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30)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오(吳-기원전 585년경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군국(君國)의 하나로, 현재의 소주(蘇州) 주변을 지배했던 나라였고, 군주(君主)의 성(姓)은 희(姬), 원(元) 국호(國號)는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후에 같은 국명으로, 삼국시대였던 222년에 손권이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강남에 세운 나라로, 280년에 서진(西晉)에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오대십국 가운데 902년에 양행밀(楊行密)이 양저우(揚州)에 도읍하고 화이난(淮南), 장둥(江東)에 세운 나라로, 937년에 남당(南唐)에 의해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나라 오(吳)에 대해서 소개함.

 오(吳)는 그 성립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그러니까 주(周)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6-12참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자(末子)였던 계력(季歷-6-12참조)이 총명해서 그를 후계로 삼았다. 그러자 나머지 두 아들은 주(周)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바로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태백(太伯)이 죽자, 우중(虞仲)이 그 뒤를 이었으며, 아주 나중에 수몽(壽夢)이 오(吳)로 개칭했다.

 아무튼, 그 6대째였던 합려(闔閭)의 시대에 오(吳)는 강국이 되었고, 그러자 합려(闔閭)는 명신(名臣)들이었던 손무(孫武=孫子)와 오자서(伍子胥) 등과 함께 당시에 초 대국이었던 초(楚)를 공략해서 수도를 빼앗았으며, 그리하여 초(楚)를 멸망 바로 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신흥국이었던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서 합려(闔閭)는 중상을 입었는데, 그러자 그는 아들이었던 부차(夫差)에게 꼭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죽었다.

 ※앞에서 소개된 부분들과 중복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러나 일단 상기하는 차원에서 계속 진행하는 것이니, 진부하게 여기시는 분께는 넓은 이해 당부 드립니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서 회계(會稽)에서 구천(句踐)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그러자 또 구천(句踐)이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을 종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 후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를 안심시키면서 국력을 축척해나갔고, 부차(夫差)는 또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펼쳐졌던 월(越)의 책략에 빠져서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를 자살로 몰아갔고, 그런 다음 중원(中原)에서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會盟)했지만, 그러나 또 그 사이에 오(吳)의 수도는 월(越)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 부차(夫差-?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 오(吳)의 제7대 왕이었던 동시에, 최후의 왕이었다. 성(姓)은 희(姬),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한명이었으며, 선대(先代) 합려(闔閭)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오자서(伍子胥)의 도움을 받아서 한때 패자(覇者)로 이름을 올렸지만, 그러나 구천(句踐)에게 패배해서 자결했다. 그리고 원래대로였다면 제(齊)나라의 공주를 맞이했던 장형(長兄) 파(波)가 태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 파(波)는 상처(喪妻) 후에 요절(夭折)했고, 그리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부차(夫差)에게도 왕위승계쟁탈전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므로 생략하며, 아무튼 그 후에 합려(闔閭)는 구천(句踐)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 그러자 합려(闔閭)는 자신이 죽고 나면 분명히 형제들끼리 후계를 둘러싸고 다툴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급히 부차(夫差)를 불러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는 꼭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합려(闔閭)는 죽었으며, 그리하여 부차(夫差)는 왕 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합려(闔閭)의 유언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부하에게 시켜서 합려(闔閭)의 유언을 다시 읊게 했고, 그리고 또 본인 스스로도 그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신(薪-섶나무, 땔감으로 장작 같은 것을 말하며,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편하게 잠들 수 없을만한 거친 풀 같은 것으로 해석함) 위에서 잤다고 해서 <와신(臥薪)>의 고사를 남겼다.(史記의 呉太伯 및 越王 句践 世家의 臥薪嘗胆에서) 아무튼 그 후,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서 오(吳)의 국력을 충실하게 신장시켰고, 그러자 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구천(句踐)이 공격을 해왔지만, 그러나 구천(句踐)은 오히려 반격 당해서 부차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 기회에 구천(句踐)을 죽여야한다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당시 월(越)에 뇌물을 받았던 재상(宰相) 백비(伯嚭)의 말을 받아들여서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을 살려주었다. 그 후, 부차(夫差)는 신장(伸張)했던 국력을 배경으로 북쪽으로 눈을 돌려서 황하(黃河) 유역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패자(覇者)를 꿈꾸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월(越)의 복수를 경계하면서 그런 부차(夫差)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기원전 484년에 오자서(伍子胥)는 백비(伯嚭)의 참언을 받아서 자결했는데, 그런데 그 이면에는 또 범려(范蠡)의 이간(離間)계(計)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또 기원전 485년, 부차(夫差)는 군을 통솔해서 제(齊)를 쳤는데, 그것은 오(吳)가 제후들의 맹주임을 각성(覺醒)시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처음부터 화북(華北)의 맹주 격이었던 진(晋)이 그에 반대를 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482년, 진(晋)과 오(吳)는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 틈을 노리고 월(越)이 오(吳)를 침범해서 태자 우(友)와 동족(同族)이었던 공손 미용(公孫弥庸) 그리고 장군이었던 수어요(壽於姚) 등을 포로로 데려갔다.

 
참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공손미용(公孫弥庸)이 왕손미용(王孫弥庸)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친족이나 혈연 상의 계보관계는 불명(不明)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공자(公子) 고멸(姑蔑)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가 죽은 자기 아버지의 군기(軍旗)를 월(越)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은 월(越)의 포로가 되었던 나의 아버지의 군기(軍旗)다! 그러므로 월(越)은 나와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태자 우(友)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나라는 망한다. 그러므로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미용(公孫弥庸)은 우(友)의 말을 듣지 않고 군사 5천명을 데리고 월(越)에 맞섰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부차(夫差)의 말자(末子)였던 공자(公子) 지(地-春秋左氏傳에서는 王子 地)가 그를 원조했다. 그러자 그 결과 공손미용(公孫弥庸)은 월(越)의 무장 주무여(疇無餘)를 그리고 공자(公子) 지(地)는 같은 장수 구양(謳陽)을 포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공자(公子) 지(地)에 관해서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인솔했던 본군(本軍)이 도착하자 진영(陣營)을 더욱 공고(鞏固)히 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무튼, 하지만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고(春秋左氏傳), 그 보고를 받은 부차(夫差)는 몹시 놀라서 허둥댔다. 그리고 또 그 일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자연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모두에게 입막음을 시켰다. 하지만 그 후, 어떤 자가 그 일을 세간에 흘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격노했던 부차(夫差)는 그 자가 누구인지를 조사했으며, 그러자 결국 일곱 명의 용의자가 적발되어서 처형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오(吳)는 진(晋)과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조앙(趙鞅)이 공갈(恐喝)을 쳤기 때문에(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음) 하는 수 없이 부차(夫差)는 단념했다. 그리고 그 돌아오던 도중에 백비(伯嚭)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서 의도적으로 천천히 귀국했으며, 그리하여 그 도중에 송(宋)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때, 월(越)도 오(吳)를 단숨에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일단 두 나라는 화목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월(越)에 의한 격심한 공세는 계속되었으며, 그리고 또 기원전 475년에는 오(吳)의 공자(公子) 경기(慶忌)가 부차(夫差)에게 <왕은 자신의 품행을 고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망할 것이요!>라고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또 경기(慶忌)는 영지(領地)였던 애(艾)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초(楚)로 가버렸다.

