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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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3. 거병(擧兵)
유방(劉邦)이 정장(亭長)을 맡고 있었을 때, 하루는 부역(賦役)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부역에 참가할 인부들을 데리고 함양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진(秦)의 기혹한 노동과 형벌을 잘 알고 있었던 인부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화가 났던 유방(劉邦)은 술을 진탕 마시고는 잠이 들고 말았는데, 그런데 또 그 사이에 남아 있던 인부들마저 전부 도망을 가버렸고, 그러자 낙담을 했던 유방(劉邦)은 하는 수 없이 자신도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기원전 209년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했다. 그러자 패(沛)의 현령(縣令)은 거취를 결정하지 못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또 그때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나서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유방(劉邦)을 내세워서 반란에 참가할 것을 그 현령에게 조언했다. 그래서 일단 유방(劉邦)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 현령은 마음을 바꾸고는 패성(沛城)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던 유방(劉邦)은 현령이 자신을 내쫓으려고 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그리고는 비단에다 다음과 같은 글(편지)을 써서 城안으로 던져 넣었다.<중국의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성새(城塞)도시이기 때문에>
<현재, 이 성(城)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든다면 이제 곧 머지않아 들이닥칠 반란군에 의해서 이 성은 점령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성 안의 사람들은 큰 재앙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현령을 죽이고 의지가 되는 인물(劉邦 자신)을 내세워야 한다!>
그러자 성내의 사람들은 그 현령을 죽이고 유방(劉邦)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유방(劉邦)은 처음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서 그것을 거절했지만, 그러나 연이어서 소하(蕭何)와 조참(曹參)까지 그를 추천하고 나서자 어쩔 수 없다는 형식으로 그 현령 직을 수락했다.
그 후 유방(劉邦)은 패공(沛公)으로 불렸다. 그리고 또 그때 유방(劉邦)이 모았던 병력은 2, 3천 정도였으며, 그 중에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외에도 개고기장사를 하고 있었던 의제(義弟) 번쾌(樊噲)와 유방(劉邦)의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또 같은 날 태어났다던 노관(盧綰) 그리고 또 현(縣)의 마구간지기였던 하후영(夏候嬰) 그리고 또 베짜는 일을 하던 주발(周勃)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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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소개
번쾌(樊噲)는 중국 한나라 고조 때의 공신(?~B.C.189)으로, 기원전 206년 <홍문(鴻門)의 회합>에서 위급한 처지에 놓였던 유방을 구하였고, 그 후에 유방이 왕위에 오르자 장군이 되었다. 출신은 패현(沛縣). 작위(爵位)는 무양후(舞陽侯). 시호(諡號)는 무후(武侯). 그리고 그는 아주 강하고 굳센 사람이었다고 전하며, 유방(劉邦)과 알고 지냈던 당시, 개를 취급하던 백정이었다. 하지만 유방(劉邦)이 거병하자 반진봉기(反秦蜂起)에 참여했고, 그 후 많은 공적을 올렸다. 그 후, 그는 진(秦)이 멸망하자 현성군(賢成君)에 봉해졌으며, 궐기 이전부터 여치(呂雉)의 여동생이었던 여수(呂須)와 혼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왕실과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리고 한(漢)왕조 성립 후에는 '한왕 신'과 '한신'의 모반에 동조했던 '진희(陳豨)'를 토벌하고 공적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195년, 어떤 이의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체포되었고, 하지만 또 고조(高祖)의 죽음과 함께 석방되었다. 하지만 (효)혜제<孝惠帝=전한(前漢) 2대(代) 황제> 6년(기원전 189년)에 그도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의 뒤를 적자(嫡子)였던 번항(樊伉)이 이었지만, 그러나 또 여치(呂雉)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일어났던 정변에 의해서 여 씨(呂氏) 일족이 몰살당하는 과정에서 생모(生母) 여수(呂須)와 함께 그도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그(樊噲)의 뒤는 측실(側室)에게서 태어났던 번시(樊市)가 잇게 되었다.
