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모두 축하드립니다. 책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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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31 0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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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옷장 안의 상자






 사람들이 정전사태에 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다니 이상했다. 전력공급이 끊어지면 사람들은 으레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활발히 토론하곤 했다. “정전됐을 때 자네는 어디 있었나?”라거나 “전기 기술자들의 문제가 대체 뭐야? 지금 일하는 놈들은 다 해고하고 새 일꾼들을 뽑아야 한다니까”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이번엔 정반대였다. 이튿날 리나가 출근하는데 거리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사람들은 땅바닥만 쳐다보며 바삐 걸어갔다. 멈추어 서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나지막이 할 말만 하고는 서둘러 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날 리나는 똑같은 메시지를 무려 열두 번이나 배달했다. 다른 메신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고 있는 이 메시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7분.” 정전 시간이 지금까지 있었던 다른 최장 시간 때보다 두 배나 길었던 것이다.

 공포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리나는 오싹한 한기 같은 공포를 느꼈다. 직업 배정의 날에 둔이 이야기했던 것이 진실임을 리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엠버는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다음 날 온 도시의 알림판에 다음과 같은 공고문이 나붙었다.




시민 총회 안내




모든 시민 여러분들은 내일 저녁 6시에

하큰 광장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대한 사항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시장 르맨더 콜




 중대한 사항이라니 뭘까? 리나는 궁금했다. 좋은 소식일까 아니면 나쁜 소식일까? 리나는 얼른 듣고 싶어 애가 탔다.

 이튿날, 사방에서 하큰 광장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서로 따닥따닥 붙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목말 태웠고, 키가 작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밀치며 맨 앞줄로 가려고 애썼다. 리지를 본 리나는 반가워서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나온 빈디 찬스도 보였다. 리나는 고민 끝에 할머니와 포피를 집에 두고 나왔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선 포피를 잃어버릴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시계탑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소리가 여섯 번 진동하며 울려 퍼지자, 시민들이 기대에 차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모여든 군중 위를 물결치듯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더 멀리 보려고 발끝으로 서서 목을 쭉 뺐다. 공회당의 문이 열리고 시장이 경비병 두 명을 양옆에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경비병 하나가 시장에게 확성기를 건네자 시장이 연설하기 시작했다.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시장의 목소리는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갈라지는 소리까지 났다.

 “엠버 시민 여러분.” 시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사람들은 조용히 하며 정확히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엠버 시민 여러분.” 시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장은 좌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불빛에 비친 시장의 대머리가 번들번들 빛났다. “우리 도시가 최근 조그만 어…… 어리엄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다난 차믈써엉이 필요하지요.”

 “시장이 뭐라는 거야?” 사람들이 다급히 속삭였다. “시장이 뭐라고 했어? 잘 못 들었다고.”

 “조그만 어려움이래요.” 누군가가 대답했다.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참을성이 필요하답니다.”

 시장이 연설을 계속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장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다음과 같이 보장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어려운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초시어언의 노려역을 다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날카롭게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말한 거야?”

앞줄에 선 사람들이 뒤편으로 말을 전달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최선의 노력.”

 “더 크게!” 누군가가 소리쳤다.

시장의 목소리는 확성기를 통해 더욱 우렁차게 울려 퍼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확실하기만 했다. “다…… 아화앙해서는 아아됩니다. 두려엄, 두려어워 해애선 아안된니다. 무우우서어 하아리유가 저언히 엄써요오.”

 “못 알아듣겠어요!” 다른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주위 사람들도 서서히 흥분과 불만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뒤에서 등을 미는 바람에 리나는 앞으로 밀려났다.

 “시장이 말하길, 우리는 당황해서는 안 된대요.” 어떤 사람이 말했다. “공포심이야말로 가장 나쁘다는 거예요. 무서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죠.”

공회당 계단 위에 서 있던 경비병 두 명이 시장 곁으로 좀 더 가깝게 붙어 섰다. 시장은 확성기를 다시 들어 올리고 연설을 계속했다.

 “해겨어채애글 차자가느은 주우웅임니다.” 그는 이제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해결책을, 해결책을 찾는 중입니다’, 라는군요.” 앞줄에 서 있던 사람이 뒤쪽으로 내용을 전달했다.

