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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용은 80분짜리 단기기억력을 가진 초로의 박사와 미혼모 파출부, 그리고 그녀의 아들이 펼치는 우정과 사랑... 같은 거에요. 사랑이라고 했지만 음 연애감정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불명확하고 친구간에든 형제간에든 부모자식간에든 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만 좀더 강하게 연결되어있는 그런 거에요. 사실 80분마다 새 삶을 사는 박사에게 우정과 사랑이 쌓일 수 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80분마다 죄다 잊어버리니까 박사는 자신의 양복에 덕지덕지 기워져 있는 메모지를 보면서 몇분전의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떠올리고 그 양복에 달려있는 기억대로 행동하고자 할 뿐인지도 모르죠. 일종의 의무감처럼... 사실 그런 것들은 파출부나 그 아들, 박사가 루트라고 부르는 녀석한테는 상관 없는 일이에요. 박사는 80분마다 새로태어나도 박사니까요.
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숫자와 야구에 대해 공명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아마도 80분짜리 기억력을 갖기 전에도 그랬겠지만 박사는 언제나 숫자로 대화하고자 하고, 숫자로서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죠. 파출부의 생일과 박사 손목시계 뒤에 적힌 숫자처럼 말이죠. 저는 수학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을 떼서, 여기서 처음 알게된 거나 새삼 기억해내곤 와 이런 것도 있었네. 한 것도 많았어요. 그 중의 하나가 우애수입니다. 우애수는 220과 284처럼 각각의 소인수의 합이 상대방 숫자가 되는 수래요. 뭐랄까 돈독하게 이어져있는 느낌이 드는 숫자지요. 박사는 모든 것들을 정말로 이렇게 설명해요.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모든 것을 특별해 보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식으로 표현되지만 그 수식은 차갑고 냉정한 게 아니라 너무나 따스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요. 신의 수첩에서 베껴적은 거라 그런 걸까요? 파출부는 그래서 우애수를 여기저기서 찾아보고 소수를 찾아보고,.. 그러면서 사물에 박사식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법을 배웁니다. 숫자와 숫자의 조화를 보고있으면 왠지 하늘의 비밀을 훔쳐보는 것 같달까요. 그런가봐요. 뭔가 그런 열정이, 그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자체가 참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어요.
야구는 말이죠. 이미 은퇴한 에가츠를 박사는 여전히 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루트와 마찬가지로 타이거즈의 팬인데, 그 기억의 갭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함께 야구장에 갔을 때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지만 기뻐하고 환호하고 응원했답니다. 에가츠는 나오지 않아도 박사는 야구를 좋아할 수 있었어요. 아마도 루트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에가츠의 스페셜 카드를 겨우 찾아서 박사의 축하선물로 가져다줬을때 그 조용한 감탄.. 감사기도라도 드리는 것처럼, 신에게서 축복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 경건하게 감사하는 모습이라니.. 박사님은 정말로 그 카드가 갖고 싶었나봐요. 아, 아마도 '루트가 준' 카드가 갖고 싶었던 거겠죠. 사소한 것 하나 하나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은 뭐랄까 대단해요. 하지만 그날이 마지막이었어요.
박사의 단기기억력은 조금씩 손상되서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영원히 75년도에 멈춰져 버려요. 그래서 요양원으로 들어가고, 파출부와 아들은 그래도 계속 찾아가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캐치 볼을 하고 수식으로 대화를 나누죠. 그리고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영영 떠나가버리지요. 음 하지만 슬프다기보다는, 고요하고 자연스런 느낌, 누구나 언제나 떠나가는 것이니까요. 루트는 초등학교 수학선생님이 되고 파출부는 여전히 파출부지만 나이도 많이 먹었지요. 세월은 지나가지만 그 흔적들은 계속 남아있어요.
사실 마구 울어버린 부분은 따로있어요. 음 그렇게 슬픈 음악 때리면서 울게끔 만들어낸 책은 아닌데요. 뭔가 반짝반짝하고 눈이 부셔서.. 울어버렸어요. 루트가 다쳤을 때 박사의 행동이요. 새끼를 지키는 어미동물처럼 맹목적일 정도로 걱정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모습은, 다만 어린아이에 대한 어떤 맹목적인 애정이 그저 루트를 향해 표현된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박사님은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병원에서 기다리면서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1에서 100까지 더하는 빠른 방법을 설명해주는 박사도, 박사를 엄마가 믿지 못했다고 화를 내는 루트도, 잘못했다고 순순히 말하는 파출부도 모두모두 반짝반짝 빛이나서 눈물이 났어요. 음 아무래도 글 속에 그 사람들의 따스함이 잘 묻어 있어서 그런가봐요. 따스함과 순수함과 열정이 잘 버무려져서 글 속속들이 베어있어서 반짝반짝 빛이나 보였을 거에요. 아무래도 전 그런 바보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하거든요.
수학하시는 분들이 보면 왠지 공감할 거 같아요. 숫자 사이의 법칙을 알아낸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임엔 틀림없으니까요. 전에 교양과목에서 물리학 관련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분도 그런 미세한 물리적인 법칙들이 얼마나 낭만적인 건지, 신비로운 건지.. 하면서 설명해주셨거든요. 수학자들에겐 세계가 아름다운 법칙의 거미줄로 구성된 것처럼 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