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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많은, 그림자처럼 앞서간 사람들은, 자살했지만, 나는, 기형도의 죽음을 그의 시 작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시집의 구할이 부정와 슬픔이라 하여도,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113p)가, 내 가슴에 열 편의 시보다 무겁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 속의 검은 잎>은 삶/죽음의 계보를 길항하는 기형도의 번민의 노래이고, 우리의 상처이다.
기형도의 가계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난 잠바처럼, 바람 든 무들처럼, 제대로 식사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자리처럼, 비어있기 때문이다. 식솔들은 가만히 그 구멍만을 어루만지고 있고. 시인은 집, 안에서 낡은 악기를, 밖에서 크고 검은 새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아버지 팔목에 매달려 휘휘 휘파람을 날렸던 때를,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는 큰누이를, 이제는 결정과 같이 딱딱해진 추억을, 응시하고 있다. 가난을 서러워함이 아니다. 다만, 이젠 응고하여, 풀어해칠 수 없는 그 시간으로의 단절이 서러운 것이다. 그래서 그 곳은 눈이 녹아야 하는, 겨울이었다. 그러나 춥지 않다. 오히려 그 얼음장 위에서도 불들은 꺼지지 않았고, 시인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었다. 아직, 진눈깨비다. 겨울의 문턱에 온지, 이미 오래지만, 겨울은 시인과 단절되어 있다. 그립다.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가.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을.'
괴테와 슈베르트의 「마왕」이다. [다만 아이는 죽지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훌쩍 커버려, 죽음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무서운 저 울음 소리에 소스라치는 아이다. 가족을 불러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시인의 속에서 울리는 소리라고 말한다. 게다가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 말이 옳았다. 가지치기 한 나무처럼 잘려나간 아이에게, 지금 가족은 없다. 작은 흐느낌은, 빈 방에서 공동화된 사회에서 잔향의 잔향을 만들며, 거대하게 증폭된다. 시인의 의식같은 텅 빈 방만이, 휑뎅그렁하게 자신의 잔향을 듣고 있다.
삼촌이 죽었다. 엄청난 눈이 나렸다. 아이는 밤을 하얗게 새우며 생철 실로폰을 두드렸다. 삼촌은 무응답이다. 무응답이다. 누이의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어도,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시인의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든다. 기형도는 흐느낀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흐느낀다.
죽음은 눈의 이미지이다! 눈은 시인의 주된 오마쥬이자, 화두이다.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은 추억을 쉴 곳을 잃고 흩날린다. 마치 진눈깨비처럼.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구나!' 눈처럼 돌아가고 싶다. 내가 잃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꼭 죽음같은 눈. 세상은 안개로 휘감겨 있지만, 그래서 비정하지만, 눈이 내린다. 죽음같은 눈이 같은 사람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같게 만든다. 투명하게. 눈을 맞는다. 이대로 돌아가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빈 집을 나와, 기형도는 눈을 맞는다. 눈은 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 그리고, 눈이 녹을 때 시인도 같이 녹는다.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란다. 마치 폭풍 속에 작고 가느다란 불의 입상과, 고인 채 부릅뜬 몇 개 물의 눈들이 폐광촌의 불꽃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인식이 기형도의 삶이다. 그래서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였고, 그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라고 외치면서, 죽음을 꿈꾸었다. 삶은 죽음과 중첩되어 있다. 서로를 토닥거리며 위로한다. 삶과 죽음의 계보.
시인은 그렇게 꿈꾸었다. 그렇게 세상을, 자신을 벼리어갔다. 그러다 어느날 눈이 되었다. 이 세상 녹일듯한, 눈이 되었다. 우리들이 부르는 진혼가에 여미는 눈물이 되었다. 천천히 동지의 새벽이 왔다. 이제, 기억과 가족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 기형도여 안심하라. 하지만 산 죽음으로도 우리는 네 노래를, 네 육성을 믿을 수 있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