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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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언덕에 앉아 탁트인 바다를 보며 맥주 한잔을 하는 기분은 쓸쓸한 듯 하면서도 낭만적이기도 하고 또 왠지 재밌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앉아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누군가 나에게 벌을 준다고 꼼짝도 하지 말고 그렇게 앉아있으라고 하면 나는 오히려 기꺼이 그 즐거운 벌을 받고 싶다. 오히려 몇시간이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렇게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간이 온전히 주어진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가만히 누워서 하늘과 바다의 수평선이 맞닿은 그 곳을 바라보며 그 제목처럼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면 더없는 낭만적인 시간이 되지 않을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나"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기분전한을 위해 마시는 맥주 한잔과 음악,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바다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역시나 하루키 소설답다.


 

하루키가 쓴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꼭대기 자리를 어김없이 차지한다. 선인세 (10억+a)라는 미친가격에 거래되는 인기작가가 아닌가. 지금 서점에서는 하루키의 신작 1Q84를 매대에 쌓아놓고 불티나게 팔고 있다. 상실의 시대 이후 하루키는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책만 냈다 하면 대히트를 치는 인기작가다. 일본소설의 가벼운 터치감을 흔히 "하루키스럽다"라는 말로 대신할 정도로 그의 이름은 하나의 명명성을 가진 브랜드로 자리매김 했을 정도다.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요즘 나오는 하루키의 소설들에 비하면 별로 특징적일 게 없는 밋밋한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대학생 "나"가 방학동안에 이런저런 소일을 하면서 보낸 스케치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의 띠지에는 이 책을 읽어보면 하루키 소설의 원형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루키 소설의 원류를 알아야 원류를 찾기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난 그의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완벽한 문장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절망도 없다던 젊은 날의 하루키의 가치관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는 낮에는 재즈바를 운영하고 늦은 밤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이십대의 마지막을 보내며 그가 "나"의 손을 빌어 고백한 내용은 요즘 내가 고민있는 부분과 닿아 있어서 감정적으로 크게 공감이 갔다. "다양한 사람이 찾아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고 마치 다리를 건너듯 발소리를 내며 내 위를 지나가고 나서는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이십대의 마지막 해를 맞았다." (P.10)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내가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들, 내가 앞으로 알게 될 사람들... 1년 뒤의 내 주변 10년 뒤의 내 주변은 지금의 내 주변과는 많이 달라져 있겠지. 20대를 보내고 있는 내가 느끼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참 많은 질문과 고민을 던져다 주는 저 문장에 한참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하지만 역시 별 수 없잖아. "Que Sera, Sera!" 마인드로 그 고민 잠시 접어놨다.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하루키의 소설을 단 한권도 재미없게 읽어본 적이 없다. 그의 이야기는 재밌다. 인물들이 쏟아내는 음악 얘기도 흥미롭고 각자의 문학적 취향도 귀기울여 들여볼만 하다. 하루키의 디테일한 섬세함이 좋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언제나 음악이 흐른다. 그가 젊은 날 들었던 음악들을 소설 속에 쏟아낸다. 등장인물 누가됐던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 대한 나름의 호불호가 명확하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 흘러나왔다면 이 소설에서는 캘리포니아 걸(California Girl)이 흘러 나온다. 그의 주인공들은 음악을 듣고 문학을 논하고 위스키를 마신다. 바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독특하다 여겨지는 사연을 별거 아니란 듯이 웃어 넘긴다. 때론 바보같을 정도로 엉뚱하고 비현실적인 공상을 진지하게 이야기 한다. 그런 허무맹랑한 내뱉음 속에서 세상에 대한 씁쓸한 체념이 느껴진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 잠시 알았던 사람들은 추억에 남겨 두고 아주 가끔 그 시절을 술안주로 삼기도 하겠지. 어쩌다 가끔 모두가 잠든 조용한 새벽에 베란다에 홀로 나와 담배 한모금을 뻐끔거리며 꺼져가는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불현듯 옛생각을 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겠지. 그런 게 사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 똑같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두렵지 않았고 뭐든 하기만 하면 내 뜻대로 될 것 같았던 치기를 품었던 그때를 지나왔으니. 그 시절을 지나왔다고 해서 지나고 있다고 해서 전혀 슬퍼하거나 공허해하지 말라고. "나"는 그 시절을 지금 이야기로 남기려 하고 있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냉장고를 뒤지며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글밖에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고백한다. 글쓰는 건 즐거운 작업이라고. 삶이 힘든 거에 비하면 글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너무 간단한 일이라고.  "나"의 수줍은 고백에 화답하자면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담백했으며 그가 뻔뻔스럽게 등장시킨 하트필드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능청스러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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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그 마빈님이 맞는것 같아요.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해요!!
 
