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 이론신서 4
김진균 외 엮음 / 문화과학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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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떤 이유에서건 별 다섯 개를 줘야 한다. 책의 본문에서 이론적인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물론 이 책엔 오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나의 견해로 탁월한 논문들이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담론을 수입해 들어와 팔았던 그런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라, 일제 하에서 우리가 어떤 '주체'로서 양성되었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섬찟했다. 과연 나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왜 이것을 몰랐던 것인가에 대한 개탄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게된 동기는 푸코의 계보학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연구되어 있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읽었다. 정말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 책에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되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한국인이고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자란 이곳의 환경에 묻어있는 식민지성과 규율성에 대해서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바로, 현재의 한국사회를 극복해야 할 것이 아직도 많은 사회라고 비판적으로 보고, 그 부정적 현상의 기원이 상당정도 식민지체제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소위 '부정적 연속설'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이진경 선생의 글을 필두로 일본이 생산해낸 臣民으로서 한국인의 주체를 생산해낸 방법이, 그 처절한 역사가 고증되어 있다. 보통학교체제와 학교규율이 그러했고, 공장체제와 노동규율이 그러했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의료적 규율화, 일상의 군사화, 마지막으로 가족의 의미가 그러했다. 비록 이 책은 푸코의 '근대적 주체'가 우리에겐 臣民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이라는 점에 있어서의 차이, 일제시대의 교회의 역할, 그리고 일제시대의 규율권력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실태를 논의하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리라.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치욕스럽게 겪었고, 지금 우리에게 고스란히 묻어있는 臣民으로서의 규율을 파악하고, 씻어내는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이제는 정말 청산해야 하지 않겠는가? 꼭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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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꼬 2005-03-0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보학이 뭔지나 알고 썼니 짜증나게
 
김충열 교수의 유가윤리강의 예문서원 강의총서 1
김충열 / 예문서원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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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은 행위를 구속하지 않는다.' 김충열 교수의 이 책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 동양철학은 규범이 행위를 구속하지 않는다. 서양의 사상은 자유주의의 토대 아래에서 합리적인 규범을 만든다. 즉,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방임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외재적인 수단인 법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즉, 자유를 주되 제한을 가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자유와 제한이 모두 개인의 내면에 있다. 스스로 사회생활을 통해 자유와 그 제한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仁, 義, 禮는 하나의 當爲처럼 형성되어 있다. 쉽게 말해,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경하고, 친구와 의리로서 지내는 것 등은 법적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권장하는 사회생활을 통해 내면에서 형성되어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런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차이들이 있다. 그래서, 김충열 교수의 <유가윤리강의>를 읽으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과는 다른 동양의 윤리학을 맛볼 수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명성만큼이나 전문적이지만 또한 쉽다. 그래서 부담이 가지 않는다. 생명에서 시작해 나, 가정, 사회, 역사로 확대되는 유가윤리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참 쉽다. 내가 四書를 강독하면서 漢字를 한자씩 찾아가던 그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서양인은 잘 이해되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쉽게 이해된다. 그런 윤리의 환경에서 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지만 실천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고, 그에 앞서 자본주의의 파편화된 논리가 우리의 몸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수천년을 간직해온 동양의 윤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책이 유행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양의 윤리를 버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지 않다. 서양의 윤리학이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를 우리는 이미 많이 넘어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정의주의(emotivism)와 같은 문제가 우리에겐 없다. 이론과 실천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충렬 교수 역시 본문의 서두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밝힘으로서 나와 전체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이것이 동양철학의 강점이다. 노자의 사상 역시 플라톤이나 하이데거의 철학에 뒤지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근대화'가 동양의 것을 버리고 서양의 것만을 추구하는 '서양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안타까운 점이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양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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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 태양의 화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
파스칼 보나푸 지음, 송숙자 옮김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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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관에 많이 가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본성이 그래서일까? 잘사는 것도 아닌데 왠지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가는 것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벌여서 저축하려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의 부모였고, 우리들이였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을 고등학교 미술책에서만 몇 번 봤을뿐,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미술개론 수업에서 그를 다룬 이후에 이 책을 사게 되었고, 나는 감동했다.

미술의 이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고흐의 그림은 텃치가 강렬하다. 힘과 집중력이 느껴진다. 그가 그린 일련의 자화상들이 그랬듯이 인상이 강렬하다. 고흐는 말 수 없는 조용한 학생으로서의 청년기와 유능하고 세심한 직원으로서 20대를 보낸 후 뒤늦게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 비록 살아 생전에는 그 재능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는 지금 가장 인기있는 화가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앞서 지적한 강렬함이다.

