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7)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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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
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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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그 후, 춘신군(春申君)의 주도 하에 항연(項燕-項羽의 祖父) 장군의 활약으로 진(秦)에 잠시 대항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춘신군(春申君)마저 죽어버리자 초(楚)에서는 더 이상 국정(國政)을 장악할 자가 없게 되었고, 그러자 또 이어서 항연(項燕)이 진(秦)의 왕전(王翦) 장군에게 패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로 초(楚) 최후의 왕이었던 부추(負芻)는 진(秦)에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당시, 진(秦)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창평군(昌平君)이 항연(項燕) 등의 추대를 받아서 잠시 초왕(楚王)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얼마 가지 않아서 진군(秦軍)에게 진압 당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23년에 초(楚)는 완전히 멸망했다.

 ○ 춘신군(春申君-?부터 기원전 2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의 정치가로, 성(姓)은 황(黃), 휘(諱)은 알(歇-또는 헐로 읽는 곳도 많으므로 참고바라며, 알로 읽는 근거는 史記九 列伝二에 의함), 전국(戰國) 사군(四君)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고열왕(考烈王)을 옹립함으로 해서 당시, 기울어가던 초(楚)의 국세(國勢)를 바로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국정(國政)에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기원전 274년이었고, 경양왕(頃襄王)의 명을 받고 진(秦)에 사자로 갔던 때였다. 그리고 또 그 무렵에는 진(秦)이 한(韓)과 위(魏)를 거느리고 초(楚)를 공략하려고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러자 그는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현재, 천하에 진(秦)과 초(楚)보다 더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초(楚)와 진(秦)이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양호상타(兩虎相打=兩虎相鬪)가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두 나라는 함께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그것은 또 바로 약한 개(韓・魏)들만 이롭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의 말을 인정해서 초(楚)와 화평을 도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 진(秦)이 초(楚)와의 화평을 증거로 태자 완(完-나중의 考烈王)을 인질로 요구하게 되자, 그는 태자 완(完)을 따라서 진(秦)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264년에 경양왕(頃襄王)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대로 있다가는 다른 사람이 왕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는 당시 진(秦)의 재상이었던 범저(范雎)에게 완(完)을 귀국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범저(范雎)는 소양왕(昭襄王)에게 그의 그런 뜻을 전했는데, 그러자 또 소양왕(昭襄王)은 그에게 먼저 초(楚)로 가서 그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오게 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완(完)만 비밀리에 초(楚)로 보냈고, 자신은 진(秦)에 남았다. 그러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소양왕(昭襄王)은 대노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때, 범저(范雎)가 나서서 중재를 했고, 그 결과 그도 초(楚)로 귀국했다. 그러자 그 3개월 후, 완(完)은 즉위했고, 초왕(楚王)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영윤(令尹)에 임명되었고, 회북(淮北-淮河의 북쪽) 12현(縣)을 영지로 받았으며, 춘신군(春申君)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기원전 258년에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이 진(秦)에 포위되었는데,
그러자 평원군(平原君)이 구원을 구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춘신군(春申君)은 그에 응해서 출병했고, 그러자 진(秦)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 후, 기원전 248년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회북(淮北)은 제(齊)와 접하는 중요지이기 때문에, 직할 군(郡)인 방(方)이 더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에게는 회북(淮北) 대신 강동(江東)이 주어졌고, 그러자 또 그는 과거 오(吳)의 성(城)이었던 곳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는 그곳에서 군을 출병해서 노(魯)를 멸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그의 거성(居城)에는 식객이 3천 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객(上客)은 전부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객 중에는 순자(荀子)도 있었다고 하며, 그러자 또 춘신군(春申君)은 그 순자(荀子)를 난능(蘭陵)이란 현(縣)의 영(令-長官 격)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240년에 그는 제후(諸侯) 연합군을 통솔해서 진(秦)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그 때문에 그는 고열왕(考烈王)에게 외면당했다. 그리고 또 동년, 초(楚)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수춘(壽春)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또 그 즈음, 그의 식객 중에는 이원(李園)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이원(李園)의 여동생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이원(李園)은 언젠가는 그 여동생을 고열왕(考烈王)에게 보내서 출세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때, 춘신군(春申君)이 그녀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로부터 머지 않아서 그녀는 춘신군(春申君)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알게된 이원(李園)은 고열왕(考烈王)에게 자손이 없다는 점을 착안해서 춘신군(春申君)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이야기했다. <제 여동생을 왕에게 헌상하면 그 복중의 아이는 당연히 왕의 아이가 될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아이는 다음의 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초(楚)는 춘신군(春申君)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참고: 하지만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고열왕(考烈王)에게는 유왕(幽王) 이외에도 다른 아들 즉, 초(楚)의 마지막 왕이었던 부추(負芻) 등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함.

 그러자 또 아무튼, 춘신군(春申君)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고, 이어서 고열왕(考烈王)에게 말을 해서 그 이원(李園)의 여동생을 헌상까지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후에 그녀는 왕후가 되었는데, 그 결과로 이원(李園) 역시도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이원(李園)은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해서 춘신군(春申君)을 제거하려고 생각했고, 그러자 또 그에 위기감을 느꼈던 춘신군(春申君)은 식객 중 한사람이었던 주영(朱英)이란 사람과 그 일에 대해서 의논을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주영(朱英)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그 이원(李園)을 없애버리겠으니 명만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당시, 춘신군(春申君)은 이원(李園)을 대수롭게 여기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주영(朱英)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주영(朱英)은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일로 해서 자신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해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고 기원전 238년, 결국 고열왕(考烈王)은 병사했고, 그러자 그 장례식에 참석을 했던 춘신군(春申君)은 극문(棘門-城門의 한 이름)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원(李園)의 자객에게 자신의 종자(從者)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그 후에 그의 머리는 성 밖으로 버려졌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의 일족(一族)과 식솔(食率-家臣 등과 집에서 일을 하는 노비나 종 등)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이원(李園)의 여동생이 낳은 그의 아들은 나중에 즉위해서 유왕(幽王)이 되었다. 하지만 그 유왕(幽王)도 재위 10년째였던 기원전 228년에 사망했으며, 그러자 그 뒤를 이어서 동모제(同母弟) 애왕(哀王)이 등극했지만, 그러나 그도 재위 2개월 때에 서형(庶兄)이었던 부추(負芻)의 습격을 받아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초(楚)의 역대 군주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한글 표기는 하지 않음.

 1. 熊繹
 2. 熊艾
 3. 熊黵(또는 黒+旦)
 4. 熊勝
 5. 熊楊
 6. 熊渠
 7. 熊毋康
 8. 熊摯紅
 9. 熊延(執疵?-재위-紀元前848年頃)
 10. 熊勇(在位-紀元前847年頃-紀元前838年頃)
 11. 熊厳(在位-紀元前837年頃-紀元前828年頃)
 12. 熊霜(在位-紀元前827年頃-紀元前822年頃)
 13. 熊徇(在位-紀元前821年頃-紀元前800年頃)
 1
4. 熊咢(在位-紀元前799年頃-紀元前791年頃)
 
15. 若敖(熊儀, 在位-紀元前790年頃-紀元前764年頃)
 
16. 霄敖(熊坎, 在位-紀元前763年頃-紀元前758年頃)
 
17. 蚡冒(熊眴, 在位-紀元前757年頃-紀元前741年)
 
18. 武王(熊通, 在位-紀元前740年-紀元前690年) 처음으로 왕호(王號)를 사용함
 
19. 文王(熊貲, 在位-紀元前689年-紀元前675年)
 
20. 荘敖(熊囏, 在位-紀元前674年-紀元前672年)
 
21. 成王(熊惲, 在位-紀元前671年-紀元前626年)
 2
2. 穆王(熊商臣, 在位-紀元前625年-紀元前614年)
 
23. 荘王(熊侶, 在位-紀元前613年-紀元前591年)
 
24. 共王(熊審, 在位-紀元前590年-紀元前560年)
 
25. 康王(熊招, 在位-紀元前559年-紀元前545年)
 
26. 郟敖(熊員, 在位-紀元前544年-紀元前541年)
 
27. 霊王(熊囲, 在位-紀元前540年-紀元前529年)
 
28. 王比(熊比, 在位-紀元前529年)
 
29. 平王(熊弃疾, 在位-紀元前528年-紀元前516年)
 
30. 昭王(熊珍, 在位-紀元前515年-紀元前489年)
 
31. 恵王(熊章, 在位-紀元前488年-紀元前432年)
 
32. 簡王(熊中, 在位-紀元前431年-紀元前408年)
 33. 声王(熊当, 在位-紀元前407年-紀元前402年)
 
34. 悼王(熊疑, 在位-紀元前401年-紀元前381年)
 
35. 粛王(熊臧, 在位-紀元前380年-紀元前370年)
 
36. 宣王(熊良夫, 在位-紀元前369年-紀元前340年)
 
37. 威王(熊商, 在位-紀元前339年-紀元前329年)
 
38. 懐王(熊槐, 在位-紀元前328年-紀元前299年)
 
39. 頃襄王(熊横, 在位-紀元前298年-紀元前263年)
 
40. 考烈王(熊完, 在位-紀元前262年-紀元前238年)
 
41. 幽王(熊悍, 在位-紀元前237年-紀元前229年)
 
42. 哀王(熊猶, 在位-紀元前228年)
 
43. 負芻(熊負芻, 在位-紀元前227年-紀元前223年)
 
44. (昌平君) (在位-紀元前223年)
 
45. (空位)
 
46. (義帝) (熊心, 在位-紀元前208年頃-紀元前206年)

 
※ 단, 46의 의제는 진(秦) 멸망 후의 난국(亂國) 때, 항량(項梁)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회왕(懷王)의 손자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소개하고 있는 춘추전국시대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일단 소개는 함.