개를 돌봐줘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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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픽션만큼 작가에게 편리한 장치가 있을까? 독자에게 자신이 의도한 길대로 가게끔 안내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과 그동안의 내용에 대한 해명내지는 변명을 위해 자유롭게 끼어들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 메타픽션 작품을 접한 건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였다. 해피엔딩과 비극적엔딩을 보여주며 작가는 어렵게 책에 마침표를 찍었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인간의 이기심과 빅토리아시대의 고루하고 진부한 허울의식을 비판하며 프랑즈 중위의 여자를 감싸주었었다. 그 책에서도 사람들은 보고싶은 것만 봤고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프랑스 작가' J.M. 에르'도 제 눈에 안경이라는 시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꼬집고 있다. 그는 다양한 구성방식으로 내용을 전개하며 독자에게 일종의 놀이를 제안한다. 독자는 여기에 체, 예스!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독자의 게임참여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평소처럼 주어진 텍스트를 읽어가며 내용을 상상하고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유롭게 해석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길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처럼 보이던 이 게임도 결국에는 하나의 길로 통하게 된다. 왜냐면 독자인 당신도 평소 의식하지 못했던 편견을 갖고 있었고 바로 그런 편견이 후에 가서 멋지게 당신이 이해했던 내용을 뒤집고 뒤통수를 빡시게 때려줄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개를 돌봐줘>는 파리 9구 둘르 블레트가 5번지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의 세입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모든 건 확실하지 않다. 이들이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작가가 의도한 장치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누가 주인공이었는지는 아주 나중에 소설의 결말에 가서야 밝혀지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은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그중에 막스 코른느루와 으젠 플리슈는 같은 날 이사 와서 맞은 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는 관음증의 피해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이시여! 이들을 굽어살피소서.) 소설에서 가장 많은 재미와 유머를 선사하는 사람들이지만 당사자들은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 게이지 만땅이었을까.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탓하시길. 서로의 일기를 통해 이들의 생중계되는 감정을 읽어볼 수 있었던 건 이 소설을 통해 맛볼 수 있는 독자의 많은 즐거운 경험중에 하나다. 이 둘은 모른다. 서로에게 얼마나 비슷한 구석이 많은지. 그리고 바로 상대의 그러한 점에 염증을 느낀다는 게 왜 아이러니로 느껴지는지.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게 여기에 딱 들어맞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라두 부인의 편지! 그녀는 자신만은 세련되고 예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그녀의 행동은 모순투성이다. 이웃들의 사생활을 어머니에게 편지로 전부 까발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시각을 아무런 갈등없이 써내려가는 관음증 캐릭터의 결정판이었다. (신이시여! 이 여인 또한 잊지말고 굽어 살피시길~)

현대인들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중무장하며 살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들에 가하는 편견과 경계는 소름끼칠 정도다. 무관심과 모른 척이 마치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명약인 것 마냥 살아간다. 성냥갑처럼 똑같은 모양의 건물들에 살고 있는 우리들, 그리고 새로 이사온 이웃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기보다는 일단은 재고 파악하려하고 나보다 처지가 못한 사람으로 보이면 알 수 없는 실망감도 느끼고, 우리는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나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보이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경계의 고삐를 바짝 조이는 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개를 돌봐줘>는 뭔가 달랐다. 아파트 세입자들은 일단 새로 이사온 이웃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게 PR한다. 자신에 대해 어떤 판단이 내려지는지 그들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나 여기 있어요! 나는 이런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 살아요! 경계하지 마세요! 우리 친구처럼 지내요! 우리는 외롭고 또 평범한(?) 사람들이잖아요."  

