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시간은 세상 모든 것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잊혀진 시간의 흐름속에서 특별함만을 기억하려 한다. 조선이란 나라는 언제, 누구에 의해 개국했고, 임진왜란, 구한말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사라졌고 잊혀졌는지 커다란 틀에서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고려도, 신라도, 고구려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흐름을 일정한 시각과 왕과 문무신이라는 유명한 사람들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한것도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편협된 시각이 이제 서서히 바뀌려한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소외되었던, 낮은 신분의 벽에 가려 빛을 내지 못했던, 왕과 왕실의 이야기에 묻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서민들의, 민초들의 낮은 목소리가 작가들의 손끝에서 새롭게 되살아난다.
최근 역사 팩션소설은 특별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산], [태조 왕건], [세종대왕 이도]... 등 커다란 업적을 동반한 왕들과 왕실의 이야기가 몇년을 두고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지금도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팩션 역사소설은 이제 왕과 왕실이라는 틀을 벋어나 보다 낮은 계층들의 다양한 삶에 시선을 내리고 있다. 얼마전 만났던 김탁환의 [노서아가비]는 조선 최초의 여성 바리스타의 삶을 그리고 있고, [잡인 열전] 이나 [조선을 뒤흔든...] 시리즈는 조선의 연애사건이나 기생들의 삶, 왕후들의 삶과 같이 여성과 다양한 계층의 낮은 이야기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것이다.
2008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정명 작가의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란, 익숙하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천재화가의 모습을 우리 눈아래 데려다 놓기도 했고, 오세영 작가는 [구텐베르그의 조선]이라는 작품을 통해 금속활자의 전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양한 신분과 분야, 그리고 다양성에 기초한 역사 팩션소설은 잊혀진 시간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이처럼 많은 변화와 시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더불어 최근 역사 팩션소설의 또 다른 경향은 우리에게 잊혀진 시대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다.
1800년대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회고와 새로운 해석이 요즈들어 소설을 넘어 다양한 장르들 속에 녹아든다. 영화 [놈놈놈]은 일제강점기 조선반도를 떠나 만주에서 활약하는 마적단, 도적, 현상금 사냥꾼의 이야기를 만주웨스턴이란 독특한 스타일로 창조해낸 작품이다. 우리에게 잊혀졌던 땅 만주, 그 속에서는 나라잃은 백성들의 설움과 울분 대신에 또 다른 그들만의 삶을 그려지고 있었다. [그림자 살인]이라는 영화속에서도 탐정이라는 일찍이 우리 문학장르 속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등장인물이 살아간 일제시대의 모습을 독특하게 그려낸다. 경성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들을 그린 또 다른 다양한 작품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저 우리에게 잊고 싶은 기억일지 모르는 일제침략기,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의 뜨거운 피는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억압된 시간, 잊고 싶은 시간속을 흐르던 뜨거운 삶의 열정을 바라보는 다양하고 독특한 시선이 팩션소설속에서 재미와 감동으로 그려지기 시작한것이다. <제중원> 이 작품 또한 특별한 인물, 특별한 시간을 그려낸다. 백정이라는 신분으로서 조선 최초,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있었던 주인공의 삶과 그 속에 녹아있는 시대상이 바로 그것이다.

<제중원>은 구한말 '황정'이라는 백정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난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조선이란 나라의 신분사회 속에서 최하층으로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소근개, 사람이 아닌 개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그의 비참했던 삶속에서 조선 최초라는, 최고라는 수식을 가진 황정이라는 인물로 새롭게 태어나기까지 눈물겹고도 파란만장한 삶의 단면들이 그려진다. 어머니의 죽음, 죽음에서 자신을 구한 석란, 영원한 라이벌이자 최후에는 진정한 친구가 된 백도양, 알렌과의 만남, 병원에서 만난 백정 아버지, 그리고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만들어낸 신분이란 벽, 시간이 만들어낸 잔혹한 역사, 사랑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갈등이 재미와 감동을 쉴새 없이 쏟아내고 있다.
[하얀거탑]이라는 드라마를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이 작품 <제중원>은 바로 드라마 [하얀거탑]의 이기원 작가가 써낸 첫 장편소설이다. 그제서야 '아~ '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병원이란 공간을 소재로 사용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서 일지도 모른다. 조선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 '제중원', 최초, 초고의 의사가 된 박서양이라는 인물이 이 작품속 '황정'의 모델이 된다. [하얀거탑]이라는 인물 뒤에 항상 따라붙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배우 김명민이다. 이 작품을 통해 진정한 배우로서 사랑을 받게된 그의 연기는 드라마속에서 정말이지 불꽃같은 열정으로 이글거렸다. 아니 장준혁이 [하얀거탑]을 존재하도록 만든것이다. <제중원>속 장준혁의 역할은 어쩌면 백도양의 모습이 아닐지...
<제중원>속에서는 [하얀거탑]에서 보여지던 대결구도가 존재한다. 더불어 사랑이 그려진다. 장준혁과 최도영, 혹은 이주환, 노민국... 장준혁이란 인물을 놓고 대립의 각도에서 한명이 아닌 '편'이 되어버린 [하얀거탑]과는 다르게 이 작품속에서 주로 대립되는 인물은 '백도양'이란 인물이다. 사랑하는 연인인 '석란'과의 삼각관계와 일속에서 반복되는 대립과 갈등이 이야기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구한말의 서구 열강들과의 갈등과 일제 침략기 독립운동과 같은 시대적 아픔이 그려져 격동기의 삶이 우리 눈속에 녹아든다.
<제중원>이 가진 또 하나의 볼거리는 '황정'이라는 인물이 가진 신분적 갈등이다. 최하층민으로서 의사가 된 그에게 신분적 차이는 그대로 컴플렉스가 된다. [하얀거탑]속 장준혁이 그랬던 것처럼.... 천재의사 장준혁이 저지른 의료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적 괴로움, 완벽함만을 추구하고, 성공을 갈망하는 그에게 보이는 내부적 갈등이 드라마속에서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조금은 다른 차이가 있겠지만 황정과 장준혁의 이런 심적 갈등은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그들을 이해하고 몰입하게하는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전 작가의 작품속 살아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들이 특별한 시대상황과 마주하면서 더욱 더 그 매력을 발산한다. 시간속에 묻혀졌던,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최초라는 최고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그들의 삶을 우리 곁에 가까이 끌어내면서 재조명한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몰입'일 수밖에 없어보인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읽어 내려가는데 전혀 낯설지가 않다. 하반기에 이 작품은 드라마로도 선보인다고 한다. 벌써 주요 배우들의 윤곽이 드러난듯 하다. '황정' '백도양' '석란'이라는 이름이 <제중원>과 함께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특별함과 새로움으로 재탄생시킨 감동적인 작품과 만날 수 있어 이 여름은 행복한 시간이었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