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영화를 통해 먼저 접했다. 일본 영화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 영화는 그저 홀딱 반했다. 그러다 우연히 얼마전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구입.

나오키상 수상작 어쩌구 저쩌구 찬사가 화려한데, 잘 모르지만, 좋은 대중문학작품에 주는 상이란다. 그래서 문체도 평이하고 일단 술술 잘 읽힌다.

게다가 '재일' 한국인인 혈기 왕성한 열혈 청년 스기하라군의 젊은 패기는, 읽는 사람 속까지 시원하게 뚫어준다. 그러면서도 일본내 교포들에 대한 차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따뜻한 시선 모두를 자연스럽게 아우르는 아주 좋은 소설이다. 읽으면서 울컥 할 때도 많고 자연스레 느껴지는 감동에 찌릿할 때도 많다.

우리나라도 무슨 어려운 문학작품에 주는 상 말고 이런 대중문학작품에 주는 상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문학의 질적 향상이 결국 순수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명대사

"노 소이 코레아노, 니 소이 하포네스 조 소이 데사라이가도(나는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아닌, 떠다니는 일개 부초다)."

"우리는 나라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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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감독, 츠마부키 사토시 외 출연 / 마블엔터테인먼트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조제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할머니와 둘이 외롭게 살지요.
옛날 분 답게 할머니는 조제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일본 문화에서 과거의 관습적 행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더군요.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가문의 수치로 여기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래서 조제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바깥 나들이를 하는 시간은
새“芙?사람이 안다니는 때에 할머니가 밀어주시는 유모차에 타고서지요.
그것도 주변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재빠르게 담요를 뒤집어 써야 하고요.
그러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남자 주인공(이름이 기억 나지 않으므로... 그냥 타츠야라고 할게요)을 만납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밥이 맛있어서 자주 들락거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타츠야는 조금씩 적극적으로 조제를 돕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밖에 없었던 조제의 삶에 타츠야가 들어온 것이지요.
또래의 유일한 남성.
그리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20대의 타츠야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어찌보면 뻔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한동안 사랑타령이 참 지겨웠습니다.
소설도, 영화도, 심지어 음악마저
돌아다니는 데마다 사랑타령인데...
그게 왜 그리 짜증이 나던지요.
그래서 한동안 소설도 거의 읽지도 않고
저 역시 끄적대지도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조제... 를 보고 어디에선지 모르게 위안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꼭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어도
오로지 너 밖에 없다면 눈 멀지 않았어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계속 되지 않았어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불안해야 했었을 조제,
사랑했지만 버겁고 힘들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타츠야,
그리고 깜깜한 영화관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며
그저... 그저...
다들 이렇게 살지...라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제 이야기였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러닝타임내내 스크린 너머의 조제와 타츠야를 볼 수 있었던
그들이 가슴으로 들어왔던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보고나서 아주 뇌리에 박힌 것들...

0. 할머니~~

1. 카나이 하루키

2. SM king

3. 여관 물고기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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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SE - 비트윈 2disc, 할인행사
미하일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뻬르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 피아니스 - 하네케 감독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봤다. 우연히 얻게 된 영화였고 깐느 그랑프리라는 브랜드 네임에 혹해서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 화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눈을 크게 뜨고 옆에 앉은 오존을 멍하니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만큼 몹시나 당혹스러웠던 영화였다. 이 영화를 이해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수십번을 반복해서 본들 완전한 이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답을 여전히 멍한 얼굴로 대답하리라.

그럼에도 감상을 쓰는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기에 내가 느꼈던 단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에는 한계를 느껴 그저 느낀대로 나열해보겠다.


