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영화 에세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강정이, 세상의 빛보다 어둠에서 더 선명하게 타오르는 영화들의 초상을 써 내려간다. 영화가 남긴 진동과 침묵을 붙잡는 시인에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몸으로 기록된다. 꿈처럼, 혹은 고백처럼. 그에게 영화란 체험에 가깝다. “영화는 망상의 거울이고, 그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는 스크린 위 죽지 않는 영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투사하는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시작으로, 줄랍스키의 포제션,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비롯해 유럽과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 그리고 한국 영화 발레리나를 거쳐 마침내 조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어둠의 이야기들이다.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을 상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처, 욕망, 구원, 사랑을 시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 독자는 어느 순간, 스크린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비평서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다.


영화는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이다.”

 

여기 수록된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킬러, 조커, 괴물, 혁명가, 정신병자다. 이들은 사회의 정상 테두리 밖에 있거나, 그 테두리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발레리나의 복수극이든 미스틱 리버의 과거의 악순환이든, 저자는 영화가 인간이 가진 "가장 첨예한 본성"을 노출시키며 현실의 역설을 역상으로 되비추는 거름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본질을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으로 정의하는 저자에게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암흑을 넘어서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 진짜 현실을 숨기고 있는 베일이며 영화는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 영화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재고 속에서 현실이 가려버리는 어떤 흑막들을 거꾸로 보여주는 영화를 탐색하지만, 어떤 답을 제시하기보단 우리와 세계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어둠을 직시한다.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 허상과 실재의 틈에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드러낸다. “엇나간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엇나감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포착하여 폭력과 사랑의 공존, 꿈과 현실의 경계, 트라우마의 악순환, 정체성의 분열, 자본주의의 포섭, 죽음과 재생, 개인의 광기와 사회의 병증을 날카롭게 간파한다. 스크린 속 허구를 꿰뚫어 현실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독자에게 저자는 죽든 살든, 현실도 영화도 더없이 낯설어진다면 이 책은 그나마 효능 있는 물건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와 영화가 교차하는 미적 사유

 

여기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는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광과 여운, 그 흔적이 한 편의 시처럼 놓여있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쓴다.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 저자는 영화 자체를 거울로 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줄랍스키의 포제션에선 "괴물을 만난 다음 더 푸르러진 하늘"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영화 속에서 사랑은 소유욕이 되고, 소유는 폭력이 되고, 폭력은 결국 구원으로 위장한다. 인간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안토니오 리가부에를 다룬 영화 히든 어웨이, 사진작가 디앤 아버스를 다룬 영화 , 그리고 이기 팝에 관한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소위 정상성이라 불리는 일방적 질서와 억압을 해체하는 예술가의 힘을 떠올리거나 <허공에의 질주> 속에 완벽한 청년으로 살고 있는 "불사조가 된 길의 감식가" 리버 피닉스처럼, 노화하고 부패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영화 속에서만 영원을 꿈꾸듯 예술작품 속에만 영원할 수 있다는 예술가의 잔잔한 한탄도 섞여 나온다.

 

 

조커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한 두 편의 글은 광기를 다루며 이 책의 핵심을 보여준다. 조커는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다. 관객을 향해선 더욱 급진적으로 선언한다. "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일관된 주제들을 반복하면서 명확해지는 것은 "영화 자체가 조커"라는 저자의 깨달음이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고, 허구로 현실을 뒤바꾸며, 스스로 가면을 쓴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지배한다. 더 나아가 이제 현실 자체가 영화처럼 작동한다. 나이트크롤러의 루이스가 "사실을 편집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듯" 언론과 SNS, 영상 매체는 사건을 창조하고 현실을 편집하고 조작한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불안을 감지한다. 영화와 현실의 전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흥미롭고 요란해졌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펑크록의 대부 이기 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짐 자무시의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새로운 각으로 예리하게 설파한다. 이기 팝의 무대 공연은 극단적인 예다. 반라 상태에서 자해하고, 대놓고 음란한 포즈를 취하고, 관객 속으로 다이빙하는 '크라우드 서핑' , 이 모든 것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현실과 구분되는 공간이었다. 과거에는 무대(영화, 연극, 음악) 위에서 "모든 게 가능하면서도 모든 게 허구"였다. 그 안에서 인간의 억눌린 본능과 광기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무대가 사라지고 현실 자체가 쇼가 되었으며, 구분할 수 없는 혼종 상태에서 "이 세계는 조만간 자폭할 것"이라는 암담한 예감을 전한다. "이구아나처럼 요리조리 몸을 비틀고 춤추면서, 모든 모욕과 환희를 인간의 가장 첨예한 본성이라 소리"치고 싶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절망 속에서도 성찰의 가능성을 붙들려는 저항으로 읽힌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 담긴 의미가 아닐까. 시인은 죽지 않는다. 그는 계속 말하고, 계속 묻고, 계속 저항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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