★ 한왕 신(韓王信-?부터 기원전 196년)은,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정치가였고. 초한전쟁기의 한왕(韓王)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한신(韓信)이지만, 그러나 또 동시대에 살았던 동성동명의 한신(韓信), 즉 유방(劉邦) 휘하에 있었던 회음후(淮陰侯)와는 구분된다. 그리하여 그 한신(韓信)과 혼동되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위의 한신(韓信)은 <한왕 신(韓王信)>으로 호칭되는 것이 통례이다. 아무튼 그는 전국시대 한(韓)나라 양왕(襄王)의 서자(庶子)의 손(孫)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아직 어렸을 때 나라가 망해서 그는 모든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 진말(秦末) 동란기(動亂期)에 항량(項梁)과 장량(張良)에 의해서 한왕(韓王)으로 옹립되었던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은 그의 족부(族父-혈연이 아닌 같은 족의 어른, 아저씨뻘)에 해당되었지만, 그러나 그 한성(韓成)은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의 노여움을 사서 살해되었다. 어쨌든 한왕 신(韓王信)은 초한전쟁(楚漢戰爭) 초기, 장량(張良)의 추천을 받아서 유방(劉邦)으로부터 한(韓)의 태위(太尉=군사담당宰相)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는 또 한왕(韓王)으로 봉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초한전쟁(楚漢戰爭)에 참가했으며, 덧붙여서 그는 유방(劉邦)이 처음으로 봉건(封建)했던 제후왕(諸侯王)이었다. 그 후,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종결했고,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흉노(匈奴)를 막기 위해서 태원군(太原郡)을 한(韓)으로 개명하고는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머지않아 실제로 흉노(匈奴)가 그곳을 침공해왔는데, 그러자 그는 목돌선우(冒頓單于)와 휴전교섭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배신행위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는 의심을 사느니 차라리 흉노(匈奴)에 투항했다. 그 후, 그는 흉노(匈奴)의 장군이 되어서 자주 한군(漢軍)과 교전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196년, 진무(陳武=紫武)와의 싸움에서 져서 죽었다. 그리고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던 한언(韓嫣)과 한설(韓說)은 그의 증손(曾孫)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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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盧綰)>
기원전 256 또는 기원전 247년-기원전 194년.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전한(前漢)초기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부친은 유태공(劉太公)과 친구사이였고, 그와 또 유방(劉邦)이 같은 날 태어났던 것으로 해서 두 사람은 친구로 자랐다. 그래서 훗날 유방(劉邦)이 죄를 짓고 도망갔을 때<함양에 부역을 나갔다가 인부를 다 잃고 오지(奧地)로 숨어들었을 때>도 그는 함께 했다. 그리고 또 그 관계는 유방(劉邦)이 황제가 되고 나서도 계속되었고, 또한 유방(劉邦)은 그런 이유 등으로로 해서 그만을 자신의 침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유방(劉邦)이 거병했을 때도 유방(劉邦)과 함께 각지를 전전했다. 그리고 또 초한전쟁(楚漢戰爭) 때에는 유가(劉賈=劉邦의 사촌형)와 함께 유방(劉邦)의 명(命)을 받아서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과 합류해서 초군(楚軍)의 보급기지를 습격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식량난에 빠져서 최후까지 고전(苦戰)했다. 그 후, 기원 전 202년, 유방(劉邦)이 제위(帝位)에 오르자마자 연왕(燕王) 장도(臧筡)가 반란을 일으키고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당시 태위(太尉)였던 그가 그 자리에 올라 연왕(燕王)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95년, 그는 영포(英布) 토벌 때 입었던 부상이 원인이 되어서 건강이 더욱 나빠졌고, 그런데다 또 설상가상으로 그가 모반을 획책했다는 모함까지 있어 그는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여름, 유방(劉邦)이 미앙궁(未央宮)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자 유영(劉盈=惠帝)이 즉위했다. 그러자 그는 여치(呂雉)가 곧 그의 후견(後見)으로 나설 것을 알고는 흉노(匈奴)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목돌선우(冒頓單于)는 그를 환영했고 <동호(東胡)의 노왕(盧王)>에 봉건 했다. 하지만 그는 그 1년여 만에 병사했고, 그리고 여치(呂雉)의 시대에 그의 처자(妻子)는 한(漢)이 그리워서 기원전 180년에 비밀리에 흉노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또 그 당시 여치(呂雉)는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래서였던지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해주고 사망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의 처도 병사했으며, 기원전 144년에는 그의 손자였던 노타지(盧他之)가 당시, 흉노(匈奴)의 동호왕(東胡王)이었지만, 한(漢)에 귀순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그를 아곡후(亞谷侯)에 봉했다.
