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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에 앉아 팜플렛을 쓰고 있을 때, 미셸은 파리의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프랑스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동시대 인물들이 이제 막 식민주의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뉴칼레도니아의 죄수 신분으로 1878년 원주민 봉기에 참여했다. ​오늘날까지도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붉은 처녀'로 명성을 얻은 루이즈 미셸은 프랑스 인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미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1830년 5월 29일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오트마른(Haute-Marne)에 있는 반쯤 허물어진 요새화된 저택에서 어머니와 친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에티엔 샤를 드마이(Etienne-Charles Demahis)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화주의적 지지의 표시로 자신의 성을 '드 마이(De Mahis)'에서 덜 화려한 '드마이(Demahis)'로 바꾸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인인 마리 안(또는 마리안) 미셸과 더 이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아들 로랑 사이에서 루이즈가 태어났을 때 브롱쿠르(Vroncourt) 마을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루이즈는 마치 적통인 드마이 가문의 손녀처럼 양육되었고, 친조부모가 사망한 후 여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오트마른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혁명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고,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2제국이 황혼에 접어들 때 급진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과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공격 당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불만을 품은 빈민들이 거주해 온 몽마르트르 지역 혁명 단체의 주요 일원이었다.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시민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공화국을 훔치려 한다고 믿고 반란을 일으킨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미셸은 사건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며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피의 일주일’ 1871년 5월 베르사유 정부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미셸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873년 죄수 호송선을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이송되었다. 6년 동안 수도 누메아 인근의 형벌 식민지에서 가혹한 조건 속에 살았으며, 이후 수도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여론의 압박에 따라 정부가 코뮌 가담자들에게 내린 1880년 일반 사면령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미셸이 귀국했을 때 거대한 대중 집회가 그녀를 맞이했으나, 그녀가 혁명진영 내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무지했고, 급진 세력 내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얻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그 어떤 '전설'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얻는 대중적 지지는 여전히 엄청났으며, 이후 몇 년간 파리와 지방, 그리고 해외에서 열린 그녀의 강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소란을 이룰 정도였다.​
1882년 미셸은 치안 문란 죄로 체포되어 2주간 감옥에서 보냈다. 이어 1883년 봄, 앵발리드에서 열린 ‘빵과 일자리’시위 직후, 그녀는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들고 파리 전역에서 군중을 이끌었다. 그녀는 폭동을 일으키고 추종자들에게 빵집 약탈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실질적인 변론을 거부한 그녀는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사면된 그녀는 단호하게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급진적인 대중은 그녀를 '위대한 시민(la grande citoyenne)'으로 예우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유럽을 돌며 강연 투어에 나섰으며 1905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도 강연 투어 중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수만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프랑스의 3대에 걸친 혁명 정서가 거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품었던 막연한 동정과 이후 유토피아적 혁명에 바쳤던 막연한 헌신을 거쳐 무정부주의라는 신념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무정부주의로의 전향이 죄수 호송선 비르지니(Virginie)호를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가던 넉 달의 항해 중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개종시킨 나탈리 르멜(Natalie Lemel)과 여정을 함께했었다. 미셸은 회고록에서 1883년 1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옹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녀는 회고록에 "나는 그곳에 기록된 모든 사상을 공유한다"라고 적으며 해당 문서의 전문을 인용했다.
하지만 미셸의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당대와 과거의 혁명 저작물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녀가 라메네(Lamennais)를 읽은 것은 확실하며, 프루동(Proudhon)을 읽었을 가능성도 크다. 블랑키(Blanqui)나 바쿠닌(Bakunin)의 사상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기에 당연히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다. 마르크스주의는 회고록에서는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이는 그녀가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회고록 출간 수년 후인 189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유권에 대한 관점, 착취에 대한 인식, 과학의 역할에 대한 주장, 그리고 인류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비전에서 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사회 혁명에 대한 염원에서도 그녀는 그 형태와 성격에 대해 일관적이었다. 즉, 혁명이란 불의와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이 일으키는 자발적인 봉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민중의 자발적 봉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녀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택했던 테러의 승인에서 한 발 비켜나가게 한다. 암살은 도구로서 아주 가끔만 언급한다. 한 번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살해하는 것을 논했고, 또 다른 때는 아돌프 티에르를 암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그녀가 폭발물을 사용한 유일한 사례는 동상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시도뿐이었다. 그녀는 "폭군 살해는 폭정의 머리가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적은 수일 때만 실용적이다. 그것이 히드라(머리가 여럿인 괴물)일 때는 오직 혁명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녀는 혁명의 모든 지도자가 혁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전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는데, 그래야만 민중이 살아남은 참모진과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 어떻게든 무정부주의적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
​E. H. 카(E. H. Carr)의 적절한 표현을 빌려 "낭만주의 교리의 논리적 결말"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는 정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 핵심—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모든 형태의 정치 조직에 대한 혐오,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대한 믿음—은 미셸의 생각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미셸이 무정부주의를 찾은 것인지 무정부주의가 미셸을 찾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 그녀는 진보가 필연적이며, 정부는 그 어떤 정부든 악하다는 점을 확고하게 믿었다. "권력은 악이다"라는 그녀의 진술은 모든 무정부주의 체계의 핵심을 형성한다.
그녀는 역사를 자유로운 인류가 어떻게든 노예화되어 온 이야기로 보았으며 과거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큼이나 컸다. 과거에 대한 그녀의 비전이 비록 신화와 괴물로 가득 찬 낭만적인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은 미래에 대한 그녀의 낭만적인 꿈과 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안타깝지만, 미셸의 희망—그리고 역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라는 낭만적인 꿈은 미래의 물결이 아니라 쇠퇴해가는 세력이었다. 수치상으로 볼 때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1890년대의 폭력 사태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의 기간이었으나, 그 수십 년 동안 무정부주의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은 노동자 자치조직(Bourses de Travail), 다양한 노선과 전략을 품은 노동총연맹(CGT), 그리고 정파 간의 내분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루이즈 미셸이 꿈꾸었던 무정부주의, 즉 사회 혁명과 착취의 종말로 이어지는 형태 없는 민중 봉기는 세부 사항과 방법론을 둘러싼 화해 불가능한 말다툼 속으로 사라졌다. 그 꿈은 흩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셸은 이론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조직가도 아니었다. 시위와 조직을 구상하는 초라하고 어두운 방들은 미셸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1882년 한 연설에서 "모든 혁명이 불충분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조직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는데, 가까운 시점에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압도적인 수와 의지의 힘, 그리고 그들 명분의 정당성을 통해 구체제가 자신들 앞에서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론가도 조직가도 아니었던 미셸은 프랑스 급진파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역할을 채웠다. 베를렌은 그녀를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라 불렀다.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낭만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는 어느 시의 초고 제목을 '루이즈 미셸'이라고 지었으며, 「남자보다 위대한(Viro Major)」으로로 제목이 바뀐 이 긴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는 이들은 알리라... 모두를 위해 바쳐진 당신의 나날들, 밤들, 심려들, 눈물들을, 타인을 돕느라 스스로를 잊어버린 당신을, 사도의 불꽃과도 같은 당신의 언어들을, 비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향한 당신의 긴 증오의 시선을, 그리고 당신의 두 손으로 녹여주던 아이들의 발을..."