 <초(楚)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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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6)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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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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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장의(張儀-?부터 기원전 309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세(遊說)가(家)였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태생은 위(魏)였으며,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중국 古代의 思想家들로, 諸子百家의 하나였고, 특히 外交의 策士로서 각국을 周遊했던 사람들을 가리킴)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진(秦)의 재상을 지냈으며,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 또는 합종설은 韓·魏·趙·楚·燕·齊의 6국이 縱으로 동맹을 맺어서 秦에 대항하자는 說)에 대해서 연횡책(連衡策 또는 연횡설은 秦이 위의 6국과 橫 또는 衡으로 각각 동맹을 맺어서 화친할 것을 주장했던 설)으로 맞섰으며, 후에 진(秦)이 통일하는데 크게 공헌했던 인물이었
다.

 아무튼, 그는 어렸을 때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자(鬼谷子 또는 귀곡선생 또는 귀곡)에게 배웠으며, 그 후에 제국(諸國)으로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했지만, 그러나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더욱이 초(楚)의 어느 대신(大臣)을 따라서 연회(宴會)에 참석했을 때는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뭇매질까지도 당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는 그 상처투성이로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내 혀(舌)는 아직도 잘 붙어 있소?> 그러자 그의 아내가 살펴보고 그렇다고 답을 하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럼 됐소! 나는 혀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아무튼, 그 후에도 그의 불우한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그러자 그 당시에는 이미 조(趙)로 가서 출세를 하고 있었던 소진(蘇秦)에게 부탁이라도 해보려고 그는 소진(蘇秦)을 찾아갔다. 하지만 예기(豫期)잖게 큰 모욕만 당했던 그는, 그래서 그 굴욕을 갚아주기 위해서라도 일단 진(秦)으로 가서 벼슬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벼슬을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돈은 소진(蘇秦)이 장의(張儀) 모르게 지불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후에 장의(張儀)는 진(秦)에서 벼슬을 해서 출세를 하게 되었고, 그러자 또 소진(蘇秦)은 그때 연(燕)과 조(趙)를 동맹시키고는 그 동맹이 정착될 때까지 장의(張儀)가 조(趙)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진왕(秦王)을 설득시켰다. 그러자 장의(張儀)는 <소군(蘇君=蘇秦)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구나>라고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장의(張儀)는 위(魏)를 토벌했고, 이어서 상군(上郡)과 소량(少梁)을 획득했던 공을 인정받아서 재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위(魏)가 제(齊)와 손을 잡으려고 하자 위(魏)로 가서 재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위(魏)와 진(秦)의 동맹도 성사시켰고, 이어서 다시 진(秦)의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앞의 그 장의(張儀)에게 뭇매를 가했던 초(楚)의 재상에게 그는 <앞에는 당신들이 나를 의심해서 나에게 심하게 대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로 당신들의 성(城)들을 내가 빼앗아 보겠소!>라고 하는 글을 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기원전 316년에 촉(蜀)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장의(張儀)는 혜문왕(惠文王)에게 한(韓)을 공격하고, 주(周)를 두렵게 하여,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라고 진언했지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착(司馬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촉(蜀)을 점령했다.

 그러자 또 그 후였던 기원전 313년에 장의(張儀)는 대(對)초(楚) 공작(工作)에 들어가서, 상(商)과 어(於-과거 商鞅의 封地였던 땅)의 땅 600리(里) 사방(四方)을 할양(割讓)해 줄 것이니, 제(齊)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초(楚)의 회왕(懷王)은 기뻐하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초(楚)는 제(齊)와의 동맹을 깼다. 그런 다음 자신의 부하 장수를 시켜서 진(秦)으로 가서 그 약속한 땅을 받아오라고 시켰는데, 그러자 장의(張儀)는 6리(里) 사방(四方)의 땅을 주겠다고 그 장수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또 그 장수는 처음 약속과 다르다면서 맹렬히 항의했지만, 그러나 장의(張儀)는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회왕(懷王)은 대노(大怒)해서 출병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藍田의 싸움), 그러자 회왕(懷王)은 하는 수 없이 진(秦)에 화목의 의미로 대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토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장의(張儀)의 목숨이요!>

 그러자 장의(張儀)는 그 답(答)으로 초(楚)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회왕(懷王)은 장의(張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러자 또 장의(張儀)는 사람을 시켜서 그 회왕(懷王)이 아끼던 총희(寵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했다. <지금, 진(秦)에서는 장의(張儀)를 살리기 위해서 회왕(懷王)에게 바칠 재보(財寶)와 미녀들을 선물로 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회왕(懷王)의 마음이 그 미녀들에게로 돌아가고, 당신의 처지는 어찌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자 불안해진 총희(寵姬)는 회왕(懷王)을 설득시켰고, 그리하여 장의(張儀)는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그 후, 혜문왕이 죽었고, 그러자 장의(張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자가 즉위해서 무왕(武王)이
되었다. 그러자 장의(張儀)는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위(魏)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재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1년 후에 죽었다.

 ⊙ 소진(蘇秦-?부터 기원전 317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변론가(辯論家)로, 장의(張儀)와 나란히 하며 종횡(縱橫)가(家)를 대표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제국(諸國)을 유세(遊說)해서 합종(合從)을 성립시켰으며, 소대(蘇代)의 형이었다.

 사기(史記)의 소진(蘇秦)열전에 의하면, 그는 낙양(洛陽) 사람이었고, 제(齊)로 가서 장의(張儀)와 함께 귀곡(鬼谷)에게 종횡(縱橫)의 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년 후에 제국(諸國)을 방랑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의야행해서 친족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그러자 그는 발분(發奮)해서 나름대로의 상대를 설득하는 술(術)을 개발했고, 그리하여 그 처음으로 주(周)로 가서 현왕(顯王)을 모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진(秦)으로 가서 혜문왕을 만났지만 역시 실패했다.(당시, 秦에서는 商鞅의 사형이 집행된 바로 직후였기 때문에, 그래서 辯舌士 등을 기피했던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연(燕)으로 가서 문공(文公)에게 진언을 해서 조(趙)와의 동맹을 성사시켰으며, 이어서 한(韓)과 위(魏) 그리고 제(齊)와 초(楚)의 왕들을 각각 설득시켜서 당시, 전국7웅이었던 진(秦)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동맹도 성사시키고는 그 6국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또 그때, 한(韓)의 선혜왕(宣惠王)을 설득시켰을 때, 그가 말했다던 <계구우후(鷄口牛後)>의 고사는 유명하며, 참고로 또 그 뜻은, 닭의 주둥이 또는 입과 소의 꼬리 또는 닭의 머리와 소 또는 용의 꼬리라는 의미로, 큰 단체의 꼴찌보다는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조(趙)로 다시 귀국했을 때 숙후(肅侯)는 그를 무안군(武安君)에 봉했으며, 그런 다음 그 맹약의 약정서(約定書)를 진(秦)으로 보냈다. 그러자 그 후로 15년간이나 진(秦)은 더 이상 침공을 하지 못했고, 그러자 또 당시 최강국이었던 진(秦) 외의 나라들은 남북 종(縱)으로 서게 되었기 때문에 소진(蘇秦)의 책략은 합종설(合從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합종(合從)을 성립시켰던 소진(蘇秦)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러자 제후들이 각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서 그를 배웅했으며, 그래서 또 마치 그것은 왕의 행차와도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런 소문을 들었던 주(周)나라의 왕도 그의 앞길을 말끔히 청소를 해서 그를 맞았으며, 그런 다음에는 사람을 보내서 국경까지 그 행렬을 배웅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런 소문을 들었던 그의 친척들은 전에 그를 멸시했던 일을 생각하고는, 그가 고향에 나타나자 두려워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에 나에게 조금의 땅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재상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는 자신을 멸시했던 그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다액(多額)의 돈을 내서 골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합종(合從) 해체 후에 그는 연(燕)으로 가서 벼슬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다시 제(齊)로 옮겨갔고, 그 이유는 또 그 제(齊)의 국력을 약화시켜서, 연(燕)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자 또 제(齊)의 민왕(湣王)은 그를 받아주었지만,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는 반대파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그러니까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민왕(湣王)에게 남겼다고 했는데 <만약에 제가 죽게 된다면, 제 시체를 차열(車裂-차에 사지를 묶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 형에 처해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해주십시오. "소진(蘇秦)은 연(燕)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제(齊)에서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면 저를 죽인 자가 반드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 후에 민왕(湣王)은 그의 유언대로 해주었고, 그러자 또 그를 죽였던 자가 자수를 해왔기 때문에 민왕(湣王)은 그 자를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장의(張儀)열전에 의하면, 그 장의(張儀)를 진(秦)으로 보냈던 것은 소진(蘇秦)의 혼담(魂膽-魂魄)이었다고 하며, 그 이유는 또, 장의(張儀)가 진(秦)으로 가서, 그 진(秦)이 조(趙)로 출병을 하는 것을 멈추게 할 의도였다고 했지만, 그러나 상기(上記) 사마천(司馬遷)의 기록에는 많은 모순(矛盾)이 있다고 하므로, 그리고 또 본인 역시 그냥 건너뛰어도 될 것이지만, 그러나 재미 삼아서 참고로 올려드린 것이니,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다만 참고로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 후에도 진(秦)의 공세(攻勢)는 더욱 강해졌고, 그 결과로 기원전 278년에는 백기(白起)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진(陳)으로 천도(遷都)했다.