 참고: 경기(慶忌)는 오월춘추(吳越春秋) 및 동주열국지(東周列国志)에 의하면, 오왕(吳王) 요(僚)의 아들로,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던 합려(闔閭)와 오자서(伍子胥)가 보냈던 자객 석요리(石要離 또는 要離)에게 참살(慘殺)되었다고 설정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겨울에, 월(越)이 오(吳)를 공격하자 경기(慶忌)는 다시 귀국했으며, 그리고는 다시 부차(夫差)에게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렸다. <지금이라도 불충(不忠)자들을 제거하시고 월(越)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러자 부차(夫差)는 격노했다. 그리고는 대부(大夫)들과 결탁해서 기어이 그 경기(慶忌)를 죽여 버렸다.(春秋左氏傳) 그리고 또 기원전 473년, 드디어 수도(首都) 고소(姑蘇)가 함락되었다. 그러자 부차(夫差)는 근처에 있던 고소산(姑蘇山)으로 도망을 갔고, 그 다음에 대부(大夫)였던 공손웅(公孫雄-吳의 公族?)을 파견해서 화목을 구(걸)했다. 그리고 그때, 그러니까 공손웅(公孫雄)이 구천(句踐)에게 화목을 구걸했을 때, 그는 벗은 몸으로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부차(夫差) 님은 전에 구천(句踐) 님을 한번 살려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구천(句踐) 님께서 부차(夫差) 님을 한번 살려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그러자 범려(范蠡)가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구천(句踐)에게 말을 했다. <하늘로부터 받은 기회를 버렸기 때문에 지금의 오(吳)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22년간이나 당했던 치욕을 벌써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러자 잠시 고민을 했던 구천(句踐)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정 그렇다면 부차(夫差)를 용동(甬東-吳의 땅에 면한 동쪽 바다에 떠있는 群島)으로 보내버립시다. 그러면 다시 재기하지 못할 것이요!> 그러자 공손웅(公孫雄)은 다시 돌아가서 부차(夫差)에게 그런 구천(句踐)의 결정을 전했다. 하지만 부차(夫差)는 <내가 이 나이에 누구를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말을 하고는 다시 <내가 죽어서도 오자서(伍子胥)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을 하고는 얼굴에다 포(布)를 두르고 자살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부차(夫差)의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주었으며, 그런
다음 오(吳) 망국의 원흉이었던 백비(伯嚭)를 처형했고, 그리하여 오(吳)는 멸망했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473년, 오(吳)는 월(越)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리고 또 그때, 부차(夫差)는 구천(句踐)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위 부차(夫差)에서 이미 소개한 그대로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오(吳)는 멸망했고, 그리고 그 두 나라의 다툼으로 인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든가, <오월동주(吳越同舟)>란 고사도 남겼으며, 그리고 또 아래는 오(吳)의 역대 군주(君主)를 소개한 것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한글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1. 太伯(句呉建国)
 
2. 虞仲
 
3. 季簡
 
4. 叔達
 
5. 周章
 
6. 熊遂
 
7. 柯相
 
8. 彊鳩夷
 
9. 余橋疑吾
 
10. 柯盧
 
11. 周繇
 
12. 屈羽
 
13. 夷吾
 14. 禽処
 1
5. 転
 1
6. 頗高
 
17. 句卑
 
18. 去斉

 呉王

 
1. 寿夢(紀元前585年-紀元前561年) 국명(國名)을 오(吳)로 개명(改名)
 
2. 諸樊(紀元前560年-紀元前548年)
 
3. 余祭(紀元前547年-紀元前544年)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기원전 531에 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余昧(紀元前543年-紀元前527年)
    사기(史記)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기원전 530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僚(紀元前526年-紀元前516年)
 
6. 闔閭(紀元前515年-紀元前496年)
 
7. 夫差(紀元前495年-紀元前473年)




 <吳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9) 孫武 계속


 ○ 손무(孫武-기원전 535년경부터 몰년불명)는 중국 고대의 무장, 군사사상가로, 병법서 손자(孫子)의 작자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논의가 많으므로, 후술하는 병법서 孫子에서 조금 더 考察할 예정임) 그리고 또 그는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춘추시대 제(齊)나라 출신이었고, 자(字)는 장경<長卿-그러나 자(字)는 신당서(新唐書)의 재상세계(宰相世系) 3하(三下)에 의한 것이며, 이름을 무(武)라고 한 것은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의함이다>이었다. 그리고 후세의 병법가 손빈(孫臏)의 선조였으며, 손자(孫子)는 존칭이다. 그는 또, 군사학연구에 있어서 전략, 전술, 정보 등, 폭넓은 영역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라는 전략사상과 전투에서의 방세주의(防勢主義)와 단기(短期)결전, 첩보활동의 고찰 등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또 그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에는 리델하트(Sir Basil Henry Liddell-Hart)와 모택동(毛澤東) 등이 있었다.



 손무(孫武)에 관한 자료로서는 정사(正史) 사기(史記) 외에도, 오(吳)월(越)의 흥망에 관해서 기록했던 야사(野史-載記) 오월춘추(吳越春秋)와 손자(孫子)의 선조와 그 자손에 관해서 기술한 당(唐)의 정사(正史) 신당서(新唐書)가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는 내용들도 모두 그것들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성(史實性)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으므로, 단지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손무(孫武)는 제(齊)나라의 명문(名門) 전씨(田氏) 출신이었다고 한다.(그러나 吳越春秋에서는 그가 吳나라 사람이라고 했고, 그것을 현대 학자 중에서도 동조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래서 또 앞에서 소개되었던 伍子胥가 齊에 자신의 자식을 맡겼을 때, 그 친구였던 孫武도 역시 자기 자식을 伍子胥의 자식과 함께 맡겼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전완(田完)의 5세(世) 손(孫)이었던 손무(孫武)의 조부(祖父)가 군공(軍功)을 세웠기 때문에 손(孫) 성(姓)을 하사받았고, 그리하여 손 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무(孫武)는 어려서부터 병서(兵書)를 좋아했는데, 그래서 황제(黃帝)와 4제(帝)의 싸움이나, 고대(古代) 인물들(특히, 伊尹, 姜尙, 管仲 등)의 용병(用兵)과 책략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517년경, 일족(一族) 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그러자 손무(孫武)는 일가(一家)를 데리고 강남(江南)의 오(吳)로 피신했다.

 참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孫)빙(憑)은 무(武)를 낳았고 (武의) 자(字)는 장경(長卿)이다. 전(田)・포(鮑) 4족(族)의 모(謀), 난(難)을 피해서 오(吳)로 도망쳐서 장군이 되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으니, 치(馳)와 명(明)과 적(敵)이다>라고 기록되어있고, 그 중에서 차남이었던 손명(孫明)은 오(吳)에서 부춘군(富春郡)을 하사받은 후, 손 씨(孫氏)의 선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그 부춘손씨(富春孫氏)는 부춘용문손씨(富春龍門孫氏)라고도 칭해졌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의하면, 삼국시대 때의 손견(孫堅), 손권(孫權) 부자(父子)도 그 계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참고로,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청나라 때, 건륭제의 명에 따라서 건륭 37년(1772)에 시작하여 1782년에 완성했던 중국 최대의 총서(叢書)로, 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 외에도 전국의 민간에 소장된 서적을 골라 모아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4부문으로 나누었다고 하며, 7부(部)를 작성하여 여러 서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던 책이었다.

 아무튼, 그 후 손무(孫武)는 오(吳)에서 오자서(伍子胥)를 지기(知己)로 얻었으며, 그 후에는 오(吳)의 왕도(王都) 고소(姑蘇) 외곽의 어느 산속에서 칩거하면서 손자(孫子) 13편을 저작했다.

 참고: 손자(孫子) 또는 손자병법(孫子兵法) 13편의 목차소개. 단, 한글표현은 하지 않음.

 計篇 - 서론(序論)으로, 전쟁을 결단하기 전에 충분히 숙고해야할 것들에 관해서 기술.
 作戦篇 - 결단이 이루어지면, 전쟁준비에 관한 계획 등에 관해서 기술.
 謀攻篇 - 실전(實戰)에 임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방법 등에 관해서 기술.
 形篇 - 공수(攻守) 각각의 태세에 관해서 기술.
 勢篇 - 상술(上述)의 태세(態勢)로부터 생기게 되는 군세(軍勢)의 세(勢)에 관해서 기술.
 虚実篇 - 전쟁에 임해서는 어떻게 주도성(主導性)을 발휘하는가에 관해서 기술.
 軍争篇 - 적군(敵軍)의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것에 관해서 기술.
 九変篇 - 전국(戰局)의 변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에 대응하는 9가지의 방법에 관해서 기술.
 行軍篇 - 진군(進軍) 시의 주의사항에 관해서 기술.
 地形篇 - 지형(地形)에 따른 전술(戰術)의 변경에 관해서 기술.
 九地篇 - 9종류의 지세(地勢)에 관한 설명과 그에 대응하는 전술(戰術)에 관해서 기술.
 火攻篇 - 화공(火攻)의 전술(戰術)에 관해서 기술.
 用間篇 - <간(間)>은 간첩(間諜)을 의미하며, 적정(敵情)정탐의 중요성에 관해서 기술함.