의문의 살인사건과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같은 등장인물들, 그리고 소설 초반부터 등장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제3의 목소리 (대체 당신 누구야!! 작가야? 집주인이야?- 정답은 소설의 결말에 가서야 알 수 있다. 그 목소리의 정체를!)까지 뭐하나 전형적인 것이 없이 독창적이고 신선하다. 거기에다 유머를 가장한 훌륭한 메시지까지 담겨있다. '유즈얼 서스펙트'에 버금가는 반전과 읽는 독자의 고정관념까지 비틀어놓는 분하지만 엄지손가락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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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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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유>에 대한 감상을 쓰려고 하니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으로는 처음 접했던 <화차>에 대한 그 어떤 코멘트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인데 <화차>는 현대 소비사회가 낳은 별종 인간에 대해 얘기했던 책이다. 신용카드로 엄청난 빚을 지고 결국 남의 신분으로 살아야했던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경각없이 소비에 몰두하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릴만한 메시지를 전하려한 소설이었다. 마지막 결말에서 느껴졌던 여운도 기억에 남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약간의 동정심도 느꼈었다. 그리고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따끔한 일침으로 비판할 건 과감하게 비판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그녀의 심정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처음엔 인물을 통해 캐릭터의 어두운 모습을 그리지만 결국 그것이 그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일본의 소비현실에 대한 이야기임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그 얘기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거의 똑같다는 것도.

도쿄 아라카와구에 있는 초고층 고급 아파트에서 중년남성, 중년여성, 20대 청년, 80대 노인(여성) 이렇게 4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엔 일가족으로 보였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실제 아파트 거주자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수사당국은 그들의 신원부터 밝히려 한다. 그들이 살해된 장소인 2025호는 현재 경매가 진행중인 아파트로 실제 거주자인 일가족은 부동산회사의 조언에 따라 집을 비우고 소위 '버티기꾼'이라고 불리는 이들 네명이 몇달 전부터 들어와 살고 있던 거였다. 경매로 이 집을 낙찰받은 이시다 나오즈미는 사건현장에서 떠난 게 목격돼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자 용의자가 되고 도주 중이다. 3개월 후 도주 중인 이시다가 자수할 것임을 경찰에 밝히지만 그는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고 이들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가?

소설 <이유>는 주인공이 따로 없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소설이다. 그들만의 사정과 살아온 간략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캐릭터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준다. 일본소설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던 가벼움과 쿨함과는 거리가 먼 묵직한 스토리다. 나는 이유와 사정은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들에게 느낀 건 이유가 아니라 어떤 사정(事情)이었다. 이 소설은 구성형식도 다양한데 챕터마다 어떤 건 인터뷰 형식으로 어떤 건 시점을 조금 달리한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또 어떤 부분은 전지적작가시점으로 여러 장치들을 동원해서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일본의 서민들도 우리나라의 서민들과 비슷한 고민을 한다. 그네들도 그렇고 우리들도 내집 하나 마련하는 게 인생의 숙원인 사람들이다. 일본은 버블경제의 후유증으로 집 값이 어마하게 비싸다. 그들도 이렇게 거품 잔뜩 낀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고 저축하고 은행 문턱도 높아서 자금조달에 애먹고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산다. 소설 <이유>에는 바로 이런 일본 서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우리 부모님들과 비슷한 고민을 저 나라의 부모세대도 한다. 자식들 사립대학 등록금 문제에 고민하고 더 늙기 전에 내 집 하나 마련해서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자화상이다.

