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연과 일치하기를 원한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그가 남긴 말 중 하나다.브라크에게 회화는 자연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과 화음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 차이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한다.

화가의 단상집이라는 장르는 낯설었다. 파울 클레(Paul Klee),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이론을 글로 남겼다. 브라크는 이론을 쓴 것이 아니라 단상을 남겼다. 다른 의도다.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진지하게, 보이는 진실 하나하나를 고정하려는 의지였다. 그 35년의 직무가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이다.


1882년 5월 13일, 브라크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Argenteuil)에서 태어났다.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조부와 부친이 건물 도장업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한 집안이었다. 브라크는 르아브르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오통 프리에즈(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미술을 배웠다. 이 시절의 훈련, 즉 장인의 눈으로 타일을 다루고 표면을 가공하는 습력이 후일 그의 회화에 직접 반영됐다는 평이 프랑스 미술계에서 공통적 견해다.


1900년 파리로 이주한 브라크는 아카데미 앙베르(Academie Humbert)에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를 만났다. 1906년 에스타크(L'Estaque) 해안 풍경화로 야수파(Fauve) 스타일에 진입했다가, 1907년이 그의 회화 인생의 분기점이 된다. 엑스(Aix)에서 폴 세잔(Paul Cezanne)의 회고전을 보고,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소개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아틀리에에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목격했다. 이 조우가 브라크의 경로를 완전히 바꿨다.



큐비즘의 탄생 — 피카소와의 시절

1907년 11월,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시도한 풍경화 연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화에 반응했다. 1908년 가을, 드니엘-앙리 카날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갤러리에서 브라크의 첫 전시가 열렸다.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브라크의 건물 피사체들을 "작은 큐브들(petits cubes)의 집합"이라 평했다. 큐비즘(Cubisme)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스스로 자신들의 협업을 "로프로 연결된 등반자들(La Cordee)"에 비유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두 사람은 여름을 세레(Ceret)와 소르그(Sorgues)에서 함께 작업하며 큐비즘 분석기를 전개했다. 1912년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즉 신문지나 인쇄 종이를 화면에 직접 붙이는 기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이것이 현대 콜라주 기법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훗날 편지에서 브라크를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한 여성(la femme qui m'a le plus aime)"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를 전하는 동시에, 큐비즘 혁명에서 브라크의 기여가 피카소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에 대한 미묘한 인정이기도 했다.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쟁 — 두개골 천공 수술과 35년의 준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브라크는 보병 제224연대로 징집됐다. 피카소는 아비뇽 역에서 군복 차림의 브라크를 전송했다. 두 사람이 수년간 이어온 대화는 그 순간 끊겼다.

1915년 5월 11일, 브라크는 뇌빌-생-바스트(Neuville-Saint-Vaast) 전투에서 두부에 중상을 입었다. 전사한 것으로 여겨져 방치됐다가 다음 날 들것병들에게 발견됐다. 두개골 천공 수술(trepanation)을 받고 이틀간의 혼수상태 끝에 의식을 되찾았다. 회복에 1917년까지 걸렸다.


바로 이 1917년,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와 함께 평상의 단상들을 정리해 문학 잡지 『노르-쉬드(Nord-Sud)』 제10호에 발표했다. 제목은 「회화에 대한 사상과 성찰(Pensees et reflexions sur la peinture)」. 이 글이 이후 35년간 작성된 단상들의 출발점이 된다. 전쟁이 붓을 빼앗았지만, 성찰은 계속됐다.


전후 브라크의 회화는 큰 변화를 거쳤다. 큐비즘의 납작한 기하학에서 점차 곡선으로 돌아오고, 단일한 색채로 화면을 통일하는 대상을 고집했다. 인물, 정물, 비둘기. 같은 대상을 수년간 반복해 그렸다. 브라크에게 싫증은 없었다. 다음 단계는 언제나 안에서 발견해야 했다.


그의 단상들도 같은 방식으로 성장했다. 1917년부터 단상을 쓰기 시작한 브라크는 1952년까지 35년 동안 이 작업을 이어갔다. 하루에 하나를 쓰기도 하고, 몇 달에 하나를 쓰기도 했다.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단상들은 노트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임리에서 나온 것을 다듬고 완성하는 방식으로 겹쳐졌다.