위고는 미셸이 영웅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위고는 미셸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두 정신이 뒤섞인 존재 ...거대하고 폭풍우 치는 심장 밑바닥에서 보이는 별과 같은 것들의 신성한 혼돈 ...불꽃 속에서 보이는 광채
당신은 여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은 위대한 남성(Viro Major)보다 더 거대하다."
모든 운동에는 예언자와 입법자, 죄인과 변절자, 순교자와 성인이 필요하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미셸은 순교자이자 성인—즉, '붉은 처녀'였다.
미셸의 지적 호기심은 엄청났고 지식에 대한 갈증은 갈구해도 끝이 없었다. 그녀의 회고록 전반에는 음악, 악기, 교수법, 동물 학대, 여성의 지위, 카나리아 제도에서 통용되는 화폐, 곤충, 카나크 원주민 인류학, 날씨, 식물학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이 흐르고 있다. 목록은 끝이 없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신의 탑 방에 동물 해골을 수집했다. 파리에서 여교사로 지낼 때는 바쁜 수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물리, 화학, 역사, 심지어 법학 수업까지 청강했다. 감옥에서는 책과 시를 썼고,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동식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파파야 나무의 황달병 예방 접종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녀가 회고록에서 드러낸 내면의 삶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설, 맹수, 민속 영웅들이 그녀의 환상 속에서 뒤섞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결코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초기 생애가 "꿈과 학업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이는 삶의 두 번째 부분인 "투쟁의 시기"를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파리 포위전과 코뮌이라는 깨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행동했다. 꿈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둘은 외견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어린 시절에 놀이처럼 상연했던 교수대 연극의 연설을 그녀는 1871년 재판관들 앞에서 실제로 쏟아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연을 맡기 마련인데, 미셸은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루이드 여사제, 발키리, 베스탈 처녀(성스러운 처녀)로 여겼으며, 기이한 악령과 신비로운 환영 등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녀의 실재 삶 속을 지나갔다. 1860년대의 어느 날, 그녀는 친구 빅토린과 함께 어린 시절 집 근처의 깊은 숲속을 걸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숲속을 거의 소리 없이 가로지르며 늑대 한 마리가 그들 곁에서 발맞추어 걸었다고 한다. 늑대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60년대에는 오트마른 지역조차 늑대의 수가 적었으나, 그 맹수는 미셸의 마음속에 분명하고 진실하게 존재했다.
​본문의 주요 준비 과정이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셸이 공적인 기록이 있는 사건들을 서술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투옥되지 않았을 때조차 매일 경찰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의 보고서가 남아 있기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그리고 1886년부터 1889년까지의 그녀의 삶은 객관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과 여교사 시절에 대해서는 그녀의 기억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일부 태도들은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실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미셸은 환상을 구축한 뒤 그것을 실현하며 살았거나, 혹은 회고적으로 환상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회고록 집필자 외에 자기의 삶을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셸은 회고록이 빠지기 쉬운 자기과시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우며, 심지어 자신의 중요성을 소홀히 다루기까지 한다. 그녀는 코뮌 기간 여성 감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파리 포위 공격(파리 포위전-보불전쟁) 당시 그녀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도움 덕분에 약 200명의 아이를 보살피며 일상적인 복지를 책임졌고 그 일을 아주 잘 해냈으나, 그녀의 회고록에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비록 그녀의 재판 중 하나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크로포트킨의 국제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그녀는 그 여행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녀의 회고록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엄한 몸짓으로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1886년의 이러한 서술들은 루이즈 미셸이 자기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방식이거나, 혹은 타인에게 드러내려 했던 방식을 나타낸다. 그 효과란 그녀에세 선전의 의미일 것이며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회상록은 미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상황에서 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쉰여섯 살의 이 혁명가는 모든 것을 혁명에 희생했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아를 훗날의 혁명가 모습으로 소급하여 만들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볼테르적 가르침 덕분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반교회적이었다고 자신을 묘사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겉보기에 적절히 종교적인 아이였다. 경건한 고모의 열렬한 가르침을 통해 그녀가 신비주의적 가톨릭에 매료되었던 흔적들이다. 이는 훗날 혁명가로서 열정에 모종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발휘한다. ​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미셸은 곧바로 급진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기간 중 그녀의 친구 마리 페레(Marie Ferré)가 사망했으나, 미셸에게 사건의 정점은 리옹에서 열린 '66인의 재판(Trial of the Sixty-eight)'이었다. 정부는 크로포트킨과 고티에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를 파멸시킴으로써 무정부주의 운동을 꺾으려 했다. 미셸은 재판 초기에 영국에 있었으나 마지막 단계에 참석했고,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수감자들과 동일시했다. 66인의 유죄 판결 이후 그녀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허용된 자유를 사용해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뻗어 나갈 새롭고 거대한 인터내셔널을 소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의 공범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순교를 갈구하고 있었고, 1883년 4월 앵발리드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정부는 야만적으로 반응했고, 형식적인 재판 끝에 그녀에게 6년의 독방 구금형을 선고했다. 이는 범죄에 비해 너무나도 불균형한 형량이었기에 보수적인 신문들조차 항의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쇠약해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유죄 판결 이후에도 최소 두 차례 어머니를 병문안할 수 있는 가석방 허가를 받았다. 클레르몽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어머니를 뵙기 위한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절차였다. 미셸의 전기 작가 에디스 토마스(Edith Thomas)는 이 에피소드를 논하며 19세기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인도적인 시대였다"라고 평했다. 미셸은 1884년 12월 초, 당국이 그녀를 어머니와 가까운 파리 교도소로 이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나흘 후 내무부 장관은 미셸이 두 명의 경찰관 감시하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녀의 회고록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미셸은 1884년 12월 11일부터 1885년 1월 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미셸의 감정은 항상 격렬했다. 그녀의 회고록 페이지 곳곳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점철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을 묘사할 때는 친척들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젊은 여성 시절에는 자신을 따라 파리까지 온 줄리 롱샹(Julie Longchamps)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도 제자들에 대한 미셸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첫 번째 재판 당시 정부가 그녀에게 제자가 없었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격분하며 반박했는데, 정작 그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들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상력 풍부한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의 증거들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누메아에서 카나크족을 가르치는 데 쏟은 그녀의 헌신은 회고록에 자부심으로 담겨 있다.