 ○ 백기(白起-B.C.?~B.C.257년 11월)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의 무장이었으며, 공손기(公孫起)라고도 표기되었고, 병법(兵法)의 대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260년에는 장평(長平-장평의 싸움)에서 조(趙)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40만이나 되었던 포로들을 땅속에 묻어서 죽였으며, 그러자 그 후에 그 일을 후회하면서 자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백기(白起)는 진(秦)나라의 미(郿-지금의 陝西省 西郿현)현(縣) 출신으로, 소양왕(昭襄王)을 모시면서 각지를 전전(轉戰)했고, 그리하여 조(趙)와 위(魏), 초(楚) 등과 싸워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것으로 진(秦)의 영토 확대에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사기(史記)의 백기(白起)・왕전(王翦) 열전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294년에 좌서장(左庶長-대충 卿 아래의 직급으로, 장군에 버금가는 직급이었고, 商鞅이 지냈던 적이 있었음)에 임명되어서 한(韓)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3년에는 좌경(左更-左庶長보다 한 단계 위의 직급)에 올라서 한(韓)과 위(魏)를 공략했는데, 그런데 그 중에 이궐(伊闕)에서 싸워서 이겼을 때는 포로 24만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한(韓)의 장군 공손희(公孫喜)를 포획했으며,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기원전 292년에는 위(魏)를 공격해서 대소(大小) 61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기원전 278년에는 초(楚)를 공격해서 수도였던 영(郢)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초(楚)는 진(陳)으로 천도(遷都)를 했는데, 그러자 또 동년(同年), 그 공을 인정받아서 그는 무안군(武安君)으로 칭해졌다. 그리고 또 기원전 275년에는 위(魏)의 화양(華陽)을 공격해서 한(韓)・위(魏)・조(趙)의 장군들을 포획했으며, 13만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또 동년, 조(趙)의 장군 가언(賈偃)과 싸웠고, 그때도 사졸(士卒) 2만 명을 황하(黃河)에 빠뜨려서 죽였다. 그 다음 기원전 265년에는 한(韓)의 형 성(陘城)을 공격했고, 그 결과로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포로 5만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교묘한 용병술로 조괄(趙括)이 이끌었던 조(趙)군(君)에 대승했다.

 ⊙ 장평(長平)의 싸움은 기원전 260년에 진(秦)과 조(趙)가 장평(長平-현재의 山西省 高平市 근처)에서 격돌했던 전쟁으로, 진(秦)의 대승으로 끝났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백기(白起)는 조(趙)나라의 포로 40만여 명을 생매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며(坑殺), 그 때문에 또 조(趙)의 국력은 한순간에 쇠(衰)해지고 말았다.

 <배경>

 당시, 진(秦)은 상앙(商鞅)의 개혁에 의해서 강성(强盛)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전국7웅 중에서도 압도적인 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런 힘을 배경으로 해서 다른 6국,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한(韓)과 위(魏) 그리고 조(趙)와 초(楚)를 몇 번이고 침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65년에는 백기(白起)를 장군으로 해서 공략 길에 나섰으며, 그 결과 한(韓)의 야왕(野王-현재의 河南省 沁陽市)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한(韓)의 북방영토였던 상당 군(上黨郡)이 고립되고 말았는데, 그러자 또 당시, 그 상당 군을 지키고 있었던 풍정(馮亭)은 그 상당 군을 조(趙)에 헌상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조(趙)의 효성왕(孝成王)은 그 당시 조(趙)의 실력자였던 평원군(平原君)과 평양군(平陽君)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평양군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에 그 땅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은 곧 진(秦)과 적이 되어서 싸워야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평원군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단 한 알()의 금(金-돈)도 지불하지 않고도 영토가 생기게 되었는데, 뭐 고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효성왕(孝成王)은 <그 땅을 접수 하든 안 하든 진(秦)과의 싸움은 결국 시간문제이다!>라고 생각하고는 평원군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군사를 보내서 그 상당 군을 접수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대노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62년에 왕흘(王齕)을 장군으로 해서 원정군을 조(趙)로 보냈으며, 그 결과 그 상당(上黨)은 진(秦)에 점령되었다. 그러자 또 그 상당(上黨)의 백성들은 조(趙)의 장평(長平)으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왕흘(王齕) 군은 그들을 추적하던 중, 조(趙)를 그대로 침공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또 조(趙)의 효성왕(孝成王)은 노장이었던 염파(廉頗)를 총대장에 임명하고는 곧 방위체제에 들어갔다.

 <경과>

 하지만 염파(廉頗)는 진군(秦軍)에 연거푸 세 번이나 졌고, 그러자 그는 작전을 바꾸어서 진지를 강하게 구축한 뒤에 지구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세월이 2년이나 지속되었는데, 그러자 또 염파(廉頗)의 생각대로 진군(秦軍)들은 그때부터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진(秦)의 재상이었던 범저(范雎)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조(趙)로 간첩을 들여보냈고, 그 간첩은 범저(范雎)가 시켰던 대로 <진(秦)에서는 조괄(趙括)이 조군(趙軍)의 지휘를 맡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인 염파(廉頗)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한다>라는 데마고기(Demagogie-정치목적의 선동적인 악선전 또는 허위정보)를 퍼뜨렸다. 그러자 효성왕(孝成王)은 적극책을 취하지 않고 있었던 염파(廉頗)에게 불만을 품고는 염파(廉頗)를 해임하고 조괄(趙括)을 소환해서 총대장에 임명해버렸다. 그러자 또 경험이 미숙했던 조괄(趙括)을 기용하는 것에 위기를 느꼈던 군신(群臣)들 중에서 인()상여(藺相如)란 사람이 병든 몸을 이끌고 와서 그 일에 대해서 간언했지만,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 조괄(趙括)에 대해서 조금 소개하고 넘어가면, 그는 사실 당시 그 조(趙)의 명장이었던 조사(趙奢)의 아들로, 자타가 공인했던 병법의 대가였지만, 그러나 실전경험은 전혀 없었던 소위, 탁상 병법가였고, 그래서 단지 병법서들을 두루 꿰고만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또 그의 아버지였던 조사(趙奢)도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에게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만약에 나라에서 저 아이에게 어떤 큰일을 맡기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꼭 말리도록 하시오!> 그래서 또 그때, 그의 어머니는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곧 효성왕(孝成王)을 찾아가서 그 결정을 거두어 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그 어머니의 말도 듣지를 않았고,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시다면, 만약에 저의 아들이 싸움에서 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일족들에게는 절대로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러자 효성왕(孝成王)은 그 말에는 약속을 해주었는데, 그랬던 한편, 진(秦)에서는 조(趙)의 총대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밀리에 백기(白起)를 장평(長平)으로 파견해서 총대장에 임명시켰으며, 그러자 왕흘(王齕)은 그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싸움>

 그 후, 총대장에 임명되었던 조괄(趙括)은 조(趙)의 군세만 믿고 진군(秦軍)을 한 번에 무찌르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염파(廉頗)의 전법을 변경해서 조군(趙軍)을 진(秦)의 본진을 향해서 돌격시켰는데, 그러자 또 백기(白起)는 선봉부대를 미끼로 해서 퇴각하는 것처럼 하면서 조군(趙軍)을 유인했고, 그런 다음 주력부대로 조군(趙軍)과 맞서던 사이에 미리 매복시켜두었던 병사 25000명으로 하여금 조군(趙軍)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다. 거기다 또 5천의 기병(騎兵)으로 조군(趙軍)을 양분(兩分)하는 작전도 함께 병행했는데, 그러자 조군(趙軍)은 금방 대혼란에 빠졌고, 이어서 전의(戰意)를 상실하고는 장평(長平)성(城)으로 도주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장평 성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진(秦) 국내의 장정 남자들을 총동원해서 백기(白起)를 도와주게 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그들을 이용해서 포위망을 더욱 견고하게 했고, 그것으로 조군(趙軍)에게는 단 한 톨의 병량(兵糧)도 공급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조군(趙軍)에게는 46일 간이나 병량이 전혀 보급되지 않았으며, 그러자 또 굶주렸던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워서 그 죽은 인육(人肉)을 먹었고, 나중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갔다. 그러자 또 초조해졌던 조괄(趙括)은 어떻게든 그때까지 남아 있던 병력을 동원해서 그 포위망을 돌파해 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진군(秦軍)이 쏜 화살에 고슴도치처럼 맞아서 전사했고, 그러자 남아 있던 조군(趙軍) 40만여 명은 드디어 항복했다. 그러자 백기(白起)는 병량(兵糧)이 부족한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 소년병 약 240명 정도만 남긴 채로 조군(趙軍) 전원을 생매장시켜 버렸다. 그래서 또 그때, 조(趙)의 전사자와 피처형자들은 모두 합해서 45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실제로도 1995년 5월에 발굴된 조사에서도 대량의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결과>

 아무튼 그 후, 진군(秦軍)은 백기(白起)의 공적에 위협을 느꼈던 범저(范雎)에 의해서 일단 진격이 멈추어졌지만,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조(趙)를 침공했으며, 그리하여 수도 한단(邯鄲)까지 포위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평원군 등의 활약과 위(魏)의 신능군(信陵君) 그리고 초(楚)의 춘신군(春申君) 등의 협력을 받아서 조(趙)는 멸망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하지만 그 장평(長平)에서의 대량학살로 인해서 더 이상 진(秦)에 대항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안타깝게도 백기(白起)는 그 승리로 인해서 범저(范雎) 등의 시기를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그는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자살을 하려고 했을 때, 그는 <나는 단지 죽을 뿐이다. 나는 그 장평(長平)에서 포로 40여만 명을 생매장 시켰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나 그 일은 당시 재상이었던 범저(范雎)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러자 또 범저(范雎)는 당시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던 백기(白起)의 공적을 무위로 돌리기 위해서, 아주 사소한 조건으로 조(趙)와 화의해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259년, 진(秦)은 왕릉(王陵)을 기용(起用)해서 한단(邯鄲)을 포위시켰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258년에는 증파(增派)도 했지만, 그러나 또 거기다 지휘관까지 왕흘(王齕)로 교대시켰던 차에, 그래서 또 그때 조(趙)를 구원하러 왔던 위(魏)의 신능군과 초(楚)의 춘신군에 의해서 진(秦)은 대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진(秦)에서는 그때서야 부랴부랴 백기(白起)를 다시 불러서 출병을 독려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오히려 백기(白起)가 그러했던 범저(范雎)의 행동들에 불신을 품고는 병(病)을 핑계 삼아서 그 출병을 거부했다. 하지만 또 그 일이 그를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했으며, 그리하여 또 결국에 기원전 257년에 그는 소양왕(昭襄王)으로부터 자해(自害)를 명받았다. 그러자 그는 자해 직전에 이렇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왜 나는 자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그리고는 또 잠시 후에 <나는 다만 죽을 뿐이다. 그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나는 그 포로 40여만 명을 하루저녁에 모두다 생매장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바로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 진(秦)의 백성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하며, 각지에서 사당을 지어서 그를 위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그를 평가하기를 <料敵合変、出奇無窮、声震天下>라고 평가했다고 하고, 그 내용은 또 <그는 적의 능력을 꿰뚫어보고 그에 맞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기책(奇策) 또한 무한하게 풀어냈었다. 그리하여 그의 위세(威勢)는 천하를 벌벌 떨게 했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그리고 또 그 말미(末尾)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해서 왕전(王翦)과 함께 아주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지만, 그러나 결점도 있었던 인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또 특히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그러나 범저(范雎)의 손아귀에서는 벗어나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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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5)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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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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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참고: 맹상군(孟嘗君-?부터 기원전 279년)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였고, 전국(戰國)사군(四君) 중 한사람이었다. 성(姓)은 규(嬀), 씨(氏)는 전(田), 휘(諱)는 문(文)이었고, 맹상군(孟嘗君)은 그의 시(諡)였다. 그리고 또 그는 제(齊)나라 위왕(威王)의 후손이었다.