★ 유가(劉賈-?부터 기원전 196년)는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무장으로, 유방(劉邦)의 사촌형제였고, 작위는 형왕(荊王)이었다. 그리고 초한전쟁(楚漢戰爭) 기에 노관(盧綰)과 함께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과 합류했으며, 그리고는 팽월(彭越)의 지휘 하에 초군(楚軍)의 보급기지를 습격해서 성공했다. 그리고 또, 항우(項羽)의 부하였던 대사마(大司馬)·주은(周殷)을 설득해서 한(漢)에 귀순시켰다. 기원전 201년, 한신(韓信)이 모반으로 실각하자 유방(劉邦)은 그 영토를 남북으로 분할해서 남부를 형국(荊國), 북부를 초국(楚國)으로 정했다. 그리고 유가(劉賈)는 그 형왕(荊王)에, 그리고 또 유방(劉邦)의 이모제(異母弟)였던 유교(劉交)는 초왕(楚王)에 봉했다. 기원전 196년 가을, 회남왕(淮南王)·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가(劉賈)는 정벌에 나섰지만, 그러나 그 전쟁에서 패하고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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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영(夏候嬰)> ?-기원전 172년
진(秦), 전한(前漢)시대의 무장. 패현(沛縣) 출신. 유방(劉邦)을 잘 따랐으며, 현(縣) 소속 마구간에서 근무했다.(마부와 書記 일도 함께 했다고 함) 그러다가 유방(劉邦)이 군사를 일으키자 동조했으며, 그 공으로 나중에 태복(太僕)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등공(滕公)에 봉해졌다. 그 후, 계속해서 그는 태복(太僕)으로 종군했으며, 한신(韓信)이 국사(國士)로 추천되었을 때 동의했다.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유방(劉邦)이 도주를 하면서 자신의 두 자식(惠帝와 魯元公主)을 마차에서 밀어서 떨어뜨렸을 때, 그는 그 두 사람을 구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화를 내며 그마저 죽이려 했지만, 결국 도주에 성공했다. 그러자 그는 더욱 신임을 받았고, 이어서 소평후(昭平侯)에 봉해졌다. 유방(劉邦)이 천하통일을 이루자 그는 다시 여음후(汝陰侯)에 봉해졌고, 이어서 초(楚)의 장군이었던 계포(季布)를 위기에서 구출해내고는 유방(劉邦)에게 추천했다. 그러자 계포(季布)는 유방(劉邦)으로부터 낭중(郎中=근위병)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하동군(河東郡)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만년(晩年)에 들었던 그는 여 씨(呂氏) 멸(滅) 후 진평(陳平),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과 함께 유방(劉邦)의 4子였던 유항(劉恒=太宗・文帝)을 옹립했고, 기원전 172년에 죽어서, 문후(文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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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周勃)> ?-기원전 169년
유방이 어렸을 때부터 키웠던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위는 강후(絳侯), 시호는 무후(武侯)였다. 그리고 그의 먼 조상은 권(卷)이란 현(縣)에서 패(沛)로 이주해왔다고 하며, 원래는 베짜는 일을 했으나 부업으로 장의사도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방(劉邦)이 거병했을 때 함께 했고, 유방(劉邦)이 한왕(漢王)이 되자 무위후(武威侯)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선봉을 맡아서 장평(章平) 등을 무찌르는 등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진평(陳平)이 유방에 귀순해 왔을 때, 그의 인물됨이 나쁘다는 것을 들어서 반대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죽고 또 그 후(後)였던 기원전 180년에 여치(呂雉)가 죽었다. 그러자 여 씨(呂氏) 일족이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는 말이 제왕(齊王)의 동생 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제왕(齊王) 유양(劉襄)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러자 또 주발(周勃)은 당시 우승상(右丞相)이었던 진평(陳平)과 힘을 합쳐서 여 씨(呂氏) 일족을 정리했다. 그 후, 그는 그 공적으로 병을 핑계 삼아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문제(文帝)와 진평(陳平)의 권유로 다시 돌아와서 진평(陳平)은 우승상(右丞相), 본인은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하지만 점점 진평(陳平)의 능력을 인정하게 된 그는 다시 사임했다. 하지만 또 진평(陳平)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승상(丞相)이 되었는데, 그러나 또 그는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러자 그는 옥졸에게 돈을 주고 “무실(無實=無罪=억울함 또는 誣告함)”이라고 쓴 편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원앙(袁盎-文帝의 신하)과 문제(文帝)의 모(母) 박태후(薄太后)의 노력으로 그는 석방되었다. 그러자 그는 또 <내가 예전에는 백만의 군세를 지휘했던 적도 있었지만, 일개 옥졸에게 그렇게 큰 힘이 있는 줄은 몰랐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영지로 돌아가서 편안한 만년을 보냈다고 한다.