 “어떤 해결책?” 리나 곁에 서 있던 여자가 물었다. 군중 속의 다른 사람들도 이 여인의 말을 되풀이했다. “어떤 해결책? 해결책이 뭔데?” 이들의 부르짖음은 어느덧 합창이 되어 더 크고 힘차게 울려 퍼졌다.

 리나는 또다시 뒤에서 공회당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떠미는 압력을 느꼈다. 난폭하게 떠미는 사람들의 팔이 리나의 몸을 찔러 댔고, 육중한 몸집이 리나를 밀어붙였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리나는 이 생각뿐이었다.

리나는 사람들 팔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찾는 대로 돌진해 가며 군중들 뒤쪽으로 뚫고 나갔다. 시장의 목소리는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이 되어 갔고, 모여든 인파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발밑에 깔릴까 두려워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리나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고, 목에 둘렀던 스카프는 절반쯤 풀어져 버렸다. 불과 몇 초였지만 리나는 사람들의 발아래에 짓밟히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다. 마침내 겨우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온 리나는 학교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리나는 경비병들이 시장을 보호하며 공회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군중들은 고함치며, 일부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자갈, 쓰레기, 구겨진 종이, 심지어 자신들의 모자까지도-닥치는 대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리나는 뛰어가고 있었다. 시장의 연설 내용 따위는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 버렸다. 오터윌 가에서 가게 문을 열기 위해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가던 리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믿어 주기를 바라는 거야…….” 누군가 말했다. “시장은 단지 우리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대재앙을 향해서…….”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모든 목소리들이 분노와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리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리나는 보도블록 위를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밟고, 등 뒤로 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렸다. 리나는 그저 빨리 집에 도착해서 식구들과 함께 뜨거운 감자 수프를 만들어 먹고, 그러고 나서 새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털실 가게 옆에 난 계단을 한 번에 두 단씩 뛰어오른 리나는 아파트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그런데 문 앞에 놓인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팔과 무릎을 바닥에 사정없이 부딪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리나는 놀라 빤히 쳐다보았다. 훤히 열린 옷장 옆에는 외투와 장화, 가방과 상자 들이 높게 쌓여 있었고, 그것들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몽땅 쏟아져 나와 어지러이 엉켜 있었다. 옷장 안쪽에서 쿵쿵대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쿵쾅대는 소리가 몇 번 더 울렸다. 할머니가 옷장 모서리에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오래 전에 이 안을 살펴봤어야 했는데. 그 물건은 여기에 있을 거야, 그렇고말고.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좀 와서 보렴!”

 “할머니.” 리나의 가슴이 갑자기 철렁 내려앉았다. “아기는 어디 있어요?”

 “아! 포피는 여기 있지!” 옷장 안 깊숙한 곳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할미를 도와주고 있었단다.”

 리나는 바닥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포피가 눈에 들어왔다. 엉망진창 어질러진 바닥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 뒤에 앉아 있었다. 포피 앞에는 어둡고 광택이 나는 무언가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경첩으로 연결된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뚜껑은 열린 채 뒤쪽으로 덜렁거렸다.

 “포피, 그거 언니가 좀 봐도 될까?” 리나는 허리를 굽히고 내려다보았다. 뚜껑 테두리에는 기계장치로 보이는 게 달려 있었다. 일종의 자물쇠가 아닐까, 리나는 생각했다. 상자는 훌륭하게 만들어졌으나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상자의 표면에는 움푹 들어간 상처와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있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리나는 상자를 집어 들고 확인하려고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었니, 포피? 찾은 거 없어?” 하지만 포피는 좋아서 깔깔 웃기만 했다. 포피는 잔뜩 구겨진 종이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포피는 손에도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찢고 있었다. 포피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종잇조각들 중 하나를 리나가 집어 들었다. 그 종잇조각은 작고 완벽한 서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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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밤거리에서



 날이 갈수록 할머니는 점점 더 정신이 흐릿해져 갔다. 리나가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설 때면 할머니는 으레 깡통들과 뚜껑 열린 항아리들을 벌여 놓은 채 부엌 찬장을 샅샅이 뒤지고 있거나, 리나의 침대 커버를 찢고, 뼈가 앙상한 팔로 매트리스를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곤 했다. “중요한 물건이었단다. 우리가 잃어버린 물건 말이다.” 할머니가 말했다.