미셸의 동정심은 사회의 모든 약자, 즉 가난한 이들, 노인들, 죄수들, 그리고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즘(protofeminism)을 발전시켰으나, 이는 곧 더 포괄적인 급진주의로 융합되었다. 미셸은 사회 문제를 명확히 직시했으며,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집단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여성에 관한 회고록의 한 장은 사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가 "좋은 동반자로서 인생을 함께 걸어갈 것"을 호소하는 톤으로 변한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인류 전체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인종이 으뜸인지를 두고 인종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처럼, 어느 성별이 우월한지"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향한 잔혹 행위에 대한 미셸의 혐오감은 약자와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연결되어 있다. "새끼가 짓밟힌 새부터 전쟁으로 보금자리가 파괴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 다음으로 가장 격렬한 감정은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를 향해 있다. 그녀는 그와 그의 처형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만, 그 감정이 인간 페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탄압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의 상징으로서의 페레를 향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페레를 그의 연인으로 보기도 한다. 페레의 누이 마리(Marie)와 미셸의 따뜻한 우정이 테오필에 대한 감정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와 별개인지는 불분명하나, 미셸과 마리 페레의 삶은 영구적으로 얽혀 있었다. 마리는 미셸이 집회에 참석하거나 유배 중일 때, 혹은 여행이나 투옥 중일 때 미셸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도왔고, 두 사람은 수년 동안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셸이 자신의 시집과 스크랩 자료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 덕분이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회고록에 포함되었다. 블랑키 서거 기념일 시위 직후 미셸이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사망했다. 미셸은 회고록에 마리의 장례식 기록과 앙리 로슈포르가 보낸 찬사의 편지를 수록했다.
하지만 미셸의 정서적 삶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미셸은 어머니가 "공유하지 않았던" 자신의 견해 때문에 어머니가 겪은 고통의 대부분을 자신이 초래했음을 인정했다. 평생 어머니는 딸의 빚을 갚기 위해 애썼고 애정과 소소한 선물들을 쏟아부었다. 그 보답으로 루이즈는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에게 숨기려 애썼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노력했다. 미셸은 "우리 혁명가들은 가족에게 행복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한다"라고 한탄한다.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미셸은 어머니의 장례식 기록 전문을 실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파리를 가로질러 르발루아 페레 묘지까지 행진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루이즈 자신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미셸의 회고록은 어머니의 죽음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그녀는 상실로 인해 황량해진 정신 상태로 이듬해 출판을 위해 원고를 완성했다. 현실은 가변적이며, 회고록 저술가가 해야 하듯 자신의 마음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은 회상이 소환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햇빛이나 그림자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다. 혁명적 대의에 대한 미셸의 헌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도 확고했으나, 만약 그녀가 슬픔의 충격 속에서 회고록을 쓰지 않았더라면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향수와 슬픔을 덜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우리 몫이 아니다.
미셸이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3년에 시작된 그녀의 세 번째 수감 기간 중이었으나, 자료 수집은 그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시작한 오트마른의 역사와 같은 초기 저작물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뉴칼레도니아 항해 중에 기록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일기'에 대해 감질나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
188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미셸은 일종의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이는 그녀의 회고록이 파편화되고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 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 두 부분으로 나뉜 본문 전체에 대략적인 연대기적 개요가 흐르고는 있지만, 이야기와 일화들은 단계적인 서사보다는 단어 연상에 따라 나타난다. 또한 이 회고록은 사실적인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문은 그녀의 꿈에 대한 감정적인 묘사, 행동을 촉구하는 고무적인 부름, 그리고 다수의 시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다른 아이디어로 가볍게 옮겨간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독자에게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문에서 그녀는 "나의 세 번째 체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앞선 두 번의 체포 과정을 서술해야겠다"라고 쓰기도 했다. 회고록은 향수와 고양된 감정, 서사와 예언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다.
1888년 1월,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루이즈 미셀은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
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미셸은 이 무모한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년 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년 1월 9일,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월 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 시 경계 바로 바깥에 걸쳐 있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
"영웅주의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
흔히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버전의 서술이 존재했는데, 이는 드문 경우이지만 큰 틀에서 항상 서로 일치하면서도 각기 새로운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 있었다. 몇몇 시들은 서사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 생략했다. 게다가 미셸의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있다. 물론, 에디스 토마스는 미셸의 "가장 훌륭한 시는 단연코 그녀의 삶"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셸은 분명 이 회고록의 후속편을 쓸 의도가 있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녀의 시와 편지들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루이즈 미셸 자필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이 혁명가이자 시인, 그리고 몽상가였던 매혹적인 여성의 가장 주요한 자전적 기록이다.
1886년 이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그녀는 쉰여섯 살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언급했던 두 번째 회고록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번역본은
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
F. Roy, libraire-éditeur, Paris, 1886
참고는
The Red Virgin, Memoirs of Louise Michel,
edited and translated by Bullitt Lowry and Elizabeth Ellington Gunter. The University of Alabama Press.1981
위 글은 Bullitt Lowry and Elizabeth Ellington Gunter의 Translators' Introduction & Epilogue에서 갈무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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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영화 에세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강정이, 세상의 빛보다 어둠에서 더 선명하게 타오르는 영화들의 초상을 써 내려간다. 영화가 남긴 진동과 침묵을 붙잡는 시인에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몸으로 기록된다. 꿈처럼, 혹은 고백처럼. 그에게 영화란 체험에 가깝다. “영화는 망상의 거울이고, 그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는 스크린 위 죽지 않는 영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투사하는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시작으로, 줄랍스키의 포제션,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비롯해 유럽과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 그리고 한국 영화 발레리나를 거쳐 마침내 조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어둠의 이야기들이다.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을 상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처, 욕망, 구원, 사랑을 시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 독자는 어느 순간, 스크린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비평서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다.


