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해롤드 클러먼이라는 제자들을 배출하고 이제는 헐리우드의 일급 감독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 1889~1937)는 1937년 조앤 크로퍼드 주연의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은 잊혔지만 스승이 가져온 것은 살아남았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최초로 미국 땅에 전달한 이 책, 『연기6강(Acting: The First Six Lessons)』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33년 뉴욕의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됐다. 교재가 아니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1920년대 내내 Theatre Arts Monthly에 기고한 연기론 칼럼들을 엮은 것이었다. 형식은 대화였다. 교사인 저자와 열정적이지만 재능이 불분명한 젊은 여배우 사이의 여섯 번의 대화. 그 대화 안에 농축된 수업이 미국 연기 교육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군인이었다가 배우가 됐다가 연기 스승이 된 사람
본명은 볼레스와프 리샤르트 스르제드니츠키(Boleslaw Ryszard Srzednicki). 1889년 2월 4일,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폴란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났다. 트베르 기병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장교의 길을 걷던 그는 연기에 이끌려 방향을 틀었다. 190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 MAT)의 스쿨에 입학해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와 그의 조교 레오폴트 술레르지츠키(Leopold Sulerzhitsky)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09년, 스타니슬랍스키의 유명한 투르게네프 연출작 '시골에서의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에서 주역 벨랴예프를 맡았다. 학생으로서 MAT 무대에서 주역을 받은 것은 드문 영예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볼레스라브스키는 러시아 제국군 기병 중위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바르샤바, 프라하, 파리, 베를린을 거쳤다. 폴란드에서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의 승리를 다룬 반다큐멘터리 영화 '비스와의 기적(Cud nad Wisla)'을 만들었다. 1922년에는 덴마크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의 독일 영화 'Die Gezeichneten'에 배우로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뉴욕에 도착했다.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 — 메소드의 발원지
1923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이 순회공연에 배우 겸 스타니슬랍스키의 조교로 합류했다. 공연 이후, 프린세스 시어터에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소개하는 강연 시리즈를 열었다. 이 강연이 미국 연극 후원자 미리엄과 허버트 스톡턴(Miriam and Herbert Stockton)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이들의 재정 지원으로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American Laboratory Theatre, 이하 '랩')가 설립됐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유학 동료 마리아 우스펜스카야(Maria Ouspenskaya)와 함께 랩을 이끌었다. 랩의 학생 명단은 후일 미국 연극사의 목차가 됐다.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 해롤드 클러먼(Harold Clurman). 이 세 사람은 모두 랩의 동문으로, 1931년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를 창설했다. 그룹 시어터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미국 연기에 최초로 체계적으로 적용한 앙상블 단체였다. 스트라스버그는 훗날 이 시스템을 '메서드(The Method)'로 발전시켜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 세대를 훈련했다.
랩은 1930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발성 영화의 등장으로 할리우드에서 극작가와 연출가 수요가 급증했고, 볼레슬라프스키는 영화 연출 계약을 받아 뉴욕을 떠났다. 1930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시작으로 MGM, 20세기 폭스, RKO 등 주요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1932년 'Rasputin and the Empress'는 배리모어 3남매(에텔, 존, 라이어널)가 함께 출연한 유일한 영화로, 당시 화제를 모았다. 이후 'The Painted Veil'(1934, 그레타 가르보), 'Les Miserables'(1935, 프레드릭 마치와 찰스 로튼), 'Theodora Goes Wild'(1936, 아이린 던)를 연출했다.
여섯 번의 대화, 하나의 철학
『연기6강』은 교사인 저자(I)와 젊은 여배우 '크리처(The Creature)' 사이의 대화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집중(Concentration), 2. 감정의 기억(Memory of Emotion), 3. 극적 행동(Dramatic Action), 4. 성격화(Characterization), 5. 관찰(Observation), 6. 리듬(Rhythm).
여섯 항목은 독립된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파생된 여섯 갈래다. 그 신념을 볼레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요약했다. "연기는 예술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 영혼의 삶이다(Acting is the life of the human soul receiving its birth through art)." 기술보다 내면이 먼저다. 테크닉 이전에 진실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여섯 수업 전체를 관통한다.
첫 번째 수업 '집중'에서 볼레스라브스키는 집중을 "영혼에 대한 정신적 집중"으로 규정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야 감지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 두 번째 수업 '감정의 기억'은 이 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챕터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메서드를 발전시키는 데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개념이 여기 있다. 배우는 과거의 감정 경험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정확하게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무대 위에서 없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 경험했던 감정의 기억을 재활성화한다는 원리다.
