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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바흐 : 호프만 이야기
TDK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오펜바흐 : 호프만 이야기 | 원제 Offenvach : Les Contes d´Hoffmann
Bryn Terfel | TDK

Disc - 2 장
상영시간 - 173분
자막 -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화면비율 - 16:9
오디오 - DTS & DD 5.1 & PCM Stereo, NTSC
지역코드 - 0


유럽 오페라 연출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로버트 카르센의 경이로운 무대를 담은 바스티유 극장의 2002년 10월 실황에는 쓰리 테너급의 명가수로 인정받는 실력파 닐 쉬코프(호프만)를 비롯하여 데지레 랑카토레(올랭피아), 루스 앤 스웬슨(안토니아), 베아트리스 우리아-몽종(줄리에타), 수잔 멘처(뮤즈, 니클라우스) 등 세계적 가수들이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여기에 브린 터펠까지 악마 역으로 가세했다. 특히 프랑스가 자랑하는 메조소프라노 베아트리스 우리아-몽종의 고혹적 카리스마와 대담한 연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영상물이다.

오페라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좀 애매하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과 오페라를 좋아하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 챙겨서 보느냐고 묻는다면, 챙겨서 보고 싶긴 한데, 까다롭다 축에 들어간다. 다른 클래식 카데고리에 비해 오페라에 대해서는 많이 까다롭게 된다.
가창력은 필수에 무대, 연기, 의상 등 클래식의 종합예술인지라 전체적인 완성도에 따라서 이게 참 오페라를 좋아할 수도 있고, 지겹게 느낄 수도 있다. 특히, 프리마돈나 하나 정도 대표하는 가수만 있는 경우... 굉장히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오페라의 질은, 정말 그 오페라단의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물론 주인공인 소프라노와 테너의 유명세(가창력)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떠받쳐주는 나머지 가수들의 실력도 무지하게 중요하고 현대에 와서는 연출가의 능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솔직히 고백컨대, 그래서 난 (스스로도 매우 재수없다는 것을 알지만) 국내 오페라단의 공연은 보러 가지 않는다ㅠㅜ(이따금 실력 체크를 위해 몇 년에 한번씩은 가지만... 늘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 오페라단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역사와 그 문화를 향유하는 관객의 스펙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꼭 오페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공연문화 전반에 걸쳐 길게 내다보는 안목이 깊지 못함은 참으로 아쉽고 아쉽다.) 대신 이탈리아, 프랑스 오페라단의 내한 공연의 경우, 거금을 주고라도 반드시 가는 편이고, 후우, 공연 다녀온 후에도 정말 그 비싼 표 값이 아깝다는 생각을 안하니, 오페라의 경우 만큼은 어쩔 수 없이 사대주의다. ㅠㅜ
하지만 내한 공연은 자주 없고(오페라는 무대장치만 해도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 듯) 돈도 돈이고;;; 그래서 오페라의 경우는 DVD를 많이 즐기는 편이다. 특히 TDK사에서 출시하는 오페라는 정말 훌륭하다.

'호프만의 이야기'도 여러 레이블에서 나왔는데 고민하다 TDK를 선택, 정말 재밌게 봤다. ㅠㅜ
위의 선전이 아니더라도, 호프만 역의 닐 쉬코프의 가창력과 연기력은 정말 환상적이었고, 호프만을 끝없이 괴롭히는 브린 터펠의 그 섬세한 연기와 바닥을 쫙 까는 근사한 바리톤은... 찌릿찌릿. 뮤즈와 니클라우스를 연기한 수잔 멘처의 메조는 우아하면서도 엄격한 게 상당한 호소력을 자랑했다. 공연 후반부 줄리에타 역인 우리아-몽종의 열연은 세포까지 건드리는 짜릿함과 매혹으로 가득해서... 후우 노래 하나가 끝날 때마다 막 혼자 박수치고 열광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줄리에타와 니클라우스의 이중창(보통 호프만의 뱃노래라고 일컫는)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이렇게 가수들 하나하나의 능력도 좋았지만,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 그리고 현대적이면서도 원작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는 무대는 두 시간이 넘는 공연에 그대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음악에 취하고 이야기에 빠져서 정말 제대로 즐겼다. 완성도에 어찌나 감탄했는지 1부를 보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누가 연출했나 체크까지 들어갔다.(로버트 카르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유럽 오페라 연출에서 뜨는 태양이란다;;)