 “그렇지만 할머니도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신다면, 할머니가 찾아냈는지 못 찾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할머니는 이런 리나의 물음에는 대답하려 들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리나의 손바닥을 찰싹 내리치고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신경 쓰지 마. 상관하지 말라고.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계속해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머도 부인은 자신의 집보다는 리나네 집 창가에서 꽤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 머도 부인은 할머니에게 친구가 되어 드리려고 찾아올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여자와는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걸” 하고 할머니는 리나에게 툴툴거렸다. 리나는 그런 할머니를 설득했다. “아마 아줌마도 외로운 가 봐요, 할머니. 기쁘게 맞아 주세요.”

 할머니와 달리 리나는 머도 부인이 곁에 있어서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엄마가 다시 생긴 것 같은 기분도 조금 들었다. 사실 머도 부인은 늘 꿈속을 헤매며 넋 놓고 살던 리나의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머도 부인은 엄마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엄마’ 같았다. 부인은 리나네 식구 모두가 제대로 된 아침식사-대개는 버섯 육즙 소스를 곁들인 감자와 사탕무 차-를 했는지 날마다 챙겼다. 비타민 알약을 각자의 접시 옆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으며, 식구들이 완전히 약을 삼켰는지도 꼼꼼히 살폈다. 머도 부인이 집에 있을 때면 신발은 항상 제자리에 정리되었고, 가구에 묻은 얼룩도 말끔히 닦여 있었으며, 포피는 언제나 깔끔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부인이 곁에 있을 때면 리나는 마음이 놓였다. 부인이 모든 것들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 나이의 다른 사람들처럼 리나도 매주 목요일은 휴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쉬는 목요일, 리나는 그날 저녁 스튜를 요리하는 데 쓸 순무 한 봉지를 사려고 가안 광장 앞 야채 가게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이때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리나는 우연히 엿들었다.

“내가 사고 싶었던 건 우리 집 정문에 칠할 페인트였어. 원래는 회색이었는데 몇 년간이나 새로 칠하지 못했더니 칠이 죄다 벗겨져 어찌나 꼴사나운지. 그런데 마침 나이트 가 어딘가에 그런 물건을 파는 상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 뭐야. 파란색을 살 수 있길 바랐지.”

“파란색으로 칠하면 진짜 근사하겠는걸.”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탐난다는 듯 말했다.

“한데 막상 그곳에 찾아갔더니, 글쎄 점원 말이 페인트 같은 건 없다고 하지 뭔가. 심지어 단 한 번도 판 적이 없다며 내몰더라고. 불쾌한 인간 같으니! 그가 가진 건 색연필 몇 개가 고작이라더군.” 첫 번째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리나는 자신이 그린 상상 속 도시 그림을 생각하자 색연필이 몹시 갖고 싶어졌다. 그 도시가 어떤 빛깔일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장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돈을 좀 더 유용하게 쓸 데는 많았다. 할머니의 단벌 외투만 해도 여기저기 헤진 구멍들로 가득했고, 실밥이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최근엔 거의 외출하지 않으시잖아, 리나는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할머니는 주로 집 아니면 털실 가게에 계시니까, 뭐. 사실 새 외투 같은 건 그다지 필요없으시지, 그렇고말고. 게다가 색연필 몇 자루가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 어쩌면 할머니께 드릴 외투를 사고도 색연필 몇 자루 정도는 살 수 있을지 몰라.

 그래서 결국 리나는 그날 오후 포피를 데리고 나이트 가에 있다는 그 상점으로 출발했다. 최근 업히는 요령을 터득한 포피는 다리로 리나 허리를 감싸고, 작고 튼튼한 손가락으로 언니의 목을 꽉 붙잡았다.

 두 블록 더 걸어가자 아무런 간판도 붙어 있지 않은 상점이 나왔다. 이곳이 틀림없이 그곳일 거야, 리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가게 문이 닫힌 듯했다. 창문 안쪽이 어둠침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슬쩍 밀자 뜻밖에도 문이 스르륵 열리며 동시에 문손잡이에 달린 종이 소리를 냈다. 가게 뒤쪽 방에서 머리가 까만 남자가 나타났다. 큼지막한 이와 기다란 목이 두드러져 보였다. “무슨 일이죠?” 그가 물었다.

