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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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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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장의(張儀-?부터 기원전 309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세(遊說)가(家)였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태생은 위(魏)였으며,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중국 古代의 思想家들로, 諸子百家의 하나였고, 특히 外交의 策士로서 각국을 周遊했던 사람들을 가리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진(秦)의 재상을 지냈으며,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 또는 합종설은 韓·魏·趙·楚·燕·齊의 6국이 縱으로 동맹을 맺어서 秦에 대항하자는 說)에 대해서 연횡책(連衡策 또는 연횡설은 秦이 위의 6국과 橫 또는 衡으로 각각 동맹을 맺어서 화친할 것을 주장했던 설)으로 맞섰으며, 후에 진(秦)이 통일하는데 크게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그는 어렸을 때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자(鬼谷子 또는 귀곡선생 또는 귀곡)에게 배웠으며, 그 후에 제국(諸國)으로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했지만, 그러나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더욱이 초(楚)의 어느 대신(大臣)을 따라서 연회(宴會)에 참석했을 때는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뭇매질까지도 당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는 그 상처투성이로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내 혀(舌)는 아직도 잘 붙어 있소?> 그러자 그의 아내가 살펴보고 그렇다고 답을 하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럼 됐소! 나는 혀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아무튼, 그 후에도 그의 불우한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그러자 그 당시에는 이미 조(趙)로 가서 출세를 하고 있었던 소진(蘇秦)에게 부탁이라도 해보려고 그는 소진(蘇秦)을 찾아갔다. 하지만 예기(豫期)잖게 큰 모욕만 당했던 그는, 그래서 그 굴욕을 갚아주기 위해서라도 일단 진(秦)으로 가서 벼슬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벼슬을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돈은 소진(蘇秦)이 장의(張儀) 모르게 지불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후에 장의(張儀)는 진(秦)에서 벼슬을 해서 출세를 하게 되었고, 그러자 또 소진(蘇秦)은 그때 연(燕)과 조(趙)를 동맹시키고는 그 동맹이 정착될 때까지 장의(張儀)가 조(趙)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진왕(秦王)을 설득시켰다. 그러자 장의(張儀)는 <소군(蘇君=蘇秦)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구나>라고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장의(張儀)는 위(魏)를 토벌했고, 이어서 상군(上郡)과 소량(少梁)을 획득했던 공을 인정받아서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위(魏)가 제(齊)와 손을 잡으려고 하자 위(魏)로 가서 재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위(魏)와 진(秦)의 동맹도 성사시켰고, 이어서 다시 진(秦)의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앞의 그 장의(張儀)에게 뭇매를 가했던 초(楚)의 재상에게 그는 <앞에는 당신들이 나를 의심해서 나에게 심하게 대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당신들의 성(城)들을 내가 빼앗아 보겠소!>라고 하는 글을 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6년에 촉(蜀)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장의(張儀)는 혜문왕(惠文王)에게 한(韓)을 공격하고, 주(周)를 두렵게 하여,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라고 진언했지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착(司馬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촉(蜀)을 점령했다.
그러자 또 그 후였던 기원전 313년에 장의(張儀)는 대(對)초(楚) 공작(工作)에 들어가서, 상(商)과 어(於-과거 商鞅의 封地였던 땅)의 땅 600리(里) 사방(四方)을 할양(割讓)해 줄 것이니, 제(齊)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초(楚)의 회왕(懷王)은 기뻐하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초(楚)는 제(齊)와의 동맹을 깼다. 그런 다음 자신의 부하 장수를 시켜서 진(秦)으로 가서 그 약속한 땅을 받아오라고 시켰는데, 그러자 장의(張儀)는 6리(里) 사방(四方)의 땅을 주겠다고 그 장수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또 그 장수는 처음 약속과 다르다면서 맹렬히 항의했지만, 그러나 장의(張儀)는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회왕(懷王)은 대노(大怒)해서 출병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藍田의 싸움), 그러자 회왕(懷王)은 하는 수 없이 진(秦)에 화목의 의미로 대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토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장의(張儀)의 목숨이요!>
그러자 장의(張儀)는 그 답(答)으로 초(楚)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회왕(懷王)은 장의(張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러자 또 장의(張儀)는 사람을 시켜서 그 회왕(懷王)이 아끼던 총희(寵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했다. <지금, 진(秦)에서는 장의(張儀)를 살리기 위해서 회왕(懷王)에게 바칠 재보(財寶)와 미녀들을 선물로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회왕(懷王)의 마음이 그 미녀들에게로 돌아가고, 당신의 처지는 어찌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자 불안해진 총희(寵姬)는 회왕(懷王)을 설득시켰고, 그리하여 장의(張儀)는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그 후, 혜문왕이 죽었고, 그러자 장의(張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자가 즉위해서 무왕(武王)이 되었다. 그러자 장의(張儀)는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위(魏)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재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1년 후에 죽었다.