이 책의 작가인 파스칼 포나푸 선생도 그것을 지적하듯이 부제를 '태양의 화가'로 썼다. 그런데, 나는 그의 강렬함이 그렇게 인상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전기 작품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던만큼 광산촌의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그림을 많이 그렸던 반 고흐는 일련의 그림에서 사람들의 내면에 담긴 상처와 아픔들을 그렸다. 그들의 내면에 끊임없이 치유의 대화를 걸었던 반 고흐. 나는 적어도 그의 그림을 그렇게 감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흐의 그림에서 자유롭게 소용돌이치는 빛과 그림자는 그가 그린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흐의 내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애착이 그림에 그대로 투여된 것이다. 이 소시민들의 슬픔에 대한 안타까움이 붓 끝을 통해서, 팔레트의 색채들을 통해서 화폭에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 이들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는 고뇌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의 주변에도 누군가가 고흐처럼 나를 생각하고 세상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그가 누구일까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고흐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그의 따뜻함과 강렬함. 나는 그것을 배우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내면에 말을 걸어 본다. 그의 상처가 묻어있는 그림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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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170
강윤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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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詩를 습작하고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에게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다. 마치 신나고 재미있고 슬프고 혹은 딱한 삶의 이야기들을 듣는 기분을 느낀다. 또한 그런 체험들이 엮이고 얼어붙은 結晶과 같은 그들의 세계관을 본다. 그 세계관은 때론 너무 투명하고 깨끗해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안경이 되기도 한다. 내가 미처 못 보았던 부분, 보고서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한 성찰에로 인도하는 그런 안경 말이다.

강윤후라는 젊은 시인의 상상과 현실세계도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른 남짓의 시인이 가진 체험들. 그 서울의 한 귀퉁이 성북에서 그는 '너'를 기다리고 있고 또한 '너'를 찾아서 떠나고 있다. 냉랭하고 메마르고 건조한,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도시의 공기는 그렇게 나를 어느 곳으로인가 옮겨놓고, 너를 어느 곳으로인가 옮겨놓는다. 그리고 둘은 간혹 우연히 스칠지는 몰라도 그것은 영화 속의 이야기일뿐. 만남은 없고 사랑도 없다. 다만 매일매일 누군가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말도 붙이기조차 어려운 그 딱딱함들. 그 속에서 시인의 현실세계는 상상세계로 전화한다. 마치 현실화될 수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듯, 사랑을 바라고 꿈꾼다. '더 먼 날에는 오늘의 누추함마저도 환한 빛으로 떠오르리라 믿으면서'. 지금 기억하고 있는 지난날의 빛나는 상처와 기억들을 밟고 올라서서 이 침침한 도시의 死角 공간에 틈을 내려는 것이다. 그 곳에서는 '너'와 나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쓸쓸하게 돌아온다. 상상만으로 도시생활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렇게 상상과 拮抗한다. 마치 투쟁으로는 상상세계를 실현할 수 없음을 깨달은 지친 전후세대 작가들의 방향 상실감이랄까? 그러나 강윤후 시인의 시세계는 그렇게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그는 성북역에서 아직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체념하고 잃어버리는 것들을 상상하며, 다시 '너'를 꿈꾸고 있다. 두 사람이 만날 방법을 꿈꾼다. 장소를 꿈꾼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은 낯선만큼 이전에는 낯익었고 또 가까운 길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상상하는지는 계속된 작업의 궤적을 따라가봐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 상상을 하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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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유럽의 역사 - 개정판 까치글방 93
프레데리크 들루슈 엮음, 윤승준 옮김 / 까치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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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럽 각 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모여 유럽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객관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즉, 서양사 특히 유럽의 역사는 국가의 성립과 소멸 그리고 영토경계가 복잡하게 변화하는데, 그것을 각국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되는 객관적인 史觀으로 정립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집필진들의 참으로 오랜 토론과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에 따라 쓰여졌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유럽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대륙의 사람들도 보다 공평하게 유럽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歷史는 각 시대의 역사적 방향을 가름하는 중요한 변수였던 '史的 事件'들이 어떻게 의미 해석되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이것을 현시대에 맞게 해석하여 국가나 인류의 미래를 좀더 영원한 관점에서 투사하는 것이 역사의 임무이자 목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국가의 입장을 뛰어넘는 공동의 작업은 실로 뜻깊고, 객관적인 역사의 서술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책에서는 유럽사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유럽 내부만의 문제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약점을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십자군원정, 투르크족의 침공, 미국의 독립전쟁, 제국주의의 발발 등은 그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입장을 또 들어야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서 역사적 사건을 의미 해석하는 것이 역사를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 아닌 객관적 사건으로 지양시키는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서로간의 입장확인과 이해, 그리고 소통과 토론은 한 국가의 역사를 넘어 '인류의 역사'를 정립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1, 2차 세계대전의 문제가 그렇다. 1차 대전은 유럽의 내전이라는 성격을 좀더 강하게 띈다 하더라도, 2차 세계대전은 공히 지구 전체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2차 세계대전의 의미해석과 그 객관적 서술은 이 책과 같은 입장에서 씌여질 수 있도록 토론과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역사 가운데 어떤 점들을 왜곡하는 것도 이러한 방법에서 해결가능하다고 본다. 역사서술은 그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다. 유럽의 역사적 사건을 쉽게 풀이했다는 장점, 그리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 이외에도, 책의 이면에 숨어있는 양보와 화해의 미덕을 읽었기 때문이다. 즉, 역사를 한 국가나 민족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이데올로기적 史觀을 넘어 인류적 공동체의 발전적 지향점으로 나아가는 객관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각국의 史觀을 한단계 초월하려는 집필진들의 양보와 화해에 기초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에 있었다. 다음 세기 쯤에는 지구상의 국가는 거의 하나로 묶이고 언어도 몇 개로 통일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뉴스를 보았다. 이런 시대에 객관적인 인류 공통의 역사를 정립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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