 그(田文)의 아버지 전영(田嬰)은 선왕(宣王)의 이모제(異母弟)로, 설(薛-현재의 山東省 滕州)이란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전영(田嬰)은 슬하(膝下)에 자식을 40명도 더 두었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의 어머니의 신분은 낮았고, 그의 생일은 또 5월 5일로, 그 날짜에 태어난 자식은 훗날 그 아버지를 죽인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전영(田嬰)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비밀리에 숨겨서 키웠다고 한다.(하지만 그 이야기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음)

 아무튼 그 후, 그가 성인 정도 되었을 때, 전영(田嬰)이 하루는 노하면서 그에게 <왜 아직도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또 그가 <왜 제가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또 전영(田嬰)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것을 진정 네가 몰라서 묻는 것이냐?! 너처럼 그때 태어난 아이는 가문(家門)의 혜택을 잘 받아서 자란 다음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제가 가문의 혜택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전영(田嬰)은 그의 뜻을 받아주어서 같은 집에서 살게는 해주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날, 그는 전영(田嬰)에게 <아버님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의 손(孫)은 어떻게 될까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전영(田嬰)이 잘 모른다고 답을 했는데,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제(齊)의 영토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데도 우리 집은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하지만, 하지만 또 우리 집에는 가족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사람들 때문에 이 집의 재산은 앞으로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전영(田嬰)은 식객(食客) 한명을 집으로 초빙해서 그와 이야기를 해보게 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객 앞에서 신랄한 비평을 가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대단히 날카로웠던 것이어서 금방 소문이 났다. 그러자 그 후에는 제후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전영(田嬰)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전영(田嬰)의 후계를 잇게 된 그는 별 내세울 것도 없는 식색(食色)이라도 적극적으로 맞이했고, 그러자 그 수는 수천(數千)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느 때, 그는 중간에 칸막이를 세워두고 식객들과 같은 방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런데 그때 식객 중 한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 칸막이를 쳐둔 것은 주인의 것과 우리 식객들의 요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또 그가 그 말을 듣고는 그 객에게 요리는 전부 같은 것임을 알려주었는데, 그러자 그 객은 자신의 언행에 수치심을 느껴서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 일이 결국 그의 명성을 드높이게 했고, 그리하여 또 기원전 299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은 그를 재상에 영접하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또 그는 진(秦)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어떤 사람이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가 당대 일류의 인재인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인정을 하지만, 그러나 그는 결국 제(齊)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秦)의 재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제(齊)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그대로 제(齊)로 돌려보내버린다면, 그는 또 필시 제(齊)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것이므로, 그러므로 또 결국 그는 진(秦)의 위협(威脅)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때 그가 묵고 있던 집을 포위했다. 그러자 곧 그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는 한 식객(食客)에게 시켜서 소양왕(昭襄王)의 총희(寵姬)에게 목숨을 구걸해보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 총희(寵姬)는 그때 그가 가지고 갔던 보물이었던 호백구(狐白裘)를 탐냈다. 그리고 또 그 호백구(狐白裘)란 여우의 겨드랑이에 난 흰 털만으로 만든 외투 같았던 것으로, 그것을 한 벌 만드는 데는 여우가 1만 필이나 필요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대단히 귀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것은 그가 진(秦)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소양왕(昭襄王)에게 헌상을 했던 것이었는데, 그래서 또 그는 당연히 고민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때 식객 중에 구도(狗盜-개처럼 날렵한 도둑)란 사람이 나서서 그를 도와주려고 했고, 그리고는 소양왕(昭襄王)의 침소로 잠입해서 그것을 다시 훔쳐 내왔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그 총희(寵姬)에게 전달하고는 일단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또 언젠가 그 소양왕(昭襄王)의 마음이 바뀌었던지 맹상군(孟嘗君) 등은 급히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국경이었던 함곡관(函谷關)까지 갔을 때, 이미 밤중이어서 관문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난감해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식객 중 한사람이었던 물진사(物眞似)란 사람이 나서서 닭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그 소리를 들었던 닭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함곡관(函谷關)은 열렸고, 그들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평소에 학자나 무술인 등의 식객들은 맹상군(孟嘗君)이 그런 도둑이나 하찮은 닭소리나 흉내 내는 사람들을 식객(食客)으로 받고 있었다는데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지만, 그러나 그때는 또 <과연, 사람은 쓰기 나름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맹상군(孟嘗君)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이야기가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가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제(齊)로 다시 돌아왔던 맹상군(孟嘗君)은 재상이 되었고, 그 후에 한(韓) ・위(魏)군과 합세해서 진(秦)을 쳤다. 그런데 또 그 즈음에 풍환(馮驩)이란 거지 같은 사람이 그를 찾아왔는데, 그러자 그는 그를 식객으로 맞아주었고, 하급(下級)숙사에서 머물게 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은 가지고 있던 검(劍)을 땅에 두드리면서 다음과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나름대로 검객인데)인데도 이런 대접을 받으니 그냥 돌아 가버릴까? 그러나 당장 먹을 물고기 한 마리 없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맹상군(孟嘗君)은 그를 중급(中級)숙사로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이 똑 같이 칼로 땅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인데, 그냥 돌아 가버릴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고 해도 타고 갈 가마가 없네> 그러자 또 맹상군(孟嘗君)은 그를 상급(上級)숙소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또 그 풍환(馮驩)이 앞과 꼭 같이 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가 장검(長劍)인데 그냥 돌아 가버릴까, 지금까지 집 한 채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후로 1년 정도나 그를 무시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맹상군(孟嘗君)은 설(薛)의 영지를 백성들에게 대여해주고 거기서 들어오는 이자로 식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지만, 그런데 그 중에는 그 이자를 지불하지 않는 백성들도 있었다. 그러자 식객들 중에서 그 풍환(馮驩)이란 자가 추천되었고, 그래서 그는 그 이자를 받기 위해서 그 백성들에게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자를 내지 않았던 백성들을 모두 한 집에 모았는데, 그러자 몇 사람이 그 이자를 내놓았다. 그러자 또 그는 그 돈으로 술과 고기를 사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연회를 베푼 뒤에 한 사람씩 일일이 만나서 기한이 찼는데도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한을 연장해 주었고, 그리고 아직 기한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증문(證文)을 쓰게 해서 따로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 백성들이 보던 앞에서 불에 태우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맹상군(孟嘗君)이 토지를 빌려주고 있는 것은 백성들에게 일을 주기 위함이요. 하지만 맹상군(孟嘗君)은 그 이자를 지불하지도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그 증문(證文)을 태우라고 나에게 명령을 내렸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맹상군(孟嘗君)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요!> 그러자 그곳에 있었던 백성들은 모두 맹상군(孟嘗君)의 덕(德)에 감복했다.

 하지만 또 정작에 그 말을 들었던 맹상군(孟嘗君)은 몹시 화를 내면서 풍환(馮驩)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이렇게 말을 했다. <이자를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사람들에게 그 이자를 내라고 해봐야 그들은 고작 도망이나 갈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터전을 잃게 된 그들은 맹상군(孟嘗君)을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맹상군(孟嘗君)은 돈만 좋아하지 백성들을 아낄 줄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사람을 배신하고 돈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맹상군(孟嘗君)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증문(證文)들을 태우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맹상군(孟嘗君)께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보였고, 그리하여 맹상군(孟嘗君)의 덕을 천하에 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또 맹상군(孟嘗君)도 그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 그는 민왕(湣王) 아래서 재상을 지내면서 내외의 정치를 맡았다. 그러자 그때, 그는 제(齊)의 국력을 최고로 올렸지만, 그러나 또 나라가 그렇게 부강해지자 민왕(湣王)은 갑자기 거만해져서 타국(他國)에 압도적인 외교를 펼치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민왕(湣王)에게 그에 대해서 간언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민왕(湣王)은 그랬던 그와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맹상군(孟嘗君)의 제(齊) 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는 제(齊)>라는 평(評)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맹상군(孟嘗君)은 제(齊)의 재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러자 또 당시 3천명이 넘었다던 식객들도 모두다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런데 그때 단 한명의 사람이 그의 곁에 남아있었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앞의 그 풍환(馮驩)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맹상군(孟嘗君)을 다시 재상에 올리기 위해서 일대 연극을 벌였으며, 그 우선으로 그는 진(秦)으로 갔다. 그리고는 소양왕(昭襄王)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맹상군(孟嘗君)이 진(秦)에서 벼슬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소양왕(昭襄王)은 그동안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즉시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풍환(馮驩)은 그 다음으로 제(齊)로 급히 돌아가서 민왕(湣王)을 만나서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진(秦)에서 맹상군(孟嘗君)을 데려가려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으므로, 왕께서는 그를 복직시켜주고, 영토도 더 올려주어서 그를 위로하심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자 민왕(湣王)은 그 사정을 정확히 알아본 다음에 풍환(馮驩)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풍환(馮驩)의 말대로 맹상군(孟嘗君)을 복직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토까지도 올려주었다.

