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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도서관 : 체 게바라 - 십진분류법으로 읽는 혁명가의 다층적 초상 ㅣ 인물 도서관 1
송영심 지음 / 구텐베르크 / 2025년 6월
평점 :
《인물 도서관: 체 게바라》십진분류법으로 읽는 혁명가의 다층적 초상
저자 : 송영심
출판사 : 구텐베르크

혁명은 낭만으로만 남기엔 너무 뜨겁고, 역사로만 읽기엔 너무 현재적입니다. 구텐베르크 전기 총서의 첫 권, 송영심 작가의 《인물 도서관: 체 게바라》를 읽기 전 제 기대는 단순했습니다. 티셔츠 속 아이콘이 아닌 ‘한 인간’ 체 게바라 를 만나고 싶다. 분류표(000~900)를 따라 서가를 옮겨 다니는 동안, 체 게바라 의 신념·모순·격랑이 제일상까지 걸어 들어왔습니다.교과서식 서술에 지쳤지만 역사적 맥락은 놓치고 싶지 않은 분,토론하기를 좋아하는분들 에게 권합니다
한 권으로 걷는 ‘인물 도서관’
작은 판형에 200쪽 안팎. 그러나 얕지 않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줄거리 나열’이 아니라 ‘독자의 동선’을 설계한다는 데 있습니다. 000 총류에서 프로필과 핵심 연표를 정리해 주고, 이후 100~900으로 이어지는 서가를 따라가다 보면 체 게바라의 생애가 지도처럼 펼쳐집니다. 입구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안내표지판이 참 든든합니다. 덕분에 독자는 복잡한 역사·사상·문화의 층위를 자신의 속도로 소화할 수 있고, 어느 순간 “내가 궁금한 건 지금 300인가, 600인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읽기 경험 자체가 도서관을 거니는 산책처럼 설계되어 있어요.

십진분류법이 보여 준 체의 다층성
가장 신선했던 대목은 십진분류의 분할이 곧 ‘인물의 측면들’을 자연스럽게 환기한다는 점입니다. 100(철학)에서는 인권·해방·평등에 대한 체의 근거들을 보여 주고, 200(종교)에서는 가톨릭 문화권에서 태어난 무신론자가 어떻게 ‘신 대신 혁명’을 선택했는지 맥락을 잡아 줍니다. 300(사회과학)으로 건너가면 라틴아메리카의 빈곤과 쿠데타가 ‘청진기에서 총으로’ 손을 옮겨 놓은 사연이 살아나고, 500(기술과학)·600(예술)에서는 산업·기술·이미지 정치가 그의 실천에 어떻게 접속했는지 읽힙니다. 700(언어)의 “Hasta la victoria siempre!”는 문장이 아니라 행동의 레토릭으로, 800 (문학) 『돈키호테』네루다.『볼리비아 일기』, 총알 사이를 비춘 책들 ,900(역사)에서는 39년의 짧은 생이 한 세기를 관통하는 신화가 되는 과정을 정리합니다. 각 장이 독립적이면서도 서로를 비추는 구조라, 어느 장에서 시작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의사에서 혁명가로: 청진기와 총 사이의 진동
체 게바라 는 의사였습니다. 빈곤과 병이 중첩된 환자 앞에서, 그는 치료의 ‘원인’을 자꾸만 사회 구조로 돌려보게 됩니다. 과테말라에서의 좌절, 멕시코에서의 재정비, 피델과의 조우, 그리고 쿠바 혁명의 성공까지 이 책은 ‘의사적 현실감각’이 ‘혁명적 결단’으로 기울어지는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의료·위생 캠페인과 토지개혁, 산업화 정책 등 행정가로서의 모습도 놓치지 않습니다. 단, 여기서 멈추지 않고 ‘경제 모델의 한계’까지 같이 보여 주기 때문에 책은 찬양도, 악마화도 아닌 균열을 남깁니다. 청진기와 총 사이에서 흔들린 건 체 게바라 만이 아니라, 시대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합니다.

이상과 폭력의 간극, 그리고 균형의 문장들
혁명은 언제나 윤리의 모서리를 긁습니다. 책은 게릴라 전술의 효용과 폐해, 국제 연대의 명분과 현실, 그리고 냉전의 그림자까지 함께 비춥니다. 유엔 연설과 외교 행보, 콩고·볼리비아에서의 실패는 ‘낭만의 후광’을 걷어내는 사례로 제시됩니다. 특히 사진 한 장(알베르토 코르다의 이미지)이 ‘저항의 보편 아이콘’으로 굳어지는 서사는 600(예술)과 700(언어)의 교차점에서 설득력 있게 읽힙니다. 저자는 “미화도 악마화도 아닌 서술”을 고집합니다. 그래서인지 독자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대신 질문을 오래 붙잡게 됩니다. 그 여운이 오래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본 질문들
체 게바라 를 통해 ‘나’를 묻게 만듭니다. 불평등과 구조적 폭력, 국제질서의 비대칭은 20세기의 유물만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세상과 현실은 얼마나 겹치는가?”, “나는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넘나듭니다. 낭만을 경계하는 독자에겐 구조 분석이, 이상을 꿈꾸는 독자에겐 실천의 윤리가 남습니다. 작은 문고본이지만 토론의 불씨를 충분히 제공합니다. 한 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독서 ,이 시리즈가 노리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벽에 걸린 체 게바라 의 얼굴이 조금 달라 보였습니다. 반짝이는 상징에서, 모순을 감당한 인간으로. 뜨거운 신념과 서툰 결정, 용기와 한계가 동시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의 도서관에서 체 게바라는 어디일까요? 오늘, 당신의 삶이라는 도서관에서 어떤 분류표로 걷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