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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행성 ㅣ 환상문학전집 6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평점 :
엄청 엄청 재미있게 세 권을 후다닥 만 하루만에 해치웠음. 역시 어둠의 왼손이나 빼앗긴 자들에 비하면 초기작인지 미묘하게 모험활극의 느낌이 더 강해서 즐거웠다. 그 당시에 이미 헤인 세계의 역사를 대부분 구상해 놓았던 것인지 한 작품 한 작품이 먼 옛날의 신화적 영웅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SF인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그 애틋한 시선이라니, 그 때는 아직 할머니도 아니었을 텐데, 누가 할머니 아니랠까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될지, 잘 된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생길지 어떨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인공들은 분연히 일어선다. 앞으로 나아간다. 영웅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삶답게 살아가는 것에 마음을 쏟았을 뿐이다. 발끝을 보며 걷되,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작은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헤인의 세계는 몇천년씩 이어져 나갈 수 있었다. 변화의 가능성, 의지의 중요성, 다른 세계에 대한 관용과 이해, 많은 것들이 신화적인 SF 세계속에 담겨있다. 나는 환영의 도시 이후 이야기가 알고 싶다. 물론 헤인과 테라를 중심으로 했던 우주 연맹은 '싱'으로 인해 멸망했다가 환영의 도시에서 주인공의 활약을 통해 아마도 테라가 '싱'의 지배에서 풀려나고 뭐 그렇게 해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우주 연맹이 창설된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이 '싱'이 thing인지 궁금한데, 원서를 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겠지. 소년마법사에서 잠깐 스쳐지나가듯 나왔던 'the Thing'이라는 영화가 생각나서 으스스했다. 그렇지만 마음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 뺀다면 이들도 평범한 헤인 세계의 인간들과 다를바 없어보인다. 무슨 이유에서 왜 그런 식으로, 적응도 하지 못하면서 지배해야했는지 왜 살생을 금했는지 마음의 거짓말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이다. 나에게는 그들도 인간으로 보였다. 그저 매우 다른 '세계'를 지닌 인간. 어슐러 르 귄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을까? 과연 그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