⊙ 소진(蘇秦-?부터 기원전 317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변론가(辯論家)로, 장의(張儀)와 나란히 하며 종횡(縱橫)가(家)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제국(諸國)을 유세(遊說)해서 합종(合從)을 성립시켰으며, 소대(蘇代)의 형이었다.
사기(史記)의 소진(蘇秦)열전에 의하면, 그는 낙양(洛陽) 사람이었고, 제(齊)로 가서 장의(張儀)와 함께 귀곡(鬼谷)에게 종횡(縱橫)의 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년 후에 제국(諸國)을 방랑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의야행해서 친족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그러자 그는 발분(發奮)해서 나름대로의 상대를 설득하는 술(術)을 개발했고, 그리하여 그 처음으로 주(周)로 가서 현왕(顯王)을 모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진(秦)으로 가서 혜문왕을 만났지만 역시 실패했다.(당시, 秦에서는 商鞅의 사형이 집행된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그래서 辯舌士 등을 기피했던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연(燕)으로 가서 문공(文公)에게 진언을 해서 조(趙)와의 동맹을 성사시켰으며, 이어서 한(韓)과 위(魏) 그리고 제(齊)와 초(楚)의 왕들을 각각 설득시켜서 당시, 전국7웅이었던 진(秦)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동맹도 성사시키고는 그 6국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또 그때, 한(韓)의 선혜왕(宣惠王)을 설득시켰을 때, 그가 말했다던 <계구우후(鷄口牛後)>의 고사는 유명하며, 참고로 또 그 뜻은, 닭의 주둥이 또는 입과 소의 꼬리 또는 닭의 머리와 소 또는 용의 꼬리라는 의미로, 큰 단체의 꼴찌보다는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조(趙)로 다시 귀국했을 때 숙후(肅侯)는 그를 무안군(武安君)에 봉했으며, 그런 다음 그 맹약의 약정서(約定書)를 진(秦)으로 보냈다. 그러자 그 후로 15년간이나 진(秦)은 더 이상 침공을 하지 못했고, 그러자 또 당시 최강국이었던 진(秦) 외의 나라들은 남북 종(縱)으로 서게 되었기 때문에 소진(蘇秦)의 책략은 합종설(合從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합종(合從)을 성립시켰던 소진(蘇秦)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러자 제후들이 각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서 그를 배웅했으며, 그래서 또 마치 그것은 왕의 행차와도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런 소문을 들었던 주(周)나라의 왕도 그의 앞길을 말끔히 청소를 해서 그를 맞았으며, 그런 다음에는 사람을 보내서 국경까지 그 행렬을 배웅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런 소문을 들었던 그의 친척들은 전에 그를 멸시했던 일을 생각하고는, 그가 고향에 나타나자 두려워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에 나에게 조금의 땅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재상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는 자신을 멸시했던 그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다액(多額)의 돈을 내서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합종(合從) 해체 후에 그는 연(燕)으로 가서 벼슬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다시 제(齊)로 옮겨갔고, 그 이유는 또 그 제(齊)의 국력을 약화시켜서, 연(燕)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자 또 제(齊)의 민왕(湣王)은 그를 받아주었지만,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는 반대파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그러니까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민왕(湣王)에게 남겼다고 했는데 <만약에 제가 죽게 된다면, 제 시체를 차열(車裂-차에 사지를 묶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 형에 처해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해주십시오. "소진(蘇秦)은 연(燕)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제(齊)에서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면 저를 죽인 자가 반드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 후에 민왕(湣王)은 그의 유언대로 해주었고, 그러자 또 그를 죽였던 자가 자수를 해왔기 때문에 민왕(湣王)은 그 자를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장의(張儀)열전에 의하면, 그 장의(張儀)를 진(秦)으로 보냈던 것은 소진(蘇秦)의 혼담(魂膽-魂魄)이었다고 하며, 그 이유는 또, 장의(張儀)가 진(秦)으로 가서, 그 진(秦)이 조(趙)로 출병을 하는 것을 멈추게 할 의도였다고 했지만, 그러나 상기(上記)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에는 많은 모순(矛盾)이 있다고 하므로, 그리고 또 본인 역시 그냥 건너뛰어도 될 것이지만, 그러나 재미 삼아서 참고로 올려드린 것이니,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다만 참고로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진(秦)의 공세(攻勢)는 더욱 강해졌고, 그 결과로 기원전 278년에는 백기(白起)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진(陳)으로 천도(遷都)했다.