★ 진평(陳平)은 중국 한나라의 정치가(?~B.C.178)였고, 한고조를 도와서 천하 통일을 이루었으며, 여 씨(呂氏)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처음에 그는 위구(魏咎), 항우(項羽) 등의 휘하에 있었지만, 유방(劉邦)에게 의탁(依託)하면서 초한전쟁(楚漢戰爭)을 치르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자 유방(劉邦)의 유언에 따라서 그는 결국 승상(丞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여치(呂雉) 사후 반란을 수습하면서 유 씨(劉氏) 정권을 지켜냈다.
○ 위구(魏咎-?부터 기원전 208년)는, 전국시대 후기부터 진대(秦代)의 정치가였고, 위(魏) 왕실의 일족이었다.
그리고 그는 양무호판(陽武戸版=현재의 河南省 原陽縣)의 사람으로, 선천적으로 키가 크고, 훌륭한 용모(容貌)를 갖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젊었을 때는 형(兄=陳伯=陳家 장남)의 농가(農家)에서 면학에 힘썼다는 데, 하지만 그의 형수가 무위도식하는 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므로, 그의 재능을 믿고 있었던 그의 형은 그녀와 이혼을 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이런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그곳의 유력자(有力者)들 중에서 장 씨(張氏)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손녀와 결혼을 했던 남자들 5명이 전부 사고나 병이 나서 죽어버렸다. 그러자 그 후로는 그녀가 무서워서 아무도 그녀에게 장가들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말을 들었던 진평(陳平)은 그 일들을 치러냈던 장의사의 일을 도우면서 자신의 근면함을 그 장 씨(張氏)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는 또 그 다음으로 귀족들이 타고 다니던 마차의 차바퀴를 자신의 집 현관에다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그의 뒤를 밟았던 장 씨(張氏)가 그것을 보았고, 그리고는 그에게 높은 뜻이 있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손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막대한 지참금을 손에 넣었고, 그것으로 인맥을 넓혔다. 그리고 그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자신을 따르던 젊은이들과 함께 위구(魏咎)의 휘하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인물의 부족함을 느꼈던 데다 중상모략까지 겹쳐져서 항우(項羽)에게로 도망을 갔다. 그 후에 또 그는 모반을 일으켰던 은왕(殷王)・사마공(司馬邛)을 항복시킨 공으로 도위(都尉)가 되었으나, 사마공(司馬邛)이 다시 유방(劉邦)에게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에, 항우(項羽)의 벌이 무서워서 그는 다시 도망을 갔다.
○ 사마공(司馬邛-?부터 기원전205년)은, 진말(秦末)의 인물이며, 진(秦)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조(趙)의 부장(部將)이었다. 사마앙(司馬卬)이라고 표기된 곳도 있다.