영화는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이다.”

 

여기 수록된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킬러, 조커, 괴물, 혁명가, 정신병자다. 이들은 사회의 정상 테두리 밖에 있거나, 그 테두리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발레리나의 복수극이든 미스틱 리버의 과거의 악순환이든, 저자는 영화가 인간이 가진 "가장 첨예한 본성"을 노출시키며 현실의 역설을 역상으로 되비추는 거름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본질을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으로 정의하는 저자에게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암흑을 넘어서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 진짜 현실을 숨기고 있는 베일이며 영화는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 영화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재고 속에서 현실이 가려버리는 어떤 흑막들을 거꾸로 보여주는 영화를 탐색하지만, 어떤 답을 제시하기보단 우리와 세계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어둠을 직시한다.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 허상과 실재의 틈에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드러낸다. “엇나간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엇나감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포착하여 폭력과 사랑의 공존, 꿈과 현실의 경계, 트라우마의 악순환, 정체성의 분열, 자본주의의 포섭, 죽음과 재생, 개인의 광기와 사회의 병증을 날카롭게 간파한다. 스크린 속 허구를 꿰뚫어 현실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독자에게 저자는 죽든 살든, 현실도 영화도 더없이 낯설어진다면 이 책은 그나마 효능 있는 물건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와 영화가 교차하는 미적 사유

