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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독특한 문체로 쓰여있는 소설은 처음 행간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따옴표 없는 대화들로 군더더기없이 간결하게 상황을 묘사한다. 에둘러 가지 못하는 매카시의 단도직입적인 표현일까 아니면 텍스트를 낭비하지 않는 매카시의 검소함일까. 아무튼 문맥에 집중해서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좀 전에 그 말은 누구에게서 나온 말인지 집중하며 읽어야 했다.
텍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돈가방을 들고 도망간 자와 그를 쫓는 잔혹한 살인마의 추격전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 특징이 제대로 드러나는 건 관조적인 시선을 던지는 보안관 벨의 시선뿐이다. 은퇴를 앞둔 벨은 자신이 해야할 역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살인마에게 쫓기는 모스를 연민할 뿐이다.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않아서 사건에 중심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경계에서 일부러 겉도는 느낌이다.
벨은 그가 겪고 있는 모든 것들에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며 상황을 염려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벨의 무기력과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느끼는 실망과 앞으로 자신의 주변에 다가올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지만 올드맨이기에 쿨한 척 할 수 없다. 산전수전 다 겪은 올드맨이기에 인생을 너무 잘 알기에 몸을 사리는 것이다. 안타깝고 걱정스럽긴 하지만 쯧쯧 혀를 차며 지금보다는 좀더 평안하게 지냈음을 소망하는 것밖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올드맨들이 사회에 걸었던 기대는 노인이 자신의 손자 손녀에게 기대했던 희망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자신들이 지키고 만들어 온 나라가 그 옛날 자신들이 그렸던 청사진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그들이 느끼는 실망은 자신들의 땀과 젊은 시절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느낌이 아닐까.
노년의 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살인마 시거가 등장하지만 보안관인 그는 감히 살인마의 정면에 서려 하지 않는다. 한참 뒤에서 살인마의 행적을 쫓으며 시간을 느리게 밟고 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남편을 걱정하는 모스의 부인에게 올드맨 특유의 자애로움과 동정을 보여주는 것을 보며 마음과 행동에서 오는 그의 괴리감을 보았다. 아마 모스 부인은 따뜻하고 희망적인 말을 건네는 벨을 보며 안심하며 안도감을 느끼겠지만 그녀의 믿음과는 다르게 벨은 사건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조연을 자처한 인물이니 말이다.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이야기가 올드맨의 상상력으로 쓰여졌다. 간결하고 날랜 문장들, 짧막한 대사들, 그리고 살인마 안톤 시거가 평범한 결말을 바라는 평범한 인물들에게 던지는 냉소적이지만 진지한, 그럼에도 조소로 가득한 질문이 있다. 그의 행동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로인해 초래된 인물들의 비참했던 결말은 분명 우리가 바랐던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해피엔딩을 바라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믿음을 안톤 시거는 사뿐히 즈려 밟고 으깬다. 그에게 해피엔딩은 없는가 보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과는 다르게 세상은 안톤 시거의 믿음대로 움직이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게 편한 원칙만을 받아들이며 자유롭게(-우리의 관점으로는 무모하게-) 살아가는지 모른다. 올드맨 매카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올드맨을 위한, 아니, 올드맨이 꿈꿨던 나라도 없는데 영맨, 아니 당신들은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세상 정말 엿같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