 그 후, 풍환(馮驩)은 맹상군(孟嘗君)에게 사라진 식객들을 전부 다시 부르게 했다. 그러나 맹상군(孟嘗君)은 자신을 버리고 갔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맹상군(孟嘗君)을 설득했다. <그들이 그때 갔던 것은 맹상군(孟嘗君)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자들 옆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지만, 그러나 가난한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그것은 또 아침에 시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아주 많지만, 그러나 해가 지고 나서 시장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적은데, 그것은 또 아침보다 저녁에 물건이 적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살 것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들이 그때 맹상군(孟嘗君)을 떠났던 것은 그들이 맹상군(孟嘗君)을 싫어했고 좋아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맹상군(孟嘗君)과 같이 있다가는 그들 자신들의 생활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이 납득하고 풍환(馮驩)의 뜻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풍환(馮驩)이 맹상군(孟嘗君)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재빠른 토끼는 잘 도망가기 위해서 항시 구멍을 3개를 파둡니다. 그런데 맹상군(孟嘗君)에게는 영토인 설(薛) 한 개의 구멍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위(魏)와 제(齊)에 2개의 도망갈 구멍을 더 만들어두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맹상군(孟嘗君)은 풍환(馮驩)에게 돈(金)을 주어서 위(魏)의 양왕(襄王)을 만나게 했다. 그러자 또 그 자리에서 풍환(馮驩)은 양왕(襄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제(齊)의 민왕(湣王)은 과거에 맹상군(孟嘗君)을 쫓아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으므로 명성이 높은 맹상군(孟嘗君)을 위(魏)로 불러들이신다면 금방 위(魏)는 부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양왕(襄王)은 아주 기뻐하면서 풍환(馮驩)에게 상석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 후, 맹상군(孟嘗君)은 위(魏)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풍환(馮驩)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맹상군(孟嘗君)을 말렸다. <민왕(湣王)이 곧 달려올 것이므로 잠시만 더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후, 풍환(馮驩)의 생각대로 위(魏)에서 빈번히 사자가 와서 맹상군(孟嘗君)을 만나고 가는 것을 알게 되었던 민왕(湣王)은 맹상군(孟嘗君)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붙잡았다. <설(薛)에 선대(先代)의 사당(廟)을 지을 생각이므로 제(齊)에 머물러주시오> 그러자 풍환(馮驩)이 그 말을 듣고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드디어 2개의 도망 구멍이 더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는 <교토삼굴(狡免三窟)> 고사의 어원이 되었다.

 하지만 또 당시, 민왕(湣王)은 아직 맹상군(孟嘗君)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민왕(湣王)의 그런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었던 맹상군(孟嘗君)은 스스로 은거(隱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당시까지도 그의 명성은 드높았고, 그 때문에 또 진(秦)으로서는 제(齊)에 그가 있는 한은 어쩔 수가 없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진(秦)은 맹상군(孟嘗君)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공작(工作)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또 그 때문에 민왕(湣王)의 시기심은 더욱 높아져서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결국 맹상군(孟嘗君)은 기원전 284년에 풍환(馮驩)이 미리 확보해두었던 그 도주 길에 올라서 위(魏)로 들어갔고, 그러자 또 위(魏)에서는 그를 재상으로 영접했다.

 그 후, 민왕(湣王)에게 한을 품고 있었던 연왕(燕王)의 뜻을 받았던 악의(樂毅-燕의 장군. 후술. 그러나 낙의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람)의 주도로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과 진(秦) 그리고 연(燕) 그 5개의 연합군이 성립되었으며, 그러자 제(齊)는 그 연합군에 대패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제(齊)로 쳐들어갔던 악의(樂毅)에 의해서 민왕(湣王)은 살해되었으며, 그로서 제(齊)는 바로 멸망 촌전(寸前)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전단(田單-齊의 장군)에 의해서 제(齊)는 부흥(復興)했으며, 그러자 맹상군(孟嘗君)도 다시 제(齊)로 돌아왔다.

 그 후, 기원전 279년에 그는 사거했으며, 그 후에 시(諡)로 맹상군(孟嘗君)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의 자손들은 후계문제로 서로 다투었으며, 그러자 또 그 틈을 타서 위(魏)와 제(齊)가 설(薛)을 공격해서 그의 자손들은 모두다 죽었다.

 
그리고 또,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염려해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러나 위의 田單에 대해서는 소개할 것이 조금 있기 때문에, 잠시 소개를 하고 마칩니다.

 그리고 또 이 자리를 빌어서 그동안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올려드리며, 민족의 대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시며, 또한 풍성하고도 넉넉한 추석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해 올립니다. 그리고 또한 행복하시기만 하고 무탈한 명절 되시길 진심으로 빌어 올립니다. 그럼, 저 역시도 명절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추석이 지난 후에 편안한 날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그럼, 즐거운 명절 되십시오...

 ※ 전단(田單-기원전 3세기경)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무장이었고, 연(燕)에 의해서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신의 지략으로 나라를 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기(史記)에 단독으로 올랐던 인물이었다.

 기원전 284년, 제(齊)는 연합군에 패했다. 그러자 당시 하급직이었던 전단(田單)은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의 친척들에게 마차(馬車)를 보강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제(齊)에는 아직도 70여 성(城)이 남아있다>라고 태평스런 말을 하면서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낙의(樂毅)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제(齊)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단 그의 친척들이 모여서 마차(馬車)를 보강했는데,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대로 낙의(樂毅)가 쳐들어오자 제(齊)는 그를 대항하는데 역부족이었다.

 그 후, 전단(田單)이 머물고 있던 성마저 떨어졌고, 그러자 사람들은 그 성을 탈출하는데 급급했다. 그러자 또 미리 보강(補强)하지 않았던 마차(馬車)들은 차축(車軸)이 부러지는 등해서 연(燕)군(軍)의 손에 넘어갔지만, 그러나 미리 보강해두었던 마차(馬車)들은 다행히도 즉묵(卽墨-현재의 山東省 靑島市 內)이란 곳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즉묵(卽墨)도 낙의(樂毅)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즉묵(卽墨)의 성주(城主)가 그에 대항해서 싸웠지만 오히려 격퇴 당했다. 그러자 또 그때, 앞의 일을 알고 있었던 어떤 관리가 전단(田單)을 추천했고, 그러자 그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전단(田單)은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너무도 갑작스럽게 장군이 되었던 전단(田單)은,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잘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선 자신의 집 정원에서 선조들에 대한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그러자 그 공물(供物)에 새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러자 또 그것을 불길하게 생각했던 전단(田單)은 그것이 필시 무슨 징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내가 전날 꿈을 꾸었는데 군사들 중에 신(神)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기분이 든다는 병사를 찾아내서 제단에 올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것으로 군령(軍令)은 이제 신(神)의 말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즈음에 제(齊)의 70 수(數) 도시(都市)들은 수도 임치(臨淄-현재의 山東省 淄博市)를 포함해서 거의가 점령이 되었던 상태였다. 그래서 또 제왕(齊王)이 머물고 있던 거(莒-현재의 山東省 日照市)와 즉묵(卽墨) 그 두 도시만이 어떻게든 버텨내면서 수년(數年)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연(燕)에서는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를 했다. 그러자 전단(田單)은 그 태자와 낙의(樂毅)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그때가 호기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간첩을 연(燕)으로 보내서 그 궁정(宮廷) 안에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리게 했다. <거(莒)와 즉묵(卽墨)은 지금이라도 바로 함락할 수 있는데도, 낙의(樂毅)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제왕(齊王)이 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제(齊)가 현재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낙의(樂毅) 대신으로 올 장군이 이 제(齊)를 사정없이 짓밟는 것이다>

 그러자 연왕(燕王)은 그 말을 믿고는 낙의(樂毅) 대신으로 기겁(騎劫)이란 자를 제(齊)로 보냈고, 낙의(樂毅)는 귀국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자 또 졸지에 낙의(樂毅)는 망명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부당한 지휘관 교대에 불만을 가졌던 연(燕)군(軍)들은 곧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낙의(樂毅) 대신으로 왔던 그 기겁(騎劫)이 낙의(樂毅)는 제(齊)의 70여 성(城)이나 함락을 시켰던 것에 비해서 자신은 단 한 개의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내심 전공(戰功)이 없다는 초조감에 휩싸여있을 것이란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또 전단(田單)은 <포로가 되면 코가 잘리는 벌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듣고 벌벌 떨고 있다>라든지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 밖에 있는 자신들 선조들의 묘가 파헤쳐지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먹고 있다>라는 등의 허위정보를 연(燕)군(軍)에 흘렸다.

 그런데 기겁(騎劫)이 그대로 따라하자 그것을 봤던 즉묵(卽墨)의 민병(民兵)들은 <우리가 항복을 하게 되면, 그대로(유언비어처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또, 조상들을 욕보이는 저런 자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사기(士氣)를 올렸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여자아이들과 노인들을 배치시켜서 성(城)을 지키게 하는 것처럼 해놓고는 사자를 연군(燕軍)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또 <이제 제(齊)에는 싸울 병사들도 없고, 화살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아직도 철저항전을 부르짖는 자들이 몇 명 남아있으므로, 그래서 그들을 설득시키는데 수일(數日) 정도가 걸릴 것이므로, 그때까지 말미를 달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자 또 기겁(騎劫)은 5일의 말미를 주었는데, 그러자 또 그런 사실을 전해 들었던 연군(燕軍)들은 그때 이미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왔던지 벌써 수년(數年)이 지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간의 피로와 망향(望鄕) 생각으로, 이제는 싸움이 다 끝났다면서 환호했다. 그러자 연군(燕軍)들의 긴장은 금방 풀려버렸고, 경계심도 그만큼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전단(田單)은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말미 중 하루 밤을 선택해서 비밀리에 성문을 열고는 뿔에는 단검을 꽂았고, 꼬리에는 횃불을 매달았던 소 천(千)두(頭)를 연군(燕軍)이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방사했다.(火牛의 計) 그러자 그 소들은 미친 듯이 연군(燕軍)의 진지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뿔에 달렸던 단검으로 연군(燕軍)들을 찔렀을 뿐만 아니라, 꼬리에 횃불을 단 채로 연군(燕軍)의 막사를 덮쳤기 때문에, 그래서 연군(燕軍)의 진영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그러자 또 전단(田單)은 그 우왕좌왕하던 연군(燕軍)들을 향해서 그동안 연군(燕軍)에 한을 품고 있었던 병사들을 풀어서 맹공을 가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백성들은 큰북을 울리면서 제군(齊軍)이 대군인 것처럼 위장을 했고, 그러자 또 연군(燕軍)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결국 기겁(騎劫)의 군대는 무너졌다.