 

여기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는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광과 여운, 그 흔적이 한 편의 시처럼 놓여있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쓴다.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 저자는 영화 자체를 거울로 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줄랍스키의 포제션에선 "괴물을 만난 다음 더 푸르러진 하늘"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영화 속에서 사랑은 소유욕이 되고, 소유는 폭력이 되고, 폭력은 결국 구원으로 위장한다. 인간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안토니오 리가부에를 다룬 영화 히든 어웨이, 사진작가 디앤 아버스를 다룬 영화 , 그리고 이기 팝에 관한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소위 정상성이라 불리는 일방적 질서와 억압을 해체하는 예술가의 힘을 떠올리거나 <허공에의 질주> 속에 완벽한 청년으로 살고 있는 "불사조가 된 길의 감식가" 리버 피닉스처럼, 노화하고 부패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영화 속에서만 영원을 꿈꾸듯 예술작품 속에만 영원할 수 있다는 예술가의 잔잔한 한탄도 섞여 나온다.

 

 

조커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한 두 편의 글은 광기를 다루며 이 책의 핵심을 보여준다. 조커는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다. 관객을 향해선 더욱 급진적으로 선언한다. "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일관된 주제들을 반복하면서 명확해지는 것은 "영화 자체가 조커"라는 저자의 깨달음이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고, 허구로 현실을 뒤바꾸며, 스스로 가면을 쓴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지배한다. 더 나아가 이제 현실 자체가 영화처럼 작동한다. 나이트크롤러의 루이스가 "사실을 편집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듯" 언론과 SNS, 영상 매체는 사건을 창조하고 현실을 편집하고 조작한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불안을 감지한다. 영화와 현실의 전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흥미롭고 요란해졌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펑크록의 대부 이기 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짐 자무시의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새로운 각으로 예리하게 설파한다. 이기 팝의 무대 공연은 극단적인 예다. 반라 상태에서 자해하고, 대놓고 음란한 포즈를 취하고, 관객 속으로 다이빙하는 '크라우드 서핑' , 이 모든 것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현실과 구분되는 공간이었다. 과거에는 무대(영화, 연극, 음악) 위에서 "모든 게 가능하면서도 모든 게 허구"였다. 그 안에서 인간의 억눌린 본능과 광기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무대가 사라지고 현실 자체가 쇼가 되었으며, 구분할 수 없는 혼종 상태에서 "이 세계는 조만간 자폭할 것"이라는 암담한 예감을 전한다. "이구아나처럼 요리조리 몸을 비틀고 춤추면서, 모든 모욕과 환희를 인간의 가장 첨예한 본성이라 소리"치고 싶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절망 속에서도 성찰의 가능성을 붙들려는 저항으로 읽힌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 담긴 의미가 아닐까. 시인은 죽지 않는다. 그는 계속 말하고, 계속 묻고, 계속 저항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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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영화 ― 존재를 위하여 2025, 불란서 책방』


