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의 여행 5 - NT Novel
시구사와 케이이치 지음, 김진수 옮김, 쿠로보시 코하쿠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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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만 자자하던걸 1편을 본 순간 바로 빠져들었다. 너무 사색적이라거나 모든 걸 설명하려든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긴 했지만, 우화로서 보아주기엔 충분했다. 사막의 몽롱하고 갈증이 이는 분위기, 아무도 없는 나라의 텅빈 허전함,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며 떠돌면서도 그 자유로 인한 고독으로 허망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어린 소녀(여자로 구분하기엔 확실히 너무나 어린.)가 등장하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읽다보면 나조차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괴하고, 그리고 슬프고, 따스하고, 차가운 이야기들이 시간순서에 관계없이 계속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두개 있는데 하나는 콜로세움이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3일 후면 없어질 나라의 이야기이다.

콜로세움의 이야기.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자는 자신의 아들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며, 그로인해 원한을 품은 아들은 다시 왕을 죽인다. 순환고리. 파괴에 물든 마음은 다시 그 순환고리를 이으려했다. 멋진 총격전 끝에, 아들은 왕을 노릴 수 있는 자리 앞에 섰다. 그러나 키노는 그가 어찌하기도 전에 일그러진 얼굴로 웃어제끼는 왕의 얼굴에 마지막 총알을 날린다. 피로 이어지는 악연의 순환... 안타까운 마음.. 높은 희망.... 한 없는 좌절.... 제대로된 문장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이상하고 미묘한 감정의 그림들이 이어진다.

두번째 이야기. 한번도 떠나는 것을 주저해본 적이 없는 키노가 떠나갈 것을 머뭇거릴때는 오히려 머물 수 없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죽음을 알면서도 재앙을 알면서도 마을을 떠나 살고 싶지 않다고 죽음을 선택해버리는 그들은 난 이해할 수 없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멍청해서 그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화가나서.... 난 울어버렸다. 키노도 여관일을 하시는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마을의 그 아이와 키노는 너무나 다르다. 키노는 자유를 원했고 그 아이는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키노는 그 겹쳐보이는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른이 되는 수술을 받지 않은 건 잘 한 걸지도 몰라. 광기어리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키노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너무 서글프다.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보였던 그마을이 용암에 덮여 사라져버림에 내가, 키노가 울부짖은 것은 아마도.... 비뚤어진 세상에서 자유로운 만큼 잃어야했던 사랑이라던가, 정겨움 같은 것들을 마지막으로 찾아볼 수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키노의 여행은 시간순서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니 이 여행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보는 키노의 여행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제는, 키노가 머물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키노는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행은 목적지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키노는 이제 그것을 잃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결정할 권한을 져버렸다. 아이들에게는 마을의 종말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고 마을에서 내보내려 애썼다. 자신들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다른 어딘가에서 평온하게, 아이만은 평온하게 살아주기를 바랬겠지. 그러나 아이는 알았다. 그리고 가족과 함꼐하기를 선택한다.

어리석지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찌했을까. 비뚤어진 결정이지만 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키노의 여행은 그런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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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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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나는 이미 폐허의 도시를 감명깊게 읽었다. 그 안에 내비치는 공허와 삶에 대한 관조, 안나 볼룸의 치열한 삶 속에 묻어있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까지... 폐허의 도시에선 의심해 보았던 것을, 빵굽는 타자기에서는 확신하게 되었다.

빵굽는 타자기는 폴오스터라는 작가의 회고록이다. 그는 부유하면서도 가난해서 삶에 찌들어 살면서도 언제나 공허했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어느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어디로든 떠돌아다녔다. 그 떠도는 삶에서 얻어낸 기억들과 감성이 찬사받는 작가로 이끌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행복하다거나,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언제나 목마름을 느끼고, 언제나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가가 되기 위한 공허인지, 아니면 그로 인해 작가밖에 택할 길이 없었던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이글을 보면서 김윤아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100%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음악따위 때려치겠다.' 그녀또한 날카로운 공허를 통해 음악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폴 오스터도 백퍼센트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작가따위 때려칠까? 빵굽는 타자기는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마음에 남는 글이었다. 폴오스터의 경험과 감성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 작가가 쓰는 다른 글들에 이 회고록이 타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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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타 칼니스의 아이들 1
김민영 지음 / 황금가지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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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고, 가상현실과 현실에 대한 생각이 재밌게 풀어져있다고 그래서 빌렸는데 그런 내용보다는 액션같은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좀더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런 노력도 없이 칭얼거리는 주인공도 맘에 들지 않았고, 어설픈 음모론도, 황당하게 끝난 살인사건의 범인찾기도 맘에 들지 않았다.

