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죽음.운명 - 스토아 철학에서 禪으로, 이정우 교수의 현대철학 이야기 2
이정우 지음 / 거름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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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마수미가 미국에서 질 들뢰즈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는 이정우 선생이 감히 그렇다고 난 말한다. 어느새 열풍처럼 불어들어와, 이젠 한국에서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 버린 들뢰즈는 '20C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릴만큼 그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그의 이론은 맑시즘과 접속되면서 이진경 선생과 같은 분은 그를 주체생산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진중권씨와 같은 분이 이진경씨에게 NL과 PD의 논쟁을 걸었지만 말이다.

<삶, 죽음, 운명>은 이러한 들뢰즈의 4대 주저 가운대 하나인 <의미의 논리>를 풍부하게 해설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이 강의록을 묶어 만들었다는 점에서 연작 1권인 <시뮬라크르의 시대>와 함께 나에게 상당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학교에서 학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이런 좋은 강의를 하는 선생님을 초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삶, 죽음, 운명>에 대한 각론으로 들어가면, 첫째 이 책은 <의미의 논리>에서 잘 나타나 있지 않은 들뢰즈와 스토아 학파와의 관계가 잘 설명되어 있다. 예를들면, 표착적 표상이나 좀마타(물질) 개념이 그러하다.

둘째로,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들뢰즈의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정석대로 분석하였다면, <삶, 죽음, 운명>은 이정우 선생의 동북아시아적 사유에 대한 작업의 연장으로써 동양의 선 사상 및 운명 개념과 함께 사유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현재 <접힘과 펼쳐짐>에로까지 연장되어 있는 이정우 선생의 한국적 철학에 대한 사유의 진폭이 어떤 것인지, 세 권의 연작 가운데서는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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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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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때 읽었던 버트란트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이 나에게 주었던 내 삶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잊지 않고, 철학과를 다니고 있다.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은 작년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얼핏 철학과 인문학을 선택한 것이 내 삶의 근원적인 실수가 아니었는가하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난 선배들과 후배들의 틈에 끼여 바쁜 생활을 보냈고, 그 공부의 시간들에 이 불안감은 어느새 한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난 이 책을 몇 달전 다시 읽었을 때, 이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작은 논문을 하나 준비하던 차에 이 책을 다시 들줘보았는데,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보수적이고 뻔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문구조의 차이를 알지 못했고, 이 둘의 관계가 본질적인 차이, 즉 세계에 내재하는 차이인 양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아니 적어도 그들이 문제시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자크 라캉, 과학철학과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자연과학은 근대까지만 하더라도 환원론적이고 조작적인 문제틀을 가지고 있었다. 즉 관찰자(실험자)의 위치는 배제된 채, 아니 그렇게 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예컨데, 통제변수, 종속변수나 실험집단, 통제집단과 같은 용어들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애초부터 이 관찰자를 주체의 위치로 설정하여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악신의 논리에 의해 세계가 한갖 꿈이 아닐지 모른다고 회의하였고, 칸트는 인식주관에 의해 이 세계가 구성된 것은 아닐까하고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자연과학은 20C에 들어서면서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러셀 역설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등에 의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젠 관찰자의 위치가 객관성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적사기>에는 이러한 지성과 통찰이 없다. 그들은 다만, 근대의 자연과학이 규정한 틀 안에서 객관성을 논하였고, 그것만이 유일한 지식의 기준인양 떠들어댔다. 그러나, 철학은 그렇게 만만한 학문이 아니다. 즉, 철학은 자연과학이 설정한 객관성과 보편성을 의문시하는 메타학문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학제성이 분명 가능하며, 그것은 동형성 관계(isomorphy)나 유추, 혹은 은유가 아닌, 교환가능성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실재로 나는 논문을 완성하면서 그렇게 적어내려갔다. 지금 책을 다시 펼쳐읽어 보아도, 자크 라캉에 대한 그들의 폄하는(27p)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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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자연 까치글방 52
그레고리 베이트슨 지음 / 까치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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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을 김영민 교수가 쓴 <컨텍스트로, 패턴으로>에서의 소개를 읽고 접하게 되었다. 그 글에서는 정말 베이트슨을 극찬하는데, 후의 일이지만 그때는 재밌게 읽었던 김영민 교수의 글이 베이트슨의 사유에 너무 젖어 그다운 독창적 작업이 되기엔 좀 무리가 있었던 것도 같다.

베이트슨의 <정신과 자연>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책 3권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고 생각된다. 특히 1장에서 학습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것이 사물을 연결시키는 패턴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그러하다.