1. 영화의 이름으로, 존재를 사유하다
김성태의 『영화 ― 존재를 위하여』는 제목에서부터 철학적이다. 저자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명제를 다시 묻는다. 그 물음은 영화가 여전히 존재하는가, 혹은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중층의 질문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극장에서 보던 영화는 점점 사라지고, 스크린은 스마트폰의 창으로 흩어졌다. 영화가 사라지는 시대에 ‘존재를 위하여’라는 말은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그러나 김성태는 바로 그 ‘사라짐’의 지점에서 영화의 존재론을 다시 열어젖힌다.
그에게 영화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즉, 영화는 사유의 도구이자 존재의 현현이다. 이 책은 영화를 산업으로서도, 예술로서도, 텍스트로서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규정을 유예한 채, 영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는 들뢰즈의 이미지철학,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그리고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배경으로 하며, 영화의 시간을 ‘존재의 시간’으로 읽는 시도이다.
2. 영화의 철학, 혹은 존재의 이미지
김성태가 말하는 ‘존재로서의 영화’는 미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그에게 영화는 감각과 언어 사이, 현실과 재현 사이에 놓인 틈이다. 그 틈에서 세계는 새롭게 드러난다. 즉, 영화는 단순히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비추는 장(場)을 형성한다.
그는 영화의 본질을 ‘이미지’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란 재현된 시각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운동과 지속이 시간 속에서 포착된 존재의 흔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는 기록이 아니라 발생이며, 서사가 아니라 현현이다.
이러한 접근은 들뢰즈의 『시네마 1·2』와 깊이 맞닿아 있다. 들뢰즈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사유 능력을 논했다면, 김성태는 그것을 한층 더 확장해 ‘존재-이미지’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존재를 드러내는 매체이자, 존재가 자신을 감각적으로 발화하는 장치다.
그에게 영화의 목적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느껴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영화가 예술이자 철학이 되는 방식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오즈 야스지로의 정지된 컷, 베르톨루치의 붉은 사막, 김기덕의 무언의 인물들 속에서 우리는 ‘사람이 아닌 세계’의 시선을 경험한다. 그것이 곧 존재의 이미지다.
3. 실증주의 영화학에 대한 비판
김성태는 기존 영화이론의 실증주의적 태도를 비판한다. 통계, 구조분석, 장르 분류, 산업 연구 등은 영화의 외피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연구가 언제부턴가 ‘영화를 통해 사회를 설명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영화의 존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비판은 단순한 형식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존재는 인간의 인식 이전에 있는가, 이후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영화의 존재론을 넘어, 이미지의 존재론으로 확장된다. 즉, 영화란 인간의 눈을 거치지 않고도 존재하는 세계의 움직임이며, 인간의 감각이 그 세계를 포착하는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세계를 사유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더 이상 사회적 거울이 아니라 존재의 거울이 된다.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가치의 외피를 벗긴 영화는 그 자체로 철학이 된다.
4. 영화의 소멸 이후에도 영화는 존재한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존재를 논하면서도, 그 존재가 더 이상 극장 스크린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인식에 있다. 디지털과 스트리밍의 시대, 영화는 사라지는 대신 흩어지고, 분화되고, 변형된 존재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김성태는 이것을 ‘존재의 다중적 현현’이라 부른다.
이 대목은 플랫폼 시대의 영상문화와 깊게 연결된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이미지 역시 영화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김성태의 관점에서 보면, OTT가 영화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영화적 존재 방식이 다른 형식으로 이행한 것이다. 즉, 영화의 존재는 매체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다. 영상이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영화’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블루스>나 <더 글로리>, <스크린 속 AI 캐릭터> 역시 영화의 존재론적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사라졌는가? 김성태의 대답은 “아니오”다. 영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중이다. 존재는 형식보다 앞서고, 영화는 형식을 초월해 존재한다.
5. 사유의 영화와 윤리의 문제
이 책이 단지 철학적 선언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김성태가 영화의 존재를 윤리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곧 타자를 사유하는 일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의 존재론은 곧 타자 윤리학으로 이어진다. 그는 영화가 우리를 세계의 고통과 타자의 얼굴 앞에 세우는 장치라고 본다. 카메라의 시선은 단지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마주보는 윤리적 행위’다.
이 윤리적 관점은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현의 폭력’이 논의되는 흐름과 맞닿는다. 타자의 고통을 소비하는 영상, 트라우마를 재현하면서 오히려 상처를 반복시키는 콘텐츠는 김성태의 영화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는 영화가 존재를 드러내되, 존재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영화의 윤리다.
6. 기억과 지속의 철학으로서 영화
김성태의 영화관은 시간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을 차용하여, 영화의 시간을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여가는 시간’으로 본다. 영화는 한 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때 영화는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매체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보존하고 생성하는 기억의 장치가 된다. 따라서 김성태에게 영화는 기록된 과거가 아니라 지속 중인 현재이다. 영화는 사라진 순간을 다시 불러오되,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존재를 새롭게 창조한다.
이 관점은 ‘집단기억과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당신의 연구 주제와도 직접 연결된다. 김성태의 영화론을 드라마로 확장하면, 드라마의 장면 또한 존재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려낸 1990년대의 시간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집단이 스스로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시간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적 시간의 사회적 버전이다.
7.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
김성태는 영화의 언어를 ‘비언어적 언어’라 부른다. 즉, 영화는 말이 아니라 보이는 것의 언어로 존재한다. 그는 “언어가 사유를 제한할 때, 이미지는 사유를 확장한다”고 말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시간, 관계가 영화 속 이미지로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를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영화이론이 언어 중심적 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여주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철학을 이미지로 번역하는 예술이며, 존재가 언어 이전에 발화하는 순간이다.
8. ‘존재를 위한 영화’와 ‘영화를 위한 존재’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김성태는 영화와 존재의 상호성을 말한다. “영화는 존재를 위하여 있지만, 동시에 존재는 영화를 위하여 있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대칭이 아니다. 그는 영화를 인간 존재의 확장으로 본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본다면, 세계 또한 우리를 통해 영화를 본다.
그는 이를 ‘공명’이라 부른다. 영화와 인간, 이미지와 존재가 서로의 울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공명의 감각은 결국 예술의 근원적 역할을 다시 일깨운다. 영화는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반추하는 미학적 행위다.
따라서 김성태의 영화론은 기술 중심의 미디어 담론에 대한 대안적 제안으로 읽힌다. 디지털 이미지와 AI 영상이 넘치는 시대일수록, 존재의 문제를 묻는 영화철학은 더 절실해진다.
9. 비평적 논평 ― 철학과 현실 사이
그러나 이 책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사유는 지나치게 고도로 추상화되어 있어, 구체적 영화 사례나 현대 영상 환경에 대한 분석은 부족하다. 예를 들어, AI 이미지 생성이나 플랫폼 알고리즘이 ‘존재의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또한, ‘존재론적 사유’라는 이름 아래 영화의 사회적 조건, 노동, 젠더, 재현의 문제를 다소 외면하는 측면도 있다.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떤 존재가, 누구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 존재를 위하여』는 하나의 출발점이다. 철학적 사유로서 영화론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그 사유를 현대 영상 현실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작업은 독자의 몫이다. 당신이 그 연장선에서 OTT 드라마와 기억, 알고리즘과 감정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면, 바로 이 책이 그 이론적 뼈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0. 결론 ― 존재를 위하여, 다시 영화를 위하여
『영화 ― 존재를 위하여』는 한국 영화이론서 중 드물게 존재론적 깊이를 견지한 저작이다. 산업·정책·장르 연구에 치우친 한국 영화 담론 속에서, 김성태는 영화가 다시 철학의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영화는 인간이 만든 이미지의 집합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보여주는 현상학적 장면이다. 그 장면 속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나고, 시간을 느끼며, 존재의 근원을 묻는다.
따라서 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존재를 사유하는 이미지로서 계속 남는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증명한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영화를 만들고, 알고리즘이 장르를 결정하는 시대에, 김성태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는 존재하는가?” 그 물음은 곧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영화를 보고 있는가?”

