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네이크 스톤 -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물
제이슨 굿윈 지음, 박종윤 옮김 / 비채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시리즈의 첫권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두번째 권인 『스네이크 스톤』은 어느정도 재미는 보장하는 소설이다. 사실 제국의 위대한 보물이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니 하는 것들에 독자들은 더이상 흥분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궁금증과 그저 이야기 자체가 좋아서 그 어떤 허무맹랑한 내용이라도 시간을 갖고 들여다보길 원하는 것이지. 그러니 더이상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성배니 보물이니 하는 건 그야말로 '평범한' 독자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넘치고 넘치는 비슷한 이야기들 속에서 얼만큼의 차별성을 가지는지 독자들은 바로 그 점을 갖고 이야기를 평가할런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등장인물들이 주는 매력. 이야기 특유의 배경이 가지는 분위기등.

19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스네이크 스톤』은 그런 의미에서 배경의 차별성은 확보했다고 봐도 되겠다. 우선 낯선 세계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해준다. 유구한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자체가 가지는 매력. 그리고 그 안에 녹아있는 다양한 국적의 민족들의 삶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진다. 이스탄불의 역사와는 별도로 그려지는 여러 민족들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이 소설이 탐정을 등장시키는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점을 조금은 옅게 만든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던 게 주석이다. 역사적인 사실성을 띄는 내용들에 적당한 주석을 곁들여 조금의 배경설명을 해주었더라면 하는.

환관탐정 야심은 단순히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떠나 그의 일상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요리하는 야심. 서점에서 책 고르는 야심. 친구 집에 마실가는 야심. 시장 보는 야심. 커피 타는 야심. 궁에 볼일보러 가는 야심. 이렇게 일상을 즐기는 성실한 탐정은 처음보는지라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참 인물이 선하다. 틈틈히 독서하고 요리하고. 나는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건과 부딪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좋다. 그리고 내용이 은근히 지적이다. 책을 즐겨 읽는 야심이 주인공이 아닌가. 얼마나 사안에 대해 아는 척할 게 많겠는가. 거기다 배경이 이스탄불. 참 사연 많은 도시. 이 책은 정말 풍부한 소재로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거기에서 이 책의 호불호가 엇갈릴 것 같다. 야심의 일상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여유라고 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론 긴장감이 떨어지는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른사람의 사정을 봐주다가 오지랖 넓게 사건과 마주하지만 야심이 급할 게 뭐가 있는가. 사실 야심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계기는 엉뚱한 소문에 억울하게 휘말리는 게 싫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었는지. 그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가 급할 게 뭐가 있었을라고. 하여튼 성격 좋은 사람이다. 허구헛날 집이 털리고 (생각해 봐라. 애써 정리했는데 다음날 또 털리면 기분이 어떻겠는지.) 위험에 노출되었어도 그곳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요리하고 커피 타는 야심이다. 짜증 한번 안 내고. 저주 한번 안 퍼붓고. 묵묵히 힌트를 좇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니어 2009-02-2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가의 역량이겠지요. 어떤 번역가는 작가와 인터뷰를 거쳐 충실한 주석을 다는 사람도 있던데.

마빈 2009-03-01 00:13   좋아요 0 | URL
주석도 때로는 읽을거리를 제공해 주는데 ㅋㅋ 그점이 조금 아쉬웠어요^^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 -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김선우 외 지음, 클로이 그림 / 비채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교 때 두꺼운 국어 (상,하) 교과서는 쉬는 시간 베개로 삼고 자기에 참 좋았다. (나름 이미지 관리를 위해 쉬는 시간이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꼭 쉬는 시간만은 아닐 수도.) 국어시간이 즐거웠냐고? 아니 전혀. 국어시간은 나의 공식적인 취침시간이었다. 창 밖의 운동장을 나른하게 바라보며 쏟아지는 잠을 절대 참지 않고 혼자만의 시에스타를 달콤하게 즐기는 시간.

시를 배울 때,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는 건 수능 때 최악의 점수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주관적인 느낌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느끼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우리들 앞에서 해부되고 분석당하고 벌거벗겨졌다. 몇권의 시집을 낸, 시인선생님도 계셨지만 우리는 버릇없게도 유독 그 선생님 수업시간을 무시했다. 이유는 못 가르친다는 거였다. 딴 얘기만 한다고 우리는 선생님을 힐난했다. 돌이켜보면 그분이야말로 문학을 사랑하셨던 정말로 시를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려 했던 분이셨는데.  

