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 사회 - 감정 과잉은 어떻게 우리 삶을 지배하는가
기타 야코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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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마저 타인과의 과도한 접촉을 피하라고 배우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자신이 뭘 원하지 않는지, 어떤 것이 기분 나쁜지를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중략) 이때 많은 이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은 '선 긋기'와 회피다. (P.10, 들어가는 글)

최근 유튜브 썸네일에 이끌려 김경일 교수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요즘의 감정 과잉 현상과 언어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바쁠수록 자극적인 것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쓸데없이 바쁜 감정의 과잉 시대로 이어지면서 ‘폭망’, ‘극혐’과 같은 극단적인 표현의 사용도 늘어났다는 설명이었다. 감정 표현을 대신하는 신조어도 끊임없이 생겨난다. ‘짜증 난다’를 ‘샤갈’, ‘신난다’를 ‘야르’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나도 한동안 아들이 “야르!”를 외쳐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왜 저런 외계어를 쓰는지 의아했다. 그러다 유튜브 속에서 모두가 ‘야르’를 외치는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이것도 트렌드로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조차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몰입 사회』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무엇이 우리의 감정을 결정하는지, 우리는 왜 특정한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지,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정에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1.감정은 전염된다

_ 우리가 많은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그저 그 감정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내 앞에서 그 감정을 드러내어 나도 그 감정에 전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간 거리를 두고서 내가 어떤 감정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고, 자리를 내주고 싶은지를 성찰해보는 것은 분명 아주 바람직하다. (P.56-57)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염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함께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쉽게 동조한다. 어쩌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유대감을 형성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갖게 된 자연스러운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불평이 많은 사람 옆에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순간 나 역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타인의 감정이었는데 어느새 내 감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에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주변의 감정에 맞춰주다 보면, 나 역시 모르는 사이 그 감정에 전염되기 쉽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감정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말 내 것인지 한 번쯤 멈춰서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2.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_ 대부분의 감정 논의는 한 개인의 이력이나 상황의 어떤 요인이 그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의 원인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야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현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사실 수많은 부정적 감정은 기질 탓이다. 이런 경우 개인의 과거를 아무리 헤집어봐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따라서 첫째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유익하다. (P.86)

책에서는 도전을 앞두고 있거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대처 방식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상황 지향적인 사람은 생각이 현재의 상황에 집중되다 보니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반면, 행동 지향적인 사람은 힘든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버리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 역시 어느 정도는 기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 지향적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성향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목표나 원하는 상태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대체로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것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는 데 더 익숙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부정적인 상태를 피하려고만 하면 오히려 그 감정에 더 오래 붙잡힐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애쓰기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을 바라보고 그쪽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3.타인도 생각하라

_ 자기돌봄을 강조하고 자기감정과 욕구에 주목하는 최근의 추세는 타인의 욕구를 무시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욕구에 눈을 돌리라고 외친다. (p.227)

_ 재미나게도 최근 들어 고독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정확히 이런 현상들을 반영한다. 그런데도 그것이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선을 그어대는 현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고민하고, 선 긋기를 멈출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고독을 퇴치하자며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p.235)

요즘 세상은 지나치게 ‘자기돌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만 힘들어도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지나치게 깊이 파고드는 것이 오히려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있기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시선을 전환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만이 감정을 돌보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나의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감정 돌봄’이라는 말을 꽤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감정에 대한 반응 역시 과유불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라우마, 공황장애, ADHD와 같은 용어가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면서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언어를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언어가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는 데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불안이나 슬픔, 집중력의 흔들림까지 특정한 틀 안에서 해석하면서 스스로를 그 감정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감정과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렇다면 감정을 해석하는 언어가 풍부해진 시대에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데에도 훨씬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그 안에서 문제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지금 내가 가진 것과 앞으로 원하는 것을 바라보는 연습도 필요하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모든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거리를 두고, 때로는 흘려보내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며 감정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

『과몰입 사회』는 감정이 넘쳐나는 시대에 감정에도 적당한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RHK코리아 #장혜경옮김 #감정과잉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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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입문하기 - 삶의 방식에서 살아 있음의 철학까지, 인류학의 가장 위대한 질문들
오쿠노 카츠미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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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입문하기

_우리와 전혀 다른 규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존재하는 방식을 아는 것이야말로 인류학의 묘미입니다. (p.43)