○ 백기(白起-B.C.?~B.C.257년 11월)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의 무장이었으며, 공손기(公孫起)라고도 표기되었고, 병법(兵法)의 대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260년에는 장평(長平-장평의 싸움)에서 조(趙)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40만이나 되었던 포로들을 땅속에 묻어서 죽였으며, 그러자 그 후에 그 일을 후회하면서 자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백기(白起)는 진(秦)나라의 미(郿-지금의 陝西省 西郿현)현(縣) 출신으로, 소양왕(昭襄王)을 모시면서 각지를 전전(轉戰)했고, 그리하여 조(趙)와 위(魏), 초(楚) 등과 싸워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것으로 진(秦)의 영토 확대에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백기(白起)・왕전(王翦) 열전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294년에 좌서장(左庶長-대충 卿 아래의 직급으로, 장군에 버금가는 직급이었고, 商鞅이 지냈던 적이 있었음)에 임명되어서 한(韓)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3년에는 좌경(左更-左庶長보다 한 단계 위의 직급)에 올라서 한(韓)과 위(魏)를 공략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 이궐(伊闕)에서 싸워서 이겼을 때는 포로 24만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한(韓)의 장군 공손희(公孫喜)를 포획했으며,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2년에는 위(魏)를 공격해서 대소(大小) 61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기원전 278년에는 초(楚)를 공격해서 수도였던 영(郢)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초(楚)는 진(陳)으로 천도(遷都)를 했는데, 그러자 또 동년(同年), 그 공을 인정받아서 그는 무안군(武安君)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또 기원전 275년에는 위(魏)의 화양(華陽)을 공격해서 한(韓)・위(魏)・조(趙)의 장군들을 포획했으며, 13만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또 동년, 조(趙)의 장군 가언(賈偃)과 싸웠고, 그때도 사졸(士卒) 2만 명을 황하(黃河)에 빠뜨려서 죽였다. 그 다음 기원전 265년에는 한(韓)의 형 성(陘城)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포로 5만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교묘한 용병술로 조괄(趙括)이 이끌었던 조(趙)군(君)에 대승했다.
⊙ 장평(長平)의 싸움은 기원전 260년에 진(秦)과 조(趙)가 장평(長平-현재의 山西省 高平市 근처)에서 격돌했던 전쟁으로, 진(秦)의 대승으로 끝났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백기(白起)는 조(趙)나라의 포로 40만여 명을 생매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며(坑殺), 그 때문에 또 조(趙)의 국력은 한순간에 쇠(衰)해지고 말았다.