 그 후, 전단(田單)은 그 기세를 타고 잃었던 성들을 전부다 되찾았으며, 그러자 또 수도였던 임치(臨淄)로 그가 개선했을 때, 양왕(襄王)은 그를 평안군(安平君)에 봉했다.

 그 후, 그는 장군의 자격으로 몇 번인가 전쟁에 참가했으며, 특히 조세가(趙世家)에는 그가 나중에 조(趙)나라의 재상이 되었다고 기록을 해두었다. 그리고 또, 동시대의 사료(史料)였던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순자(荀子)에서도 그가 아주 훌륭한 군략(軍略)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또 사마천(司馬遷)도 <손자(孫子)의 "처음에는 처녀(處女)처럼 적에게 문을 열어주고, 나중에는 달아나는 토끼처럼 적이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다"라고 했던 것은, 바로 그 전단(田單)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라고 그를 제법 높게 평가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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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4)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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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
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
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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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참고: 공자(孔子) 등, 너무 유명해서 잘 알려진 사람들에 대한 소개는 가급적 삼가거나, 나중에 따로 한곳에 묶어서 소개해드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름이 나온 다음에 그냥 넘어가기도 뭐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진부(陳腐)해해하실 분은 상기의 내용을 참조하시어, 부디 이해 당부 드립니다.

<孔丘>



 ♧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9월 28일부터 기원전 479년 4월 11일)는 춘추시대 중국의 사상가였으며, 철학자였고,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道德)을 확립했던 시조(始祖)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의 씨(氏)는 공(孔)이며, 휘(諱)는 구(丘) 그리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며, 공자(孔子)라는 것은 그에 대한 존칭이다(子=先生). 그래서 또 유럽에서는 라틴화(化)된 말로 컨퓨셔스(Confucius-孔夫子의 音譯이며, 夫子는 先生이라는 존칭)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그는 기원전 551년(일설에는 552년)에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변경의 추읍<陬邑-한자의 뜻과 다르게, 昌平 또는 太平을 누린다는 의미이며, 邑은 村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그곳은 현재의 山東省 곡부(曲阜)市라고 알려져 있다>에서, 추읍(陬邑)대부(大夫)의 차남으로 태어났다.(하지만 또 그에는 당시에 아주 비천한 계급이었던 巫女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도 있으며, 그것은 또 공자가 스스로 論語에서 '자신은 가난하고 賤한'이라고 표현했던 것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아무튼, 알려지기로 그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안징재(顔徴在)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논어(論語)에서는 기술(記述)된 바가 없다. 그리고 또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었다고 했고, 그래서 또 고아로 자랐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학문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고학(苦學) 중에 예학(禮學)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또 어떻게 해서 그 예학(禮學)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래서 또 그 때문이었던지 당시 예학(禮學)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국조(國祖) 주공단(周公旦-6-13참고)을 제사지내는 대묘(大廟)에 들어갔을 때는, 오히려 그는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물어보는 등, 자신의 지식에 애매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그에는 또, 그때 그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은, 오히려 禮를 실천했던 것이었다 라는 이설이 있다)

 아무튼 그는 또 노자(老子)에게 교육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것은 공자(孔子)의 예학(禮學)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려고 했던 후세의 유가(儒家)들과, 그리고 또 그 공자(孔子)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했던 도가(道家)들의 사상이 일치했던 것으로, 일종의 날조(捏造)였을 가능성이 지적되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또, 그는 신장(身長)이 9척(尺) 6촌(寸-춘추시대의 1척은 약 22.5센티였던 것으로 계산하면 약 216센티)이나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장인(長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史記의 孔子世家)

 그리고 또 그는 52세 때, 노(魯)의 정공(定公)에 의해서 중도(中都)란 곳의 재(宰-宰相)가 되었다고 사기(史記)의 공자(孔子)세가(世家)에서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또 그 다음 해에는 대사구(大司寇-刑部를 맡았던 六卿 중의 한명)에 취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 당시, 정변(政變)으로 노(魯)의 실권을 쥐게 되었던 양호(陽虎)의 권유에 응했던 것이라고 한다.(논어의 陽貨 제17-하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도망갔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또, 그는 기원전 497년에 국정(國政)에 실망을 해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나라는 없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기원전 483년에 69의 나이로 노(魯)에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제자들의 육성에만 전념했으며, 기원전 479년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상기의 내용으로 봤을 때, 공자(孔子)의 인생은 대부분이 무관(無冠)으로, 일개학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한 대(漢代-前漢)의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는 그의 공적을 왕(王)에 버금하는 것으로 평가를 해서 공자(孔子)세가(世家-諸侯王家의 역사를 말함)라고 이름을 붙였고, 그리고 또 그의 제자들의 전기는 중니(仲尼)제자(弟子)열전(列傳)이라고 이름 붙였을 만큼 사마천은 공자(孔子)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또 후세에 유교(儒敎)에서는 그를 두고 소왕(素王-無位의 王)이라고 부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의 공적과 주장에 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그는 인(仁-人間愛)과 예(禮-規範)에 기초한 이상(理想)사회의 실현을 강조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또 그는 당시까지 샤머니즘(shamanism-巫術) 같은 원시유교(단, 儒敎란 명칭이 성립되었던 것은 후세였다)를 체계화해서 하나의 도덕(道德)과 사상으로 승화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또 당연히 그의 근본적인 뜻(意義)은 인(仁)에 있었으며, 그 인(仁)을 다양한 상황에서 관철시키는 것으로 해서 도덕(道德)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그 근저(根柢)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인 선조숭배사상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유교(儒敎)에서는 인(仁)이라는 인도(人道)적인 측면과, 예(禮)라는 가부장제(家父長制)를 축(軸)으로 했던 신분제도 그 쌍방(雙方)을 함께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공자(孔子)는 자신의 그런 사상을 국정(國政)에 반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거의 무산되었다. 그래서 또 공자(孔子)는 만년에 그에 실망한 나머지 노(魯)나라로 다시 돌아갔으며, 그러던 중에 제일로 아꼈던 애제자 안회(顔回)마저 청빈(淸貧)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 다음으로 아꼈던 제자 자로(子路)는 모반이 일어났을 때 왕을 지키려다가 참살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모든 것에 낙심을 했던 공자(孔子)는 결국 불우한 말로(末路)를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공자(孔子) 사후에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이 그의 후계자로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이 전국(戰國)에서 한(漢) 초기로 넘어가려던 때여서 그다지 세력을 확장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후였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거치면서 점점 유교(儒敎)의 세력은 확대되어 갔고, 그 결과로 유교(儒敎)는 결국 국교(國敎) 화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 시대에 의한 고하(高下)는 있었지만, 유교(儒敎)는 중국 사상의 근간(根幹)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 한참 후였던 20세기에, 모택동(毛澤東)이 발동했던 <문화대혁명> 때, 공자(孔子)는 또 다른
의미로 중국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 그때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비림(임)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란 것을 전개해서 공자(孔子)와 임표(林彪)를 결부시켜서 비판하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결과로 공자(孔子)는 봉건주의를 확대했던 중국사(中國史)의 <악인>으로 치부되었으며, 임표(林彪)는 그런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현대에 부활시켰다고 하는 <현대의 악인>으로 치부되었던 불행한 역사가 중국에는 있었다.

 ♣ 증자(曾子-기원전 506년부터 ?)는 공자(孔子)의 제자로 유교(儒敎) 여명(黎明)기의 중요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휘(諱)는 참(參)이었으며, 자(字)는 자여(子與), 아버지는 증석(曾皙), 아들로는 증신(曾申)이 있었다.

 그는 노(魯)의 무성(武城-현재의 山東省 武城) 출신으로, 효()도(道-親孝行)에 밝았으며, 그래서 공자(孔子)의 눈에 띄게 되어서 효경(孝經)을 저술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제자로는 앞의 오기(吳起)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에는 또 그 오기(吳起)의 실제 스승은 증신(曾申)이었고, 그래서 또 그를 파문시켰던 사람은 바로 그 증신(曾申)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또 그는 <증참(曾參), 사람을 죽였다>라고 하는 말을 남겼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또 그 사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면, 어느 때에 그가 알던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그 사실을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고 한다. <증참(曾參)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으려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 후에 두 번, 세 번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식들이 전해져오자 그의 어머니는 그때서야 그 말을 믿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이란 곳에 실려 있다는 것으로, 그 교훈은 또, 평소에는 별 들을 가치도 없는 거짓말 같은 것이라도 사람이 몇 번을 꼭 같이 듣게 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의 어머니와 관련된 글은 <24효(孝)>에도 들어있다는데, 그래서 그 내용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또 어느 때에, 그가 풀 같은 것을 베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그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를 몰라서 그가 빨리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지만, 그러나 그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의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자신의 손가락을 계속해서 깨물었다는데, 그러자 또 그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아픈 것을 느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손님이 와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히 그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 참고: 사마양저

 사마양저(司馬穰苴-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제(齊)의 장군으로, 성(姓)은 규(嬀)였고, 씨(氏)는 전(田-그러나 景公을 섬기다가 大司馬가 되었기 때문에, 후에 司馬라고 했다), 휘(諱)는 양저(穰苴)였다. 그리고 또 그는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안영(晏嬰)의 추천으로 등용되었으며, 그 후에 제(齊)가 번영하는데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또한, 병법서인 사마법(司馬法)은 그가 썼던 것을 다시 정리했던 것이었으며, 전완(田完)의 후예로 알려졌다.

