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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하자면, 나는 말이 좀 많다. 내면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한때, 조용하고 유능하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을 주고자 의도적으로 말을 거의 안 하고 살아본 적이 있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남들은 내가 화났는 줄 알고 나에게 의도적으로 말을 안 걸었고 덕분에 한동안 외롭게 살았다. 사람이 이미지라는 것이 중요하구나라는 걸 그때 다시 한번 느꼈다.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씁쓸한 깨달음과 함께.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은 정당화하는 경향이 짙지만 타인의 비슷한 행동에는 너그럽지 못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발끈하고 분노한다. 나도 그런 성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속 마음을 털어놓았던 걸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분위기상, 기분상, 또 다시 그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뻔하다. 그러고 또 후회할 것이다. 반복되는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사람이 죽으면 그를 누가 평가하는가. 그를 알았던 세인들의 보고 들은 바에 의해 평가된다. 역사도 그렇고 한 사람의 족적도 마찬가지로 결국 남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앞에서 잘 해주면서 뒤에서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건 아닐까. 술자리에서 가장 맛있는 안주가 "뒷담화"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듯이 사람은 참 남말 하는 걸 좋아한다. 누가 어떻다더라. 요즘 그런 일이 있다더라식의 타인이 하는 타인의 얘기들. 돌아서면 남는 거 하나 없을 영양가 없는 얘기들.
<우행록> 말 그대로 어리석은 행동을 적은 글이다. 도쿄 외곽의 신흥 주거지에서 벌어진 단란한 일가족이 괴한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사건은 1년 뒤 르포라이터에 기록되어 지고 르포라이터는 살해당한 남편과 아내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과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죽은 남편과 아내는 화려한 과거를 갖고 있었다. 문란하다기 보다는 말 그래로 화려한. 엘리트 남편과 아내. 대학 때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드러나지 않는 신분이 존재하는 작은 일본사회에서도 상류층에 있었던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마음을 등진 원수 하나 없을까.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과 아름답고 반짝이는 추억만 있을까. 르포라이터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은 부부가 그렇게 나빴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식의 과거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전제는 그거다. “나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제3자였다고.”
르포라이터에게 일련의 일화들을 들려주는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그 입에서 오르락내리던 사람들 중에 끔찍한 일을 일으킨 범인이 숨어 있다.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는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라온 성장환경이나 비뚤어지게 된 근본적인 계기들은 충격이었다. 사회적, 가정적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비뚤어진 괴물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그 괴물은 분노를 삭히지 않고 한 가정을 잔인하게 뭉게 버렸다. 조금의 반성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괴물의 고백이 계속 이어진다. 섬찟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