<배경>
당시, 진(秦)은 상앙(商鞅)의 개혁에 의해서 강성(强盛)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전국7웅 중에서도 압도적인 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런 힘을 배경으로 해서 다른 6국,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한(韓)과 위(魏) 그리고 조(趙)와 초(楚)를 몇 번이고 침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65년에는 백기(白起)를 장군으로 해서 공략 길에 나섰으며, 그 결과 한(韓)의 야왕(野王-현재의 河南省 沁陽市)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한(韓)의 북방영토였던 상당 군(上黨郡)이 고립되고 말았는데, 그러자 또 당시, 그 상당 군을 지키고 있었던 풍정(馮亭)은 그 상당 군을 조(趙)에 헌상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조(趙)의 효성왕(孝成王)은 그 당시 조(趙)의 실력자였던 평원군(平原君)과 평양군(平陽君)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평양군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에 그 땅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은 곧 진(秦)과 적이 되어서 싸워야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평원군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단 한 알(푼)의 금(金-돈)도 지불하지 않고도 영토가 생기게 되었는데, 뭐 고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효성왕(孝成王)은 <그 땅을 접수 하든 안 하든 진(秦)과의 싸움은 결국 시간문제이다!>라고 생각하고는 평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군사를 보내서 그 상당 군을 접수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대노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62년에 왕흘(王齕)을 장군으로 해서 원정군을 조(趙)로 보냈으며, 그 결과 그 상당(上黨)은 진(秦)에 점령되었다. 그러자 또 그 상당(上黨)의 백성들은 조(趙)의 장평(長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왕흘(王齕) 군은 그들을 추적하던 중, 조(趙)를 그대로 침공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또 조(趙)의 효성왕(孝成王)은 노장이었던 염파(廉頗)를 총대장에 임명하고는 곧 방위체제에 들어갔다.
<경과>
하지만 염파(廉頗)는 진군(秦軍)에 연거푸 세 번이나 졌고, 그러자 그는 작전을 바꾸어서 진지를 강하게 구축한 뒤에 지구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세월이 2년이나 지속되었는데, 그러자 또 염파(廉頗)의 생각대로 진군(秦軍)들은 그때부터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진(秦)의 재상이었던 범저(范雎)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조(趙)로 간첩을 들여보냈고, 그 간첩은 범저(范雎)가 시켰던 대로 <진(秦)에서는 조괄(趙括)이 조군(趙軍)의 지휘를 맡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인 염파(廉頗)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한다>라는 데마고기(Demagogie-정치목적의 선동적인 악선전 또는 허위정보)를 퍼뜨렸다. 그러자 효성왕(孝成王)은 적극책을 취하지 않고 있었던 염파(廉頗)에게 불만을 품고는 염파(廉頗)를 해임하고 조괄(趙括)을 소환해서 총대장에 임명해버렸다. 그러자 또 경험이 미숙했던 조괄(趙括)을 기용하는 것에 위기를 느꼈던 군신(群臣)들 중에서 인(린)상여(藺相如)란 사람이 병든 몸을 이끌고 와서 그 일에 대해서 간언했지만,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조괄(趙括)에 대해서 조금 소개하고 넘어가면, 그는 사실 당시 그 조(趙)의 명장이었던 조사(趙奢)의 아들로, 자타가 공인했던 병법의 대가였지만, 그러나 실전경험은 전혀 없었던 소위, 탁상 병법가였고, 그래서 단지 병법서들을 두루 꿰고만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또 그의 아버지였던 조사(趙奢)도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에게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만약에 나라에서 저 아이에게 어떤 큰일을 맡기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꼭 말리도록 하시오!> 그래서 또 그때, 그의 어머니는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곧 효성왕(孝成王)을 찾아가서 그 결정을 거두어 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그 어머니의 말도 듣지를 않았고,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시다면, 만약에 저의 아들이 싸움에서 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일족들에게는 절대로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러자 효성왕(孝成王)은 그 말에는 약속을 해주었는데, 그랬던 한편, 진(秦)에서는 조(趙)의 총대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밀리에 백기(白起)를 장평(長平)으로 파견해서 총대장에 임명시켰으며, 그러자 왕흘(王齕)은 그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싸움>