인류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서로 다른 사회와 문화는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지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연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인류학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항해시대의 유럽인들이 바다 건너 미지의 ‘타자’를 만나게 된 순간과 맞닿아 있다고 한다.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을 발견하면서, 유럽인들은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문명화된’ 유럽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규정했고, 인류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문헌만으로는 다른 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직접 현지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며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관찰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인류학자들이 작성한 필드 조사는 자료로 축적되었고, 오늘날의 인류학이 만들어졌다.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말리노프스키가 트로브리안드 제도를 연구했을 때의 이야기다. 트로브리안드 제도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돌아와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녀의 성교가 임신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섬을 떠나 돈을 벌던 남편이 장기간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아내가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은 것을 알게 되더라도 아내를 비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아이를 사랑하고 애지중지 길렀다.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상식이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인류학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 내가 가진 기준이 과연 보편적인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특히 세대와 젠더를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인류학자들이 가진 ‘타자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내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먼저 이해해보는 것. 상대를 나의 기준으로 해석하기보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려는 자세 말이다.

이 책은 작년에 읽었던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일본인 인류학자로, 23살부터 탄자니아를 드나들며 스와힐리어를 배우고 그들의 삶과 관습을 참여 관찰했다고 한다.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홍콩의 청킹맨션에 체류하며 탄자니아인들의 비즈니스와 삶의 방식을 참여 관찰하고 펴낸 책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이다. 홍콩에 사는 탄자니아인들의 삶을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기록한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난민, 불법 체류자, 성 노동자 등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신뢰’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 죽으면 시신을 고국으로 보내기 위해 조합원들이 기부금을 모으는 모습을 보면서는, 서로의 삶을 완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어려운 순간에는 서로를 돕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제도에 온전히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처럼 인류학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양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인류학자의 몫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경험한 세계와 내가 속한 사회의 규범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인류학은 그 틀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유일한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_필드에서 사람들로부터 배우려면 '타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든 그저 우리의 '지식'을 늘리려고 그 말과 행동을 자료로만 해석한다면 이는 '타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논의를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필드 사람들의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풍요로워진 우리의 상상력에 대해 논의해나가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전합니다. (p.179)

AI로 무엇이든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과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내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세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려는 것.

어쩌면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갈라파고스 #청킹맨션의보스는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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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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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노동은 왜 그렇게 확고하게 여성들의 몫이 되었는가? 우리의 성격과 선호가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말하는 문화적 각본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는 성격 본질주의 서사는 이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p.281)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이 설명한 성향들은 매우 성별화되어 있었다. 즉, 여성들은 초인으로 묘사되고, 남성들은 허당으로 묘사되었다. (중략) 그러나 남성과 여성에게 수용 가능한 활동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는 반면, 수용 가능한 자아의 범위는 그만큼 빠르게 확장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는 행위는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생각, 주의, 인지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p.282)

이 책은 94쌍의 커플을 대표하는 172명의 부모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가정 내에서 인지노동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배분되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인지노동이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일련의 사고과정을 말한다. 샴푸가 다 떨어졌으면 사야 하고, 아이들의 방학 일정에 맞춰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며, 가족의 생일을 준비하고, 주말에 무엇을 할지 계획해야 한다. 이처럼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필요한 일들이다.

보통 가사노동이라고 하면 빨래, 요리, 설거지, 청소처럼 눈에 보이는 행위를 떠올린다. 그래서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말할 때도 이런 행위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머릿속으로 계속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일,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계절이 바뀌면 아이의 옷장을 정리해야 하고, 내복이 작아졌다면 새로 주문해야 한다. 이불을 세탁하고, 계절에 맞는 이불을 꺼내야 한다. 식재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을 보고, 아이들의 방과후활동을 제때 신청해야 한다. 늘 예상하고,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은 가시성이 높지 않고 중대성도 낮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고, 그 가치를 쉽게 인정받기도 어렵다. 이에 비하면 휴가 계획은 일회적인 일이지만 오히려 훨씬 가시적이다. 반면 식재료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을 보고, 아이들의 방과후활동을 제때 신청하는 일은 어떤 목록에 올릴 만큼 중대한 일도 아니고 그저 일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대개는 여자의 몫이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은 집안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모호한 일을 담당하고, 남편들은 “이러이러한 것을 해달라”고 요청받으면 그 일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가정이라는 맥락에서 왜 여성들이 인지노동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지, 왜 인지노동의 배분이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한다.