 참고: 사마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 또는 무학(武學)7서 중의 하나이며, 중국의 병법에 관한 일곱 가지의 책인 무경칠서는 육도(六韜)와 손자(孫子) 그리고 오자(吳子)와 사마법(司馬法) 그리고 삼략(三略)과 울요자(尉繚子) 그리고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전완(田完 또는 陳完-생몰불명)은 중국 춘추시대 진(陳)의 공자(公子)였고, 제(齊)의 정치가였다. 그리고 성(姓)은 규(嬀)였고, 씨(氏)는 진(陳) 또는 전(田), 휘(諱)는 완(完), 시(諡)는 경(敬)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여공(厲公-利公)의 차남이었으며, 진경중(陳敬仲) 또는 전경중(田敬仲)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전국7웅이었던 전제(田齊)의 조상이었다.

 아무튼, 당시의 제(齊)는 장기 간에 걸쳤던 내란의 결과로 경공(景公)이 즉위했으며, 명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영(晏嬰)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에는 진(陳)에서 망명해 왔던 귀족 전씨(田氏)들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제(齊)의 구(舊) 귀족들은 그런 그들을 질시(嫉視)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경계의 도를 점점 더 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랬을 때쯤, 제(齊)는 진(晋)과 연(燕)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로 영토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자 상심했던 경공(景公)은 그 영토의 회복을 위해서 고심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마침 그때 안영(晏嬰)이 사마양저(司馬穰苴)를 추천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안영(晏嬰)은 <양저(穰苴)는 비록 전씨(田氏)의 서자(庶子)이지만, 그 문덕(文德)은 병사들을 따르게 하고, 그 무덕(武德)은 적을 위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군이시여, 부디 그를 한번 시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를 천거했다. 그러자 또 경공(景公)은 사마양저(司馬穰苴)와 여러 가지의 병법에 대해서 논하고는 그를 장군의 자리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원래 저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는 낮은 자리인데, 그런데도 갑자기 장군이 된다면 사람들이 저를 업신여기고 따르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군의 총신(寵臣)이며, 그에 더해서 신망까지 있는 사람을 저의 고문(顧問)으로 임명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경공(景公)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경공(景公)은 그의 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로 장가(莊賈)라는 사람이 그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장가(莊賈)에게 <내일 정오에 군문(軍門)에서...>라고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장가(莊賈)는 돌아가던 길에 <진정으로 군을 잘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친척과 고관(高官)들과의 송별(送別)을 위한 주연(酒宴)을 벌였고, 그 때문에 약속시간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러자 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장가(莊賈)가 없던 사이에 군을 정비해서 군규(軍規)를 전군(全軍)에 시달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었을 때쯤에 나타났던 장가(莊賈)에게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장가(莊賈)는 솔직하게 전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늦게 되었다고 말을 했고, 그러자 사마양저(司馬穰苴)가 또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노(激怒)했다고 한다. <장군이란, 일단 출격을 명받았으면 집안일 같은 것은 잊어야 하고, 군중(軍中)에 임해서는 친척이나 지인(知人) 같은 것을 잊어야 하며, 전장(戰場)에 나서서는 자신의 안전 따위는 잊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현재, 적군은 이 나라를 유린하며 깊숙이 쳐들어와 있는 상태이고, 그로 인해서 국내는 불안에 휩싸여 있으며, 병사들은 또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풍우(風雨)에도 아랑곳없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주군께서도 그 모든 일로 심려하고 계시며, 그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또 밤잠도 설치고 계신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고작 송별을 위한 주연 때문에 출진(出陳)에 늦었다니, 그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는 군법에 따라서 그 장가(莊賈)를 처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장가(莊賈)는 너무 놀라서 경공(景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리고는 경공(景公)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 사자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장가(莊賈)를 처형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그것을 지켜봤던 병사들은 사마양저(司馬穰苴)를 경외(敬畏)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군규(軍規)를 바로 세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경공(景公)에게 용서를 빌러 갔던 장가(莊賈)의 사자가 다시 돌아와서 그 뜻을 사마양저(司馬穰苴)에게 전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고는 그 사자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장수는, 군(軍營)에 있을 동안에는 비록 군령(君令-왕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후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군중(軍中)에 있었을 때는 항상 병사들과 행동을 같이 했고, 식사도 같은 것을 먹었으며, 약한 병사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병자들까지도 출진의 뜻을 높였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런 일들을 알게 되었던 진(晋)과 연(燕)의 군대에서는 미리 제군(齊軍)에 겁을 먹고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그러자 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그들을 끝까지 추격해서 잃어버렸던 땅을 모두 되찾았다. 그러자 또 그 후, 경공(景公)은 개선하고 왔던 그를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했다.

 그 후, 전씨(田氏)의 세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고, 그러자 또 타족(他族)들은 그런 그들을 더욱 질시(嫉視)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로 그는 구(舊) 귀족들<晏嬰이 등장하기 이전에 국정을 장악했던 자들로, 그에는 또 포(鮑) 씨(氏-鮑叔의 家系)와 고(高) 씨(氏) 등>로부터 참언을 받았으며, 그러자 또 그 말을 받아들였던 경공(景公)으로부터도 그는 소외되었고, 그 후에는 해임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후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도 전씨(田氏)들의 세력 확대는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제(齊)의 강(姜) 씨(氏-太公望의 家系)들로부터 나라까지도 빼앗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위왕(威王) 때에는 왕호(王號)를 부르게까지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위왕(威王)은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병법을 존경해서, 그래서 또 그것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제후들이 제(齊)에 입조(入朝)하게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위왕(威王)은 학자들에게 시켜서 그의 병법을 연구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사마양저(司馬穰苴)병법이란 것이 탄생했으며, 그것이 후세에 사마법(司馬法)이 되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그 사마법은 전부 155편으로 되어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현존(現存)하는 것은 인본(仁本)・천자지의(天子之義)・정작(定爵)・엄위(嚴位)・용중(用衆) 그 5편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후세에 사마천(司馬遷)은 그 병법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넓고 깊으며, 특히 삼대(三代-夏・殷・周)의 전쟁에 관해서 그 정도로 상세하게 기술된 책은 없다>

 그리고 또, 그 현존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그것은 병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쟁에서의 의례적(儀禮的)인 것을 적은 부분이 많으며, 그것에 대한 예로는 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에는 전쟁에 져서 도망을 치는 적은 백보(百步)까지밖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후퇴하는 적도 삼사(三舍-앞에서 설명되었음. 그러나 다시 상기하는 차원에서, 舍는 군이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로, 대충 12킬로미터 정도임. 그러므로 대충 36킬로미터)까지밖에는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실전(實戰)적인 부분으로서는 <전쟁에서는 우선, 적보다도 이동하는 것이 더 힘들고, 그리하여 도착이 늦어지게 되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리고 또 쉬게 되면 나태해지기 쉽고, 하지만 또 쉬지 않으면 피곤해진다. 그리고 또 그 휴식이 길어지게 되면 다시 공포(恐怖)가 찾아온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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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3)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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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
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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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오기(吳起-?부터 기원전 381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군인으로, 정치가였고,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였다. 그는 또 손무(孫武), 손빈<孫臏-孫武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孫武와 함께 孫子로 불려졌던 인물이었다. 저작에 손빈병법(孫臏兵法)이 있으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과 함께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가 생전에 행했던 병법(兵法)은 별명으로 <손오(孫吳)의 술(術)>이라고도 불렸으며, 그가 죽은 후에 나왔던 <오자(吳子)>의 원작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들은 오기(吳期)가 있었다.

 참고: 1. 별록(別錄)은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펴낸 장서(藏書-秘書) 목록 집으로, 조정의 장서목록과 해제집(解題集)을 모아 엮은 것이며, 칠략(七略)의 처음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 없어져서 오늘날은 일부(20권)만 전한다고 하며, 그리고 또 칠략(七略)은 역시 유향의 별록(別錄)에 입각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흠(歆)이 지었던 서적 분류목록이었으며, 집략과 육예략 그리고 제자략, 시부략, 병서략, 술수략, 방기략으로 분류하였던 것이었다. 3만 2000권.

 2. 그리고 그 별록(別錄)에 의하면 <노(魯)의 좌구명(左丘明)이 춘추좌씨전을 작성해서, 그것을 제자였던 증신(曾申-曾子)에게 전했고, 그러자 또 그 증신은 자신의 제자 오기(吳起)에게 그것을 전했으며, 오기(吳起)는 다시 그것을 자신의 아들 오기(吳期)에게 전했고, 오기(吳期)는 제자였던 초(楚)의 탁초(鐸椒)에게 전했으며, 탁초(鐸椒)는 다시 제자였던 조(趙)의 우경(虞卿)에게 전했고, 그 우경(虞卿)은 다시 제자였던 순경(荀卿-荀子/荀況)에게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그는 위(衛)의 좌씨(左氏-현재의 山東省 菏沢市 定陶県) 출신의 사람이었고, 증자(曾子-曾申 또는 曾參. 공자의 제자)에게 배웠다고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파문(破門)당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일찍이 벼슬을 하기 위해서 각지를 떠돌았는데,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가산(家産)만 탕진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비웃은데 격분해서 고향사람들을 죽인 일로 해서(일설에 의하면, 그때 고향사람 약 30여 명을 죽이고는 曾子에게로 갔다고 함)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두말없이 증자(曾子)의 문하를 떠났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노(魯)의 원공(元公)이었던 가(嘉)를 찾아가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자신의 아내가 제(齊)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노(魯)의 입장에서 적국(敵國)의 사람이었던 자신의 아내를 미리 죽였던 것으로 해서 가(嘉) 등의 의심을 풀고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은 또 그의 인격에 대한 불신감을 낳게 했고, 그러자 또 노(魯)의 대부(大夫)들은 그를 두고 <오기(吳起)란 자는 장군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노(魯)와 형제의 나라인 위(衛)를 독단으로 침략한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또 그 말을 들었던 원공(元公)은 그를 징계면직(懲戒免職)했고, 그로써 그는 실각(失脚)했다. 그러자 또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다시 위(魏)의 문후(文侯)에게로 도망쳤다.(그러나 그는 그 사이에 齊를 쳐서 魯를 강국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함)