주인공 에리카는 슈베르트가 전공인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수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무서우리만큼 엄격한 완벽성, 그리고 언제나 얼굴을 꼿꼿하게 세운 신경증적인 자존심, 질끈 잡아매서 정리된 머리칼과 흰색과 검정색조의 변하지 않는 보수성의 상징같은 옷차림등... 처음 화면에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추악한 속내를 감춘 지성이라 불리는 것의 클리셰적인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심리학이나 이런 류의 인물을 다룬 문학이나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전형만으로도 그녀의 모든 허울 안에 가려진 것의 진실에 대해 어렴풋하게 나마 눈치를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클레메와 만나서 나누는 슈베르트와 슈만에 대한 이야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예상처럼 그녀의 숨겨진 또 하나의 모습은 일상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씩 드러난다. 엄격한 얼굴로 마치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가는 사람처럼 섹스숍에 들러서 방안에서 포르노를 보면 어떤 남자가 토정해낸 정액이 뭍은 휴지를 장갑을 낀 손으로 잡아 냄새를 맡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모습은 정말 강렬했다. 그리고 클레메의 등장과 함께 그녀의 욕망의 대상이 구체화되면서, 그것은 표면으로 솟아나기위해 꿈틀거린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클리셰화된 에리카의 캐릭터처럼 그녀의 내면의 변화를 전통적인 상징인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의 변화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파격적이고 대담한 성애와 욕망에 대한 묘사에 대한 아이러니한 도구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과잉적 해석일 수도...). 전반부 내내 변하지 않던 그녀의 레인코트와 금욕적인 검은색과 흰색이 주조를 이루는 옷차림은 클레메에게 그녀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할 때부터 붉은 계열의 현란한 옷차람으로 바뀐다. 질끈 매었던 머리는 풀어서 부드럽게 웨이브를 주고 화장기 없던 얼굴에 붉은 볼터치가 등장한다. 오렌지색 블라우스, 그리고 붉은 코트와 푸른색의 치마는 그녀의 감정의 변화를 나타낸 것일 것이다. 그리고 클레메에게 거절당하고 매도당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에리카의 옷차림. 마지막 장면에 나온 그녀 옷에 드러난 피 얼룩은 그녀에게 있어 클레메가 미친 변화의 정도를 설명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옷에 묻은 피 얼룩같은 정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물 정도의 상처 정도. 역시 재미있는 것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적극적으로 접근하며 화장실에서 그녀와의 정사(?)에 욕망과 수치심, 그리고 모멸감을 한꺼번에 드러냈던 클레메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옷차림에 있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입으로 행동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사랑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클레메의 경우에 전혀 변화가 없는 그 모습은 어쩌면 단순히 에리카의 상상속의 사랑을,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즉, 클레메와의 만남에 있어서 변화는 오로지 그녀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 비극(?)을 암시하는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클레메의 취미이다. 그는 원래 공학도이다. 그런데 작은 살롱 음악회에서 에리카를 만나고 그녀의 음악적 재능에 반해 그녀가 교수로 있는 학교로 들어온다. 그에게 피아노, 즉 음악은 그가 즐기는 아이스 하키만큼 정도의 취미인 것이다(주변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있다면 알겠지만 그들은 손가락이 상할까봐 설겆이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스하키라니!!!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들어온 학생이???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적인 배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즉, 음악이 피아노가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인 에리카와 피아노가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정도인 클레메 사이의 그 넘을 수 없는 간격이 드러난다. 그들의 매개는 바로 피아노이고 슈베르트이다. 그 매개에 대한 기본적인 사상의 차이.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상징하는 폭력적이고 남성적인 것들. 순수하게 에리카에게 다가간 클레메, 처음에 드러난 슈베르트와 클래식에 대한 그의 뛰어난 이해와 교양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지독하게 마초스럽고 폭력적인 성정의 상징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에리카가 초반에 그를 지배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환타지를 이루려고 할 때, 그의 분노와 경멸은 어쩌면 공존하고 있던 그의 내재된 폭력성과 잔인함의 반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 주도권이 그에게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암시.

그리고 에리카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은 그들의 또 다른 투영인 안나와 안나의 엄마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그들의 관계가 안나 모녀와 비슷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서로 공생하고 희생하며 증오하고 사랑해마지 않는 그 모순된 복잡한 감정이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들의 상식을 넘어선 비틀린 유대관계가 에리카에게 미쳤던 영향들은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클레메가 에리카의 게임에 대해 분노와 경멸을 바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서 폭력의 주체로 설 때 그것은 에리카와 단 둘의 상호작용이 아닌 그녀의 엄마와의 삼각구도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멍들고 초췌한 얼굴로 콘서트 장에서 클레메를 기다리던 에리카. 친구들과 함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들석하게 그녀 앞을 지나가며 "교수님의 연주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가는 클레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핸드백에서 꺼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에리카... 낡은 블라우스 위로 얼룩져 번지는 핏자국. 그대로 연주장을 빠져나가 거리로 나가는 에리카. 그리고 잠시 후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그녀가 향한 곳은 어딜까?