국어시간에는 유독 아이들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교과서에 머리를 처박고 색볼펜으로 선생님이 메모하라고 하는 곳에 예쁘게 체크하면 그만이었다. 작품을 읽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대해 배워야했다. 내재율이 어떻고 외재율이 어떻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어떻고. 긍정의 시어에는 동그라미를 부정의 시어에는 세모표시를. 표현방식, 특히 역설은 반드시 시험에 나오니까 절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표시해 둘 것! 국어교과서는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색볼펜으로 적나라하게 분석된 해부도로 가득한 책이 되어가고 있었다. 국어시간이 즐거울 리 없었다.

주옥같은 언어로 작품을 쓴 수많은 시인들께서는 아마도 당신들의 시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분석당하고 해부되는 걸 원치 않으셨을거다. 당신들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느껴줬으면 하셨을거다. 하지만 나는 기계처럼 나도 모르게 시어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눈으로 시를 가위질하며 형식을 분석하고 있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런 나에게 시가 마음에 다가올 리 없다. 이렇게 냉정한 눈으로 작품을 대하는 인간인데. 그리고 지병으로 얻은 게 하나 있다. 시란 어렵고 난해하다는 것.

물론 나에게도 시가 재밌었던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마니또며 교환일기가 유행이었다.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게 유행이었고 달콤하고 귀여운 시를 편지에 적어 넓은 칸을 매우기도 했다. 왜 그런 시 있지 않은가. 국어시간에는 너의 이름을 써보고 수학시간에는 너와 나의 관계를 계산해 보고 영어시간에는 i love you... 뭐 이런 귀여운 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시를 가까이 하기에는 내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

그렇지만 시가 없는 세상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요즘에도 많은 연인들이 시의 은유를 빌려 마음을 고백한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마음을 적는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어보셨는지. 아마 네루다에게 메타포를 배우지 않았다면 마리오는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에게 마음을 고백하겠다며 사랑시를 추천해 달라고 인터넷의 문을 두드린다. 수많은 시들이 조각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지만 때로는 그 많은 조각들은 선한 낚시꾼의 낚싯대에 걸려 사랑의 언어로 요리된다. 감미로운 로맨스로 포장되어 설레이는 마음과 함께 연인에게 보내진다.
 
사랑으로 가득한 사랑의 시는 언제 읽어도 좋다. 늘 시를 접하는 시인의 눈과 마음에 엄선된 시라면 더더욱. 꼭 그 모든 시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어도 말이다.『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이 책에 대한 감상은 시에 대한 개인적인 두려움의 변명을 늘어놓는데 급급했지만 시인의 개인사가 적절하게 언급된 해설과 함께 읽으니 시가 좀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나처럼 시에 대한 지병에 버금가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빈한한 인간에게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01-08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등학교때 시인이셨던 현대문학 선생님이 계셨는데 수업은 참...
다른 과목만 보충공부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죠.
돌이켜보면 참 따뜻한 분이셨던거 같아요

마빈 2009-01-09 14:50   좋아요 0 | URL
저 선생님은 잔소리도 안 하시고.. 애들이 버릇없게 굴어도 그냥 넘어가는 그런 타입 ㅋㅋ 애들이 우습게 보기 딱 좋은 그런 선생님이셨어요.. 저도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조금 후회가 돼요^^;;;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공교롭게도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중동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가자지구에서 학살극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의 민간인들에게 무장단체 하마스를 무너뜨리겠다는 명분으로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감상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시온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묵인또는 반대성명만 낼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아랍연맹은 이스라엘의 이번 폭격은 전 아랍을 상대로한 도발이라고 명명했다. 2009년의 떠오르는 해를 평화 속에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자비한 폭격이 얼른 멎으길, 총성이 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잔해 속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냉전이 종식된지 20여년이 다되어 가지만 우리는 지금 감히 평화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까. 

9.11을 겪은 미국과 부시정권은 성명을 발표하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물론 일방적인 폭격이었고 수많은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몰랐다. 세계를 향한 테러를 자행하는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우호적이다는 이유로, 아니 그들과 한패였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폭격을 감행하는 미국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숫자를 세는 게 무색해진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에 우리는 무감각했다. TV는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행적을 보도하며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최우선임을. 그 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아프간 민간인에 대한 피해는 애써 외면했다. 마치 그 길만이 아프간인들에게 평화를 안겨줄 것이라는 듯이.