인물들이 주인공외엔 너무 단순하게 이분화 되어 있는 것도 싫었다.주인공을 배신하거나, 주인공과 함께 싸우거나... 그런 주제에 가상현실과 현실의 조화가 소설의 궁극적인 주제라니... 그런 주제를 말하고 싶었다면 인물을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선 안됐다. 배신하는 자도 배신하는 자 나름이고, 함께 싸워주는 사람도 싸워주는 사람 나름이다. 착한 사람은 끝까지 착하고, 나쁜 사람은 아무 이유없이 끝까지 나쁘구나... 마지막에 팔란티어의 배후인 선배가 원철을 회유하는 장면은 마왕이 용사를 처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판타지 만화의 전형을 떠올리게 하기까지 했다.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 또한 결국,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가상현실에서 희망을 본다면, 현실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소중함을 잃는다면 가상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말은 맞는데, 그말은 소설의 전체 줄거리나 분위기와는 따로 놀고 있다. 악당은 선천적으로 악당이었고, 천박한 여자는 선천적으로 천박했다. 세계는 배신과 배신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주인공과 그 일당만은 착하다. 뭐야, 이거... 헐리웃 영화야? 아니면 디즈니 만화야?

악인에게도 일말의 선은 존재하고, 선인에게도 욕망은 존재하며 세계의 것들은 한 자아가 판단내릴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는게 내 철학인지라... 사람들의 관계를, 세계와 자아간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가상현실과 현실간의 관계를 논한다는 건... 좀 어불 성설인 것 같았다... 그래서 재밌게 보고나서도, 옥스타칼리스의 아이들을 좀 기분 나쁘게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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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걸작선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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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으로도 나와있고, 왠지 은하철도 999가 연상되어 친근하게 느껴졌다. 동화, 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작가가 일제시대 살았던 작가라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뒤의 작가 이력을 보고 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 시대는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의 평범한 사람이나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겐 끔찍한 시절이었다. 무모한 전쟁을 위하여 착출되는 것은 아마도 식민지 사람만이 아니었을테니까. 제국주의의 물결속에서 광기에 들떠있을 그 시대에서 이 사람은 어떤 꿈을 꾸었는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싶었을까... 나는 글을 통해서 그런 것을 보고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하나의 그림같다는 생각을 했다. 격정적인 그 시대와는 상관없이 산이 있고, 물이 있고, 풀이 있고, 짐승이 있고, 사람이 있는 그냥 그런 세계... 선문답을 하듯 난해한 언어로 자연의 미, 알 수 없는 작은 세계속의 현묘한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가 하면, 은하철도의 밤처럼 어린아이같은 환상을 통해, 삶과 죽음, 그속에 있을 어떤 진실을 생각해보려 한다. 쌍둥이별 이야기라든지, 다른 것들을 보면 동화답다는 생각도 들지만, 튤립의 환술이라든지 은하철도의 밤, 용과 시인 같은 것을 보면 이건 도저히 동화가 아니다, 동화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어도 자격이 유지된다면야, 동화란 이름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선문답같은 대화에,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와 고찰, 불교사상... 아 어렵다. 내 인생에 동화가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어린애들은 읽기 싫어할 거다. 그림도 없고 내용도 어렵고....