하지만 그 중간에서 그는 도적떼를 만나서 목숨을 잃을 뻔도 하였는데, 그러자 그는 또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칼 등을 그들에게 건네주고는 목숨을 겨우 건졌다. 그리고는 거의 알몸상태로 옛날에 알고 지내던 위무지<魏無知-이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魏나라 사람 누구 또는 위 씨(魏氏) 누구 정도로 해석함. 그리고 췌사로, 위무기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를 찾아가서 그 연줄로 유방(劉邦)을 만났다. 그러자 유방(劉邦)도 마음에 들어 했고, 바로 그날로 항우(項羽)와 같이 그를 도위(都尉)에 명했다. 하지만 그때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이 그 인사를 반대하고 나왔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그러자 그는 자신의 형수와 밀통하고 있었다든지, 뇌물을 받고 인사를 결정했다든지 하는 것들이 거론되었다. 그러자 그가 스스로 해명하기를 <보직(補職)은 받았으나 그에 따른 경비는 받지를 못했고, 나라 일과는 관계없이 가져온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漢)에서는 인재(人才)가 중요한 것이지, 그런 것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유방은 그를 더욱 마음에 들어 했고, 그의 지위를 아장(亞將-장군에 다음가는 위치)으로 격상시켜서 '한왕 신(韓王信)'에 소속시켰다. 그로부터 또 얼마 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에게 쫓겨서 형양성(滎陽城)에 칩거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런 불리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진평(陳平)이 나섰다. 그리고는 유방(劉邦)에게 <항우(項羽)는 원래 의심이 많은 자이므로, 그것을 이용해서 부하들과 이간시키는 계략을 써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진언을 했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 계책을 수락했고, 진평(陳平)에게 거금(巨金) 4만금(萬金)을 주었다. 그러자 진평(陳平)은 그 돈을 이용해서 항우(項羽)의 중신들<범증(范增), 종리매(鐘離昧), 용차(龍且), 주은(周殷) 등>이 스스로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독립)을 품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려서 항우(項羽)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말을 믿고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특히 범증(范增)은 당시 항우(項羽)의 부하들 중에서 제일로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더욱 치밀하게 공작을 펼쳐서, 그 진위(眞僞)를 알아보기 위해 항우(項羽)에게 화평을 신청한다는 의미로 사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윽고 사자가 왔는데, 그러자 진평(陳平)은 그 사자가 범증의 사람(手下)인 줄 거짓으로 알아차리고는(일부러) 화려한 연석에 초대했다. 그리고는 또 범증(范增)과 자신들이 아주 사이가 좋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그 사자가 <자신은 항우의 사신>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태도를 갑자기 돌변시켜서는 아주 초라한 상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는 또 그 사자가 들으라는 듯이 유방(劉邦)에게 <우리는 당연히 이길 수 있지만, 그러나 옛정을 생각해서 화평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아주 건방진 태도로 그 사자를 접대했다. 그러자 그 사자는 돌아가서 그대로 항우(項羽)에게 고했고, 그에 항우(項羽)는 화가 나서 범증(范增)을 쫓아내버렸다. 그러자 범증(范增)은 귀향(歸鄕) 길에서 분사(憤死)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후에 한신(韓信)이 제왕(齊王)이 되겠다고 원해왔을 때, 유방(劉邦)은 분개해서 날뛰었지만, 그때도 그는 장량(張良)과 함께 유방(劉邦)을 달랬다고 한다. 그리고 또 광무산(廣武山=洛陽 근처)에서 항우(項羽)와 화해를 했을 때도, 그는 장량(張良)과 함께 그것을 깨고 쳐들어가야한다고 간언했고, 그리하여 결국 한(漢)은 승리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승리해서 전한(前漢)이 성립되자, 그는 고향 호판(戶版)에 봉해져서 호판후(戶版侯)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기원전 200년, 유방(劉邦)이 흉노(匈奴)토벌에 친정했는데, 그런데 목돌선우(冒頓單于)의 작전에 휘말려서 평성(平城=현재의 山西省 大同부근)의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되었던 적이 있었다.
※ <소개>
아래 그림은 산서성(山西省) 대동 시(大同市)에 접한 태원 시(太原市)의 위치도이며, 그 아래 그림은 <雲崗洞窟=世界遺産>임. 그리고 雲崗洞窟(윈강석굴)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서쪽에 있는 중국 최대의 불교 석굴사원으로, 북위(北魏)시대인 460년에서 494년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양식과 중국양식이 섞여있다고 함.