아프간은 그동안 우리나라 못지않은 기구한 현대史를 겪어야만 했다.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주의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게릴라들의 항전으로 오랫동안 내전을 겪어야만 했다. 가장 최근이 탈레반이었다. 나는 아프간의 기구한 현대사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으며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아프간은 평화를 당연하게 바라왔지만 그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가족들이 죽었고 불과 어제까지 함께 인사를 나누던 이웃들이 폭격에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깔려 죽었다. 거리는 폐허가 되어 버렸고 사람들은 진이 다 빠져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총성과 전쟁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아프간의 기구한 현대사와 특별'대우'가 아닌 특별'취급'을 받은 아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여성들에 대한 학대와 차별은 여성들을 고통 속에서 살게 했다. 그녀들은 참아야만 했다. 딸이었고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법이라는 것이 여성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법으로부터도 경멸을 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폭정과 폭력 밑에서 그녀들은 서로를 위로했고 감싸주었다. 고통스런 순간을 묵묵히 감내해야 했다.

아비없이 태어난 자식에게도, 아니 아들이 아닌 딸이었어도 누구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녀들의 행복에 대한 결정권은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녀들은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딸(자식)이고 어머니(아내)가 아닌가. 왜 그녀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스스로가 좋아하는 일을 남의 간섭을 받으며 해야하는 것인지.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인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현실이었다니. 아프간 여성들의 역사였다. 눈물의 역사,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작은 몸에 수없이 생겨난 딱정이와 흉터가 말해주는 폭력의 역사.

최근까지도 중동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가문의 명예를 더렵혔다는 이유로 가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희생된 그녀들은 이슬람의 보수적인 율법을 어겼다. 그녀들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남자를 사랑했거나 부르카를 착용하기를 거부했거나 남자들보다 너무 열성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려 했다는 이유로 짧은 인생을 남도 아닌 가족에 의해 마감해야 했다. 그들의 율법서 코란에 과연 그렇게 나와 있을까.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거기서 말하는 생명에 여성은 제외란 말인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먹먹함과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절망적인 삶을 참아내야 하는 아프간 여인들의 한스런 인생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것은 아마 현재형의 이야기일 것이다. 꼭 아프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인권 유린에 노출된 여성들을 얘기하고 있다. 전쟁과 가난의 최대 희생자는 여성과 아이들이다.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다른 이의 평화를 짓밟고 유린하는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지구도 병들어 가고 있지만 인간도 병들어 가고 있다.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다. 여기서 잠잠하면 저기서 또 비슷한 일이 자행된다. 지난 반세기동안 이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겨우 3주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끼리와 귀울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본격추리소설은 정황이나 사소한 힌트들로 사건을 풀어내는 해결사(안락의자탐정)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자면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같은. 등장인물의 사소한 행동이나 우연히 쏟아내는 말들에도 중요한 단서를 감지해낸다. 뛰어난 추리력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의 단순한 사고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견고한 논리를 필요로 하지만 이야기에서 완성되는 그럴듯한 이들의 논리는 현실에서는 별로 소용이 없다. 간단한 이유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변수를 통제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정답과 그에 따른 근거의 추리를 설명하는 마무리 없이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 바꿔말하면 소설이 됐든 만화가 됐든 사건은 반드시 해결된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필요한 게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사의 설명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언제나 결말에서 수수께끼는 해결됐다며 혼자만의 자아도취에 빠진다는 점은 잊자.) 해결사가 말하는 논리는 앞뒤가 척척 들어맞고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감탄스런 설명도 있는 반면에 작위적이고 억지로 논리에 끼워맞춰진 황당한 설명도 있다. 만들어진 정황처럼 어색한 것도 또 없다. 

스스로도 미스터리의 팬이라고 밝힌 독서광이자 작가인 온다 리쿠는 『코끼리와 귀울음』에서 본격추리소설을 표방하며 11편의 단편을 소개한다. 전직판사인 세키네 다카오라는 노신사가 등장하는 연작 미스터리 단편이다. 세키네 다카오는 미스터리 팬의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꽤 좋아하지만 내가 나중에 노년이 되거나, 가까이는 중년이 되었을 때 미스터리를 읽는다는 건 조금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은퇴를 하고도 여전히 일상에서의 추리를 즐기고 옆에 미스터리 문고본을 두고 있다는 게 사실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생활은 전제되어야 할 여건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현실에 어느정도 여유가 따라줘야 오락성이 있는 것들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불편했던 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추리에 대한 집요한 집착으로도 보였다. 물론 이건 미스터리팬이 연작단편의 주인공으로 연이어 등장한 이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카오가 말하는 상황에 대한 논리가 조금은 작위적인 부분이 더러 있었다. 인간사를 그렇게 그럴듯한 논리로만 설명할 수가 있으면 참 좋으련만, 이 책은 현실이 아닌 절대'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스터리를 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온다 리쿠를 대단한 이야기꾼이라고 여겨왔는데 『코끼리와 귀울음』에서 온다 리쿠의 부족한 점을 조금 엿본 것 같아서 팬으로서는 조금 속상하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온다 리쿠에게 있어서 본격은 조금 내공이 부족한 장르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온다 리쿠의 한계를 멋대로 규정하겠는가. 온다 리쿠는 나에게 『밤의 피크닉』과 『삼월은 붉은 구렁을』처럼 기막힌 이야기를 선물해 준 고마운 이야기꾼이 아닌가. 나는 여전히 온다 리쿠의 팬이다.

