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에세이 - 개정증보판 동녘선서 70
김교빈.이현구 지음 / 동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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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양철학에 대한 입문서이다. 저자들이 책의 앞머리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공술이나 사주팔자로 속화되어 있는 동양철학에 대해 올바른 의미를 전달해주기 위해서 이 책은 쓰여졌다. 특히 에세이라는 제목이 붙은데서 알 수 있듯이, 참 쉽다. 책의 구성은 공자, 노자를 비롯해서 순자, 맹자까지 익히 알려진 동양철학의 사상가들을 설명한 다음, 주역과 같은 책을 살펴보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년전에 공자에 대해 일본의 어떤 방송사와 우리나라가 방송사가 같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생각났다. 그것은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쉽게 설명한 것이었는데, 추석과 같은 명절 프로로는 적격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재미있게 보았다. 이 책 역시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삶과 항상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동양철학의 가르침은 쉽고, 깊이가 있지만 어렵거나 현란한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배웠으면서 익히지 않는 개념을 동양철학에선 진정한 앎으로 생각하지 않듯이, 공유할 수 없거나 일상생활을 배제한 지식도 진정한 앎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자라난 이 환경이 얼마나 오랜 시간의 知的인 퇴적이 있었던 가를 보여준다. 속담이나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이 주듯이, 저자가 분명하지 않은 동양의 가르침들은 그렇게 삶 속에서 녹아있다. 우리가 익힌 습관과 습속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대로 행하면 왜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지 않는지도 알 수 있다.

물론 서양철학도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양철학의 이러한 융화력은 서양철학이 가지지 못한 강점이다. 나는 학부 수업에서 칸트는 이성, 오성, 감성을 분리하였지만, 동양철학에서는 이러한 분리가 없다는 것을 배웠었다. 아물러,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과 같은 작업도 통합되어 수행되었다고 하셨다. 그 동양철학 교수님은 지금 정년을 앞두고 계시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무튼 이 책은 유교의 정서를 몸으로 익히고 자라온 한국사람에게 동양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쉽게 가르쳐준다. 동양철학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의미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매력 또한 색다르다. 책의 내용이 그다지 어렵거나 길지 않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잠시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다.

교양을 쌓는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틈틈이 이런 책을 읽어두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듯, 그 의미 또한 스스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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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도미니크 르쿠르 / 새길아카데미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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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 출판사에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서적들이 많이 출판되어 나오는데, 이 책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바슐라르-캉키옘-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에 대해 연구를 한 이 책은 우리에게 뒤늦게 소개된 감도 없지 않다. 예컨데, 바슐라르는 우리나라에 그의 詩學 분야만 소개되었지, 과학사에 대해서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바슐라르의 위대함은 詩學보다 오히려 '인식론적 단절'로 대변되는 과학사 분야의 연구업적에 있다. 프랑스의 학문적 전통과 대학의 커리큘럼이 그렇게 짜여있듯이, 프랑스의 학자들은 학제적인 연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위의 세 사람 모두, 과학사 이외에 각각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었다.

인식론이란 엄밀히 말해서, 과학들에 대한 철학이다. 또한 이들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의 인식론적 성과에 기초해 철학을 비판하고 성찰한다. 이러한 비판은 철학을 내재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외재적으로 그 정체를 검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는 오늘날의 과학의 위상을 고려해 볼 때, 철학의 영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을 낳았던 철학이 이제, 과학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검증받는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의 분절은 그 시대성에 따라 유연하게 재정의되어야 한다. 마치,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고대철학에 접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현대철학을 알기 위해서는 현대과학의 주요한 인식론적 성과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분석이 있다면 종합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사실, 철학은 스스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여야만 메타적 비판의 학문으로서 기능할 수 있고, 예전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다. 철학은 이제 의미없는 학문이 아니다. 과학을 비롯한 많은 분과학문들의 영역이 넓어져 철학이 그것들에 대해 전부 꼼꼼히 검토하는 작업과 내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학문이 서로 이질적으로 연구되기는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한 통합이 필요한데, 철학이 이제 그런 기능을 수행하기엔 과포화 상태에 놓여버린 것이다.

그러나, 과학사를 공부하는 이 인식론자들은 그런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려 한다. 과학적 성과들을 과학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같이 검토하고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태도이다. 학문의 분절과 경계는 우리들이 스스로 그 필요에 의해 설정하는 것이지, 그렇게 경계지워진 영역에서 그 학문만을 공부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그것은 학문의 경직과 지지부진한 도태를 낳는다. 고인 물이 썩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는 대단히 흥미로운 분야이다. 이 책을 통해 프랑스 인식론자들의 성과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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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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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짜릿함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장 비밀스러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기장은 괜히 펼쳤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 사람의 너무 아픈 부분들을 봐야했기 때문에. 훔쳐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벌하는, 그런 죄책감과 슬픔으로 다가올때가 있다.