이것은 상동성(homology) 개념과 맞물려, 컨텍스트 개념에로까지 나아가는데, 이 부분은 정말 생물학이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 학문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예컨데, 추상적 사유만큼이나, 실증적 실험에서 우리들이 얻는 성찰도 크다는 것이다.

베이트슨은 기존의 교과서가 알려주는 전형화되어 있는 문제와 답에 대한 논리계형을 여지없이 깨어버린다. 그리고는 그것을 주체적으로 사유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크레아투라와 플로레마 각각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는 어떻게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지... 이 책은 마치 우주의 언어를 번역한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정신과 자연>이 나에게 가장 즐거움을 줬던 부분을 꼽으라면,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이 어떻게 서로를 寫像하며 그들의 상동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우주적 차원의 공진화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알려줬던 점이다. 이것은 그의 기술과 설명 및 토톨로지에 대한 언급(102p)에서 나오는데, 세계가 하나의 토톨로지라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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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 청하신서 28
K.만하임 / 청아출판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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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는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지식의 형성과 사회(Wissensformen und die Gesellschaft)'와 더불어 지식사회학의 고전이다. 번역은 국내에서 헤겔철학의 대가로서 유명한 임석진 선생님이 해주셨다.

만하임은 우선 지식사회학이 당면한 과제를 규정하면서(27-30pp), 사유의 독점을 논의하였고(48-50pp), 그에 따라 생성된 '특수적 이데올로기'와 '총체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구별하였다(105ff). 그 틀 내에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의 어원과 총체적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보편적 파악의 방법을 논의하였고, 이러한 세부적 규명을 통해 사유의 존재구속성(130p) 및 합리화(170p)의 문제를 고찰하였다. 결국 이러한 합리화의 구조적 경향을 독해하는 작업은 정치와 역사의 전체성을 간파함으로써 문화적이고 유물론적인 차원에서 형성되는 '지식'이 어떻게 이상적인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사회학은, 그 자신의 진리의 기준에 대한 타당성을 스스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 사이의 진폭(275p)에서 떨리는 유동적이고 변증법적인 도상의 객체이다. 그래서 주어진 문제는 층화되어 있는 다양한 의식구조 자체를 비판하는 작업인데, 필자의 관점에서는 지식사회학이 그 자체의 전제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주체생산양식'으로서 담론형성을 논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성적 역능(potentia)의 개념을 철학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빌려와야 한다고 본다. 진리개념과 사회역사적 존재상황과의 연관성이 실증적이고 실재적인 수위에서 형성되기 위해서는 지식의 형성이 스스로를 비판하는 전제를 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이성의 奸智가 끊임없이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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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메타과학
장회익 지음 / 지식산업사 / 199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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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물리학과 과학철학 방면에서 장회익 선생은 유명하다. 특히 과학의 학문적 구조와 인식적 성격 및 그 안에서의 생명과 인간을 규명한 '과학과 메타과학'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정합적이고 사실적인 하나의 이론체계가 구성되는 과정을 그는 '양태'와 '실태'라는 구분을 통해, 한편으로는 체계 내 발견으로서의 정상과학과 체계 외 발견으로서의 과학혁명(28p)이라는 토마스 쿤의 입장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쿤과 포퍼의 체계변형에 대한 입장차이(29p)를 통해 검토한다.

이 논의를 바탕으로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고찰하여 규범적 방법론을 비판하고(38p),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을 시도한다. 더 나아가 III장 '지식진화와 학문간의 상호영향'에서는 구성요소와 집합체를 중심으로 물리과학과 자연과학의 상호관계를 규정하고, 더 나아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지식진화와 그 학제성을 논구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진술적 관점과 구조적 관점에 따른 과학이론의 구조 이해(66p)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학에서의 인과관계를 고찰함으로서(125ff) 이루어졌다.

이런 충분한 이론과학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는 2부에서 '우주와 인간'을 다루었는데, 그 주요한 골자는 우주진화의 복잡성(148p)과, 생명체의 경계조건과 협동현상(154p), 그리고 자체증식계 조성환경의 문제(182p) 등이다. 특히, 환경을 규명함에서 있어서 유기체를 우주라는 거시적인 환경과의 작용자/보작용자 관계로 설정함으로서, 공진화co-evolution의 큰 틀을 엮어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개체가 이 보작용자와의 관계를 통해 상동성homology의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그러한 '내부적 상태'(221p)가 발현해가는 역사적 진화과정이, 과학과 그 과학의 의미규정을 '과학 밖에서' 그러니까 메타과학으로써 규정하려는 과정과도 매끄럽게 조응되어 오래 기억될 자연과학의 교양서로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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