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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읽기를 멈추고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한 젊은이가 품은 연민의 순수했던 감정이 내면으로 침잠해가며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적인 불안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이 남긴 내면의 흉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연민의 쾌락에 빠져있던 한 젊은이로 인해 삶에 희망을 잠시 놓아버렸던 장애소녀가 사랑에 대한 욕망과 나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젊은이는 이 소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소녀의 사랑을 자신에 대한 집착과 올가미로 받아들이고 소녀에게서 도망치려고만 했을 뿐이다.
연민이라는 감정이 사랑의 감정으로 오해될 때 치닫게 되는 고통과 좌절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남자의 이야기는 초반에는 아름다웠다. 그가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때로는 달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초반부터 드러나는 소녀의 남자에 대한 사랑을 읽는 나도 느낄 수 있었는데 어리석은 이 바보는 끝까지 모르고 있었다. 소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남자의 모습이 그렇게 당황스러울 수 없었다.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이야기의 비극적인 결말이 너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이 불안했다.
남자가 품었던 연민이라는 감정은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 아름답고 순수하게만 보여지는 감정이 남자의 내면에서 점점 치명적인 가시가 되어 그의 내면에 깊게 뿌리 내리는 모습을 보는 게 고통스럽고 두려웠다. 연민은 동정으로, 그리고 소녀가 자신을 욕망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로는 도망쳐야할 올가미로, 결국에는 위선으로 변한다. 그리고 남자는 이런 연민의 감정 변화에 자신의 이성과 내면의 목소리를 맡겨버린다.
장애소녀가 품은 사랑의 감정을 집착으로 받아들이고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고 오해하는 우유부단한 남자를 보면서 안타깝지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츠바이크가 직접 남자에게 들었던 실화라는 사실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몰라줬을까. 도망치지만 말고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행동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기병대소위였던 호프밀러의 이 가련하고도 실망스러운 젊은 날의 치명적인 이야기는 아마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연민과 사랑은 다른 것일까. 소설에서 이 두 감정은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긋났을 때 일어난 비극적인 남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도 호프밀러는 평생 자신의 지난 날의 일을 후회하며 보냈을 것이다. 자신이 품었던 연민의 감정을 후회하며.
에디트가 호프밀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호프밀러가 케케스팔바 저택에 초대되지 않았더라면, 장애소녀인 에디트를 보고 연민의 감정을 품지 않았더라면, 에디트에게 실수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로 장미꽃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매일 그녀에게 찾아가 그녀에게 웃음을 주지 않았더라면, 에디트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였더라면, 그에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사랑과 연민은 어떤 관계일까. 둘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할까. 연민이 사랑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은 그의 가혹한 운명일까. 왜 사람들은 에디트가 보여주는 연민에 대한 불편한 반응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걸까.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연민의 쾌락에 빠져 결국 지쳐갔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에디트는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했을까.
이런 현실에 괴로워하고 도망치려하는 호프밀러를 보면서 나 또한 연민이라는 감정을 품게 됐다. 그가 느꼈던 에디트에 대한 연민에 동조하고 그를 흐뭇하게 바라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에디트가 호프밀러에게 제발 그런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고 할 때마다 나도 호프밀러처럼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시 연민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너무 쉽게 맡겨버렸던 호프밀러처럼 나도 그 감정으로 너무 쉽게 빠져들었다. 호프밀러와 한 느낌이 된 기분이었다. 연민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쉽게 생겨날 수 있는 건지 미처 알지 못했다. 나또한, 아니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누군가도 또다른 호프밀러다. 책을 덮고 감상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불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 호프밀러와 에디트에게 느낀 연민의 감정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정말 지독한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