전혜린의 일기들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일기가 대부분 일어와 독어로 쓰여져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서울 법대 재학중 용감하게 독일로 유학가서 새로운 개척을 감행하는 그녀의 생활을 여실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나 역시 조만간에 유학을 떠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생활을 많이 상상했었다. 나 역시 전혜린처럼 그렇게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한 명의 어른이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 어린아이가 쓰는 일기와는 다르다. 전혜린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무엇인가를 잊지않고, 스스로를 추스리려고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스스로를 독하게 제어하는 그런 인텔리의 모습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일기를 보면 삶의 단편들을 많이 만날수도 있지만, 그만큼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과 자신을 팽팽하게 대결시키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책을 덮으면 슬프다. 그렇게 힘들여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는데, 전혜린은 딸 정화를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흔히 여자는 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남자보다 훨씬 독하고 모질기도 하다. 전혜린은 이 양자의 모습을 이 일기에서 다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그녀도 결국은 죽음 앞에서 사라져갔다는 점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들에 영향받으며, 새롭게 지향하면서 사는 모습... 그런 모습이 전혜린의 일기에는 눈부시도록 투명하게 씌여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일기보다 더 깨끗한 마음이 드러나있는 것 같다.

누구나 내면 저 깊은 곳은 이렇게 깨끗할까? 김현 선생님이나, 조영래 변호사, 전태일, 그리고 전혜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이토록 많은 천재들이 일찍 세상을 달리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극복하지 못할 운명이란 결국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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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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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선생님은 천재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는 그의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이 남겨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 말은 선생님의 연구가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를 우상화하는 발언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연구는 탁월하다.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황금의 비평가로 알려진 김현 선생님의 연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특히 그러하다.

김현 선생님은 한국에서 좀 더 사셨어야 했다. 그렇게 짧게 세상을 떠나시기엔 너무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내가 국문과 학생이거나 불문과 학생이 아니면서 김현 선생님의 전집을 모두 소장하고 있고, 그가 번역한 책이라든가 유고집, 그리고 이 일기를 소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전범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적어도 선생님이 보통 사람의 수명을 사셨다면 한국에 인문학은 훨씬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시집에서 때로 만나는 그의 해설이나, 서점에 몇권은 꼽혀 있는 그의 책은 나에게 반갑다. 존경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전공자는 아니여도, 김현 선생님의 해설은 나에게 많은 공감을 주었고, 날카롭다. 그가 해설을 써준 시집은 단번에 급부상한다는 이야기도 그런 의미이다. 물론, 이것은 선생님께서 당시 출판된 소설이나 시는 거의다 읽어보셨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일기를 읽고 있으면, 학자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이것은 장정일씨의 독서일기과 같은 책이 아니다. 여러 영역을 아우르면서도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면서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깊이를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이란 것은 이렇게 아이러니컬한 것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학문과 일치시켰던 이 학자의 삶도 빼앗으려 했으니...

이 일기를 읽고 있으면, 사적 영역에서도 학자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진정한 학자의 모습이란 이런 열정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학자가 한 평생 하지 못할 것을 40대의 나이에 하고 가버린 선생님을 추모하며, 그를 애도한다. 아울러, 그의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나의 전공과 겹치는 지라르나 푸코에 대한 연구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감사한다. 이 일기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 그 자체이다. 사람이 무엇을 희망하고, 무엇에 도취해 있다는 것. 이 책은 가장 뜨겁고 강렬하게 그것을 보여준다. 김현 선생님을 私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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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 시인선 128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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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와 <남해금산>(1986) 등의 시집을 통해 유명해진 이성복 시인의 이 시집은 그의 파리 체류시의 외로움과 그리움 및, 정제되고 균형잡힌 새로운 시적공간의 창출 등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오생근 선생이 해설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전의 시들보다 자아와 내면의 세계로 더 깊이 침잠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와 같은 긴 연작시나 II부 '천사의 눈'에서 씌여진 일련의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대상들에 대한 묘사는 분명 자아의 시선을 조용히 관찰한 것이다. 개인의 작은 기억이나, 취향, 시선, 삽화, 의미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일종의 내성법(introspection)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려는 시인의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의 묘사는 아름답다. 자신이 사랑한 대상들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손길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시인의 손길이 대상에로 투여한 따스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너무나도 미묘한 삶의 淨化 아니겠는가?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서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삶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세상에서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감각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마저도 어쩌면 統覺하는 것이라고.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살갗, 이 모든 감각이 행해지는 우리는 피부, 그 층위에서 세상은 돌아가고 구성되는 것 같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이 관계, 나와 너가 무엇을 느낀다는 이 관계 뿐이지, 나의 동일성도 너의 동일성도 부차적인 요소라고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참 맑아진다. 그 모든 기억도, 나에게 던져진 상처도 다 용서하고, 우리가 걸어왔던 곳으로 回歸하는 마음.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쓰여진 미소를 볼 수 있다고나 할까? '아침에 문 열고 커튼을 열어젖히면 햇빛도, 햇빛 그림자도 없다'(「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30」) 과연 이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있을까?

나는 영국경험론의 버클리 주교의 주장을 좇는 것이 아니다. 감각만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너무나 여실하게 다가와 우리의 얇은 신경들을 섬세히 찌르는 이 감각들이 또렷하다. 당신도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이것을 똑같이 느낄 수 있을텐데. 저 깊이 交通하는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사랑을 좀 더 소중하게 느낄텐데. 이젠 너무 늦었나?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이젠, 그 기억들을 하나 둘씩 지워나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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