 그러자 또 문후(文侯)는 당시 위(魏)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1,2를 다투던 명군(名君)으로, 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위(魏)의 국력을 상승시키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오기(吳起)가 위(魏)로 들어왔다고 하자 가신(家臣)이었던 이극(李克)이란 사람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이극(李克)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탐욕적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흠이지만, 그러나 군사(軍事)적으로는 명장(名將) 사마양저(司馬穰苴-중국 춘추시대 齊의 장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도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후(文侯)는 그를 등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그 후, 오기(吳起)는 군중(軍中)에 있을 때,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그 병사들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잤으며, 그 병사들 중에서 상처가 나서 고름이 생긴 병사가 생기자,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빨아냈다. 그런데 또 어느 때, 그가 다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고 있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옆에 있다가 탄식했다. 그러자 그가 물어보자 그 여자가 이렇게 답을 했다. <장군께서는 저 아이 아버지의 고름도 빨아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 사람은 장군의 행동에 감격해서 목숨을 바쳐서 적과 싸웠고, 그리고는 전장에서 장열하게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장군께서 저 아이의 고름도 빨아내어주고 있으니, 장차 저 아이도 그 사람과 같이 그렇게 장열하게 죽을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여인의 이야기가 시사(示唆)해주는 바와 같이, 당시 병사들은 모두 그의 행동에 감격해서 그를 신복(信服)처럼 따르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군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오기(吳起)는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진(秦)을 쳤으며, 그리고는 5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러자 또 그 공적이 인정되어서 그는 서하(西河)의 태수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로 진(秦)과 한(韓)을 견제하게 되었
다.

 그리고 또 그 후, 문후(文侯)가 죽고 그 아들이었던 무후(武侯)가 즉위하자 전문(田文-孟嘗君과는 同名異人)이란 자와 재상(宰相)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지만, 그가 졌다. 그러자 또 그는 그에 불복(不服)해서 전문(田文)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군략(軍略)과 정치력 그리고 제후(諸侯)들에의 위신 등에 대해서 그와 전문(田文) 중 누가 더 뛰어났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전문(田文)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3가지 중에서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난 것은 하나도 없소! 하지만 지금의 주군(主君)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의 신망이 약하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당신과 나 중에서 누가 재상(宰相)이 되면 더 좋겠소?!> 그러자 오기(吳起)는 자신이 재상(宰相)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전문(田文)이 죽자 문후(文侯)의 사위였던 공숙모(公叔某)란 자가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자는 오기(吳起)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처(妻)의 동생이었던 무후(武侯)에게 오기(吳起)를 참언했다.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그때부터 오기(吳起)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공숙모(公叔某)는 오기(吳起)를 함정에 빠뜨릴 책략까지 획책했으며, 이윽고는 오기(吳起)에게 반역의 누명까지 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오기(吳起)는 다시 초(楚)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또 마침 초(楚)의 도왕(悼王)은 그를 반겨 맞아주었고, 그리고는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는 법가(法家)적인 사상을 토대로 해서 국정개혁을 실시했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 초(楚)에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종족(宗族)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했는데, 그래서 또 오기(吳起)는 법 준수의 철저와 불필요한 관직의 폐지 등, 제(諸) 개혁을 실시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자 또 그 결과 국고(國庫)는 전보다 풍족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것으로 군을 양성하여 부국강병에 힘썼고, 그것으로 또 왕권강화에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후세에 그 일을 두고 오기(吳起)가 법가(法家)의 원조(元祖)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수법으로, 그 전의 관중(管仲)이라거나 또는 태공망(太公望) 같은 사람들도 이미 비슷하게 썼던 수법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또 그로 인해서 힘을 잃게 되었던 귀족들은 점점 더 불만이 강해졌고, 그 결과로 또 그 모든 한(恨)은 당연히 오기(吳起)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오기(吳起) 자신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또 그때까지 자신의 뒤를 밀어주던 도왕(悼王)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분간은 무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원전 381년에 고령의 도왕(悼王)이 사망했고, 그러자 또 그와 동시에 오기(吳起)를 죽이겠다던 무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오기(吳起)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던 그 도왕(悼王)의 시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폭도들은 그를 향해서 마구잡이로 활을 쏘았고, 그러자 또 그 화살들은 도왕(悼王)의 사체에도 꽂혔다든지, 오기(吳起)의 몸에도 꽂혔다든지 해서 결국 오기(吳起)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또 잠시 초(楚)에는 정치의 공백기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후에 도왕(悼王)의 뒤를 이었던 숙왕(肅王)이 왕위에 등극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도왕(悼王)의 몸에도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왕의 유체를 건드린 자는 죽을 죄-楚의 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거 伍子胥가 왕의 사체에 채찍을 가했던 일로부터 생겼던 법률이었다>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찾아내서 대역(大逆)의 죄로 일족(一族) 전원을 처형했지만, 그러나 오기(吳起)의 죽음으로 인해서 초(楚)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굴원(屈原-기원전 343년 1월 21일부터 기원전 278년 5월 5일?)은 초(楚)의 정치가였고, 시인이었다. 성(姓)은 미(羋)였고, 씨(氏)는 굴(屈) 그리고 휘(諱)은 평(平) 또는 정칙(正則), 자(字)는 원(原)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이었으며, 정치가로서는 진(秦)의 장의(張儀)에 의한 책략을 미리 간파하고 회왕(懷王)에게 필사적인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초(楚)의 장래에 절망해서 물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는 초(楚) 무왕(武王)의 공자(公子) 하(瑕-屈瑕)를 조상으로 했던 공실(公室)계의 종족(宗族-廣義의 왕족) 중 한사람이었고, 굴(屈)씨(氏)는 경(景)씨(氏)・소(昭)씨(氏)와 함께 초(楚)의 왕족 계에서도 최고 명문(名門)의 하나였다.(그것을 3閭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가문에 더해서 그는 박문강기(博聞强記-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서 그것을 잘 기억함)에다 시문(時文)에도 특히 뛰어났었기 때문에, 그래서 회왕(懷王)은 그를 깊이 신임했고, 그리하여 그는 좌도(左徒)가 되었다.

 
참고: 左徒는 중국의 내정(內政)에서, 최고였던 영윤(令尹)을 보좌했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아래의 직급으로, 그에는 또 좌도(左徒)와 사패(司敗)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좌도(左徒)는 굴원(屈原)과 춘신군(春申君)이 담당했던 적이 있었으며,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사도(司徒)라는 관직이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사도(司徒)를 보좌했던 직책이 좌우(左右)사도(司徒)였는데, 그런데 또 어떤 연유로 인해서 전국시대 경에 좌도(左徒)만 남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당시, 초(楚)는 서쪽의 진(秦)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그래서 그 진(秦)과 동맹을 맺어서 편하게 가자는 친진파와, 동쪽의 제(齊)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하자는 친제파로 나뉘어져있었다. 그리고 굴원(屈原)은 친제파의 필두였으며, 정치능력도 아주 뛰어났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는 동료들로부터 질투(嫉妬)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참언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부터는 회왕(懷王)조차도 그는 멀리하게 되었으며, 그로서 초(楚)의 정책은 친진파로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필사적으로 회왕(懷王)에게 간언해서 진(秦)은 신용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곧 회왕(懷王)은 굴원(屈原)의 염려대로 진(秦)의 모략(謀略)가(家)였던 장의(張儀)의 꾐에 빠졌고, 그리하여 초군(楚軍)은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굴원(屈原)은 3여(閭)대부(大夫)의 자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자 또 진(秦)은 회왕(懷王)에게 혼인을 핑계로 진(秦)으로 올 것을 요청했는데,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앞의 회왕(懷王)이 장의(張儀)의 꾐에 넘어갔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회왕(懷王)을 말렸지만, 그러나 결국 회왕(懷王)은 친진파였던 공자(公子) 자란(子蘭)에게 설득당해서 진(秦)으로 갔고 그곳에서 감금되었다.

 그러자 왕을 잃게 된 초(楚)에서는 경양왕(頃襄王)을 옹립했고, 그 경양왕(頃襄王)은 또 굴원(屈原)을 싫어했던 자란(子蘭)을 영윤(令尹-丞相)에 앉혔기 때문에 굴원(屈原)은 다시 정계로부터 추방되었고, 이어서 강남(江南)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진(秦)이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했고,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굴원(屈原)은 절망했던 나머지 돌을 안고 멱라강(汨羅江-汨羅水는 中國 湖南省 湘陰縣의 북쪽에 있는 江으로, 서쪽으로 흘러서 湘江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戰國時代에 楚나라 三閭大夫였던 屈原이 周圍의 讒訴로 분함을 못 이겨 그곳에 빠져 죽은 곳으로도 有名하다. 지금은 汨水라고 부른다)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 후, 굴원(屈原)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는 망해(亡骸)를 물고기들이 잘 먹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물고기 밥으로 조릿대 잎(笹葉)에다 쌀밥을 넣어서 강에 던졌다고 전해지며, 그것이 또 종(粽-단옷날 등에 먹는 띠·조릿대 잎에 싸서 찐 찹쌀떡)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설적인 경정(競艇)경기(競技)인 드라곤보트(dragon boat-龍船)는 <물에 빠진 굴원(屈原)을 구출해내려는 민중들이 앞을 다투어서 배를 냈다>라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굴원(屈原)의 강렬했던 애국의 정(情)으로부터 나왔던 시(詩)들은 초(楚)의 노래집 초사(楚辭)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더욱 대표되었던 것은 <이소(離騷)>라고 알려져서 후세의 애국지사들로부터 애창(愛唱)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작품 <어부사(漁父辭)>의 모두(冒頭) 굴원기방(屈原旣放-굴원은 이미 쫓겨났다)으로부터 철부지 같은 짓을 굴원(屈原)이라고 말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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