출처 : https://www.facebook.com/share/p/1c1d3798F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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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가고자 하는 곳에 닿지 못하면서도 지도를 유심히 살피는 것과 같다. 또는 분명 한 번은 와 본 곳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입구를 지나치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기도 하다. 좁은 화폭에서도 무수한 복선과 암시, 속임수가 지뢰처럼 화면 곳곳에 묻혀있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장식된 거실에서 손을 맞잡은 두 남녀의 모습이 사랑의 확인인지 파국의 전조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그림엔 언뜻 익숙한 이야기가 놓여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길을 잃고 망연히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이 원색과 흑백의 모호한 서사, 이미지와 표제의 충돌이 우리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그대로 머무는 것 또한 쉽지 않은데 그 모호함은 우리가 수없이 보고 겪어온 바로 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백한 감정과 관계가 흔들리는 세계에 대한 재현은 사실적인 이미지 속에 배치된 어두운 그림자의 기묘한 조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호함 속에 짧은 삶을 살아낸 청년의 이름은 자크 베르디에. 펠릭스 발로통이 쓴 소설 [유해한 남자]의 인물은 자신의 선의나 사소한 행위가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식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자신을 폐쇄한 청년이다. 자신의 단순한 행위들은 언제부터인가 타인에게는 모호한 행위, 치명적인 순간엔 유해한 행위가 되곤 했다. 그에게 세상은 명료한 그 무엇이 아니다. 무모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늘 자신을 번복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다시 시작한다. 되풀이되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부정과 추앙, 그 사이의 우연한 일탈은 마침내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는 순간 그 사랑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청년은 이해 불가의 세계에 던져진 태고의 저주가 된다.


그의 삶은 따뜻함이라곤 없던 고통의 연속이자 타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어내버린 외롭고 메마른 삶이었다.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타인에게 이해받지도 못한 채 사랑의 갈망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의 삶에서 펠릭스 발로통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참고로 [유해한 남자]를 자전적 소설이라 썼지만, 자전적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겠다. 분명 [유해한 남자]는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의 인물 묘사는 분명 젊은 발로통의 자화상 그대로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은 그의 초기 회화의 장면 속 이야기에 닿아 있다. 그리고 자크 베르디에가 젊은 미술평론가로서 내리는 홀바인과 앵그르에 대한 평가는 발로통의 그것과 정확히 같다. 그런 이유를 들어 자전적 소설이라 소개해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밝혀둔다.


“펠릭스 발로통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이념론자"가 아니며, 일반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영심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론들 속에서 영혼을 고갈시키지도 않는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독단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이 정확한 남자는 최선의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기대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관적이길 원치 않는다. 그는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추구한다.”
-옥타브 미르보, 1910년 1월 10일에서 22일까지 파리 드루에 갤러리에서 열린 발로통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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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유령. 저자는 자신을 그렇게 부릅니다. 때론 영화보기가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일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영화란 마치 뱀파이어와 같습니다. 뱀파이어의 눈은 곧 영화의 눈이죠. 매혹하고 최면을 거는 뱀파이어에 홀린 남자, 상훈이 형이 오랜 세월 영화와 함께 살아온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에 영화가 무엇인지 이토록 절박하게 이야기하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비로소 영화는 상훈이 형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영화의 존재를 증명하는 작업. 어떤 비평 이상으로 영화의 심연, 그 실재를 말하는 상훈이 형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1. 이 책의 제목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이 책의 제목은 잘 아는 동생인 김시선 영화 유튜버로부터 시작됐어요. 시선이가 몇 년 전에 본인의 책인 오늘의 시선을 출간했을 때 영화는 사람입니다’ 챕터에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어요. 저에 관한 글을 써줘서 정말 고마웠죠. 그리고 제가 2023년부터 필름포럼에서 영화 토크 행사를 하고 있는데요. 토크 행사의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시선이에게 허락을 받고 다시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를 사용하게 됐어요. 그게 다시 책 제목으로까지 온 거에요. 처음에 시선이의 책에 제 글이 실릴 때 걱정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글 때문에 제 책 제목까지 만들어졌으니 너무 고마운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이번 책의 추천사를 시선이에게 받게 됐어요. 시선이가 이런 제목을 지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제목은 생각할수록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것 같아요. 우선 극장에는 항상 제가 있다는 건 97년부터 지금까지의 제 삶을 요약하는 말이에요. 그 결과로 대략 30년만에 책이 한 권 나올 수 있었구요. 그런데 한편으로 이 제목은 제 책에도 썼지만 사람들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에 저는 할 수 없이 극장에라도 존재하려고 했다는 저의 비극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기도 해요. 영화와 관객의 숙명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이렇게 이 제목은 저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2. 서문에서 이 책이 ‘영화로부터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한 연애편지’라고 표현했는데요, 지금은 영화가 답장을 해줬다고 느끼시나요?