하나 재밌는 것은,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는 갈라로도, 공연으로도 종종 즐기던 작품이었는데 정작 원작에 대해서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 생각도 안했다는 점. 그런데 공연실황 디비디를 다 보고 나서 한 번 더 보고 서울로 돌아올 때 펴든 책이 독일작가 E.T.A.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읽다가 '에에? 어째 호프만 이야기랑 비슷하잖아?'는 생각이 들어 찾아봤더니 오펜바흐의 이 오페라, 좋아하는 발레작품 '코펠리아'의 원작이 바로 '모래사나이'란다;;; 참내 인연이 보통은 아닌게, 오페라를 다 보고 난 후에 펴든 책이 그 원작이라니. 때로는 이런 기막힌 우연이 취미생활을 더욱 발랄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작가 호프만은 독일에서는 그닥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오히려 프랑스에게 인기를 끌었단다. 하하, 그러니 고민하다 파리 국립 오페라단 작품을 택한 것도, 우연이지만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던 듯.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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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엑스트라바간자 [한글자막] - 베르비에 음악제 10주년 기념 콘서트 실황
키신 (Evgeny Kissin) 외 / 소니뮤직(DVD)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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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황은 사서 보는 게 결국은 이득이란 게 평소의 지론.

미디어와 통신의 발달을 쌍수 들고 환영할 때는 바로 이런 때다.
클래식이나 오페라, 연극 등 과거 소수 있는자들을 위한 고급 유흥거리가 일반 서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다 기록장치의 발달 아니겠는가.
마음이야 스위스 베르비에로 날아가 그 현장에서 팔딱팔딱 뛰는 생생한 콘서트를 두 눈으로, 두 귀로, 오감, 육감 다 동원해서 즐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 가까운 일본도 힘든 판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근 5년 전에 큰 맘 먹고 갖춰놓은 홈 씨어터 덕에 그나마 그럭저럭 맛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해야겠지.
오프닝 크레딧부터 두근두근이다.
익숙한 몬스터들의 얼굴들이 하나 하나 스쳐지나가는데, 스위스 베르비에의 아름다운 풍경은 그 얼굴들에 묻혀버린다.


이윽고 시작하는 모짜르트 4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세상에 아르헤리치와 키신의 협연이라니 ;ㅁ; 아이고, 이런 근사한 광경을 어디가서 또 볼 수 있을까나. 근데 아르헤리치 아줌마, 젊었을 때보다 많이 착해진 얼굴;;; 하핫, 모님 덕에 아르헤리치를 알고 그녀의 치열한 쇼팽을 듣고 반했는데, 영화 오라버니는 무션 아줌이라며 연주는 좋지만 인간성이 별로라고 에비에비하는 것을, 친구도 아닌데 그녀의 인간성이 어떨지 어떻게 아냐며 발끈, 난 연주만 좋으면 다 좋아~♡라는 오묘한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각설하고 아르헤리치 여사님과 우리의 키신 옵빠의 연주는, 그저 두 사람이 이따금 한번씩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를 나누기만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몹시나 좋았던 것은 급조된 해피버스데이 오케스트라(웃음)의 해피 버스데이 변주곡들.

세상에 저렇게 유쾌한 변주곡이라니. 한 마디로 향연이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리는. 여전히 잘 웃는 장영주는 참으로 예뻤고(하지만 연주활동을 오래하면 왜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가들은 좀 느끼해지는 걸까?) 은근히 기돈 크레머와의 친근함이 드러나서, 괜히 흐흠~하며 지켜보고,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아저씨! 아저씨 골드베르그 베리에이숑 디게 좋아해요;ㅁ;), 미샤 마이스키등과 함께 즐겁과 화사한 협연을 보여준다. 처음엔 기본 테마를 간단히 소개하고 나서(웃음) 하이든 풍으로, 베토벤 곡과 더불어, 그리고 탱고 리듬에 맞춰, 앤드 마지막으로 집시풍의 헝가리 차르디쉬로 마무리하는 연주 릴레이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저런 생일 축하 노래 받으면, 황홀해서 잠 다잔다. 