하지만 아름답긴 하다. 은하철도의 밤 같은 경우에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답다. 번역한 것이고 중간에 원고가 없다면 당당하게 빼먹은 부분도 있을 정도이지만, 그래도 아름답다. 꿈속을 헤엄치는 것 같이 몽환적인 묘사, 새파란, 깊은 바다속처럼 일렁이는 밤하늘에 은빛 모래처럼 흐르는 은하수를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글귀들은, 미야자와 겐지는 어쩌면 동화작가라기보다 시인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글들은 현대에 와서까지 다시 읽혀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 같다. 읽고나서 멍하니 그 꿈결같은 여운을 음미할 수 있는 글을 원한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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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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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으로 어떤 도시에 파견되었다가 행방불명된 오빠를 찾기 위해 온 어떤 여성이 쓴 편지가 이 소설의 전체 내용이다. 나는 그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 빌렸던 것에 지나지 않지만, 기억 속에는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른채 행복한 삶을 살다가 이곳, 폐허의 도시에 도착하게 된 안나 볼룸은 놀란다. 그리고 오바를 찾아다니지만, 별 소득은 거두지도 못하고 결국 그도 이곳의 생활에 물들고 만다. 안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항구와 도로는 모두 폐쇄되고 도시는 고립된다. 거리에는 쓰레기와 노숙자 시체가 넘쳐나고, 건물들은 매시간마다 계속 무너져내린다. 낡을대로 낡았지만 아무도 보수하지 못하는, 아니 보수할 생각을 안하는 아파트지만, 거기에 사는 이들을 부유한 것이다. 시체는 매장할 경우 범죄가 되고 모두 쓰레기와 함께 소각되어 거기서 만들어지는 매탄으로 그나마 석탄이나 석유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전기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다. 땅이 쇠해서 야채는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시립매장에서만 음식을 구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점점 양이 줄어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폐허 속에서 쓸만한 것을 주워 파는 형식으로 살아간다. 그 폐허 안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쓸만한 것을 지닌 사람은 곧잘 살해당하고 그 시체는 곧장 나체가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죽는 방법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환상만을 배도 곯으며 생각하고 이야기하다가 멍하니 죽어가는 무리들도 있고, 훈련으로 몸을 다진다음, 먹지않고 최대속력으로 죽을 때까지 달려서 죽는, 일명 죽음의 질주라고 불리는 무리들도 있다. 아니면 고독한 죽음을 택해서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돈을 좀 모은 사람은 안락사 전문 업체에 생애 최고의 쾌락을 맛보며 죽어갈 수 있도록 부탁하기도 한다. 아니면 암살자 업체에 자신의 죽음을 의뢰하고 스릴을, 죽음을 즐기며 살기도 한다.

모든 건물이 무너져버릴 것이라고, 오늘 봤던 길이나 건물이 내일도 있을 것이라는, 어찌보면 평범한 사실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그처럼 죽음을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삶보다 죽음을 바라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은 죽기위한 수단인 것 같을 정도다. 하지만 그중에도 살아가고자 하고 사랑하고자하는 사람이 있다, 끔찍한 디스토피아지만, 그속에서도 절망하면서도 사랑하고, 서로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이 쇄락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는 도시에 물들어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그 폐허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날 것이라고, 다시 편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약속하는 마지막을 보며 희망을 걸고 싶다.

가끔,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TV에서 떠들석하게 회자되었다가 금새 사라지는 그들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나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지금은 가끔 나도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만, 지금도 나는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쨌거나 자살이란 것에는 나는 찬성하지 않는편이다. 삶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그안에는 사랑도 있고, 희망도 있고, 우정도 있다. 폐허의 도시속에서도 인간은 살아간다. 끔찍하지만... 더없이 비참하지만 어쨌든 그들도 살아간다. 죽으려 하는 이도 있지만, 살아가려 하는 이도 있다.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 폐허 속에서도... 물론 뜻하지 않은 불운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살아가야만 겪을 수 있는 특전이다.

끔찍한 디스토피아이기에, 오히려 살아가고자하는 자들은,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눈이 부시다. 옮긴이는 인간이 파괴하고 있는 인간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사회를 빗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좀 다르게 읽은 것 같다. 절망보다도, 나는 희망을 찾았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기 보다 내일의 할일을 생각하며 힘을 내는, 그런 희망... 실낱같은, 살아가기 위한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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