 

이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떠오른 답변은 아직은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는 거에요. 그런데 30년간의 연애 편지로 책이 한 권 나왔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나에 대한 영화의 답변인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네요. 영화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동경해온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처럼 평론가나 감독이 되지 못하는 이상 스스로는 계속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을 읽은 제 지인이 그가 볼 때 영화에 대한 저의 짝사랑이 짝사랑이 아니라 찐사랑인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어쩌면 제 스스로 너무 주관화해서 그동안 영화와 저의 관계를 바라봐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예전에 지인에게 내가 영화를 사랑하느냐보다 영화가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던 걸 다시 떠올려본다면 아직 영화가 저에게 답장을 줬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와 나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더 탐구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거죠. 


3. 〈벌새〉를 본 날을 '기적'이라고 표현하셨어요. 그 기적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본 날의 기적이 이번에 책 출간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하구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차원에서 볼 때 인생영화들을 갖고 있는데요. 저는 제 트라우마를 치유해서 제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버린 <벌새> 같은 작품을 인생영화로 갖고 있으니 너무 행복한 관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벌새>로부터의 치유 사례를 들면서 사람들과 심도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제 스스로도 너무 놀라운 경험이었기 때문이에요. <벌새>를 통한 제 스스로의 변화의 핵심은 이 영화와의 만남을 통해 제 스스로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렇게 되자 제 삶에는 어떤 큰 에너지가 생겼고 그 에너지에 힘입어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이전과 다르게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어서 <벌새>의 감독, 배우, 스태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4. 이 책에서 본인을 ‘극장의 유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략 30년간 영화에 미쳐 살아왔지만 그에 비해 사회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존재감이 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유령에 빗대어 설명하고 싶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극장을 떠날 수는 없지만 오랜 기간 극장에서 시간을 보낸 것을 떠올려 볼 때 극장에 왔던 수많은 관객들과 제가 과연 제대로 소통을 해왔느냐에 대해 의문이 들어요. 삶을 버티는 방식으로 극장에 남아있었던 것이지 극장에 오는 단 한 명의 사람과의 관계를 따져보더라도 저라는 존재가 상대에게 제대로 인식된 적은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어요. 상대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고 제 스스로가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유령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책에서 밝힌 심리적인 문제와도 연관은 있겠구요.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밝힘으로써 한편으로는 이제 유령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을 계기로 타인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어요.

 

5. 출간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 반응이나 피드백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인 동생의 말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 동생이 자기가 읽은 어떤 영화 에세이, 비평보다 개인적이고 솔직해서 좋았고 이 책은 한국의 모든 영화인들 중에 오로지 저밖에 쓸 수 없는 책이라고 했어요. 제 스스로 아직 영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만이 쓸 수 있는 책이었다는 표현이 너무 감동적이더라구요. 저만의 고유성을 인정해준 거잖아요. 적어도 제 삶이 오롯이 담긴 책이 나왔다는 걸 상대가 인정해준 것 같아서 정말 뿌듯했어요.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런 점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6. 책을 통해 어떤 독자와 마주하고 싶으셨나요? 어떤 이에게 이 책이 다가가기를 바라시나요?

 

저와 같이 어떤 한 대상을 오랫동안 좋아해온 사람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 책을 통해 그런 삶을 사는 게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 같은 심리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삶을 버텨온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이었으면 하구요. 영화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저처럼 영화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영화와 현실의 관계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어떤 영화를 보고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 경험을 나누거나 그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제 책이 각자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7. 앞으로 영화와 관련해서 어떤 걸 하고 싶나요?

 

일단 나이도 있고 영화쪽에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이 저의 생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솔직히 있어요. 당연히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생계형 단역 활동도 할 예정이구요. 제가 워낙 사람들에게 영화에 대한 말을 하는 걸 좋아하다가 보니 필름포럼에서 영화 토크 행사도 계속 하고 싶고 강연 시장에도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어요. 누구보다 쉽게 영화에 대해 잘 소개해주고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다음 책을 쓰게 된다면 당연히 좋겠죠.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려구요. 유튜브 활동을 하거나 편집을 배워서 생계와 연결해 볼 생각도 갖고 있어요. 크리스천으로서 생전에 영화적으로 훌륭한 기독교 장편 영화를 꼭 한 편 만들고 싶다는 소망도 이어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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