가정에서 여성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러다 보면 그 역할이 결국 굳어져 여성이 ‘초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인지노동의 성별 분업은 국적이나 직업, 경제적 상황을 떠나 상당히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 책의 결론을 들여다봐도 당장 바꿀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가정에서의 불평등한 인지노동은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회적 힘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파트너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인지노동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외주화할 수 없는 인지노동에 얼마나 많은 정신을 쏟고 있는지, 그 부담을 상대방이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분명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집안일이 왜 이렇게 많지?”라고 의문을 가졌던 모든 것들이 이 책을 읽고 나니 명료해진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을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로 경제성을 따지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는 인지노동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 행위보다 그 행위를 하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적 노동이 훨씬 클 때가 많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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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머신 - AI는 우리가 위로받고 연결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제임스 멀둔 지음, 송이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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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머신

_ 나는 인간이 고작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의식을 업로드할 수 있는 계산기계에 불과하다는 시각에 반대한다. 그러한 발상은 인간이 몸으로 겪으며 느끼는 주관적 경험의 복잡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인간의 본질은 개인의 두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을 이루는 촘촘한 관계망과 사회성에 깃들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p.55)

이 책은 AI가 친구, 연인, 심리치료사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사례들을 소개한다. 내 주변에서도 배우자와 다툰 뒤 AI와 대화를 나눈다거나, 심리치료만큼 AI와의 대화가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물론 대부분은 책 속 사례처럼 AI에 깊이 몰입하기보다는 현실의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AI를 하나의 도구처럼 활용한다.

그럼에도 책 속 이야기가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존재이고, 그 욕구를 꼭 사람만이 아니라 AI를 통해서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로 인해 인간의 소통이나 연결방식이 변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_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챗GPT를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정서적 결핍을 드러내 가족과 친구들을 지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챗GPT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해로운 감정을 모두 털어내게 해주는 일종의 ‘감정 쓰레기통’과 같았다. (p. 217)

1.이해받고 싶은 욕구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친구와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가 소중한 이유도 바로 그 공감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관계에서 같은 수준의 공감을 기대할 수는 없다. 관계마다 나눌 수 있는 이야기와 감정의 깊이가 다르다. 그래서 때로는 AI가 감정을 정리하거나 마음을 환기하는 창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을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은 AI만이 가진 장점이다.

_ AI동반자가 아무리 생명체처럼 느껴지고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감을 줄지라도 본질은 기업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상품이다. 이들은 사용자가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을 우선시한다. 구독 상품을 판매하든, 데이터를 수집하든, 광고를 노출하든 결국 수익 창출이 목적이다. (p.345)

2.AI 역시 비즈니스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AI는 영리 기업이 운영하는 서비스라는 점이다. 문서를 작성해 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를 건네는 모든 기능은 결국 하나의 상품으로 제공된다.

무료로 고민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는 기업의 서비스 개선이나 수익 모델과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AI와의 관계를 순수한 인간관계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기업의 목표는 사용자의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서비스 운영과 수익 창출이다. 그렇기에 사용자의 장기적인 이익과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AI가 위로를 줄 수는 있지만, 그 관계가 친구와 같은 상호적인 관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_ 다시 말해 자신만의 욕구나 욕망이 없는 사회적 객체와 일방적 관계를 맺는 것은 타인의 삶에 실질적 영향을 주며 얻을 수 있는 만족감과 목적의식을 스스로 박탈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관계에서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 수 없다. (p.102)

3.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해 배운다

AI는 이제 인간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서적 지지와 조언에서도 뛰어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AI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AI와의 대화는 인간과의 상호작용과는 다르다. AI는 내 감정을 받아주고 반응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변화하는 관계는 아니다. 자칫하면 나 자신의 생각 속에서만 맴도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사회생활에서는 말보다 표정과 분위기를 읽고, 상대가 말하지 않은 맥락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거리와 예의를 배운다. 때로는 갈등을 겪고, 오해를 풀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이런 거칠고 불편한 경험들까지 포함해 인간관계는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대부분 AI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진정한 관계에서 얻는 상호성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배움이 아닐까.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학교를 다니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AI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는 사례도 있지만, 10여 년 전 영화 <Her>를 보며 상상했던 미래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는 것처럼,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머지않아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소통 방식을 바꾸어 놓았듯 AI 역시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본질까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존재이며, 진정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어떤 기술도 완전히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가치다.

AI가 점점 더 많은 것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무엇을 기술에 맡기고 무엇만큼은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_ 기업이 정서적 의존성을 수익 창출 수단으로 활용하는 탓에 사용자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기 쉽다. 대다수 사용자는 AI동반자와 소통할 때 자신의 행동이 치밀한 분석과 예측, 조종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정서적으로 취약한 개인과 첨단 AI기술로 무장한 영리기업 사이에는 거대한 권력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p.327)

#웅진지식하우스 #제임스멀둔 #송이루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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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머신 - AI는 우리가 위로받고 연결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제임스 멀둔 지음, 송이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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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인간의 소통방식을 바꾼 것처럼 AI는 또 무엇을 바꿔놓을지. 책이 흥미로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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