주제도 회화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에서 숨겨진 것으로, 지식에서 감성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브라크의 단상은 회화의 주제와 거의 하나로 이어진다. 색, 구도, 관점, 언어, 자연, 시간, 남기는 것과 사라지는 것. 판단하지 않는다. 단정짓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개의 신중한 문장으로 접근한다.


『낮과 밤』 

브라크는 정식 논문이나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짤막한 노트에 문장을 적었다. 대부분은 한 단락 안에 담겼다. 그 중 일부를 선별해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내놓았다. 브라크 스스로 고른 제목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에 주제 정의가 담겨 있다. 내려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보이는 것과 숨은 것, 시작과 끝, 있는 것과 없는 것.​


쪽 수는 초판 기준 56쪽이다. 형태는 인-12판(In-12)으로 손안에 들어오는 소형 판본이다. 작가의 드로잉 2점이 수록되어 있다. 1952년 8월 4일 인쇄를 마쳐 발행됐다. 라피마-나바르(Lafuma-Navarre) 순지 100부 한정판(tirage de tete)과 일반지 판 두 종으로 발행됐다. 현재도 갈리마르 파리 서점 공식 판매 목록에 올라 있다.


브라크의 아포리즘은 두 가지 구조를 가진다. 

첫째, 개념들을 반의의 쌍으로 충돌시킨다. 

"언제나 두 가지 생각, 하나를 무너뜨릴 또 하나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Il faut toujours avoir deux idees, l'une pour detruire l'autre.)" 

둘째, 직접적인 관찰로 곧장 들어간다.

 "감정은 덧붙여지거나 모방할 수 없다. 감정은 배아고 작품은 부화(l'eclosion)다."


프랑스 아포리즘 전문 매체 Aphorismundi의 평가다. "브라크는 17세기 모랄리스트들의 진정한 계승자로, 리듬감 있고 종종 이분법적인 아포리즘 안에서 인간과 세계 표상에 연관된 복잡한 개념들을 정의하려 한다." 이 평은 브라크의 글쓰기가 단순한 화가의 메모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짚는다.


​루브르로 — 생애 말년의 영예

​1937년 카네기 국제 미술전 카네기상(Prix Carnegie),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5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 관장 조르주 살레(Georges Salles)의 의뢰로 루브르 앙리 2세 홀(salle Henri-II) 천장에 새(Oiseaux) 테마의 장식화 작업을 맡았다. 1953년 제막식이 열렸다. 피카소는 자신이 선택되지 않은 것에 불쾌해하며 브라크가 자신의 비둘기(colombes)를 베꼈다고 비난했다. 브라크는 피카소에게 답하지 않았다.


1961년, 루브르에서 회고전 「브라크의 아틀리에(L'Atelier de Braque)」가 열렸다. 살아 있는 화가로서 루브르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예술가였다. 사망 2년 전의 일이었다. 1963년 8월 31일, 브라크는 파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그가 살던 파리 거리명은 훗날 조르주-브라크(rue Georges-Braque)가로 바뀌었다.


1963년 9월 3일, 루브르 콜로나드 앞에서 국장이 열렸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문화부 장관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어떤 국가도 자국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에게 이러한 성격의 헌사를 바친 적이 없다. 프랑스의 명예에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이 있다. 이제 브라크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에게 말해야 한다. 한 국가의 명예는 무엇보다 그 국가가 세계에 무엇을 주는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로의 추도사 전문은 현재 malraux.org 공식 아카이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


​화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

​『낮과 밤』은 순서대로 읽히지 않는다.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된다. 다음 페이지의 단상이 앞의 페이지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브라크 스스로도 선형적으로 이어지도록 쓴 텍스트가 아니다. 단상들은 여러 주제를 오가면서 반복하고,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돌고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브라크에게는 천천히 읽는 독자가 더 잘 맞는다. 하나의 단락을 읽고 잠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5단락씩 읽어도 되고, 집어들고 필요할 때 열어봐도 된다. 추상적인 것도 많지만, 직접적인 것이 더 많다. 브라크는 주제를 열어 놓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을 독자에게 넘기는 편이다.


단상은 스케치보다 짧다. 그 압축이 브라크만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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