전체 연주곡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바흐의 4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아아, 정녕 황홀했다. 해피버스데이 오케스트라와 아르헤리치, 키신, 르바인, 플레트네프가 함께 하는 바흐라니.
시작부터 감동에 취하는 나머지 어쩌구 저쩌구 분석할 틈 없었다.
그냥 몸으로 느끼고 귀로 즐기고 눈으로 황홀해하면서 빠져들었음 ;ㅁ;
나중에 또 들어야지! 


그리고 이어지는 8대의 피아노가 화려하게 협연하는 연주곡들.
크으, 개인적으로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가장 좋았다. 특히 젊은 연주가들을 많이 비춰주는데, 나의 사랑 키신과 너무 나대는 랑랑의  손가락이 부러질 듯 파워풀하게 뿜어내는 에너지가 그대로 클라이막스로~~(쓰러짐).
근데 랑랑, 얘 왜 이렇게 튀냐? 보니까 재미난 게 개 중에 그래도 젊은 장영주, 키신, 랑랑의 옷차림이 다른 연주가들과 차이가 졌다. 장영주는 화려한 반짝이 드레스를, 키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크림색 턱시도, 그리고 랑랑은 파란색 실크의 중국풍 의상을 입고 나왔는데, 나름 베리에이션이고 기획이란 생각이 들어 재미났다. 그런데 랑랑! 얘 키신 옆에 바로 앉아서 카메라가 참 많이도 비춰주는데... 아, 그래! 만일 노다메가 연주하면 요런 스타일이 아닐까 싶게 연주한다(웃음) 어쨌든 정말 튄다. 만화에 나올법한 음악에 취해 캐오버해서 연주하는 스타일. 조신하게 앉아서 차분히 연주하는 키신과 어찌나 대조가 되는지. 눈도 왕방울처럼 떴다가 막 눈을 감고 감정에 취했다가, 대따 웃긴다. 혼자만의 연주였으면 그래도 귀엽게 봐줬을텐데 이 놈 땜시 키신이 자주 나오질 못해서(이, 이쁜 녀석 ;ㅁ;) 괜히 미워짐.
왕벌의 비행은 기대는 가장 많이 했는데(곡의 특성상 그 붕붕 거리는 소리가 8대의 피아노로 펼쳐질 때의 장관을 막 황홀하게 상상했음) 역시나 쓸데 없는 망상적 기대 탓에 감동은 쫌 반감. 예상외로 좋았던게 stars and stripes와 한물 흘러간 파퓰러 곡들의 변주곡들. 유쾌하고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연주하는 이들도 부담없이 즐기면서 연주하는 게 보여서 좋았다. 