난 섹스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덧,
어쩌면 감독은 결국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이나 환타지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즉 클레메와의 이야기는 에리카의 환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서로가 주고받는 감정의 떨림 정도는 존재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실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래서 결국 에리카에게 남은 것은 이전과 다름없는 현실과 가슴의 핏자국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 쥔공 이름은 웰테르 클레메인데... 자꾸 헷갈려서 웰베르라고 쓰게 되서 걍 클레메로 전부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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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십계) 박스세트 - 인피니티 할인행사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Henryk Baranowski 외 출연 / 인피니티(Infinity)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사랑은 '그대와 함께 내가' 존재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며,
'자기복종'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길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연작 영화 십계(Dekalog)는 내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두 손으로 치받들어 추종하는 영화이다. 그를 숭배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영화. 비디오로 모으다 디비디가 출시된다는 얘기만 듣고 목이 빠져다 기다리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구입했었다.

사실 많이 어렵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십계가 가장 어렵다.
제목처럼 성서의 십계명 하나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영상으로 담은 것이라 특히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너무 아쉽다. 그가 그렇게 일찍 가지 않았다면 천국/연옥/지옥 삼부작으로 그의 인생에 대한 철학을 좀 더 가까이 접하고 소통할 수 있었을텐데... 그 생각만 하면 온 몸이 저릿해지며 늘 아쉽다. )
영화를 보고 나서도 디비디와 함께 들어있는 김용규씨의 해설서를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그의 설명을 보고 다시 영화를 보면 느낌이 얼마나 다르던지.
한 시간짜리 영화지만 보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곱씹고 곱씹어 생각하게 만든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7번째 계명이면서 이 연작 영화의 7번째 이야기이다.
구약 성서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인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와 동어 반복이 되는데
성경연구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사람 도둑질을 하지 말라로 해석된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있었고,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고 비쌌기에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단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으므로 그런 것 싫어하시는 분들은 읽지 말아주세요.)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런 의미에서 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를 접근해갔다.
노예라는 것은 없지만 현대에서 사람을 도둑질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간혹 뉴스에 나오는 잔혹한 범죄인 유괴, 납치, 감금 그리고 살인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는 내내 한 장면 한 장면에서 그의 사유가 흘러들어왔다.
아마도 내가 그 의미를, 그의 해석을
그동안의 내 경험을 통해 그나마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바, 마이카, 그리고 얀카.

어머니란 존재, 그리고 모성애라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통 모성애는 추앙받아야 할 최고의 사랑으로 묘사된다.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고,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치이고 지친 우리의 영혼이 마음 편히 안주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가페적인 사랑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시절에 헷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만큼이나 필독서였던 책이 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재미없어서 끝까지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뭐... 철학서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
하지만 그 제목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시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었다.


사랑에 있어서 소유와 존재만큼
그 사유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 마음의 발전에 있어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떨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을 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에리히 프롬이나 키에슬로프스키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그의 존재만으로 행복해지며 사랑을 느낀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
김춘수의 꽃처럼 의미없는 몸짓이 아닌 서로에게 아름다운 꽃이라는 것.
그와 5분간 나눈 친밀한 대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온갖 의미가 부여되는 우연,
그의 손때가 묻은 작은 메모, 그리고 같이 먹는 밥.
그런 사소한 모든 것들에서 그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우리는 행복감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곧 그의 존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서
복잡하게 얽히고 고통스러워진다.
우리는 점점 그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나만의 특별한 사람으로.
다른 그저 그런 누구와 철저하게 차별되는 존재로서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내며
그를 얽어매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만의 것이 되길 바란다.
노래에서처럼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외치면서.
그래서 고통스러워진다.
나만의 것이 아닌 그의 존재 때문에.