 단, 현존하는 손자(孫子)는 상기(上記)의 내용과 같지만, 그러나 그 저본(底本)에 따라서 순번은 다를 수가 있음. 그 때문에 위의 편명(篇名)과 순서는 근년에 출토되었던 죽간(竹簡)에 담겨있는 것(이하, 竹簡孫子)을 토대로 한 것이며, 그 죽간(竹簡)에서 빠져있는 것은 손본십일가주손자(宋本十一家注孫子)에서 보충한 것임. 그 이유는 죽간손자(竹簡孫子) 쪽이 좀 더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되기 때문임. 그리고 손자(孫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많지만, 그러나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생략하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따로 연구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기원전 515년에 합려(闔閭)가 즉위하자 오자서(伍子胥)는 합려(闔閭)에게 손자병법(孫子兵法)을 헌상하고는 일곱 번에 걸쳐서 손무(孫武)의 등용을 간청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손무(孫武)를 불러서 병법에 대해서 논했는데, 그 때의 에피소드가 사기(史記)의 권(卷)65 손자오기열전(孫子呉起列伝) 제5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제목으로는 손자늑희병(孫子勒姫兵 또는 孫子勒兵)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므로, 그래서 아래에 그 원문을 소개하니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孫子武者,齊人也。以兵法見於吳王闔廬。闔廬曰:「子之十三篇,吾盡觀之矣,可以小試勒兵乎?」對曰:「可。」闔廬曰:「可試以婦人乎?」曰:「可。」於是許之,出宮中美女,得百八十人。孫子分為二隊,以王之寵姬二人各為隊長,皆令持戟。令之曰:「汝知而心與左右手背乎?」婦人曰:「知之。」孫子曰:「前,則視心;左,視左手;右,視右手;後,即視背。」婦人曰:「諾。」約束既布,乃設鈇鉞,即三令五申之。於是鼓之右,婦人大笑。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複三令五申而鼓之左,婦人複大笑。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乃欲斬左右隊長。吳王從臺上觀,見且斬愛姬,大駭。趣使使下令曰:「寡人已知將軍能用兵矣。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願勿斬也。」孫子曰:「臣既已受命為將,將在軍,君命有所不受。」遂斬隊長二人以徇。用其次為隊長,於是複鼓之。婦人左右前後跪起皆中規矩繩墨,無敢出聲。於是孫子使使報王曰:「兵既整齊,王可試下觀之,唯王所欲用之,雖赴水火猶可也。」吳王曰:「將軍甘休就舍,寡人不原下觀。」孫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實。」於是闔廬知孫子能用兵,卒以為將。西破彊楚,入郢,北威齊晉,顯名諸侯,孫子與有力焉。

 그리고 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필자 개인적으로는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러나 이야기가 나온 차에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합려(闔閭)가 손무(孫武)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선생의 저작 13편을 전부 다 읽어보았는데,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겠소?>라고 묻자 손무(孫武)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또 합려(闔閭)가 <그렇다면, 궁중의 부인들도 가능하겠소?>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손무(孫武)가 다시 가능하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는 궁중의 미녀들 18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두 부대로 나누고는 그 각각의 부대의 장으로 합려(闔閭)가 총애하던 여성 두 명을 세웠다. 그리고는 또 극<戟-창을 닮은 무기로, 장군의 권위와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일종의 부월(斧鉞) 같은 것. 그러나 斧鉞은 큰 도끼와 작은 도끼임>을 들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가슴과 좌우(左右) 손 그리고 등을 알고 있는가?> 그러자 여인들이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또 손무(孫武)는 <앞하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고, 좌(左)하면 왼손을 바라보고, 우(右)하면 오른손을 바라보고, 후(後)하면 뒤쪽을 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여인들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손무(孫武)는 <군령(君令)은 3영5신(3令5申-3번 令을 내리면, 5번 令을 따른다)이며, 그 약속을 잘 지키면(軍令에 잘 따르면) 포상이 내려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부월(鈇鉞)이 내려질 것입니다(즉, 참형에 처한다)>라고 말을 한 후에, 고수(鼓手)에게 북을 치게 하고는 그 북소리에 맞추어서 <우(右)!>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여인들은 손무(孫武)의 말을 따르지 않고 크게 웃었다. 그러자 또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약속이 불명확 하여(軍令이 명확하지 않아) 영(令)을 제대로 따르게 하지 못한 것은 장수의 죄다!> 그리고는 다시 군령을 숙지시킨 후에 북을 치게 하고 <좌(左)!>하고 군령을 내렸는데, 그런데 그때도 여인들은 군령에 따르지 않고 크게 웃기만 했다. 그러자 또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군령이 불명확 해서 영(令)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한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그러나 이제는 군령이 명확해졌는데도 따르지 않은 것은 병사들의 죄다!> 그리고는 좌우(左右)의 대장 두 여인을 불러서 참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 대(臺) 위에 앉아서 참관하고 있던 합려(闔閭)가 자신의 총희(寵姬)들이 죽을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서 손무(孫武)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전하게 했다. <과인(寡人)은 이미 장군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과인(寡人)에게는 저 두 여인이 없으면 먹어도 단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니, 제발 원컨대 참형만은 말아주시오!> 그러자 또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신(臣)은 이미 명(命)을 받아서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수가 진중(陣中)에 있을 때는 비록 왕명(王命)이라도 받들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두 여인을 참수해서 그곳에 모였던 여인들이 모두 볼 수 있게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두 여인을 내세워서 대장으로 삼았으며, 그런 다음 다시 북을 쳤다. 그러자 여인들은 마치 먹줄을 그은 듯이 정확하게 손무(孫武)의 명령을 따랐으며,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손무(孫武)는 또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이제 군대는 잘 정제(整齊)가 되었으니 왕께서 내려오셔서 시험을 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왕께서 저 여인들을 이용하고자 하신다면, 아마도 저 여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왕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손무(孫武)가 다시 이렇게 말을 했다. <왕께서는 병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운영하는 것에는 그다지 밝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의 능력을 인정하고 장군에 임명했다.(하략)


