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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중세 한 수도원에서 윌리엄이라는 박식한 후란시스코파 수도사가 수도원 살인사건의 비밀스러운 전모를 파헤쳐나간다. 그런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탐닉했고 그리스 합리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으며, 과거에 이단 심문관이었다가 파면된 이유 등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는 기독교인이지만, 워낙 책을 좋아했기에 반기독교적 사상이 담긴 책을 읽고 싶어한, 거기서 기독교의 비합리적인 면과 권위적인 면을 발견한 객관적이면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윌리엄이 소설의 중심인물이었고 결국은 그가 판정승하는 글의 구조로 볼 때, <장미의 이름>은 전반적으로 기독교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체계를 확립한 이래, 점차 거기서 분리되고 이탈되어 나오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들이 결국 기독교의 권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언으로 중세유럽을 그리고 있다.
사실, 중세철학을 보면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상이 항상 존재했었다. 다만, 그것은 대체로 은폐되고 왜곡되어서-물론 기독교의 권위에 의해- 전달되어졌을 뿐이다. 거칠지만 예를 들어본다면, 기독교 초기에 스토아 학파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가-스토아 학파가 로마 제정기까지의 긴 역사를 가진 소위 로마 시대의 양심이 된 철학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그랬고,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내몰렸던 그노시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가 그랬다.
투박한 예를 든 것도 같지만, 이렇게 해서 초기의 기독교는 그들을 이단으로 내몰고 하나의 거대한 보편으로서 양지를 가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종말론, 선의 결여, 계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천사계층은 이러한 증례들이다. 그러나, 이단으로 몰렸던 사상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음지에서 내면화되었을 뿐이다. (마치 의식에 대한 무의식처럼) 종교란 것은 교리를 가진다. 그러나 이 교리는 믿음의 문제이다. 즉, 아무리 중세유럽이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에 대해 다른 생각이나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이미 전제하여, 여러 가지 사회, 정치적 운영에 그 의미를 담았다. 이런 측면에서 중세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속하지 않는 것들에겐 하나의 암흑기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미로화된 비밀 도서관처럼. 하지만 비밀은 오래갈 수 없고, 도식화된 거대 기독교에 이질적인 것들의 흐름은 시작된다.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이런 인상을 확신시켜준다. 호르헤 신부가 반기독교적 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 금서에 독을 묻혀 간접적 살인을 했음이 탄로나고, 결국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며 자살한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 그러면 신앙심이 안 생겨. 악마가 두려워야지만, 신의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야. 책(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공개한다는 것은 웃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야. 그러면 인간의 웃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성은 사라지고, 다시 세상은 혼돈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네.'
우리는 전체화로 인한 많은 비극을 보아왔다. 여기서도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으며, 그 후에도 중세유럽은 마녀사냥과 같은 공식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나 기독교는 윌리엄 오캄의 보편논쟁으로 근대로 접어들고 데카르트와 영국경험론, 대륙합리론의 문제제기로 그 의미와 범위를 재조정하게 되었다. 20C에도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전체화에 반대하여 니체가 부활되고 푸코에 의해 광기의 의미가 재조명되었으며 들뢰즈에 의해 분열증이 그 의미를 새롭게 가졌음을 생각해보면 <장미의 이름> 또한 이들과 함께 현재성을 분명히 띌 수 있다고 본다.
언제나 속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의식에서 고려하지 않았기에 그것들의 이름을 모른다. 항상 유출되고, 이탈하는 그것들. 하지만, 항상 피어나는 그것들이 바로 '장미의 이름'이다. 그것은 시대사적으로 중세의 반그리스도적 이탈이였고, 기호학적으로는 기표에 충만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관계, 즉 합일되지 않는 허무) 기의의 관계이다. 이러한 중세를 넘어 근대는 人神의 사고를 시작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