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31 | 132 | 133 | 134 | 1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그림자처럼 앞서간 사람들은, 자살했지만, 나는, 기형도의 죽음을 그의 시 작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시집의 구할이 부정와 슬픔이라 하여도,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113p)가, 내 가슴에 열 편의 시보다 무겁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 속의 검은 잎>은 삶/죽음의 계보를 길항하는 기형도의 번민의 노래이고, 우리의 상처이다.

기형도의 가계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난 잠바처럼, 바람 든 무들처럼, 제대로 식사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자리처럼, 비어있기 때문이다. 식솔들은 가만히 그 구멍만을 어루만지고 있고. 시인은 집, 안에서 낡은 악기를, 밖에서 크고 검은 새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아버지 팔목에 매달려 휘휘 휘파람을 날렸던 때를,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는 큰누이를, 이제는 결정과 같이 딱딱해진 추억을, 응시하고 있다. 가난을 서러워함이 아니다. 다만, 이젠 응고하여, 풀어해칠 수 없는 그 시간으로의 단절이 서러운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은 눈이 녹아야 하는, 겨울이었다. 그러나 춥지 않다. 오히려 그 얼음장 위에서도 불들은 꺼지지 않았고, 시인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었다. 아직, 진눈깨비다. 겨울의 문턱에 온지, 이미 오래지만, 겨울은 시인과 단절되어 있다. 그립다.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가.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을.'

괴테와 슈베르트의 「마왕」이다. [다만 아이는 죽지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훌쩍 커버려, 죽음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무서운 저 울음 소리에 소스라치는 아이다. 가족을 불러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시인의 속에서 울리는 소리라고 말한다. 게다가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 말이 옳았다. 가지치기 한 나무처럼 잘려나간 아이에게, 지금 가족은 없다. 작은 흐느낌은, 빈 방에서 공동화된 사회에서 잔향의 잔향을 만들며, 거대하게 증폭된다. 시인의 의식같은 텅 빈 방만이, 휑뎅그렁하게 자신의 잔향을 듣고 있다.

삼촌이 죽었다. 엄청난 눈이 나렸다. 아이는 밤을 하얗게 새우며 생철 실로폰을 두드렸다. 삼촌은 무응답이다. 무응답이다. 누이의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어도,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시인의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든다. 기형도는 흐느낀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흐느낀다.

죽음은 눈의 이미지이다! 눈은 시인의 주된 오마쥬이자, 화두이다.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은 추억을 쉴 곳을 잃고 흩날린다. 마치 진눈깨비처럼.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구나!' 눈처럼 돌아가고 싶다. 내가 잃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꼭 죽음같은 눈. 세상은 안개로 휘감겨 있지만, 그래서 비정하지만, 눈이 내린다. 죽음같은 눈이 같은 사람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같게 만든다. 투명하게. 눈을 맞는다. 이대로 돌아가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빈 집을 나와, 기형도는 눈을 맞는다. 눈은 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 그리고, 눈이 녹을 때 시인도 같이 녹는다.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마치 폭풍 속에 작고 가느다란 불의 입상과, 고인 채 부릅뜬 몇 개 물의 눈들이 폐광촌의 불꽃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인식이 기형도의 삶이다. 그래서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였고, 그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면서, 죽음을 꿈꾸었다. 삶은 죽음과 중첩되어 있다. 서로를 토닥거리며 위로한다. 삶과 죽음의 계보.

시인은 그렇게 꿈꾸었다. 그렇게 세상을, 자신을 벼리어갔다. 그러다 어느날 눈이 되었다. 이 세상 녹일듯한, 눈이 되었다. 우리들이 부르는 진혼가에 여미는 눈물이 되었다. 천천히 동지의 새벽이 왔다. 이제, 기억과 가족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 기형도여 안심하라. 하지만 산 죽음으로도 우리는 네 노래를, 네 육성을 믿을 수 있었건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여러 문화의 제유형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신비감을 생태학적 관련성이라는 방법에 의해 거시적으로 풀어나갔다. 본문의 각 항목들은 나에게 맑스 이후 다시 한번 문화생태학적인 조건들이 인간과 그 삶을 얼마나 결정하는가에 대한 통찰을 주었다. 그러나, 비전문가적인 입장이지만, 이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을 몇 자 적고자 한다.