<손자병법서>

<孫武가 활약했던 당시, 諸国들의 위치 관계>>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512년에 손무(孫武)는 장군에 임명되어서 당시, 초(楚)의 위성국(衛星國)이었던 종오국(鐘吾國)과 서국(徐國)을 공략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그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초(楚)로 바로 진격해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손무(孫武)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합려(闔閭)를 말렸다. <초(楚)는 비록 지금은 많이 쇠퇴(衰退)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강국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현재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서 병사들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초(楚)를 공격한다는 것은 상책(上策)이 아닙니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의 말을 인정했고, 이어서 오자서(伍子胥)의 의견을 따라서 소(小)부대를 초(楚)의 국경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도발을 감행했는데, 그러자 또 초(楚)는 그에 위기를 느끼고는 대군(大軍)을 그 국경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의 국력은 나날이 소모(消耗)되어갔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6년 후였던 기원전 506년, 초(楚)는 오(吳)의 보호 하에 있던 지방 영주(領主) 당백(唐伯)과 채후(蔡侯)를 공격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오(吳)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이제 때가 성숙했다고 생각했던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와 오자서(伍子胥)를 좌우 대장으로 세우고는 군을 일으켰다. 그러자 오(吳)와 초(楚)는 한수(漢水)에서 만났고<백거(柏擧)의 싸움>, 손무(孫武)는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쳐서 초군(楚軍)의 주력을 다른 지역으로 꾀어냈다. 그러자 그 후, 오군(吳軍)의 본대(本隊)가 초(楚)의 수도를 향해서 쳐들어가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던 초(楚)의 주력은 그 즉시 오(吳)의 본대가 있던 전장(戰場)으로 달려왔지만, 그러나 강행군을 했던 탓으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러자 또 오군(吳軍)은 3만의 군세(軍勢)로 당시 20만을 헤아렸던 초군(楚軍)을 대파했으며, 그러자 또 그 여세를 몰아서 초(楚)로 진군해서 10일 만에 초(楚) 수도였던 영(郢)성(城)까지 함락시켰다. 그러자 초(楚)의 소왕(昭王)은 도망을 갔으며, 그것으로 당시의 강국이었던 초(楚)의 대군을 과병(寡兵-적은 병력)으로 무찔렀다는 전과(戰果)로 인해서 손무(孫武)의 명성은 중원(中原)을 울리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초(楚)의 신하였던 신포서(申包胥-6-22참조)가 진(秦)으로 도망을 갔으며, 그러자 또 진(秦)은 신포서(申包胥)의 책략을 받아들여서 오(吳)를 치러왔기 때문에, 그래서 오군(吳軍)은 하는 수 없이 초(楚)에서 물러났다. 그 후, 오(吳)는 북방(北方)의 제(齊)와 진(晋)을 위압(威壓)해서 제후들 간에 그 이름을 알렸지만, 하지만 그 공적은 모두 손무(孫武)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496년, 합려(闔閭)는 손무(孫武)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월(越)을 공략했지만 고전(苦戰)했고, 그런데다 또 합려(闔閭)는 그 전장에서 화살을 맞은 부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그러자 손무(孫武)는 오자서(伍子胥)와 함께 태자 부차(夫差)를 왕으로 옹립하고는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그런 다음에 부초(夫椒)에서 월(越)을 다시 만나서 대파하고는 앞의 일에 대한 설욕을 했다. 하지만 그 후의 손무(孫武)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후한(後漢)의 재기(載記=중국 역사서의 한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本紀・列伝・世家・志 등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임)의 오월춘추(吳越春秋) 부차(夫差)내전(內傳)에 의하면, 손무(孫武)는 참언(讒言)을 받아서 사직원(辭職願)을 냈다고 하고, 그 후의 오(吳)에 관한 사서(史書)에서는 손무(孫武)에 관한 기록이 도절(途絶)되었다고 했고, 부차(夫差)는 그 후로부터 더욱 교만해져서 오자서(伍子胥)를 자살로 몰고 갔다고 했으며(伍子胥 참조), 그리고 또 손무(孫武)도 살해당했다거나, 혹은 은거하면서 실전경험을 접목한 손자병법(孫子兵法)을 개량했다는 등,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묘(墓)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혹은 소주(蘇州)의 북쪽에 있는 능묘(陵墓)가 그의 묘라는 설도 있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다 또 사실, 그가 과연 실존인물이었던가에 대한 논쟁이 과거부터 내려왔는데, 그 이유는 사기(史記) 이전, 그러니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력한 고적(古籍) 등에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하여 또 그것을 의심하는 자들은 사기(史記) 등, 고문서(古文書)들의 진실성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가졌다고 하며, 그리하여 또 그 손무(孫武)가 가공의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청조(淸朝)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력한 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랬던 것이 1972년에 산동(山東)성(省-臨沂県銀雀山漢墓)에서 손빈(孫臏)의 병법서(孫臏兵法)인 죽간(竹簡)이 발견됨에 따라서 손무(孫武)의 손자(孫子 또는 孫子兵法)와는 구별된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것으로 다시 손무(孫武)가 실재인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의 사적(事績)에 관한 사실성(史實性)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므로, 다만 참고만 바랍니다.









 <孫武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8)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江蘇省 위치도-그 안에 蘇州가 있음>

 ♣오(吳-기원전 585년경부터 기원전 473년)는 중국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군국(君國)의 하나로, 현재의 소주(蘇州) 주변을 지배했던 나라였고, 군주(君主)의 성(姓)은 희(姬), 원(元) 국호(國號)는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후에 같은 국명으로, 삼국시대였던 222년에 손권이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강남에 세운 나라로, 280년에 서진(西晉)에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오대십국 가운데 902년에 양행밀(楊行密)이 양저우(揚州)에 도읍하고 화이난(淮南), 장둥(江東)에 세운 나라로, 937년에 남당(南唐)에 의해 멸망했던 나라가 있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춘추시대에 존재했던 나라 오(吳)에 대해서 소개함.
 

 아무튼, 오(吳)는 그 성립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실려 있다. 그러니까 주(周)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6-12참조)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자(末子)였던 계력(季歷-6-12참조)이 총명해서 그를 후계로 삼았다. 그러자 나머지 두 아들은 주(周)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바로 구오(句吳)였다. 그리고 태백(太伯)이 죽자, 우중(虞仲)이 그 뒤를 이었으며, 그 후에 수몽(壽夢)이 오(吳)로 개칭했다.

 ○ 수몽(壽夢-?부터 기원전 561년. 재위는 기원전 585년부터 기원전 561년)은 춘추시대 오(吳)의 초대 왕으로, 성(姓)은 희(姬), 이름은 승(乘)이었다. 그리고 거제(去斉)의 아들이었으며, 기원전 586년에 부(父) 거제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또 그의 대에 오(吳)는 강대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으로 왕이라고 칭해졌다. 그리고 또 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각각 제번(諸樊), 여제(余祭), 여매(余昧), 계찰(季札)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죽을 때 그 중에서 제일로 총명했던 말자(末子) 계찰에게 후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계찰 본인이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나머지 형제들도 그것을 인정해서 수몽(壽夢) 사후에는 형제간에 순번대로 승계하는 방식을 취했다.

 아무튼, 그 6대째였던 <합려(闔閭)>의 시대에 오(吳)는 강국이 되었고, 그러자 합려(闔閭)는 명신(名臣)들이었던 손무(孫武=孫子)와 오자서(伍子胥) 등과 함께 당시에 초 대국이었던 초(楚)를 공략해서 수도를 빼앗았으며, 그리하여 초(楚)를 멸망 바로 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신흥국이었던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의 공격을 받아서 합려(闔閭)는 중상을 입었는데, 그러자 그는 아들이었던 <부차(夫差)>에게 꼭 복수하겠다는 맹세를 받고 죽었다.

 ※앞에서 소개된 부분들과 중복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러나 일단 상기하는 차원에서 계속 진행하는 것이니 진부하게 여기시는 분께는 넓은 이해 당부 드립니다.

 ○ 합려(闔閭-?부터 기원전 496년. 재위는 기원전 514년부터 기원전 496년)는 중국 춘추시대 오(吳)의 제6대왕으로, 성(姓)은 희(姬)였고, 손무(孫武), 오자서(伍子胥) 등의 보필을 받아서 오(吳)를 일대(一大)강국을 성장시켰지만, 그러나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패해서 죽었다. 그리고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명으로 알려졌으며, 합려(闔廬)라고도 표기된다.

 사기(史記)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 의하면, 오(吳)의 초대 왕이었던 수몽(壽夢)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자(末子)였던 계찰(季札)이 현인(賢人)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그래서 수몽(壽夢)은 그 계찰(季札)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계찰(季札)은 그것을 거부했고, 그러자 결국 장자(長子)였던 제번(諸樊)이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수몽(壽夢) 사후, 형제들은 순번대로 그 자리를 이어받았는데, 그런데 또 말자(末子)였던 계찰(季札)의 차례가 왔을 때, 계찰(季札)이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는 3자(子)였던 여매(余昧)의 아들 요(僚)에게로 이어졌다.

 그러자 그때, 제번(諸樊)의 아들이었던 광(光)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그 자리는 형제들끼리 순번대로 이어받아 왔기 때문에, 그래서 말자(末子)였던 계찰(季札)이 스스로 그 자리를 거부했으므로, 그 다음은 당연히 그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난데없이 3자의 아들 요(僚)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자 그는 불만을 품었던 것인데, 하지만 그는 그런 마음을 감추고서 요(僚)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또 그 즈음, 초(楚)에서 오자서(伍子胥)가 망명을 해왔고, 그는 또 그런 광(光)의 야망을 읽어내고는 전제<專諸-그러나 春秋左氏傳에서는 전설제(鱄設諸)라고 함>란 자를 광(光)에게 추천했다. 그리하여 515년 여름 4월, 광(光)은 요(僚)를 연회에 초대했고, 그러자 또 광(光)의 명령을 받았던 전제(專諸)가 물고기요리를 요(僚)에게 받치기 위해서 찾아갔으며, 그리고는 그 물고기 배 안에 숨겨두었던 비수(匕首)를 꺼내서 단번에 요(僚)를 찔러서 죽였다.(一說에는 배안에 칼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큰 물고기였다고 함) 아무튼, 그러자 그 광경을 보고 달려들었던 호위무사들에 의해서 전제(專諸)도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는데, 그러자 그 후, 광(光)은 왕위에 올랐고, 그가 바로 합려(闔閭)였다. 그리고 합려(闔閭)는 왕위에 오른 후, 그 전제(專諸)의 공을 인정해서 전제(專諸)의 아들을 경(卿)에 임명했다고 한다.

