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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소설 <이유>에 대한 감상을 쓰려고 하니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으로는 처음 접했던 <화차>에 대한 그 어떤 코멘트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인데 <화차>는 현대 소비사회가 낳은 별종 인간에 대해 얘기했던 책이다. 신용카드로 엄청난 빚을 지고 결국 남의 신분으로 살아야했던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경각없이 소비에 몰두하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메시지를 전하려한 소설이었다. 마지막 결말에서 느껴졌던 여운도 기억에 남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약간의 동정심도 느꼈었다. 그리고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따끔한 일침으로 비판할 건 과감하게 비판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그녀의 심정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처음엔 인물을 통해 캐릭터의 어두운 모습을 그리지만 결국 그것이 그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일본의 소비현실에 대한 이야기임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그 얘기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거의 똑같다는 것도.
도쿄 아라카와구에 있는 초고층 고급 아파트에서 중년남성, 중년여성, 20대 청년, 80대 노인(여성) 이렇게 4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엔 일가족으로 보였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실제 아파트 거주자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수사당국은 그들의 신원부터 밝히려 한다. 그들이 살해된 장소인 2025호는 현재 경매가 진행중인 아파트로 실제 거주자인 일가족은 부동산회사의 조언에 따라 집을 비우고 소위 '버티기꾼'이라고 불리는 이들 네명이 몇달 전부터 들어와 살고 있던 거였다. 경매로 이 집을 낙찰받은 이시다 나오즈미는 사건현장에서 떠난 게 목격돼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자 용의자가 되고 도주 중이다. 3개월 후 도주 중인 이시다가 자수할 것임을 경찰에 밝히지만 그는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고 이들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가?
소설 <이유>는 주인공이 따로 없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소설이다. 그들만의 사정과 살아온 간략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캐릭터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준다. 일본소설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던 가벼움과 쿨함과는 거리가 먼 묵직한 스토리다. 나는 이유와 사정은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들에게 느낀 건 이유가 아니라 어떤 사정(事情)이었다. 이 소설은 구성형식도 다양한데 챕터마다 어떤 건 인터뷰 형식으로 어떤 건 시점을 조금 달리한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또 어떤 부분은 전지적작가시점으로 여러 장치들을 동원해서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일본의 서민들도 우리나라의 서민들과 비슷한 고민을 한다. 그네들도 그렇고 우리들도 내집 하나 마련하는 게 인생의 숙원인 사람들이다. 일본은 버블경제의 후유증으로 집 값이 어마하게 비싸다. 그들도 이렇게 거품 잔뜩 낀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고 저축하고 은행 문턱도 높아서 자금조달에 애먹고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산다. 소설 <이유>에는 바로 이런 일본 서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우리 부모님들과 비슷한 고민을 저 나라의 부모세대도 한다. 자식들 사립대학 등록금 문제에 고민하고 더 늙기 전에 내 집 하나 마련해서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자화상이다.
<이유>는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추리소설이라는 작은 틀에 묶어두기에는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현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 그리고 거품경제의 후유증으로 일본 서민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 거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생계형 불법행위들을 관련 인물들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이시다처럼 경매로 싸게 나온 집을 덜컥 사버렸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에 맞닥뜨린 사연과 최고만을 좇다가 결국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집까지 경매에 넘어간 고이토 가족, 버티기꾼으로 그 집에 머물다 화를 당한 신원불명의 4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저런 마음아픈 사연을 만나볼 수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촌. 그곳은 일본의 도시 사회가 안고 있는 이야기들의 축소판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이웃과의 대화 단절, 입주자가 자주 바뀌는 유동적인 패턴, 타인의 접근에 폐쇄적이고 경계적인 분위기를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리고 당신들의 눈에는 어떤 문제점이 보이는지 날카롭고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일본사회의 저 이야기가 바로 이곳, 내가 숨쉬고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도 되풀이 되는 이야기라는 거다. 그래서 작가의 저런 질문들이 일본 사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요즘같은 현실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거다. 읽다보면 거울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남의 나라 일본만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문제로 다룰 수 있는 현실의 이야기다. 마음 아픈 일본 서민들의 사정이 우리나라 서민들의 이야기와 복사판이다. 저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이었다. 일본의 사회파 소설가들, 특히 미야베 미유키를 왜 앞다투어 출판사에서 소개하려 하는지 알 것 같다. 그녀는 일본이라는 배경 속에 보편적인 현대사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앞으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싶다. 아직 그녀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는 깜냥은 안 되지만 그런 아픈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데 중요한 간접 경험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