근디 타이틀에 문제가 있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
9번째 트랙에서 10번째로 넘어갈때 듀얼레이어라서 그런건지 화면 멈춤이 생기는데,
문제는 그냥 멈추기만 하는게 아니라 막 지직댄다는 거.
두번째는 스페셜 피처로 제작과정을 보는데 르바인의 인터뷰 한참 하다가 뚝 끝난다;;; 이거 원래 이런 건지 어떤건지. 알라딘에 문의는 해놨는데 품절로 되어있어 좀 걱정;;;; (-> 오 이유를 알았다. Pal 방식 dvd를 NTSC로 전환하면서 생긴 문제란다.. 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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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감독, 츠마부키 사토시 외 출연 / 마블엔터테인먼트 / 200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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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할머니와 둘이 외롭게 살지요.
옛날 분 답게 할머니는 조제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일본 문화에서 과거의 관습적 행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더군요.
집안에 장애인이 있으면 가문의 수치로 여기고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래서 조제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바깥 나들이를 하는 시간은
새“芙?사람이 안다니는 때에 할머니가 밀어주시는 유모차에 타고서지요.
그것도 주변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재빠르게 담요를 뒤집어 써야 하고요.
그러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남자 주인공(이름이 기억 나지 않으므로... 그냥 타츠야라고 할게요)을 만납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밥이 맛있어서 자주 들락거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타츠야는 조금씩 적극적으로 조제를 돕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밖에 없었던 조제의 삶에 타츠야가 들어온 것이지요.
또래의 유일한 남성.
그리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20대의 타츠야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어찌보면 뻔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한동안 사랑타령이 참 지겨웠습니다.
소설도, 영화도, 심지어 음악마저
돌아다니는 데마다 사랑타령인데...
그게 왜 그리 짜증이 나던지요.
그래서 한동안 소설도 거의 읽지도 않고
저 역시 끄적대지도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조제... 를 보고 어디에선지 모르게 위안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꼭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어도
오로지 너 밖에 없다면 눈 멀지 않았어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계속 되지 않았어도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불안해야 했었을 조제,
사랑했지만 버겁고 힘들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던 타츠야,
그리고 깜깜한 영화관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며
그저... 그저...
다들 이렇게 살지...라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제 이야기였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러닝타임내내 스크린 너머의 조제와 타츠야를 볼 수 있었던
그들이 가슴으로 들어왔던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보고나서 아주 뇌리에 박힌 것들...

0. 할머니~~

1. 카나이 하루키

2. SM king

3. 여관 물고기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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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SE - 비트윈 2disc, 할인행사
미하일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뻬르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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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니스 - 하네케 감독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봤다. 우연히 얻게 된 영화였고 깐느 그랑프리라는 브랜드 네임에 혹해서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 화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눈을 크게 뜨고 옆에 앉은 오존을 멍하니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만큼 몹시나 당혹스러웠던 영화였다. 이 영화를 이해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수십번을 반복해서 본들 완전한 이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답을 여전히 멍한 얼굴로 대답하리라.

그럼에도 감상을 쓰는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흥미를 끄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기에 내가 느꼈던 단상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에는 한계를 느껴 그저 느낀대로 나열해보겠다.