 참고: 하지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의하면, 수몽(壽夢-乘)이 죽자 그 뒤를 장남 제번(諸樊-遏)이 이었는데, 그 제번(諸樊)은 또 기원전 548년 겨울 12월에 초(楚)에 토벌되었으며, 그리하여 초(楚)의 장군(巢의 牛臣)과 싸워서 전몰(戰沒)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차남 여제(余祭)는 기원전 544년(史記에서는 기원전 531년에 逝去했다고 함)에 다리를 절단당하고 문지기가 되었던 월(越)의 포로에 의해서 참살되었다고 했으며, 3자였던 여매(余昧-夷末)는 기원전 527년 정월에 서거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4자였던 요(僚-州于. 그러나 史記에서는 3자 余昧 子)가 그 뒤를 이었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결국,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내용에 의한다면 계찰(季札)은 요(僚)의 숙부가 아니라 아우였고(僚는 季札 바로 위의 兄), 그래서 제번(諸樊)의 아들 합려(闔閭) 광(光)과도 사촌지간이 아니라 숙부지간이었으며, 그러므로 또 결국, 합려(闔閭)는 그 숙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상기(上記)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내용과 사기(史記)의 기록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수몽(壽夢)과 계찰(季札)의 일화(逸話)에 관해서는 그 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으며, 그것은 또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고공단보(古公亶父) 계력(季歷)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또 당시, 형제상속과 말자(末子)상속의 풍습을 유교적인 미담(美談)으로 승화시키려고 했던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학자도 
많다.

 어쨌든, 광(光)은 그렇게 해서 즉위해서 합려(闔閭)가 되었고, 오자서(伍子胥), 손무(孫武) 등의 도움을 받아서 당시 초 대국이었던 초(楚)와 몇 번이나 대결했다. 그리고 기원전 506년에는 초(楚)의 수도였던 영(郢)까지 함락시키는 대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앞의 글을 참조바라며, 그리고 또 기원전 496년에 월왕(越王) 윤상(允常)이 서거하자 태자였던 구천(句踐)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합려(闔閭)는 10년 전의 한을 풀기 위해서 월(越)을 공격했는데, 하지만 또 취리(檇李-현재의 浙江省 嘉興市이며, 추리 또는 수리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 하지만 여기서는 취리로 표현함)에서 월(越)의 장군 범려(范蠡)의 기책에 말려서 패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월(越)의 무장이었던 영고부(靈姑孚)가 쏘았던 화살에 발가락 엄지를 부상당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사망했다.

 ○ 손무(孫武-기원전 535년경부터 몰년불명)는 중국 고대의 무장, 군사사상가로, 병법서 손자(孫子)의 작자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논의가 많음) 그리고 또 그는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춘추시대 제(齊)나라 출신이었고, 자(字)는 장경<長卿-그러나 자(字)는 신당서(新唐書)의 재상세계(宰相世系) 3하(三下)에 의한 것이며, 이름을 무(武)라고 한 것은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의함이다>이었다. 그리고 후세의 병법가 손빈(孫臏)의 선조였으며, 손자(孫子)는 존칭이다. 그는 또 군사학연구에 있어서 전략, 전술, 정보 등, 폭넓은 영역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다>라고 하는 전략사상과 전투에서의 방세주의(防勢主義)와 단기(短期)결전, 첩보활동의 고찰 등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또 그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에는 리델하트(Sir Basil Henry Liddell-Hart)와 모택동(毛澤東) 등이 있었다.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서, 나머지는 부득이 다음 편으로 미룹니다>







<孫武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7)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
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그 후, 춘신군(春申君)의 주도 하에 항연(項燕-項羽의 祖父) 장군의 활약으로 진(秦)에 잠시 대항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춘신군(春申君)마저 죽어버리자 초(楚)에서는 더 이상 국정(國政)을 장악할 자가 없게 되었고, 그러자 또 이어서 항연(項燕)이 진(秦)의 왕전(王翦) 장군에게 패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로 초(楚) 최후의 왕이었던 부추(負芻)는 진(秦)에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당시, 진(秦)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창평군(昌平君)이 항연(項燕) 등의 추대를 받아서 잠시 초왕(楚王)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얼마 가지 않아서 진군(秦軍)에게 진압 당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23년에 초(楚)는 완전히 멸망했다.

 ○ 춘신군(春申君-?부터 기원전 2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의 정치가로, 성(姓)은 황(黃), 휘(諱)은 알(歇-또는 헐로 읽는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라며, 알로 읽는 근거는 史記九 列伝二에 의함), 전국(戰國) 사군(四君)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고열왕(考烈王)을 옹립함으로 해서 당시, 기울어가던 초(楚)의 국세(國勢)를 바로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국정(國政)에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기원전 274년이었고, 경양왕(頃襄王)의 명을 받고 진(秦)에 사자로 갔던 때였다. 그리고 또 그 무렵에는 진(秦)이 한(韓)과 위(魏)를 거느리고 초(楚)를 공략하려고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러자 그는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현재, 천하에 진(秦)과 초(楚)보다 더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초(楚)와 진(秦)이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양호상타(兩虎相打=兩虎相鬪)가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두 나라는 함께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그것은 또 바로 약한 개(韓・魏)들만 이롭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의 말을 인정해서 초(楚)와 화평을 도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진(秦)이 초(楚)와의 화평을 증거로 태자 완(完-나중의 考烈王)을 인질로 요구하게 되자, 그는 태자 완(完)을 따라서 진(秦)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264년에 경양왕(頃襄王)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대로 있다가는 다른 사람이 왕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는 당시 진(秦)의 재상이었던 범저(范雎)에게 완(完)을 귀국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범저(范雎)는 소양왕(昭襄王)에게 그의 그런 뜻을 전했는데, 그러자 또 소양왕(昭襄王)은 그에게 먼저 초(楚)로 가서 그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오게 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완(完)만 비밀리에 초(楚)로 보냈고, 자신은 진(秦)에 남았다. 그러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소양왕(昭襄王)은 대노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때, 범저(范雎)가 나서서 중재를 했고, 그 결과 그도 초(楚)로 귀국했다. 그러자 그 3개월 후, 완(完)은 즉위했고, 초왕(楚王)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었고, 회북(淮北-淮河의 북쪽) 12현(縣)을 영지로 받았으며, 춘신군(春申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기원전 258년에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이 진(秦)에 포위되었는데,
그러자 평원군(平原君)이 구원을 구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춘신군(春申君)은 그에 응해서 출병했고, 그러자 진(秦)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 후, 기원전 248년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회북(淮北)은 제(齊)와 접하는 중요지이기 때문에, 직할 군(郡)인 방(方)이 더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회북(淮北) 대신 강동(江東)이 주어졌고, 그러자 또 그는 과거 오(吳)의 성(城)이었던 곳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그곳에서 군을 출병해서 노(魯)를 멸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그의 거성(居城)에는 식객이 3천 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객(上客)은 전부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객 중에는 순자(荀子)도 있었다고 하며, 그러자 또 춘신군(春申君)은 그 순자(荀子)를 난능(蘭陵)이란 현(縣)의 영(令-長官 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240년에 그는 제후(諸侯) 연합군을 통솔해서 진(秦)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그 때문에 그는 고열왕(考烈王)에게 외면당했다. 그리고 또 동년, 초(楚)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수춘(壽春)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또 그 즈음, 그의 식객 중에는 이원(李園)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이원(李園)의 여동생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이원(李園)은 언젠가는 그 여동생을 고열왕(考烈王)에게 보내서 출세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때, 춘신군(春申君)이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로부터 머지 않아서 그녀는 춘신군(春申君)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알게된 이원(李園)은 고열왕(考烈王)에게 자손이 없다는 점을 착안해서 춘신군(春申君)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이야기했다. <제 여동생을 왕에게 헌상하면 그 복중의 아이는 당연히 왕의 아이가 될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아이는 다음의 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초(楚)는 춘신군(春申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참고: 하지만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고열왕(考烈王)에게는 유왕(幽王) 이외에도 다른 아들 즉, 초(楚)의 마지막 왕이었던 부추(負芻) 등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함.

