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 미래사 / 1991년 10월
평점 :
절판


고정희 시인. 시인. 시인. 그녀의 시에는 더 큰 것들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있다. 그리고, 그 염려와 배려의 형식은 슬픔이다. 사적인 슬픔도 시가 되지만, 공적인 슬픔도 시가 된다면, 당연히 시가 된다면, 그 슬픔은 고정희 시인에게서 빛을 발한다. 사적인 슬픔은 이미 허수경 시인에게서 느꼈었다. 자잘하고 또 미시적인 것들을 클로즈업 하여, 슬픔으로 묶어내는 그 허무의 힘이 허수경 시인에게서 있다면, 고정희 시인은 큰 것들을 작게 감싸 앉는다. 큰 것들을 무리없이 작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옆에 있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시인의 업보이며, 시인의 관심일 것이다.

나는 그 점 때문에 고정희 시인의 시를 즐겨 읽는다. 그녀의 시는 큰 것들을 과도하게 부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피 끓는 열정으로 큰 것들 속으로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큰 것들을 내 몸 속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냉정한 슬픔으로 형상화한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평생 시인의 모습인가.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시인이 떠난 후, 그 슬픔이 차오른다. 큰 것들을 담아두었던 그 가슴이 터지고 터져,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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