얼마전 친구가 나에게 해준 얘기가 생각난다. 불륜커플과 실제 부부사이를 구분하는 방법. 음식점에서 계산을 할 때 여자(여기서는 아주머니)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 그 커플은 부부인 것이고 아저씨가 주섬주섬 계산을 하면 그 커플은 불륜인 것이라고. 깊게 파고 들어가면 헛점도 많은 얘기다. 웃자고 한 얘기였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일상에서 정황을 보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관계를 짐작하려 한다. 직접 물어보면 확실한 사이를 규정할 수 있겠지만 계산을 끝내는 아저씨를 붙잡고 "직접 돈을 내시는 거 보니 부인이 아니신가봐요"라고 눈치없게 묻는다면... 아마 그 음식점은 내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될 것이다. 사실 제일 좋은 건 신경쓰지 않는 거지만. 아! 이야기에서만 자유로운 추리의 세계. 하긴 현실이 너무 뻔하면 그것도 재미없지. 그래도 작년 여름에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살인사건의 범인을 거의 정확하게 추리한 네티즌이 화제가 됐던 것처럼 현실에서 그 미스터리 내공을 보여주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아주 상관없는 것도 아닐 수도. 내공을 더 쌓아야겠다. 매사를 진지하게 분석해보는 연습을 해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니어 2009-02-2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륜과 실제 부부를 구분하는 방법이 인상적이네요. 하핫. 근데 저의 경우 정반대였던 것 같은데...;; 연인의 관계에 있어서 돈을 쓰는 행위는 나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매사를 진지하게 분석하려면 스트레스가 장난 아닐 듯 한데요. 어떤 분야든 깊이를 위해선 한 우물을 파는게 유리합니다. 독서의 경우 다독보다는 한 작품을 여러번 읽는 것이 더 효과가 좋지요. 다른 분야도 비슷합니다.
더불어 사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것도 좋겠지요.

마빈 2009-03-01 00:14   좋아요 0 | URL
이거 새로운 이론인데요? ㅋㅋ
제가 사실 시야가 좀 좁아요. 늘 그것 때문에 놓치고 사는 게 많아서 뒤늦은 아쉬움을 느끼게 되지요. 드러나는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서 사물을 보고 핵심을 파악하는 예리한(?) 눈을 키우고 싶더라고요^^

주니어 2009-03-01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로써 영화를 생각해보자면.
평론가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남들이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는 눈과 사고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부분은 일정한 훈련이 필요한데 보통 한 작품을 택해서 반복적으로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한 번 이상 보는 경우는 드문데 그로인해 놓치게 되는 정보들이 많지요. 처음에는 모르니까 놓치게 된 정보를 반복적으로(더불어 의식적으로) 보게 됨으로 놓친 부분을 다시 잡아내는 훈련을 하지요. 그렇게 길러진 안목은 다른 작품을 보게되었을 때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 이 방법의 목적이죠. 물론 반복적으로 볼 때는 집중해서! 스스로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다른 무언가가 있진 않을까? 하는 의문을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것이 필요하죠.
독서의 경우 한 작품을 여러번 읽는 것도 좋지만 보통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직접 필사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집중해서. 단순히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일반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되네요.