 그러자 또 아무튼, 춘신군(春申君)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고, 이어서 고열왕(考烈王)에게 말을 해서 그 이원(李園)의 여동생을 헌상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후에 그녀는 왕후가 되었는데, 그 결과로 이원(李園) 역시도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이원(李園)은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해서 춘신군(春申君)을 제거하려고 생각했고, 그러자 또 그에 위기감을 느꼈던 춘신군(春申君)은 식객 중 한사람이었던 주영(朱英)이란 사람과 그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주영(朱英)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그 이원(李園)을 없애버리겠으니 명만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당시, 춘신군(春申君)은 이원(李園)을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주영(朱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주영(朱英)은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일로 해서 자신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해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고 기원전 238년, 결국 고열왕(考烈王)은 병사했고, 그러자 그 장례식에 참석을 했던 춘신군(春申君)은 극문(棘門-城門의 한 이름)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원(李園)의 자객에게 자신의 종자(從者)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그 후에 그의 머리는 성 밖으로 버려졌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의 일족(一族)과 식솔(食率-家臣 등과 집에서 일을 하는 노비나 종 등)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이원(李園)의 여동생이 낳은 그의 아들은 나중에 즉위해서 유왕(幽王)이 되었다. 하지만 그 유왕(幽王)도 재위 10년째였던 기원전 228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 뒤를 이어서 동모제(同母弟) 애왕(哀王)이 등극했지만, 그러나 그도 재위 2개월 때에 서형(庶兄)이었던 부추(負芻)의 습격을 받아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초(楚)의 역대 군주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한글 표기는 하지 않음.

 1. 熊繹
 2. 熊艾
 3. 熊黵(또는 黒+旦)
 4. 熊勝
 5. 熊楊
 6. 熊渠
 7. 熊毋康
 8. 熊摯紅
 9. 熊延(執疵?-재위-紀元前848年頃)
 10. 熊勇(在位-紀元前847年頃-紀元前838年頃)
 11. 熊厳(在位-紀元前837年頃-紀元前828年頃)
 12. 熊霜(在位-紀元前827年頃-紀元前822年頃)
 13. 熊徇(在位-紀元前821年頃-紀元前800年頃)
 1
4. 熊咢(在位-紀元前799年頃-紀元前791年頃)
 
15. 若敖(熊儀, 在位-紀元前790年頃-紀元前764年頃)
 
16. 霄敖(熊坎, 在位-紀元前763年頃-紀元前758年頃)
 
17. 蚡冒(熊眴, 在位-紀元前757年頃-紀元前741年)
 
18. 武王(熊通, 在位-紀元前740年-紀元前690年) 처음으로 왕호(王號)를 사용함
 
19. 文王(熊貲, 在位-紀元前689年-紀元前675年)
 
20. 荘敖(熊囏, 在位-紀元前674年-紀元前672年)
 
21. 成王(熊惲, 在位-紀元前671年-紀元前626年)
 2
2. 穆王(熊商臣, 在位-紀元前625年-紀元前614年)
 
23. 荘王(熊侶, 在位-紀元前613年-紀元前591年)
 
24. 共王(熊審, 在位-紀元前590年-紀元前560年)
 
25. 康王(熊招, 在位-紀元前559年-紀元前545年)
 
26. 郟敖(熊員, 在位-紀元前544年-紀元前541年)
 
27. 霊王(熊囲, 在位-紀元前540年-紀元前529年)
 
28. 王比(熊比, 在位-紀元前529年)
 
29. 平王(熊弃疾, 在位-紀元前528年-紀元前516年)
 
30. 昭王(熊珍, 在位-紀元前515年-紀元前489年)
 
31. 恵王(熊章, 在位-紀元前488年-紀元前432年)
 
32. 簡王(熊中, 在位-紀元前431年-紀元前408年)
 33. 声王(熊当, 在位-紀元前407年-紀元前402年)
 
34. 悼王(熊疑, 在位-紀元前401年-紀元前381年)
 
35. 粛王(熊臧, 在位-紀元前380年-紀元前370年)
 
36. 宣王(熊良夫, 在位-紀元前369年-紀元前340年)
 
37. 威王(熊商, 在位-紀元前339年-紀元前329年)
 
38. 懐王(熊槐, 在位-紀元前328年-紀元前299年)
 
39. 頃襄王(熊横, 在位-紀元前298年-紀元前263年)
 
40. 考烈王(熊完, 在位-紀元前262年-紀元前238年)
 
41. 幽王(熊悍, 在位-紀元前237年-紀元前229年)
 
42. 哀王(熊猶, 在位-紀元前228年)
 
43. 負芻(熊負芻, 在位-紀元前227年-紀元前223年)
 
44. (昌平君) (在位-紀元前223年)
 
45. (空位)
 
46. (義帝) (熊心, 在位-紀元前208年頃-紀元前206年)

 
※ 단, 46의 의제는 진(秦) 멸망 후의 난국(亂國) 때, 항량(項梁)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회왕(懷王)의 손자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소개하고 있는 춘추전국시대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일단 소개는 함.




 <초(楚)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6)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장의(張儀-?부터 기원전 309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세(遊說)가(家)였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태생은 위(魏)였으며,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중국 古代의 思想家들로, 諸子百家의 하나였고, 특히 外交의 策士로서 각국을 周遊했던 사람들을 가리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진(秦)의 재상을 지냈으며,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 또는 합종설은 韓·魏·趙·楚·燕·齊의 6국이 縱으로 동맹을 맺어서 秦에 대항하자는 說)에 대해서 연횡책(連衡策 또는 연횡설은 秦이 위의 6국과 橫 또는 衡으로 각각 동맹을 맺어서 화친할 것을 주장했던 설)으로 맞섰으며, 후에 진(秦)이 통일하는데 크게 공헌했던 인물이었
다.

 아무튼, 그는 어렸을 때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자(鬼谷子 또는 귀곡선생 또는 귀곡)에게 배웠으며, 그 후에 제국(諸國)으로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했지만, 그러나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더욱이 초(楚)의 어느 대신(大臣)을 따라서 연회(宴會)에 참석했을 때는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뭇매질까지도 당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는 그 상처투성이로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내 혀(舌)는 아직도 잘 붙어 있소?> 그러자 그의 아내가 살펴보고 그렇다고 답을 하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럼 됐소! 나는 혀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아무튼, 그 후에도 그의 불우한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그러자 그 당시에는 이미 조(趙)로 가서 출세를 하고 있었던 소진(蘇秦)에게 부탁이라도 해보려고 그는 소진(蘇秦)을 찾아갔다. 하지만 예기(豫期)잖게 큰 모욕만 당했던 그는, 그래서 그 굴욕을 갚아주기 위해서라도 일단 진(秦)으로 가서 벼슬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벼슬을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돈은 소진(蘇秦)이 장의(張儀) 모르게 지불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후에 장의(張儀)는 진(秦)에서 벼슬을 해서 출세를 하게 되었고, 그러자 또 소진(蘇秦)은 그때 연(燕)과 조(趙)를 동맹시키고는 그 동맹이 정착될 때까지 장의(張儀)가 조(趙)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진왕(秦王)을 설득시켰다. 그러자 장의(張儀)는 <소군(蘇君=蘇秦)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구나>라고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장의(張儀)는 위(魏)를 토벌했고, 이어서 상군(上郡)과 소량(少梁)을 획득했던 공을 인정받아서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위(魏)가 제(齊)와 손을 잡으려고 하자 위(魏)로 가서 재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위(魏)와 진(秦)의 동맹도 성사시켰고, 이어서 다시 진(秦)의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앞의 그 장의(張儀)에게 뭇매를 가했던 초(楚)의 재상에게 그는 <앞에는 당신들이 나를 의심해서 나에게 심하게 대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당신들의 성(城)들을 내가 빼앗아 보겠소!>라고 하는 글을 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6년에 촉(蜀)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장의(張儀)는 혜문왕(惠文王)에게 한(韓)을 공격하고, 주(周)를 두렵게 하여,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라고 진언했지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착(司馬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촉(蜀)을 점령했다.

