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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없는 미래 - 실물과 기술이 재편하는 21세기 화폐 질서
이하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8월
평점 :
_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의 책 '로마인 이야기'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를 통해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빚의 규모가 작을 때는 채권자가 '강자'고 채무자가 '약자'지만 그 규모가 커지면 이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이었다. (p.26)
미국의 총부채가 40조 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국채 재매입(바이백) 규모를 두 배로 늘리며 금리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국채 금리는 급등한 채 좀처럼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정작 각국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은 예전만 못해서 외국 공식기관의 보유 비중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그럼에도 기축통화의 힘 때문인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비롯한 민간 투자자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며 여전히 미국 국채를 사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진 채무자이면서도 여전히 강자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1.유동성 역설의 시대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넘치는 유동성을 받아줄 배관 기능이 온전치 못하다면,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담보로 잡힌 자산의 가치가 흔들리는 순간, 그 담보 위에 신용을 쌓아 올린 곳들부터 마진콜과 강제 매도에 몰리고, 시중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정작 필요한 곳까지는 흘러가지 못한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 담보가 늘어나고, 은행은 더 많은 신용을 창출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늘어나는 담보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미국의 국채는 언제까지 무위험 안전자산이 될 수 있을까? 다른 나라도 이렇게 국채를 발행한다면 가능할까?
국채 발행이 계속 늘어나는데도 금리가 쉽게 내려오지 않는 지금 상황 자체가, 담보로서의 국채 가치에 대한 시장의 의심이 이미 시작됐다는 신호일 수 있다. 어쩌면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만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난 과거가 되어버린지도 모르겠다.
2.실물 본위제의 귀환
코로나19 당시 백신을 확보할 수 있었던 나라는 단순히 돈을 얼마나 많이 지불할 수 있느냐로 결정되지 않았다. 백신 생산국의 정치적 우선순위, 외교적 협상, 접근성 등이 더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반도체 부족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것보다 장기계약을 맺거나 공동 투자에 나서고, 환불 불가 예약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쪽이 오히려 반도체를 공급받을 가능성을 높였다.
이제 화폐는 예전처럼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수단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물이 기술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담보가 되고, 그 자체로 유동성을 만들어낸다. 화폐의 유동성은 그 효용성이 떨어지는 반면, 실물 담보의 유동성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_ 결국 실물 본위제의 시대는 '지배의 화폐-달러'가 '생존의 화폐-실물 담보'에 의해 도전 받는 시대다. (p.277)
3.소버린 AI가 중요해진 시대
AI가 발전하면서 지능이 상품화되고 있다. 단가는 내려가고, 모델은 많아지며, 성능은 상향 평준화된다. 이제 개인의 지능은 결국 AI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다.
그런데 지능의 가격이 0에 수렴할수록, 그 지능을 생성하고 연결하고 배급하는 물리적 ‘배관’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진다.
AI 소프트웨어를 잘 만드는 회사들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실제로 지능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연산을 담당하는 반도체, AI를 가동할 수 있게 하는 데이터센터, 그리고 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플랫폼과 네트워크가 핵심적인 기반이 될 것이다.
마치 금광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금을 캐는 방법보다 청바지와 곡괭이를 팔았던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던 것처럼.
개인의 일자리만 위협받는 것이 아니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버린 AI’라는 개념이 이제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통화주권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소버린 AI 역시 국민의 삶과 국가의 경쟁력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스테이블코인
기축통화인 달러만이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 CBDC를 고집하지 않고, 스테이블코인을 고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국채의 새로운 수요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할 수록, 그 아래 담보자산인 미국채에 투자하는 수요도 커지기 때문에 결국은 늘어나는 미국 정부의 부채를 민간 수요가 받아주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런 이유로 토큰화 MMF의 결제 활용에도 미국은 적극적이다. 연준이 9월4일에 발표한 이코노믹 리서치를 보면, 스테이블코인이 M1, M2와 같은 기존 통화지표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이는 연준이 어떤 정책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기보다는, 새 상품을 기존 통계 틀이 못 따라가고 있다는 진단에 가깝다. 그런데 내가 더 눈여겨본 것은 MMF 부분이었다. MMF는 원래 M2로 계산되지만, 결제나 담보관리 수단으로 쓰이면 M1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9월 17일 발표된 미국 SEC의 토큰화 증권 관련 보도자료에는 토큰화 MMF가 토큰화된 상장주식의 결제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 적혀있었다. 단번에 나는 연준 발표가 떠올랐다. MMF가 결제수단으로서 더 유용해질수록, 사람들이 현금 대신 MMF에 자금을 넣어둘 유인도 커질 것이고, 그렇게 새 자금이 MMF로 흘러들어온다면 만기가 짧은 국고채를 주로 담는 MMF의 특성상 결국 국채 수요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MMF가 단기 금융상품 투자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증권 결제 용도로까지 쓰이는 흐름이, 결국 이 모든 것이 미국 국채 수요와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로 이어졌다.
이 책은 꽤나 많은 부분에서 인사이트를 전해주는 책이다.
경제경영서를 읽고 싶다면, 올해 이 한권을 강하게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