저요? 게을러서.....;

마빈 2009-03-02 01:15   좋아요 0 | URL
와~ 이렇게 정성스런 설명을^^; 감사드립니다.
사실 영화도 그렇고 몇 번 반복해서 보면 처음 봤을 때와는 분명 다르죠. 정말 한번 봐서는 다 봤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감독의 해석도 새롭게 읽혀지고 말이죠. 그러면서 넓은 시야도 키울 수 있다면 일석이조겠네요.^^ 추천해주신 필사 방법도 적절히 응옹해서 도전해보고 싶네요^^;; 저도 게으리지만 않다면ㅎㅎ

주니어 2009-03-02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또 덧붙이자면.
유명한 사례로 이문열 작가의 경우 자신을 찾아오는 작가지망생에게 좋아하는 작품 5권을 고르라고 한 뒤 필사를 하라고 권한다네요. 실은 계획하는 바가 있어서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생각보다 집중이 어렵네요 ^^;






마빈 2009-03-03 01:20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작품 다섯권이라...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 되겠네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사랑하는 그는 1940년대의 LA에서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캐멀 담배를 즐겨 피우고 홀로 바에 앉아 김릿이라는 칵테일을 즐겨 마신다. 갱이나 마피아는 물론이고 아찔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할리우드 여배우들 앞에서도 도도하며 기죽지 않는 후까시를 자랑한다. 그가 던지는 시건방진 농담은 뼈가 있으며 때론 그 아슬아슬한 깡따구 때문에 강친(강한친구들)들에게 흠씬 얻어 터지기도 한다.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피마저도 끈적한 침과 함께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뱉어버리는 그. 그는 하드보일드계의 원조 사립탐정 '필립 말로'다. 비정한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 그는 인간적인 구석이 꽤 많은 탐정이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약한 이 든든한 탐정아저씨를 나는 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났었다. 악인들에게는 요즘말로 '볼매' (볼수록 매를 버는 사람)였지만 이 아저씨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여전히 독한 위스키를 쓸쓸하게 홀짝이고 계시겠지. 나도 이제 조금은 컸으니 옆에서 술친구를 해줄만도 한데. (물론 독한 위스키보다는 조금은 순한 참이슬 후레쉬를 권해주고 싶지만.)

'사와자키'라는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읽으면 잠시 잊고 있었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오버랩 된다. 오마쥬라고 생각될 정도로 사와자키는 필립 말로와 많은 점이 흡사하다. 비단 캐릭터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사와자키와 주변 인맥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말로가 LA의 경찰들과 평소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중요한 순간 공조의 앙상블을 이루는 것처럼 사와자키와 경찰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중 누가 더 좋으냐는 1차원적인 질문을 받는다면 나에게는 역시 우리 '필립'이다. 필립의 가오와 후까시가 나는 더 좋다. 사와자키는... 뭐랄까. 왠지 담배쩐내만 독하게 날 것 같은 후줄근한 이미지가 풍긴단말이지. 나는 좀더 세련되고 미남인 필립쪽이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탐정소설의 정형을 충실하게 따르는 소설이다. 혼자 일하는 자아가 강한 탐정에게 실종사건을 의뢰하는 의뢰인이 찾아온다. 하지만 의심많은 탐정은 왜 많고 많은 탐정들 중에 자신에게 의뢰를 하려는지부터 의심한다. 워낙에 사연 많은 탐정이라 의뢰가 들어오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운 일. 결국 이런저런 사연에 의해 사건을 맡게 된다.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달콤한 유혹과 아찔한 협박도 받지만 의리의 탐정은 절대로 의뢰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본인이 몸으로 때우는 한이 있더라도. 거의 막바지에 가서야 사건을 해결하며 썰을 풀어놓는다는 공식. 이 소설은 그런 공식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기본문제의 풀이에 충실한 기본유제라고 할 수 있겠다.

요는 재밌다는 것. 하지만 사와자키를 보면 그보다 훨씬 멋있고 한 수 위인 탐정의 존재를 자꾸 상기하게 된다. 오히려 잊고 있었던 옛사랑을 자꾸 떠올리게 해서 이 책을 빨리 읽고 그를 다시 만나보고 싶게 만든다. 사실 너무너무 유명한 원조의 존재는 아무리 잘 쓰고 독창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원조의 아류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원조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버거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런 흉내 마저도 팬에게는 또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잊고 있던 향수를 자극한다던지, 팬심을 더욱 단단하게 해준다던지.

타인에게 무심하며 근거 없는 의심이 넘치는 각박한 세상에 무엇하나 매정하게 지나치지 못하는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탐정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사건이 해결된 뒤에는 모두가 즐거움과 안정을 찾은 가운데 혼자만 외로움을 곱씹는 사람들이고 외로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연극이 끝난 뒤, 무대에 홀로 남아 독한 알코올에 의지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분위기 때문에라도 그들을 따르는 팬이 있고 그들의 활약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본다. 타인의 밝음을 위해 스스로는 어두운 밤을 살아가기로 한 사람들이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8-12-1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 전통의 원조 '말로'

마빈 2008-12-11 01:08   좋아요 0 | URL
ㅋㅋ '말로'땜에 햄볶아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