그리고 이어서 식량도 바닥이 나버렸는데, 그런데 그때도 진평(陳平)은 기책(奇策)을 행해서 화해를 하고는 유방(劉邦)을 그 위기에서 구출해냈다. 하지만 그 기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진평(陳平)은 몰돌선우(冒頓單于)의 알씨(閼氏=皇后)에게 <만약에 목돌선우가 이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면, 중국의 미녀들은 모두 목돌선우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등의 말을 해서, 그 질투심을 이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리고 또 기원전 195년, 유방(劉邦)은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토벌을 번쾌(樊噲)에게 명했다. 하지만 그때 번쾌(樊噲)는 출정은 하고도 토벌(죽이지는)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도 모반에 참여했다고 보고, 그도 함께 죽일 것을 진평(陳平)에게 명했다. 하지만 사실, 번쾌(樊噲)는 그때 노관(盧綰)이 모반을 일으켰을 확률은 낮고 또 병상의 유방(劉邦)이 했던 말이었던 데다 후환이 두려워서 노관(盧綰)을 잡아놓고도 처형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로부터 얼마 후에 유방(劉邦)이 세상을 떠나자 진평(陳平)은 급히 달려와서 울며불며 매우 슬픈 모습을 보인 것으로 여 씨(呂氏) 일족의 경계를 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190년에 조참(曹參)이 죽자 그는 좌승상(左丞相=副首相格)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여치(呂雉)의 전성시대에는, 면종복배(面從腹背-겉으로는 복종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배반함)의 자세로 여치(呂雉)와 대립했던 왕릉(王陵)이 실각하자 그는 또 그 자리를 이어받아서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뿐이었던 자리였다. 그러자 진평(陳平)은 주색(酒色)에 빠진 것처럼 하면서 여치(呂雉)와 그리고 또 자신의 남편(樊噲)을 포획했다는 것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여수(呂須)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또한 그 숙청의 시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드디어 기원전 180년, 여치(呂雉)가 죽자 그는 육가(陸賈)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연회(宴會)를 가장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大尉・周勃을 시작으로 하는 반(反) 여 씨(呂氏) 세력과 그리고 또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으기(포섭) 시작했다.
○ 육가(陸賈-생몰불상)는, 중국 전한의 학자, 정치가였고, 초나라 사람으로 고조를 섬겨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으며, 여씨(呂氏)의 난에 유씨(劉氏)를 도와서 한나라 왕실을 지켰다. 저서에 <신어>, <초한춘추(楚漢春秋)>가 있다.
그러나 그때, 감시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었던 여 씨(呂氏)들도 애주호색(愛酒好色)하던 그가 벌였던 연회라 그런지 별 경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관영(灌嬰) 등을 이용해서 여치(呂雉)의 조카였던 여록(呂祿)을 설득시켜서 병권(兵權)을 반납 받았다. 그리고는 또 그 군사를 이용해서 여치(呂雉)의 다른 조카였던 여산(呂産)의 쿠데타를 진압했으며, 이어서 그 여세를 몰아서 여 씨(呂氏) 일족을 몰살하는 역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후, 그들은 유방(劉邦)의 친자(親子) 유항(劉恒=文帝)를 즉위시켰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곧 은퇴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와 주발(周勃)의 요청으로 다시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편, 그 쿠데타 진압 시에 비록 병권은 잡았지만 그러나 병사들이 자신들을 따를지 어떨지 몰랐던 그들은(周勃이었다고 한다) <만약에, 유 씨에게 가담하려는 사람들은 좌단(左袒-왼쪽 어깨 또는 소매. 그러나 여기서는 어깨로 표현함)을 벗고, 여 씨에게 가담하려는 사람들은 우단(오른쪽 어깨)를 벗어라!>라고 포고(布告)를 하자, 병사들은 모두 좌측을 벗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이 정의의 편에 서는 것에 <찬성한다>는 뜻인 <좌단(左袒)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한다.(史記의 呂后本紀) 아무튼, 기원전 179년에 그는 사망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의 작위는 그의 증손이었던 진하(陳何)에게까지 계승되었지만, 그러나 그 진하(陳何)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침취(寢取)했었다고 해서 처형됨으로 해서 작위를 빼앗겼다. 그리고 또, 같은 진평(陳平)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또는 손자의 손자)이었다는 진장(陳掌)은 곽거병(霍去病)의 어머니와 밀통(密通)을 해서 곽거병(霍去病)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