주인공 에리카는 슈베르트가 전공인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수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무서우리만큼 엄격한 완벽성, 그리고 언제나 얼굴을 꼿꼿하게 세운 신경증적인 자존심, 질끈 잡아매서 정리된 머리칼과 흰색과 검정색조의 변하지 않는 보수성의 상징같은 옷차림등... 처음 화면에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추악한 속내를 감춘 지성이라 불리는 것의 클리셰적인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심리학이나 이런 류의 인물을 다룬 문학이나 영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전형만으로도 그녀의 모든 허울 안에 가려진 것의 진실에 대해 어렴풋하게 나마 눈치를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클레메와 만나서 나누는 슈베르트와 슈만에 대한 이야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예상처럼 그녀의 숨겨진 또 하나의 모습은 일상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씩 드러난다. 엄격한 얼굴로 마치 병원에 진찰을 받으러가는 사람처럼 섹스숍에 들러서 방안에서 포르노를 보면 어떤 남자가 토정해낸 정액이 뭍은 휴지를 장갑을 낀 손으로 잡아 냄새를 맡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던 모습은 정말 강렬했다. 그리고 클레메의 등장과 함께 그녀의 욕망의 대상이 구체화되면서, 그것은 표면으로 솟아나기위해 꿈틀거린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클리셰화된 에리카의 캐릭터처럼 그녀의 내면의 변화를 전통적인 상징인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의 변화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파격적이고 대담한 성애와 욕망에 대한 묘사에 대한 아이러니한 도구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과잉적 해석일 수도...). 전반부 내내 변하지 않던 그녀의 레인코트와 금욕적인 검은색과 흰색이 주조를 이루는 옷차림은 클레메에게 그녀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할 때부터 붉은 계열의 현란한 옷차람으로 바뀐다. 질끈 매었던 머리는 풀어서 부드럽게 웨이브를 주고 화장기 없던 얼굴에 붉은 볼터치가 등장한다. 오렌지색 블라우스, 그리고 붉은 코트와 푸른색의 치마는 그녀의 감정의 변화를 나타낸 것일 것이다. 그리고 클레메에게 거절당하고 매도당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에리카의 옷차림. 마지막 장면에 나온 그녀 옷에 드러난 피 얼룩은 그녀에게 있어 클레메가 미친 변화의 정도를 설명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저 옷에 묻은 피 얼룩같은 정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아물 정도의 상처 정도. 역시 재미있는 것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적극적으로 접근하며 화장실에서 그녀와의 정사(?)에 욕망과 수치심, 그리고 모멸감을 한꺼번에 드러냈던 클레메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옷차림에 있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입으로 행동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사랑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클레메의 경우에 전혀 변화가 없는 그 모습은 어쩌면 단순히 에리카의 상상속의 사랑을,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즉, 클레메와의 만남에 있어서 변화는 오로지 그녀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 비극(?)을 암시하는 장치였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클레메의 취미이다. 그는 원래 공학도이다. 그런데 작은 살롱 음악회에서 에리카를 만나고 그녀의 음악적 재능에 반해 그녀가 교수로 있는 학교로 들어온다. 그에게 피아노, 즉 음악은 그가 즐기는 아이스 하키만큼 정도의 취미인 것이다(주변에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있다면 알겠지만 그들은 손가락이 상할까봐 설겆이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스하키라니!!!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들어온 학생이???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적인 배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즉, 음악이 피아노가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인 에리카와 피아노가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정도인 클레메 사이의 그 넘을 수 없는 간격이 드러난다. 그들의 매개는 바로 피아노이고 슈베르트이다. 그 매개에 대한 기본적인 사상의 차이.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상징하는 폭력적이고 남성적인 것들. 순수하게 에리카에게 다가간 클레메, 처음에 드러난 슈베르트와 클래식에 대한 그의 뛰어난 이해와 교양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지독하게 마초스럽고 폭력적인 성정의 상징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에리카가 초반에 그를 지배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환타지를 이루려고 할 때, 그의 분노와 경멸은 어쩌면 공존하고 있던 그의 내재된 폭력성과 잔인함의 반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 주도권이 그에게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암시.

그리고 에리카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은 그들의 또 다른 투영인 안나와 안나의 엄마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그들의 관계가 안나 모녀와 비슷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서로 공생하고 희생하며 증오하고 사랑해마지 않는 그 모순된 복잡한 감정이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들의 상식을 넘어선 비틀린 유대관계가 에리카에게 미쳤던 영향들은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클레메가 에리카의 게임에 대해 분노와 경멸을 바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서 폭력의 주체로 설 때 그것은 에리카와 단 둘의 상호작용이 아닌 그녀의 엄마와의 삼각구도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멍들고 초췌한 얼굴로 콘서트 장에서 클레메를 기다리던 에리카. 친구들과 함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떠들석하게 그녀 앞을 지나가며 "교수님의 연주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가는 클레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핸드백에서 꺼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에리카... 낡은 블라우스 위로 얼룩져 번지는 핏자국. 그대로 연주장을 빠져나가 거리로 나가는 에리카. 그리고 잠시 후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그녀가 향한 곳은 어딜까?

난 섹스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덧,
어쩌면 감독은 결국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이나 환타지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즉 클레메와의 이야기는 에리카의 환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서로가 주고받는 감정의 떨림 정도는 존재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실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래서 결국 에리카에게 남은 것은 이전과 다름없는 현실과 가슴의 핏자국 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 쥔공 이름은 웰테르 클레메인데... 자꾸 헷갈려서 웰베르라고 쓰게 되서 걍 클레메로 전부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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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십계) 박스세트 - 인피니티 할인행사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Henryk Baranowski 외 출연 / 인피니티(Infinity)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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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대와 함께 내가' 존재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며,
'자기복종'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길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연작 영화 십계(Dekalog)는 내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두 손으로 치받들어 추종하는 영화이다. 그를 숭배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영화. 비디오로 모으다 디비디가 출시된다는 얘기만 듣고 목이 빠져다 기다리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구입했었다.