그 후, 총대장에 임명되었던 조괄(趙括)은 조(趙)의 군세만 믿고 진군(秦軍)을 한 번에 무찌르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염파(廉頗)의 전법을 변경해서 조군(趙軍)을 진(秦)의 본진을 향해서 돌격시켰는데, 그러자 또 백기(白起)는 선봉부대를 미끼로 해서 퇴각하는 것처럼 하면서 조군(趙軍)을 유인했고, 그런 다음 주력부대로 조군(趙軍)과 맞서던 사이에 미리 매복시켜두었던 병사 25000명으로 하여금 조군(趙軍)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거기다 또 5천의 기병(騎兵)으로 조군(趙軍)을 양분(兩分)하는 작전도 함께 병행했는데, 그러자 조군(趙軍)은 금방 대혼란에 빠졌고, 이어서 전의(戰意)를 상실하고는 장평(長平)성(城)으로 도주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장평 성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진(秦) 국내의 장정 남자들을 총동원해서 백기(白起)를 도와주게 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그들을 이용해서 포위망을 더욱 견고하게 했고, 그것으로 조군(趙軍)에게는 단 한 톨의 병량(兵糧)도 공급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조군(趙軍)에게는 46일 간이나 병량이 전혀 보급되지 않았으며, 그러자 또 굶주렸던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워서 그 죽은 인육(人肉)을 먹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갔다. 그러자 또 초조해졌던 조괄(趙括)은 어떻게든 그때까지 남아 있던 병력을 동원해서 그 포위망을 돌파해 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진군(秦軍)이 쏜 화살에 고슴도치처럼 맞아서 전사했고, 그러자 남아 있던 조군(趙軍) 40만여 명은 드디어 항복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병량(兵糧)이 부족한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 소년병 약 240명 정도만 남긴 채로 조군(趙軍) 전원을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래서 또 그때, 조(趙)의 전사자와 피처형자들은 모두 합해서 45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실제로도 1995년 5월에 발굴된 조사에서도 대량의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결과>
아무튼 그 후, 진군(秦軍)은 백기(白起)의 공적에 위협을 느꼈던 범저(范雎)에 의해서 일단 진격이 멈추어졌지만,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조(趙)를 침공했으며, 그리하여 수도 한단(邯鄲)까지 포위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평원군 등의 활약과 위(魏)의 신능군(信陵君) 그리고 초(楚)의 춘신군(春申君) 등의 협력을 받아서 조(趙)는 멸망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하지만 그 장평(長平)에서의 대량학살로 인해서 더 이상 진(秦)에 대항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안타깝게도 백기(白起)는 그 승리로 인해서 범저(范雎) 등의 시기를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그는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자살을 하려고 했을 때, 그는 <나는 단지 죽을 뿐이다. 나는 그 장평(長平)에서 포로 40여만 명을 생매장 시켰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나 그 일은 당시 재상이었던 범저(范雎)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러자 또 범저(范雎)는 당시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던 백기(白起)의 공적을 무위로 돌리기 위해서, 아주 사소한 조건으로 조(趙)와 화의해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259년, 진(秦)은 왕릉(王陵)을 기용(起用)해서 한단(邯鄲)을 포위시켰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258년에는 증파(增派)도 했지만, 그러나 또 거기다 지휘관까지 왕흘(王齕)로 교대시켰던 차에, 그래서 또 그때 조(趙)를 구원하러 왔던 위(魏)의 신능군과 초(楚)의 춘신군에 의해서 진(秦)은 대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진(秦)에서는 그때서야 부랴부랴 백기(白起)를 다시 불러서 출병을 독려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오히려 백기(白起)가 그러했던 범저(范雎)의 행동들에 불신을 품고는 병(病)을 핑계 삼아서 그 출병을 거부했다. 하지만 또 그 일이 그를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했으며, 그리하여 또 결국에 기원전 257년에 그는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자해(自害)를 명받았다. 그러자 그는 자해 직전에 이렇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왜 나는 자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그리고는 또 잠시 후에 <나는 다만 죽을 뿐이다. 그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나는 그 포로 40여만 명을 하루저녁에 모두다 생매장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 진(秦)의 백성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하며, 각지에서 사당을 지어서 그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料敵合変、出奇無窮、声震天下>라고 평가했다고 하고, 그 내용은 또 <그는 적의 능력을 꿰뚫어보고 그에 맞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기책(奇策) 또한 무한하게 풀어냈었다. 그리하여 그의 위세(威勢)는 천하를 벌벌 떨게 했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리고 또 그 말미(末尾)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해서 왕전(王翦)과 함께 아주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지만, 그러나 결점도 있었던 인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또 특히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그러나 범저(范雎)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나지를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