우선, 그가 과학주의 대한 긍정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가 마지막 장에서 밝힌 반문화에 대한 단락은 그런 의혹을 짙게 하는데, '(반문화 운동가들의) 과학기술 가치의 전면 거부', '어떤 종류든 과학기술을 거부하는 운동은 우리 문명의 중심부에 있다',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의도적인 전복은 우리 문명의 과학기술적 하부 구조의 어느 부분인가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스러운 것이 아니다', '제3의 의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그들의 생각대로 중지시키거나 지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그들은 과학기술이 불평등과 착취를 심화시키지 않고 완화시키려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이 더욱 알 수 없게 하고 있다'와 같은 문장들은 그런 예이다. 저자는 문화인류학자로서 (서구의) 자문화 중심적 태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과학주의는 말 그대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패러다임인 것이다. 그것을 현상·일반을 고찰하는데 필요한 '절대적 합리성'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방법이 포트래취 장에서 대인과 가난한 자의 근본적인 지위차이를 설명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또한 결정론적이며 전체론적인 문화 연구에 대한 비판이다. 이전에 이어령 교수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생성되며 변화하는 문화 현상을 탐구자가 연구하려는 주제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모든 문화 현상을 그것에다 관련시키는 것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는 '축소'라는 주제에,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암소숭배', '돼지숭배/혐오', '전투적 메시아니즘', '마녀사냥'이라는 주제에 너무 집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자칫하면 결정론적 시각에 의해 비합리적 요소도 반드시 합리적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몰아 전체를 경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연구가 너무 주제의식에 빠져 있는 글을 읽으면 독자는 처음에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과연 모든 문화현상들이 그 키워드에만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것인지 회의에 빠지게 된다. 문화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만큼 그 문화들은 개방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에 의존함이 없이 평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理性적 문화'에 대한 갈망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문화 현상에 대한 연구법과 더불어 이성의 추상적이며 발전적인 희망으로서의 문화를 생각해보려는 바램이다. 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의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무의식적인 이드는 자연적인 것이며, 의식적인 에고는 문화적인 것이라는 프로이트 심리학과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을 통해서 문화 현상을 관찰하려 했다. 특히 그는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에 집착하여 문화의 구조를 강조하였다. 관념의 행위는 인간의 근본적 범주에서 파생하며 상징적 언어는 모든 대상에 대한 보편적 특징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현상의 무의식적 실체를 의식적 표현으로 해석하려 하였다. 즉, 문화 현상을 하나의 구문으로 보며 이 구문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의식·교환·신화 등의 인간행위를 음운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를 하나의 의사전달 부호로 간주하는 그의 연구방법은 좀더 이성적이며 창조적인 문화창조에 관한 희망을 나에게 제시하였다. 물론 이 방법 또한 상징적 구조를 강조한 나머지 문화의 발전적 측면을 간과한 면도 있다. 하지만, 원시인들의 구체적이고 감지적이며 심미적인 무시간성의 문화를 그는 마빈 해리스의 생태학적 접근 방식과는 달리 나름대로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며 개념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연구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세 한 수도원에서 윌리엄이라는 박식한 후란시스코파 수도사가 수도원 살인사건의 비밀스러운 전모를 파헤쳐나간다. 그런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탐닉했고 그리스 합리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으며, 과거에 이단 심문관이었다가 파면된 이유 등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는 기독교인이지만, 워낙 책을 좋아했기에 반기독교적 사상이 담긴 책을 읽고 싶어한, 거기서 기독교의 비합리적인 면과 권위적인 면을 발견한 객관적이면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윌리엄이 소설의 중심인물이었고 결국은 그가 판정승하는 글의 구조로 볼 때, <장미의 이름>은 전반적으로 기독교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체계를 확립한 이래, 점차 거기서 분리되고 이탈되어 나오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들이 결국 기독교의 권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으로 중세유럽을 그리고 있다.

사실, 중세철학을 보면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상이 항상 존재했었다. 다만, 그것은 대체로 은폐되고 왜곡되어서-물론 기독교의 권위에 의해- 전달되어졌을 뿐이다. 거칠지만 예를 들어본다면, 기독교 초기에 스토아 학파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가-스토아 학파가 로마 제정기까지의 긴 역사를 가진 소위 로마 시대의 양심이 된 철학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그랬고,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내몰렸던 그노시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가 그랬다.
투박한 예를 든 것도 같지만, 이렇게 해서 초기의 기독교는 그들을 이단으로 내몰고 하나의 거대한 보편으로서 양지를 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종말론, 선의 결여, 계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천사계층은 이러한 증례들이다. 그러나, 이단으로 몰렸던 사상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음지에서 내면화되었을 뿐이다. (마치 의식에 대한 무의식처럼) 종교란 것은 교리를 가진다. 그러나 이 교리는 믿음의 문제이다. 즉, 아무리 중세유럽이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에 대해 다른 생각이나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이미 전제하여, 여러 가지 사회, 정치적 운영에 그 의미를 담았다. 이런 측면에서 중세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속하지 않는 것들에겐 하나의 암흑기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미로화된 비밀 도서관처럼. 하지만 비밀은 오래갈 수 없고, 도식화된 거대 기독교에 이질적인 것들의 흐름은 시작된다.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이런 인상을 확신시켜준다. 호르헤 신부가 반기독교적 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 금서에 독을 묻혀 간접적 살인을 했음이 탄로나고, 결국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자살한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 그러면 신앙심이 안 생겨. 악마가 두려워야지만, 신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야. 책(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공개한다는 것은 웃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야. 그러면 인간의 웃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성은 사라지고, 다시 세상은 혼돈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네.'

우리는 전체화로 인한 많은 비극을 보아왔다. 여기서도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으며, 그 후에도 중세유럽은 마녀사냥과 같은 공식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나 기독교는 윌리엄 오캄의 보편논쟁으로 근대로 접어들고 데카르트와 영국경험론, 대륙합리론의 문제제기로 그 의미와 범위를 재조정하게 되었다. 20C에도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전체화에 반대하여 니체가 부활되고 푸코에 의해 광기의 의미가 재조명되었으며 들뢰즈에 의해 분열증이 그 의미를 새롭게 가졌음을 생각해보면 <장미의 이름> 또한 이들과 함께 현재성을 분명히 띌 수 있다고 본다.

언제나 속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의식에서 고려하지 않았기에 그것들의 이름을 모른다. 항상 유출되고, 이탈하는 그것들. 하지만, 항상 피어나는 그것들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다. 그것은 시대사적으로 중세의 반그리스도적 이탈이였고, 기호학적으로는 기표에 충만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관계, 즉 합일되지 않는 허무) 기의의 관계이다. 이러한 중세를 넘어 근대는 人神의 사고를 시작하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b Usus Non Tolit Usum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sblue33soul 2004-01-1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ove all, trust a few, do wrong to none.
- William Shakespeare -

enrich 2004-11-20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31 | 132 | 133 | 134 | 1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