 그러자 또 그 후였던 기원전 313년에 장의(張儀)는 대(對)초(楚) 공작(工作)에 들어가서, 상(商)과 어(於-과거 商鞅의 封地였던 땅)의 땅 600리(里) 사방(四方)을 할양(割讓)해 줄 것이니, 제(齊)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초(楚)의 회왕(懷王)은 기뻐하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초(楚)는 제(齊)와의 동맹을 깼다. 그런 다음 자신의 부하 장수를 시켜서 진(秦)으로 가서 그 약속한 땅을 받아오라고 시켰는데, 그러자 장의(張儀)는 6리(里) 사방(四方)의 땅을 주겠다고 그 장수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또 그 장수는 처음 약속과 다르다면서 맹렬히 항의했지만, 그러나 장의(張儀)는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회왕(懷王)은 대노(大怒)해서 출병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藍田의 싸움), 그러자 회왕(懷王)은 하는 수 없이 진(秦)에 화목의 의미로 대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토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장의(張儀)의 목숨이요!>

 그러자 장의(張儀)는 그 답(答)으로 초(楚)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회왕(懷王)은 장의(張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러자 또 장의(張儀)는 사람을 시켜서 그 회왕(懷王)이 아끼던 총희(寵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했다. <지금, 진(秦)에서는 장의(張儀)를 살리기 위해서 회왕(懷王)에게 바칠 재보(財寶)와 미녀들을 선물로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회왕(懷王)의 마음이 그 미녀들에게로 돌아가고, 당신의 처지는 어찌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자 불안해진 총희(寵姬)는 회왕(懷王)을 설득시켰고, 그리하여 장의(張儀)는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그 후, 혜문왕이 죽었고, 그러자 장의(張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자가 즉위해서 무왕(武王)이
되었다. 그러자 장의(張儀)는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위(魏)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재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1년 후에 죽었다.

 ⊙ 소진(蘇秦-?부터 기원전 317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변론가(辯論家)로, 장의(張儀)와 나란히 하며 종횡(縱橫)가(家)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제국(諸國)을 유세(遊說)해서 합종(合從)을 성립시켰으며, 소대(蘇代)의 형이었다.

 사기(史記)의 소진(蘇秦)열전에 의하면, 그는 낙양(洛陽) 사람이었고, 제(齊)로 가서 장의(張儀)와 함께 귀곡(鬼谷)에게 종횡(縱橫)의 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년 후에 제국(諸國)을 방랑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의야행해서 친족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그러자 그는 발분(發奮)해서 나름대로의 상대를 설득하는 술(術)을 개발했고, 그리하여 그 처음으로 주(周)로 가서 현왕(顯王)을 모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진(秦)으로 가서 혜문왕을 만났지만 역시 실패했다.(당시, 秦에서는 商鞅의 사형이 집행된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그래서 辯舌士 등을 기피했던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연(燕)으로 가서 문공(文公)에게 진언을 해서 조(趙)와의 동맹을 성사시켰으며, 이어서 한(韓)과 위(魏) 그리고 제(齊)와 초(楚)의 왕들을 각각 설득시켜서 당시, 전국7웅이었던 진(秦)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동맹도 성사시키고는 그 6국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또 그때, 한(韓)의 선혜왕(宣惠王)을 설득시켰을 때, 그가 말했다던 <계구우후(鷄口牛後)>의 고사는 유명하며, 참고로 또 그 뜻은, 닭의 주둥이 또는 입과 소의 꼬리 또는 닭의 머리와 소 또는 용의 꼬리라는 의미로, 큰 단체의 꼴찌보다는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조(趙)로 다시 귀국했을 때 숙후(肅侯)는 그를 무안군(武安君)에 봉했으며, 그런 다음 그 맹약의 약정서(約定書)를 진(秦)으로 보냈다. 그러자 그 후로 15년간이나 진(秦)은 더 이상 침공을 하지 못했고, 그러자 또 당시 최강국이었던 진(秦) 외의 나라들은 남북 종(縱)으로 서게 되었기 때문에 소진(蘇秦)의 책략은 합종설(合從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합종(合從)을 성립시켰던 소진(蘇秦)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러자 제후들이 각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서 그를 배웅했으며, 그래서 또 마치 그것은 왕의 행차와도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런 소문을 들었던 주(周)나라의 왕도 그의 앞길을 말끔히 청소를 해서 그를 맞았으며, 그런 다음에는 사람을 보내서 국경까지 그 행렬을 배웅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런 소문을 들었던 그의 친척들은 전에 그를 멸시했던 일을 생각하고는, 그가 고향에 나타나자 두려워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에 나에게 조금의 땅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재상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는 자신을 멸시했던 그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다액(多額)의 돈을 내서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합종(合從) 해체 후에 그는 연(燕)으로 가서 벼슬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다시 제(齊)로 옮겨갔고, 그 이유는 또 그 제(齊)의 국력을 약화시켜서, 연(燕)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자 또 제(齊)의 민왕(湣王)은 그를 받아주었지만,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는 반대파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그러니까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민왕(湣王)에게 남겼다고 했는데 <만약에 제가 죽게 된다면, 제 시체를 차열(車裂-차에 사지를 묶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 형에 처해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해주십시오. "소진(蘇秦)은 연(燕)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제(齊)에서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면 저를 죽인 자가 반드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 후에 민왕(湣王)은 그의 유언대로 해주었고, 그러자 또 그를 죽였던 자가 자수를 해왔기 때문에 민왕(湣王)은 그 자를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장의(張儀)열전에 의하면, 그 장의(張儀)를 진(秦)으로 보냈던 것은 소진(蘇秦)의 혼담(魂膽-魂魄)이었다고 하며, 그 이유는 또, 장의(張儀)가 진(秦)으로 가서, 그 진(秦)이 조(趙)로 출병을 하는 것을 멈추게 할 의도였다고 했지만, 그러나 상기(上記)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에는 많은 모순(矛盾)이 있다고 하므로, 그리고 또 본인 역시 그냥 건너뛰어도 될 것이지만, 그러나 재미 삼아서 참고로 올려드린 것이니,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다만 참고로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진(秦)의 공세(攻勢)는 더욱 강해졌고, 그 결과로 기원전 278년에는 백기(白起)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진(陳)으로 천도(遷都)했다.

 ○ 백기(白起-B.C.?~B.C.257년 11월)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의 무장이었으며, 공손기(公孫起)라고도 표기되었고, 병법(兵法)의 대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260년에는 장평(長平-장평의 싸움)에서 조(趙)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40만이나 되었던 포로들을 땅속에 묻어서 죽였으며, 그러자 그 후에 그 일을 후회하면서 자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백기(白起)는 진(秦)나라의 미(郿-지금의 陝西省 西郿현)현(縣) 출신으로, 소양왕(昭襄王)을 모시면서 각지를 전전(轉戰)했고, 그리하여 조(趙)와 위(魏), 초(楚) 등과 싸워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것으로 진(秦)의 영토 확대에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백기(白起)・왕전(王翦) 열전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294년에 좌서장(左庶長-대충 卿 아래의 직급으로, 장군에 버금가는 직급이었고, 商鞅이 지냈던 적이 있었음)에 임명되어서 한(韓)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3년에는 좌경(左更-左庶長보다 한 단계 위의 직급)에 올라서 한(韓)과 위(魏)를 공략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 이궐(伊闕)에서 싸워서 이겼을 때는 포로 24만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한(韓)의 장군 공손희(公孫喜)를 포획했으며,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2년에는 위(魏)를 공격해서 대소(大小) 61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기원전 278년에는 초(楚)를 공격해서 수도였던 영(郢)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초(楚)는 진(陳)으로 천도(遷都)를 했는데, 그러자 또 동년(同年), 그 공을 인정받아서 그는 무안군(武安君)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또 기원전 275년에는 위(魏)의 화양(華陽)을 공격해서 한(韓)・위(魏)・조(趙)의 장군들을 포획했으며, 13만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또 동년, 조(趙)의 장군 가언(賈偃)과 싸웠고, 그때도 사졸(士卒) 2만 명을 황하(黃河)에 빠뜨려서 죽였다. 그 다음 기원전 265년에는 한(韓)의 형 성(陘城)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포로 5만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교묘한 용병술로 조괄(趙括)이 이끌었던 조(趙)군(君)에 대승했다.

 ⊙ 장평(長平)의 싸움은 기원전 260년에 진(秦)과 조(趙)가 장평(長平-현재의 山西省 高平市 근처)에서 격돌했던 전쟁으로, 진(秦)의 대승으로 끝났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백기(白起)는 조(趙)나라의 포로 40만여 명을 생매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며(坑殺), 그 때문에 또 조(趙)의 국력은 한순간에 쇠(衰)해지고 말았다.