 리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메신저가 되어 근무했던 첫날, 시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배달해 달라고 리나에게 부탁했던 사람이었다. 이름이 후퍼, 아니 루퍼, 그래 루퍼였다.

 “연필을 판다고 들었는데요?” 리나가 물었다. 왠지 미심쩍어 보였다. 상점의 선반들은 재활용 종이 몇 다발 외에는 텅텅 비어 있었다.

 리나의 등에 업힌 포피가 몸부림을 치며 낑낑댔다.

 “이따금씩.” 루퍼가 대답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색연필이에요. 당신이 정말 가지고 있다면요.” 리나가 말했다.

 “몇 자루 있긴 한데, 좀 비싸서 말이야.” 그는 툭 불거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건을 볼 수 있어요?” 리나가 말했다.

루퍼는 뒷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작은 상자를 갖고 와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리나는 자세히 보려고 상체를 숙였다.

 상자 안에는 색연필이 적어도 열두 자루는 들어 있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보라, 오렌지. 그 연필들은 심지어 단 한 번도 깎지 않은 것들이었다. 연필 끝은 납작했고, 지우개도 달려 있었다. 리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부 얼마죠?” 리나가 물었다.

 “네가 사기엔 아무래도 무리일 텐데.” 남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걸요.” 리나가 말했다. “나도 직업이 있어요.”

 “좋아, 좋아.”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불쾌하게 만들 것까진 없지.” 노랑 색연필을 집어든 그가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휙휙 돌렸다. “색연필 하나에 5달러.” 그가 말했다.

5달러라니! 일곱 자루면 외투를 살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낡고 누덕누덕 기운 게 뻔하지만 어쨌든 따뜻한 외투를 말이다. “너무 비싸요.” 리나가 말했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리더니 냉큼 상자 뚜껑을 닫았다.

 “하지만, 어쩌면…….” 리나는 다급히 생각했다. “한 번만 다시 보게 해 주세요.”

그는 뚜껑을 다시 한 번 들어 올렸고, 리나는 색연필들을 보려고 다시 몸을 굽혔다. 리나는 그중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깊고 맑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연필 표면은 반질반질했다. 연필의 꼭대기 평평한 단면에는 푸른색 연필심이 동그랗고 작은 모습을 내밀고 있었다. 분홍빛 지우개는 빛나는 금속 테두리에 감싸여 연필 끝에 매달려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딱 한 자루만 사도 되잖아, 리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돈을 모으면 다음 달에는 할머니께 외투를 사드릴 수 있을 거야.

 “결정해.” 남자가 말했다. “네가 사지 않아도 이 물건에 관심 있는 다른 고객들이 많거든.”

 “알았어요. 하나만 살게요. 아니, 잠깐만요!” 리나를 사로잡은 건 굶주림 같은 것이었다.

 리나는 아기가 잠든 방에 들어가 주머니에서 색연필 두 자루를 꺼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아까 봤을 때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색연필을 손에 쥐자 그 먼지투성이 가게에서 리나가 느꼈던, 갖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느낌은 이제 공포와 수치심, 그리고 어둠과 마구 뒤섞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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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둔은 그린게이트 광장의 아버지 가게 위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자그마한 잡화점에서는 못, 핀, 압정, 클립, 용수철, 병뚜껑, 문손잡이, 전선, 유리병 조각, 큰 나뭇조각 등, 요모조모 쓸모가 있을 법한 자질구레한 물품들을 팔았다.

 둔은 늘 가게에 먼저 들러 아버지를 보고 갔는데, 오늘은 그냥 집으로 올라갔다. 대화를 나눌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둔은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담긴-대부분 구두 굽인 듯했다-양동이 두 개를 소파 위에서 치워 버리고는 쿠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전기를 한 번 보고 파악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니, 그는 그동안 너무 어리석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토록 발전기를 다루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둔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둔은 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자부해 왔다. 둔은 전기의 원리를 터득해서 엠버를 구해 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둔은 하큰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를 수없이 상상했다. 엠버 시를 구해 낸 둔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에 시민 모두가 참석하고, 둔의 아버지는 맨 앞줄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둔이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착하고 영리한 아이지. 네 녀석은 언젠가 꼭 엄청난 일을 해낼 거야.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걸 난 알고 있단다.”