내 경우에는 이 과정이 모든 인간 관계에 해당된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난 그를 도둑질하고 싶어진다.
드라마에서도 종종 나오는 말처럼 그의 마음을 빼앗아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투쟁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라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유지되는 존재에 대한 존중
이 둘 사이에서 말이다.
그것이 내게 피를 흘리게 한다.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다행히, 그나마 아주 다행히
난 알고 있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할 감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노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너무나 다행히도
난 그 투쟁에서 겨우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
내가 객체가 되어버리는 이 감정에 대해서 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그를 괴롭히는지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감정은 스스로 깨닫고 인지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이다.
심지어 인식하고 있다해도 극복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한 감정이다.



에바, 마이카, 그리고 안카.

에바는 아마 끝까지 모를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과 잔인함을.
마이카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알면서도 그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소유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상처를 받았다.
안카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어리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과연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사랑은 '그대와 함께 내가' 존재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며,
'자기복종'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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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빌라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신현숙 옮김 / 책세상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파트릭 모디아노의 팔월의 일요일을 읽다가
중간에 딱 멈추고 맨 뒤의 평을 주루룩 읽었다.
뭐 딱히 재미없어서라기 보다는
원래 책을 읽기 전에 맨 뒤의 역자의 해석이나
전문가의 평을 읽고 읽는 편인데
깜빡하는 바람에... - -;;;;

그런데 평에서 모디아노가 프랑스 티비 독서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일화를 소개해주었다.
그걸 보고 "아하!"하며 무릎을 탁 치고 그때부터 모디아노의
글이 훨씬 더 잘 이해되기 시작했다.

모디아노 스타일의 글은
처음에 접했을 때는 정말 한마디로 답답함이었다.
나처럼 잔머리에 능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에게
이 사람의 지나칠 정도로 사물에의 집착과
동어 반복은 어눌하게 말하는 사람이
한 말을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또하고 또하는 느낌을 주었다.

언제나 1인칭 화자에
(두 권 밖에 안읽었지만 어쩐지 이사람이 3인칭을 쓴다는 것은 상상이 안된다.)

병적이라 생각될만치 세밀한 거리와 사물에의 묘사
(마치 마음 둘 곳 없는 사람의 안쓰러운 집착처럼 보인다)

그리고 언제나 한정된 공간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
(대부분 강둑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도 재밌는 포인트이다.
초라한 임시 거주지에서의 고독과 결국 사람들의 온기를
찾기 위해 북적이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보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느끼는 고독.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함없는 강둑의 풍경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강물의 흐름과 간혹 나타나는 계절의 변화이다.)

백수(<- 이건 어쩐지 매우 중요해보인다. 위의 행위를 하려면 직장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힘들겠지.)

그런 '나'의 곁에 잠시, 마치 환상처럼 곁에 있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여인...
(일시적 위안, 그리고 젊은 시절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것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화자가 나이를 먹으며
기성세대가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러므로써 헛된 희망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접근해서 도움을 주려하는
낯선 어른(들)
(--> 이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 여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마 이것은 '나'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가버리는
힘의 역학구도, 기성세대, 안정이라는 이름의 안주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과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헛(?)늙은 화자.
(시간이 흘렀지만,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기억속의 여인과 그 장소에 머무르고 있는 화자.
어찌보면 모디아노 작품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이 변한 것처럼, 시간이 흐르고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그곳에 있는, 단지 관찰의 시점이 바뀌어
버린 슬픈 자아...)


원래 꿀꿀함은 매우 좋아하지 않지만(싫어하지만)
특히 1인칭 시점의 우울한 감성은 딱 질색임에도
모디아노의 이 우울함(어두움)은 매우 깊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병신같은 인간이라고 무시하게되는 게 아니라 쯧쯧쯧 혀를 차게 된다).
그리고 어눌하게 반복되는 화자(망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를 사로잡는 시간대와 장소, 그리고 소소한 추억의 사물들이 읽는 이의 머리속에 각인되어 굉장히 이미지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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