 <배경>

 당시, 진(秦)은 상앙(商鞅)의 개혁에 의해서 강성(强盛)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전국7웅 중에서도 압도적인 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런 힘을 배경으로 해서 다른 6국,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한(韓)과 위(魏) 그리고 조(趙)와 초(楚)를 몇 번이고 침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65년에는 백기(白起)를 장군으로 해서 공략 길에 나섰으며, 그 결과 한(韓)의 야왕(野王-현재의 河南省 沁陽市)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한(韓)의 북방영토였던 상당 군(上黨郡)이 고립되고 말았는데, 그러자 또 당시, 그 상당 군을 지키고 있었던 풍정(馮亭)은 그 상당 군을 조(趙)에 헌상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조(趙)의 효성왕(孝成王)은 그 당시 조(趙)의 실력자였던 평원군(平原君)과 평양군(平陽君)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평양군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에 그 땅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은 곧 진(秦)과 적이 되어서 싸워야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평원군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단 한 알()의 금(金-돈)도 지불하지 않고도 영토가 생기게 되었는데, 뭐 고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효성왕(孝成王)은 <그 땅을 접수 하든 안 하든 진(秦)과의 싸움은 결국 시간문제이다!>라고 생각하고는 평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군사를 보내서 그 상당 군을 접수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대노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62년에 왕흘(王齕)을 장군으로 해서 원정군을 조(趙)로 보냈으며, 그 결과 그 상당(上黨)은 진(秦)에 점령되었다. 그러자 또 그 상당(上黨)의 백성들은 조(趙)의 장평(長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왕흘(王齕) 군은 그들을 추적하던 중, 조(趙)를 그대로 침공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또 조(趙)의 효성왕(孝成王)은 노장이었던 염파(廉頗)를 총대장에 임명하고는 곧 방위체제에 들어갔다.

 <경과>

 하지만 염파(廉頗)는 진군(秦軍)에 연거푸 세 번이나 졌고, 그러자 그는 작전을 바꾸어서 진지를 강하게 구축한 뒤에 지구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세월이 2년이나 지속되었는데, 그러자 또 염파(廉頗)의 생각대로 진군(秦軍)들은 그때부터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진(秦)의 재상이었던 범저(范雎)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조(趙)로 간첩을 들여보냈고, 그 간첩은 범저(范雎)가 시켰던 대로 <진(秦)에서는 조괄(趙括)이 조군(趙軍)의 지휘를 맡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인 염파(廉頗)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한다>라는 데마고기(Demagogie-정치목적의 선동적인 악선전 또는 허위정보)를 퍼뜨렸다. 그러자 효성왕(孝成王)은 적극책을 취하지 않고 있었던 염파(廉頗)에게 불만을 품고는 염파(廉頗)를 해임하고 조괄(趙括)을 소환해서 총대장에 임명해버렸다. 그러자 또 경험이 미숙했던 조괄(趙括)을 기용하는 것에 위기를 느꼈던 군신(群臣)들 중에서 인()상여(藺相如)란 사람이 병든 몸을 이끌고 와서 그 일에 대해서 간언했지만,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조괄(趙括)에 대해서 조금 소개하고 넘어가면, 그는 사실 당시 그 조(趙)의 명장이었던 조사(趙奢)의 아들로, 자타가 공인했던 병법의 대가였지만, 그러나 실전경험은 전혀 없었던 소위, 탁상 병법가였고, 그래서 단지 병법서들을 두루 꿰고만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또 그의 아버지였던 조사(趙奢)도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에게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만약에 나라에서 저 아이에게 어떤 큰일을 맡기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꼭 말리도록 하시오!> 그래서 또 그때, 그의 어머니는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곧 효성왕(孝成王)을 찾아가서 그 결정을 거두어 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그 어머니의 말도 듣지를 않았고,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시다면, 만약에 저의 아들이 싸움에서 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일족들에게는 절대로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러자 효성왕(孝成王)은 그 말에는 약속을 해주었는데, 그랬던 한편, 진(秦)에서는 조(趙)의 총대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밀리에 백기(白起)를 장평(長平)으로 파견해서 총대장에 임명시켰으며, 그러자 왕흘(王齕)은 그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싸움>

 그 후, 총대장에 임명되었던 조괄(趙括)은 조(趙)의 군세만 믿고 진군(秦軍)을 한 번에 무찌르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염파(廉頗)의 전법을 변경해서 조군(趙軍)을 진(秦)의 본진을 향해서 돌격시켰는데, 그러자 또 백기(白起)는 선봉부대를 미끼로 해서 퇴각하는 것처럼 하면서 조군(趙軍)을 유인했고, 그런 다음 주력부대로 조군(趙軍)과 맞서던 사이에 미리 매복시켜두었던 병사 25000명으로 하여금 조군(趙軍)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거기다 또 5천의 기병(騎兵)으로 조군(趙軍)을 양분(兩分)하는 작전도 함께 병행했는데, 그러자 조군(趙軍)은 금방 대혼란에 빠졌고, 이어서 전의(戰意)를 상실하고는 장평(長平)성(城)으로 도주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장평 성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진(秦) 국내의 장정 남자들을 총동원해서 백기(白起)를 도와주게 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그들을 이용해서 포위망을 더욱 견고하게 했고, 그것으로 조군(趙軍)에게는 단 한 톨의 병량(兵糧)도 공급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조군(趙軍)에게는 46일 간이나 병량이 전혀 보급되지 않았으며, 그러자 또 굶주렸던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워서 그 죽은 인육(人肉)을 먹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갔다. 그러자 또 초조해졌던 조괄(趙括)은 어떻게든 그때까지 남아 있던 병력을 동원해서 그 포위망을 돌파해 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진군(秦軍)이 쏜 화살에 고슴도치처럼 맞아서 전사했고, 그러자 남아 있던 조군(趙軍) 40만여 명은 드디어 항복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병량(兵糧)이 부족한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 소년병 약 240명 정도만 남긴 채로 조군(趙軍) 전원을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래서 또 그때, 조(趙)의 전사자와 피처형자들은 모두 합해서 45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실제로도 1995년 5월에 발굴된 조사에서도 대량의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결과>

 아무튼 그 후, 진군(秦軍)은 백기(白起)의 공적에 위협을 느꼈던 범저(范雎)에 의해서 일단 진격이 멈추어졌지만,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조(趙)를 침공했으며, 그리하여 수도 한단(邯鄲)까지 포위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평원군 등의 활약과 위(魏)의 신능군(信陵君) 그리고 초(楚)의 춘신군(春申君) 등의 협력을 받아서 조(趙)는 멸망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하지만 그 장평(長平)에서의 대량학살로 인해서 더 이상 진(秦)에 대항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안타깝게도 백기(白起)는 그 승리로 인해서 범저(范雎) 등의 시기를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그는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자살을 하려고 했을 때, 그는 <나는 단지 죽을 뿐이다. 나는 그 장평(長平)에서 포로 40여만 명을 생매장 시켰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나 그 일은 당시 재상이었던 범저(范雎)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러자 또 범저(范雎)는 당시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던 백기(白起)의 공적을 무위로 돌리기 위해서, 아주 사소한 조건으로 조(趙)와 화의해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259년, 진(秦)은 왕릉(王陵)을 기용(起用)해서 한단(邯鄲)을 포위시켰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258년에는 증파(增派)도 했지만, 그러나 또 거기다 지휘관까지 왕흘(王齕)로 교대시켰던 차에, 그래서 또 그때 조(趙)를 구원하러 왔던 위(魏)의 신능군과 초(楚)의 춘신군에 의해서 진(秦)은 대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진(秦)에서는 그때서야 부랴부랴 백기(白起)를 다시 불러서 출병을 독려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오히려 백기(白起)가 그러했던 범저(范雎)의 행동들에 불신을 품고는 병(病)을 핑계 삼아서 그 출병을 거부했다. 하지만 또 그 일이 그를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했으며, 그리하여 또 결국에 기원전 257년에 그는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자해(自害)를 명받았다. 그러자 그는 자해 직전에 이렇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왜 나는 자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그리고는 또 잠시 후에 <나는 다만 죽을 뿐이다. 그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나는 그 포로 40여만 명을 하루저녁에 모두다 생매장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 진(秦)의 백성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하며, 각지에서 사당을 지어서 그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料敵合変、出奇無窮、声震天下>라고 평가했다고 하고, 그 내용은 또 <그는 적의 능력을 꿰뚫어보고 그에 맞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기책(奇策) 또한 무한하게 풀어냈었다. 그리하여 그의 위세(威勢)는 천하를 벌벌 떨게 했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리고 또 그 말미(末尾)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해서 왕전(王翦)과 함께 아주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지만, 그러나 결점도 있었던 인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또 특히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그러나 범저(范雎)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나지를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