<이유>는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추리소설이라는 작은 틀에 묶어두기에는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현대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그늘, 그리고 거품경제의 후유증으로 일본 서민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 거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생계형 불법행위들을 관련 인물들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이시다처럼 경매로 싸게 나온 집을 덜컥 사버렸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에 맞닥뜨린 사연과 최고만을 좇다가 결국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집까지 경매에 넘어간 고이토 가족, 버티기꾼으로 그 집에 머물다 화를 당한 신원불명의 4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저런 마음아픈 사연을 만나볼 수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촌. 그곳은 일본의 도시 사회가 안고 있는 이야기들의 축소판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이웃과의 대화 단절, 입주자가 자주 바뀌는 유동적인 패턴, 타인의 접근에 폐쇄적이고 경계적인 분위기를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리고 당신들의 눈에는 어떤 문제점이 보이는지 날카롭고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일본사회의 저 이야기가 바로 이곳, 내가 숨쉬고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도 되풀이 되는 이야기라는 거다. 그래서 작가의 저런 질문들이 일본 사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요즘같은 현실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거다. 읽다보면 거울을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남의 나라 일본만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문제로 다룰 수 있는 현실의 이야기다. 마음 아픈 일본 서민들의 사정이 우리나라 서민들의 이야기와 복사판이다. 저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이었다. 일본의 사회파 소설가들, 특히 미야베 미유키를 왜 앞다투어 출판사에서 소개하려 하는지 알 것 같다. 그녀는 일본이라는 배경 속에 보편적인 현대사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다. 앞으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싶다. 아직 그녀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는 깜냥은 안 되지만 그런 아픈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데 중요한 간접 경험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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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고진하 글.사진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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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삶을 강제하지 않고, 보기에도 정도가 심한 맹목성만 띠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현명한 방법을 알려주는 수단으로써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그들이 믿는 신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인지 말해주는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지만 그 목소리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다양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힌두교가 곧 인도요, 인도가 곧 힌두교라는 말은 물론 없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게 말해도 이견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그 수만 해도 3억3000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인도에는 힌두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도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무슬림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사실 인도를 다녀오신 분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정보다 늘 더 있게 되는 곳이 그곳이란다. 나에게 인도 얘기를 들려주신 분은 갠지스 강물이 흐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에 묵으셨는데 그곳의 매력에 푹 빠지셨던지 예정보다 더 오래오래 머무셨다고. 이방인의 눈에는 결코 깨끗한 강물이라고 보여지지 않는 갠지스강은 인도인에게는 여신으로서 떠받들어지며 '어머니의 강'이라고 불린다. 배를 띄워 향을 피우고, 지은 죄를 씻기 위해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한다. 죽은 사람을 신께 가까이 보내기 위해서 화장터에서 재를 태워 강물에 뿌리고 아이에게는 축복과 안녕을 빌어주기 위해 갠지스 강에 몸을 씻긴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닐까. 

저자는 그런 인도인들의 신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방법을 보고, 힌두교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고전인 '우파니샤드'를 곳곳에 인용해 이해를 구한다. 세속의 물질적인 것들에 얽매이며 의미없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삶은 곤궁하고 남루해 보일지라도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을 보며 진정으로 가난하고 불행한 것은 마음의 가난이 아닐까 생각됐다. 신은 결코 사원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들이 노래를 부를 때, 신께 기도할 때, 수행을 할 때, 요가를 하는 중에도 신은 그들 곁에 있으며 진심으로 그것을 믿는 인도인들의 삶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해탈의 경지였다. 신의 지혜를 닮아가기 위해 일상 속에서 가르침을 실천하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굳게 믿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생각의 절반 이상이 회의적인 나에게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삶의 모습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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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2009-03-1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죠. 종교에 신념을 둔 사람들은 그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저나 마빈님도 각자의 신념에 따라 사는거겠죠. 그냥 각자 신념의 방향이 다를 뿐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혹시 갑작스런 깨달음으로 종교계에 투신하시는 것은 좀 말리고 싶은.....젊은 처자분이 속세를 떠나시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큰 피해잖아요 ^^;

마빈 2009-03-17 01:4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는 속세가 너무 좋은 걸요^^;
쉽게 떠나지 않을 거예요. ㅋㅋ

주니어 2009-04-29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달 넘게 쉬셨는데 돌아오실 때도 되신 듯. 연애하시는건 아닌가요?? ^^

마빈 2009-05-12 11:04   좋아요 0 | URL
ㅎㅎ 요즘 이래저래 정신없이 살고 있답니다. ㅋㅋ
시간이 왜케 빨리가는지 몰겠어요^^;;
 