 그런데 둔은 지하 배관터널의 더러운 흙탕물 속에 꼼짝없이 갇혀 며칠만 지나면 도로 새고 고장 날 게 뻔한, 배관에 난 구멍 때우는 일 따위를 계속해야 하는 신세였다. 그 일은 심지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보다 더 부질없고 따분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발밑에 놓인 양동이에서 구두 뒷굽을 꺼내 들어 힘껏 내던졌다. 구두 굽이 문가로 날아가는 바로 그 순간에 문이 열렸다. ‘철썩!’하는 소리와 ‘아얏!’ 하는 외마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때 둔은 문간에 서 있는 아버지의 마르고 피곤에 찌든 얼굴을 보았다.

둔의 분노가 차츰 잦아들었다. “아! 제가 던졌어요, 아버지. 죄송해요.”

둔의 아버지가 옆머리를 문질렀다. 둔의 아버지는 키가 훤칠하고 껍질 벗긴 감자 같은 대머리였으며, 이마가 높고 턱은 길었다. 그의 회색 눈은 상냥스러우면서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내 귀를 정확히 맞혔더구나. 뭐였지?” 아버지가 물었다.

“잠깐 화가 나서요. 여기 있는 구두 굽 하나를 집어 던졌어요.” 둔이 대답했다.

“그렇구나.” 아버지는 의자 위에 널려 있는 병뚜껑들을 쓸어 내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출근한 첫날인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네.” 둔이 대답했다.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버지에게 그 일을 이야기해 주지 않겠니?”

 둔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둔이 이야기를 끝마치자 아버지는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매끈하게 다듬으려는 듯 손을 대머리 위로 가져가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구나” 하고 말문을 열었다. “반갑지 않은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발전기에 대해서는 특히-그건 정말 나쁜 소식이야. 하지만 배관 수리는 어쨌든 네가 맡은 일인 만큼 다른 길이 없단다. 네가 맡은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게 너의 의무야. 게다가 말이다. 맡은 일을 하면서 네가 무엇을 하는지가 사실…… 더 중요하지, 안 그러냐?” 아버지는 둔을 향해 웃었지만 약간 슬퍼 보였다.

“그렇겠지요.” 둔이 말했다. “하지만 제가 거기서 뭘 할 수 있을까요?”

“글쎄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하지만 너는 뭔가 생각해 낼 수 있을 거야. 너는 영리한 아이니까. 중요한 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란다. 모든 것을 세심히 눈여겨보고 사람들이 예사로 보아 넘기는 것에 주목하거라. 그러다 보면 아무도 모르는 사실들을 찾아내게 될 테고 그것들은 분명 쓸모가 있을 거야.” 아버지는 외투를 벗어 벽에 달린 옷걸이에 걸었다. “벌레는 좀 어떠냐?” 아버지가 물었다.

“아직 살펴보지 못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둔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곧장 낡은 스카프로 감싼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나왔다. 둔은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스카프를 걷었다. 둔과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흐늘거리는 양배추 이파리 몇 장이 상자 밑바닥에 놓여 있었고, 그 이파리들 가운데 한 장 위에서 3센티미터 정도 되는 벌레가 꼼지락거렸다. 학교를 졸업하기 며칠 전 둔은 저녁 때 먹으려고 양배추 잎을 자르다가 잎 안쪽에서 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창백하고 부드러운  초록빛을 띠고, 몸 전체가 비단처럼 부드러우며, 다리는 작고 통통한 벌레였다.

 벌레들은 언제나 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둔은 벌레들을 자세히 관찰한 내용을 공책에 기록했고, “꿈틀거리고 날아다니는 것들”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둔은 공책의 매쪽마다 한가운데를 세로로 나누었고, 그 왼쪽 칸에 바늘 끝처럼 뾰족한 연필로 세밀화들을 그렸다. 식물의 줄기처럼 뻗은 나방 날개의 혈관 무늬, 미세한 털과 갈고리 모양의 작은 발을 가진 거미 다리들, 이마에 더듬이를 달고 반들반들한 갑옷을 입은 딱정벌레 등등. 그리고 오른쪽 칸에는 이러한 생물들에 대해 그가 알아낸 내용들을 적었다. 무엇을 먹는지, 어디서 자는지, 어디에다 알을 낳는지, 그리고 알아낸다면, 얼마나 오래 사는지 등에 관한 관찰기를 기록했다.

