에서 수복(修復)작업을 하던 중 그 무덤 안에서 맷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그가 종이를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것이라는 억측도 난무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것은 지금까지도 진위가 불명하다.

 아무튼, 그는 종래부터 제지법의 발명자였다고 평가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전한(前漢) 대(代)의 유적에서 식물섬유로 만든 종이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로서는 그가 이미 상용(常用)하고 있던 그 기술을 집약해서 통합했던 것일 뿐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실용적인 종이의 제조법을 정립했던 개량자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전한(前漢) 대의 종이란 청동제의 거울을 포장했던 포장지였을 뿐이었으며, 문자를 기록했던 종이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계속해서 개량되었고, 그러자 그 후, 그의 제자였던 좌백(左伯)이란 사람이 좌백지(左伯紙)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종이는 개량과 보급을 거듭하며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윽고는 이슬람을 거쳐서 서양에까지 전파되어 서양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또, 그는 중국에서는 <종이의 수호신>으로까지 숭배되었고, 이후 학자였던 '마이클 할트(Michael H. Hart)'란 사람은 <역사를 만든(창조한) 100인>에서 그를 일곱 번째로 올려 놓았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할트'는 그 제1위로 '마호메트'를 그리고 제2위는 '뉴턴'을 그리고 제3위는 '예수'로 올려 놓았다.

 107년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다시 폐지되었고, 한(漢)과 서역(西域)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123년


 반초(班超)의 아들 반용(班勇)이 서역장사(西域長史)가 되었고
 선(鄯)과 고창(高昌)이 한(漢)에 복속(服屬)했다




 <
고창(高昌)>

 5~7세기에 동(東)투르키스탄의 투루판분지에 있던 나라로, 전한(前漢) 시대에 이주했던 한인(漢人)의 자손들이 투르크계 토착민을 제압하고 세웠던 식민지 왕조였지만, 640년에 중국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高昌 古城 유적>

 148년



 파르티아 출신의 안세고(安世高)가 한(漢)의 낙양(洛陽)으로 와서 불전(佛典)의 번역에 종사했다




 <안세고(安世高)> 生沒未詳 또는 ?-?170년 정도

 후한(後漢) 대에 서역(西域)에서 왔던 역경승(譯經僧)으로, 자(字)는 세고(世高)였다. 그리고 원래 그는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의 태자(太子)였지만, 왕위를 백부(伯父)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출가수도에 뜻을 두어서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 후, 환제(桓帝) 대 건화(建和) 2년(148년)에 수도 낙양(뤄양=洛陽)으로 와서 입궐, 알현했고, 그 후 20년 동안 역경(譯經)을 행해서 30부(部)에 달하는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그러자 후세에 승(僧) 우(祐)는 그를 평하기를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한다.

 <그는 폭넓게 경전을 공부했으며, 그 중에서도 아비달마(阿毘達磨)에 정통(精通)했다. 그리고 또 선(禪)에 관한 경전도 암송했으며, 그 강요(綱要)도 거의 다 이해하고 있었다>(出三藏記集 卷 13)

 ※ 아비달마(阿毘達磨)는, 불전(佛典) 중에 경전을 해설하거나 주석한 논(論)을 이르는 말로, 교법에 관한 연구라는 의미임.

 그리고 다음은 그의 주요한 한역(漢譯) 경전으로, 간단히 소개만 합니다.

 安般守意経/ 陰持入経/ 大道地経/ 人本欲生経/ 四諦経/ 八正道経/ 転法輪経/ 阿毘曇五味経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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