사실 많이 어렵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십계가 가장 어렵다.
제목처럼 성서의 십계명 하나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영상으로 담은 것이라 특히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너무 아쉽다. 그가 그렇게 일찍 가지 않았다면 천국/연옥/지옥 삼부작으로 그의 인생에 대한 철학을 좀 더 가까이 접하고 소통할 수 있었을텐데... 그 생각만 하면 온 몸이 저릿해지며 늘 아쉽다. )
영화를 보고 나서도 디비디와 함께 들어있는 김용규씨의 해설서를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그의 설명을 보고 다시 영화를 보면 느낌이 얼마나 다르던지.
한 시간짜리 영화지만 보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곱씹고 곱씹어 생각하게 만든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7번째 계명이면서 이 연작 영화의 7번째 이야기이다.
구약 성서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8계명인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와 동어 반복이 되는데
성경연구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사람 도둑질을 하지 말라로 해석된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있었고,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고 비쌌기에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단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으므로 그런 것 싫어하시는 분들은 읽지 말아주세요.)




키에슬로프스키는 이런 의미에서 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를 접근해갔다.
노예라는 것은 없지만 현대에서 사람을 도둑질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간혹 뉴스에 나오는 잔혹한 범죄인 유괴, 납치, 감금 그리고 살인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는 내내 한 장면 한 장면에서 그의 사유가 흘러들어왔다.
아마도 내가 그 의미를, 그의 해석을
그동안의 내 경험을 통해 그나마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바, 마이카, 그리고 얀카.

어머니란 존재, 그리고 모성애라는 것은 무엇일까.

대개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통 모성애는 추앙받아야 할 최고의 사랑으로 묘사된다.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고,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사회에서 상처받고 치이고 지친 우리의 영혼이 마음 편히 안주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가페적인 사랑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시절에 헷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만큼이나 필독서였던 책이 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재미없어서 끝까지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뭐... 철학서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
하지만 그 제목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시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었다.


사랑에 있어서 소유와 존재만큼
그 사유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 마음의 발전에 있어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떨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을 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에리히 프롬이나 키에슬로프스키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그의 존재만으로 행복해지며 사랑을 느낀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것.
김춘수의 꽃처럼 의미없는 몸짓이 아닌 서로에게 아름다운 꽃이라는 것.
그와 5분간 나눈 친밀한 대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온갖 의미가 부여되는 우연,
그의 손때가 묻은 작은 메모, 그리고 같이 먹는 밥.
그런 사소한 모든 것들에서 그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우리는 행복감에 빠진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곧 그의 존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서
복잡하게 얽히고 고통스러워진다.
우리는 점점 그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나만의 특별한 사람으로.
다른 그저 그런 누구와 철저하게 차별되는 존재로서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내며
그를 얽어매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만의 것이 되길 바란다.
노래에서처럼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외치면서.
그래서 고통스러워진다.
나만의 것이 아닌 그의 존재 때문에.

내 경우에는 이 과정이 모든 인간 관계에 해당된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난 그를 도둑질하고 싶어진다.
드라마에서도 종종 나오는 말처럼 그의 마음을 빼앗아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투쟁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라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유지되는 존재에 대한 존중
이 둘 사이에서 말이다.
그것이 내게 피를 흘리게 한다.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다행히, 그나마 아주 다행히
난 알고 있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할 감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노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너무나 다행히도
난 그 투쟁에서 겨우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
내가 객체가 되어버리는 이 감정에 대해서 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 그를 괴롭히는지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감정은 스스로 깨닫고 인지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이다.
심지어 인식하고 있다해도 극복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한 감정이다.



에바, 마이카, 그리고 안카.

에바는 아마 끝까지 모를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무게감과 잔인함을.
마이카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알면서도 그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소유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상처를 받았다.
안카는 어떻게 될까.
그녀는 어리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과연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사랑은 '그대와 함께 내가' 존재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며,
'자기복종'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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