세 번째 수업 '극적 행동'은 내면 충동이 어떻게 무대 위의 행동으로 전환되는지를 다루고, 네 번째 '성격화'는 캐릭터를 실제 삶의 역사를 가진 인물로 구축하는 방법을 다룬다. 다섯 번째 '관찰'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삶을 연구하는 방식 자체를 요구한다. 배우는 언제나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마지막 '리듬'은 한 공연 안의 감정적 흐름과 긴장의 파동을 다룬다.
대화 형식이 가르치는 것
이 책의 형식 자체가 내용과 맞닿아 있다. 교사는 크리처에게 직접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연습을 지시하고, 크리처가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다. 배우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각으로 습득한다.
Goodreads의 독자 평들이 이 지점에서 일관되게 갈린다. 대화 형식이 "이론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평가하는 쪽이 있고, "교사가 크리처에게 지나치게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답한다"고 불편함을 표하는 쪽이 있다. 이 분열 자체가 볼레스라브스키가 의도한 방식이다. 연기를 가르치는 책이 독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Powell's Books의 소개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집중, 감정의 기억, 극적 행동, 성격화, 관찰, 리듬에 관한 여섯 편의 미니어처 드라마들. 이것들은 모든 배우 앞에 놓인 도전을 증류해낸다." 수업이 아니라 드라마라고 부른 것은 정확하다. 읽는 동안 독자도 크리처와 함께 교사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은 1933년 이후 90년 넘게 절판된 적이 없다.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출간된 뒤, Taylor & Francis 등 여러 출판사를 통해 계속 찍혔다. 현재는 Theatre Arts Book 시리즈 판본이 가장 널리 유통된다. 2013년에는 초판 원본 책의 형태, 색상, 활자, 심지어 종이 질감까지 초판 발행 당시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복제본도 나왔다. 그리고 2024년 드디어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Goodreads 리뷰의 공통 평가는 "연기에 관심이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집중, 감정 기억, 관찰이라는 주제가 연기 기술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태도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몇 시간 만에 읽혔는데,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독자 반응이 반복된다.
한편 학술적 평가는 좀 더 복잡하다. 스타니슬랍스키 연구자들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초기 개념, 특히 감정 기억(정서 기억, affective memory)에 특별히 큰 비중을 뒀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타니슬랍스키 자신은 이후 신체 행동 방법(Method of Physical Actions)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초기의 감정 기억 중심 접근을 일부 수정했다. 스트라스버그는 볼레슬라프스키의 감정 기억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스타니슬랍스키의 후기 수정을 사실상 무시한 채 '메소드'를 구축했다. 이 계보상의 분기점에서 볼레슬라프스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셈이다.
마흔여덟 살의 죽음, 그리고 남은 것
1937년 1월 17일, 조앤 크로퍼드와 윌리엄 파월 주연의 'The Last of Mrs. Cheyney'를 촬영하던 중 볼레스라브스키는 심장마비로 숨졌다. 마흔일곱 살이었다. 영화는 조지 피츠모리스와 도로시 에이즈너가 마무리했다. 그의 아들 얀은 당시 생후 18개월이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7021번지에 별이 새겨져 있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생전에 세 권의 책을 남겼다. 1932년 자전적 1차대전 회고록 'Way of the Lancer'와 'Lances Down'(모두 헬렌 우드워드와 공저), 그리고 1933년 『연기6강』. 소설가 휴 월폴(Hugh Walpole)은 1937년 소설 'John Cornelius'를 볼레슬라프스키를 추모하며 헌정했다.
그가 없었다면 스트라스버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 질문에 스트라스버그 본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기서(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에서) 우스펜스카야와 볼레스라브스키에게 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원칙들을 배웠다." 메서드가 말론 브란도를 만들었고, 그것이 현대 영화 연기의 기준이 됐다. 그 연쇄의 최초 연결고리가 1933년에 출간된 이 얇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연기6강』은 연기를 배우는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크리처'에게 가르치는 것들 — 집중, 관찰, 감정의 저장과 재생, 리듬 — 은 어떤 창조적 작업에도 적용 가능한 원칙들이다.
분량은 짧다. 빠르면 하루에 읽힌다. 그러나 각 챕터를 읽은 뒤 볼레슬라프스키가 크리처에게 제시한 연습들을 실제로 시도해보지 않으면 텍스트의 절반만 접한 셈이다.
볼레스라브스키의 이 책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진입로로 읽어도 좋다.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논쟁적이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