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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때 읽었던 버트란트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이 나에게 주었던 내 삶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잊지 않고, 철학과를 다니고 있다.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작년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얼핏 철학과 인문학을 선택한 것이 내 삶의 근원적인 실수가 아니었는가하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난 선배들과 후배들의 틈에 끼여 바쁜 생활을 보냈고, 그 공부의 시간들에 이 불안감은 어느새 한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난 이 책을 몇 달전 다시 읽었을 때, 이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작은 논문을 하나 준비하던 차에 이 책을 다시 들줘보았는데,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보수적이고 뻔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문구조의 차이를 알지 못했고, 이 둘의 관계가 본질적인 차이, 즉 세계에 내재하는 차이인 양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아니 적어도 그들이 문제시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자크 라캉, 과학철학과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자연과학은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환원론적이고 조작적인 문제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관찰자(실험자)의 위치는 배제된 채, 아니 그렇게 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예컨데, 통제변수, 종속변수나 실험집단, 통제집단과 같은 용어들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애초부터 이 관찰자를 주체의 위치로 설정하여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악신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한갖 꿈이 아닐지 모른다고 회의하였고, 칸트는 인식주관에 의해 이 세계가 구성된 것은 아닐까하고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자연과학은 20C에 들어서면서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러셀 역설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등에 의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젠 관찰자의 위치가 객관성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적사기>에는 이러한 지성과 통찰이 없다. 그들은 다만, 근대의 자연과학이 규정한 틀 안에서 객관성을 논하였고, 그것만이 유일한 지식의 기준인양 떠들어댔다. 그러나, 철학은 그렇게 만만한 학문이 아니다. 즉, 철학은 자연과학이 설정한 객관성과 보편성을 의문시하는 메타학문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학제성이 분명 가능하며, 그것은 동형성 관계(isomorphy)나 유추, 혹은 은유가 아닌, 교환가능성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실재로 나는 논문을 완성하면서 그렇게 적어내려갔다. 지금 책을 다시 펼쳐읽어 보아도, 자크 라캉에 대한 그들의 폄하는(27p)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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