벨로시티 - 딘 쿤츠 장편소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8
딘 R. 쿤츠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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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스터리 소설이든 정신이 온전히 박힌 살인범은 안 나온다지만 이 책에 나오는 의문의 인간은 평범한 바텐더 빌리에게 요상한 쪽지를 남깁니다. "이 쪽지를 경찰에게 보여주면 금발의 여선생을, 보여주지 않으면 할머니를 죽이겠다. 선택은 네 몫이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이런 쪽지를 보내 온다면. 장난치고는 꽤 지나친 장난이죠. 행운의 편지쯤으로 여기고 가볍게 무시할 건가요. 하지만 점점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의 선택에 의해 실제로 사람들이 계속 죽는다면. 끊임없이 이같은 쪽지를 보내와 나에게 어느 쪽을 계속 선택하라고 하면 어쩌시겠어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는 없는 질문이죠. 쪽지 자체를 무시해도 그렇다면 할머니가 죽을 텐데요. 살인자의 요지는 이렇네요. 누구든 죽을 것이다. 대신 네가 고르는 사람을 죽이겠다. 그것도 평범하게 내 일을 하던 사람에게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에요. 빌리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고 결국 살인자의 마지막 살인이 예고된 순간까지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해요. 참 고약한 내용이에요. 생과 사를 결정하는데 그 사람의 지위와 가족이 있는지 혹은 혼자 사는지등의 그 사람의 외적인 면을 저울에 올리거든요. 당신이 생각했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울 것 같으세요? 미혼인 저는 기혼인 아이 엄마의 목숨과 함께 저울에 올려진다면 제 목숨은 어떻게 될까요. 참 어려운 질문이죠. 누군가의 상대적인 가치를 매겨야 한다는 거. 정말 이런 선택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아! 누군가는 친절하게 학교 때 배운 지식을 이용한다고 기회비용까지 따져가며 진지하게 계산중일 수도 있겠네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교묘하게 장난질을 해오면 본인이 알고 있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게 되는 불행한 순간에 놓이게 되죠. 씁쓸하죠. 이런 순간에 혹시 나란 인간이 상대에게 그런 장난질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상대가 생각한다면. 하지만 그런 선택의 순간에 놓이는 상대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죠. 결국 나와 그 상대, 그리고 그 주변 모두가 불행해지는 일이네요. <벨로시티>는 그런 선택들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것 까지는 좋은데 결말 부분에서 빈틈도 많은 내용이에요. 무엇보다 살인에는 동기가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최후의 그 사람의 동기는... 글쎄요. 동기치고는 꽤 궁색해요. 이런 어려운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하면서 마지막에 그와 빌리가 나누는 대화는 참 어색한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왜 빌리어야 했는지도 납득이 잘 안 가는 부분. 어째서 이런 선택의 문제들을 살인의 동기로 이용했는지 설명해주지 않고 딴 소리만 해요.

아. 결말에서 기운 다 빠졌어요. 조금 허무한 결말이에요. 시체들을 여러구 처리하면서도 결말에서는 무섭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빌리의 모습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요. 대부분의 미스터리 소설 주인공들의 결말이 그렇죠.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주인공들에게 마치 보상처럼 다시 평온한 일상이 주어지죠. 사람이 여러차례 살인까지 했어요.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살인을. 고의가 아니었건 누군가를 죽인 거라고요. 그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아니죠. 평범했던 남자 맞는 거죠? 일상이 깨져버린 건 보는 나도 안타까웠고 그 당황스러움과 허무함, 기가 찬 일련의 사건들. 이해 못하는바 아니지만 정말 결말의 그 평화스러운 모습은 마치 가장된 평온 같았어요. 평범함에 대한 일종의 집착처럼 여겨지기도 했고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요. 이렇게 많은 선택의 문제들과 짧은 시간동안 시체들을 고유장소에 유기까지 했는데도. 결말의 빌리의 아무렇지 않은 모습, 바바라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살인'쯤은 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서 저는 좀 당황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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