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침묵
질베르 시누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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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그레이 부인의 집에 목에 상처를 입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절체불명의 남자가 찾아온다. 당황한 마음에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남자는 이미 사라진 상태. 나중에 남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고 그레이 부인은 남자가 남긴 수하물 보관표로 수첩 하나를 찾아온다. 스스로를 가브리엘 천사라 밝힌 남자는 천국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단서를 남기고 그레이 부인은 지인인 매클린 교수의 도움을 받아 수첩을 해독한다. 용의자로 지목된 예수와 모세, 마호메트 중에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줄거리 면에서는 큰 굴곡이 없는 무난한 책이다. 다만 너무 무난해서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진다. 차용한 소재들은 흥미로운데 그 소재를 달큰하게 버무리지 못한 느낌의 이야기다. 실은 거창한 소재들에 비해 얘기가 지극히 사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느님이니, 천사들이니, 모세, 예수, 마호메트니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무게감이 있는 캐릭터들인데 천국에서 밝혀지는 연쇄살인을 지상의 어느 유명 추리소설 작가에게 평소 작품의 팬이었기 때문에 해결을 의뢰한다는 게 아기자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별할 것 같은 소재들이었는데 개성있게 풀어가는 소설은 아니었다.

범인이 밝혀지는 결말부분에서도 시원한 해방감 같은 것은 맛볼 수 없었다. 애초부터 처벌이 불가능한 거였다면 왜 이런 수수께끼같은 숫자놀음을 제안한 것일까. 마치 그 사람의 변론을 위해 이 모든 게 이뤄졌다는 느낌이다. 단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소설의 내용이 존재한다는 느낌. 이건 열린 결말이 아니다. 살인자의 변론만을 위한 결말,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본인을 의심해서 죽인 거라니. 허무하고 여운도 느껴지지 않는 결말이다. 수사의 해결을 맡은 캐릭터가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무기력하고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면 믿었던 독자는 어쩌라고. 자칫하면 그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을 그렇게 가볍게 바라봐도 됐던 거냐고 시비를 걸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할말만 하고 슬쩍 사라지는 범인이라.

또 하나 의문스러운 부분, 바로 사건을 그레이 부인에게 목숨을 걸고 의뢰한 가브리엘 천사의 부분이다. 그레이 부인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건 숫자 19와 쌍둥이 0.809의 비밀을 밝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숫자를 메모로 남긴 가브리엘은 이미 범인을 의심의 단계를 넘어 확신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왜 굳이 지상으로 내려와서 부인에게 사건의 해결을 부탁한 걸까.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번거로운 수고를 바랐던 걸까. 나는 범인을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단서를 맡기면서 범인이 누구인지 맞춰봐!하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부분일까. 그것도 죽어가는 와중에.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처음 느꼈던 흥미를 말끔하게 채워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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