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198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람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짜릿함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장 비밀스러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기장은 괜히 펼쳤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 사람의 너무 아픈 부분들을 봐야했기 때문에. 훔쳐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벌하는, 그런 죄책감과 슬픔으로 다가올때가 있다.

전혜린의 일기들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일기가 대부분 일어와 독어로 쓰여져 있다는 점도 놀랍지만, 서울 법대 재학중 용감하게 독일로 유학가서 새로운 개척을 감행하는 그녀의 생활을 여실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나 역시 조만간에 유학을 떠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생활을 많이 상상했었다. 나 역시 전혜린처럼 그렇게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한 명의 어른이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 어린아이가 쓰는 일기와는 다르다. 전혜린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무엇인가를 잊지않고, 스스로를 추스리려고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스스로를 독하게 제어하는 그런 인텔리의 모습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일기를 보면 삶의 단편들을 많이 만날수도 있지만, 그만큼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과 자신을 팽팽하게 대결시키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책을 덮으면 슬프다. 그렇게 힘들여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는데, 전혜린은 딸 정화를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흔히 여자는 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남자보다 훨씬 독하고 모질기도 하다. 전혜린은 이 양자의 모습을 이 일기에서 다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그녀도 결국은 죽음 앞에서 사라져갔다는 점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건들에 영향받으며, 새롭게 지향하면서 사는 모습... 그런 모습이 전혜린의 일기에는 눈부시도록 투명하게 씌여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일기보다 더 깨끗한 마음이 드러나있는 것 같다.

누구나 내면 저 깊은 곳은 이렇게 깨끗할까? 김현 선생님이나, 조영래 변호사, 전태일, 그리고 전혜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이토록 많은 천재들이 일찍 세상을 달리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극복하지 못할 운명이란 결국 있는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