하지만 날쌔게 움직이는 나방과 거미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곤충들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다면 훤히 트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놓아둔 채 잽싸게 훔쳐보면서 그들의 생태를 포착해야 한다. 상자 안에 가두면 벌레들은 대개 며칠 동안 미친 듯이 기어 오르내리고 날아다니다가 이내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벌레는 어딘가 달랐다. 둔이 마련해 준 상자 안에서의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 같았다. 여태껏 이 벌레는 단 세 가지 일만 했다. 먹고, 자고(벌레가 눈을 감는지, 아니 눈이 있기는 한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잠은 자는 것 같았다), 아주 작고 검은 똥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일, 그뿐이었다.

 “벌레를 키운 지 이제 5일이 지났어요.” 둔이 말했다. “제가 처음 잡았을 때보다 두 배나 더 커졌어요. 양배추 잎을 사방 5센티미터 넓이만큼 먹어 치웠고요.”

 “모든 걸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니?”

 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지하 배관터널 안에서 일하면서 새롭고 흥미로운 벌레들을 좀 더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어쩌면요.” 둔은 대답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는 다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걸로는 충분치 않아. 난 매일같이 지하 배관터널 안을 빈둥거리고 배회하며 물이 새는 구멍이나 때우고, 벌레들 따위를 잡으러 다니면서, 위급상황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지낼 수는 없어. 그 아래에서 중요한 뭔가를 찾아내야만 해.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반드시 찾아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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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번 터널로 가기 위해서는 엠버 시 곳곳에 물을 실어 나르는, 녹이 슬고 단단한 배관을 따라 늘어선 터널 길을 복잡하게 거쳐 가야 했다. 터널 바닥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고, 벽면을 타고 갈색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주터널과 똑같이 천장에 붙은 전선줄에 달랑달랑 매달린 전구들에서 어둠침침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둔은 지하로 얼마나 깊이 내려왔을까 따져보는 데 골몰했다. 강에서 주터널 천장까지는 적어도 10미터가량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위로 높이가 6미터 정도 되는 저장창고가 한 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둔은 지금 엠버 시에서 지하로 15미터 이상 내려온 장소에 서 있으며, 몇 톤의 흙과 바위와 건물 들이 그 위에 놓여 있는 셈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둔은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힘이 들어가며 바짝 긴장이 되었다. 둔은 금방이라도 흙더미가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재빨리 머리 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자, 이곳이야.” 알린이 말했다. 그녀는 벽에서 정면으로 곧장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배관 구멍 옆에 서 있었다. “먼저 밸브를 돌려서 잠그고 배관을 분리한 다음, 새로운 연결관으로 교체하고 다시 이어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해.”

 두 사람은 렌치와 망치, 그리고 와셔(볼트나 너트로 물건을 죌 때 너트 밑에 끼우는 둥글고 얇은 쇠붙이-옮긴이)와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를 가지고 물에 흠뻑 젖어 가며 일을 했다. 오전 내내 이 일에 매달려야 했던 둔은 엠버 시가 의심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끊어질 듯한 전기 공급과 얼마 안 되어 바닥을 드러낼 것 같은 보급품의 부족뿐만 아니라, 상하수도 설비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힘없이 부서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단 한 사람이라도 대비책을 세우고 있기는 한 걸까?

점심 휴식시간이 되자, 알린은 연장 허리띠에 딸린 주머니에서 점심 도시락을 꺼내 들고 몇 개의 터널 너머에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넌 여길 지키도록 해.” 그녀는 자리를 뜨며 일러 두었다. “이 주변을 무턱대고 돌아다니다간 분명 길을 잃게 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둔은 알린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떴다. 건네받은 지도를 이용해 주터널로 돌아오는 길을 확인한 다음 둔은 동쪽 끝 지점까지 서둘러 갔다. 둔은 발전기를 볼 수 있는 특별허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둔은 혼자 힘으로 발전기실까지 길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결국 그렇게 해냈다. 둔은 발전기실 앞에 가만히 서서 누군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뚱뚱한 여자가 점심이 든 봉투를 들고 문을 밀어젖히며 밖으로 나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는 둔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문이 도로 닫히기 전에 둔은 안으로 살짝 미끄러져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끔찍한 소음에 둔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소리는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날카롭고, 으르렁 거리고, 끼익끼익 째졌고, 털거덕대는 쉰소리 가운데 칙칙칙, 굵고 낮은 소리가 함께 들렸다. 둔은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앞으로 걸어갔다. 둔 앞에 2층 건물 정도 높이의 거대한 검은 기계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기계가 어찌나 심하게 흔들거리고 몸부림을 치는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귀마개로 귀를 막은 사람들 몇몇이 기계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일하고 있었지만 둔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둔이 그들 중 한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는 뛸 듯이 놀라며 돌아다보았다. 거무스름한 얼굴에 주름이 깊이 파인,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발전기에 관해서 배우고 싶습니다!” 둔은 이렇게 소리 질렀으나,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소음 속에서는 아무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둔을 잠깐 노려보더니, 성가시다는 듯 손으로 내쫓는 시늉을 하고는 돌아서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둔은 그대로 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기계 옆에는 바퀴가 달린 사다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높은 곳에 달린 부속에 접근하려는 일꾼들은 그 사다리를 타고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발전기실 바닥에는 온통 기름으로 범벅이 된 것 같은 깡통이며 도구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벽에 기대어 놓은 큰 통들 안에는 갖가지 종류의 볼트와 나사, 전동장치, 지레와 장대, 그리고 튜브 등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새까만 더께를 뒤집어쓰고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일꾼들은 연장통들과 발전기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서 발전기가 덜덜덜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몇 분 뒤, 둔은 그곳을 빠져 나왔다. 둔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둔이 여태껏 연구해 온 모든 것들은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는 일이었고, 그러한 원리 탐구는 둔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였다. 둔은 낡은 시계를 작은 부속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분리한 다음 그것을 정확히 원래대로 짜 맞출 수 있었다. 부엌에 있는 수도꼭지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도 완전히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화장실 변기를 여러 차례 수리한 경험도 있었다. 또한 오래된 안락의자를 변형하여 바퀴 달린 수레를 만들기도 했으며, 냉장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이치에 관해 어렴풋하게 생각해 내기도 했다. 둔은 기계를 잘 다루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이런 둔조차 감도 잡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기’였다. 전선을 따라 흐르고, 전구 안으로 흘러 들어와 빛을 밝히게 하는 그 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둔은 발전기를 단 한 번만이라도 관찰할 수만 있다면 필요한 실마리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것으로부터 엠버 시의 불빛이 영원히 밝게 빛날 수 있도록 해결책 찾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둔은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발전기를 한 번 본 것만으로 둔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분명히 깨달았다. 둔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발전기의 작동 과정을 보게 되리라 기대했었다. 바퀴가 돌아가고, 불꽃이 튀고, 서로 다른 지점들을 연결하는 전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둔은 괴물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이 기계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를 아는 이가 이들 중 단 한 명이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마치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은 단지 기계가 산산조각 부서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쓸 뿐인 것 같았다.

 둔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둔이 위층으로 올라와 장화와 작업복을 벗어놓고 있을 때, 둔은 발전기실에서 만났던 노인을 발견했다. 둔은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제게 발전기에 대해 설명 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둔이 물었다. “발전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게 알려 주시겠어요?”

 노인은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강물이 발전기를 움직인다는 것뿐이라네.”

 “하지만 어떻게요?”

노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누가 알겠나? 우리 일이란 게 그저 발전기가 망가가지 않도록 유지할 뿐인 걸. 부속품이 부서지면 새로운 부속을 갖다가 바꿔 끼우고, 부품이 굳어서 작동을 멈추면 거기다 기름을 치는 것이 고작이라네.” 노인이 지친 듯 손으로 이마를 훔치자 검은색 기름 줄무늬가 생겼다. “나는 20년 동안 발전기 관련 일을 해 왔지.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칙칙폭폭 잘 작동해 왔다네. 하지만 올해는…… 나도 모르겠어. 마치 몇 분마다 발전기가 붕괴하고 있는 것 같으니.”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얼마 안 가서 전구가 동이 날 거라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네. 그렇게 되면 발전기가 작동하든 안 하든 크게 상관이 없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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