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옷장 안의 상자
사람들이 정전사태에 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다니 이상했다. 전력공급이 끊어지면 사람들은 으레 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활발히 토론하곤 했다. “정전됐을 때 자네는 어디 있었나?”라거나 “전기 기술자들의 문제가 대체 뭐야? 지금 일하는 놈들은 다 해고하고 새 일꾼들을 뽑아야 한다니까”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이번엔 정반대였다. 이튿날 리나가 출근하는데 거리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사람들은 땅바닥만 쳐다보며 바삐 걸어갔다. 멈추어 서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나지막이 할 말만 하고는 서둘러 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날 리나는 똑같은 메시지를 무려 열두 번이나 배달했다. 다른 메신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고 있는 이 메시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7분.” 정전 시간이 지금까지 있었던 다른 최장 시간 때보다 두 배나 길었던 것이다.
공포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리나는 오싹한 한기 같은 공포를 느꼈다. 직업 배정의 날에 둔이 이야기했던 것이 진실임을 리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엠버는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다음 날 온 도시의 알림판에 다음과 같은 공고문이 나붙었다.
시민 총회 안내
모든 시민 여러분들은 내일 저녁 6시에
하큰 광장에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대한 사항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시장 르맨더 콜
중대한 사항이라니 뭘까? 리나는 궁금했다. 좋은 소식일까 아니면 나쁜 소식일까? 리나는 얼른 듣고 싶어 애가 탔다.
이튿날, 사방에서 하큰 광장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서로 따닥따닥 붙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목말 태웠고, 키가 작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밀치며 맨 앞줄로 가려고 애썼다. 리지를 본 리나는 반가워서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나온 빈디 찬스도 보였다. 리나는 고민 끝에 할머니와 포피를 집에 두고 나왔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선 포피를 잃어버릴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시계탑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소리가 여섯 번 진동하며 울려 퍼지자, 시민들이 기대에 차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모여든 군중 위를 물결치듯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더 멀리 보려고 발끝으로 서서 목을 쭉 뺐다. 공회당의 문이 열리고 시장이 경비병 두 명을 양옆에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경비병 하나가 시장에게 확성기를 건네자 시장이 연설하기 시작했다. 확성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시장의 목소리는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갈라지는 소리까지 났다.
“엠버 시민 여러분.” 시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사람들은 조용히 하며 정확히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엠버 시민 여러분.” 시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장은 좌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불빛에 비친 시장의 대머리가 번들번들 빛났다. “우리 도시가 최근 조그만 어…… 어리엄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다난 차믈써엉이 필요하지요.”
“시장이 뭐라는 거야?” 사람들이 다급히 속삭였다. “시장이 뭐라고 했어? 잘 못 들었다고.”
“조그만 어려움이래요.” 누군가가 대답했다.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참을성이 필요하답니다.”
시장이 연설을 계속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시장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다음과 같이 보장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어려운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초시어언의 노려역을 다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날카롭게 쑤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말한 거야?”
앞줄에 선 사람들이 뒤편으로 말을 전달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최선의 노력.”
“더 크게!” 누군가가 소리쳤다.
시장의 목소리는 확성기를 통해 더욱 우렁차게 울려 퍼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확실하기만 했다. “다…… 아화앙해서는 아아됩니다. 두려엄, 두려어워 해애선 아안된니다. 무우우서어 하아리유가 저언히 엄써요오.”
“못 알아듣겠어요!” 다른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주위 사람들도 서서히 흥분과 불만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뒤에서 등을 미는 바람에 리나는 앞으로 밀려났다.
“시장이 말하길, 우리는 당황해서는 안 된대요.” 어떤 사람이 말했다. “공포심이야말로 가장 나쁘다는 거예요. 무서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죠.”
공회당 계단 위에 서 있던 경비병 두 명이 시장 곁으로 좀 더 가깝게 붙어 섰다. 시장은 확성기를 다시 들어 올리고 연설을 계속했다.
“해겨어채애글 차자가느은 주우웅임니다.” 그는 이제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해결책을, 해결책을 찾는 중입니다’, 라는군요.” 앞줄에 서 있던 사람이 뒤쪽으로 내용을 전달했다.
“어떤 해결책?” 리나 곁에 서 있던 여자가 물었다. 군중 속의 다른 사람들도 이 여인의 말을 되풀이했다. “어떤 해결책? 해결책이 뭔데?” 이들의 부르짖음은 어느덧 합창이 되어 더 크고 힘차게 울려 퍼졌다.
리나는 또다시 뒤에서 공회당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떠미는 압력을 느꼈다. 난폭하게 떠미는 사람들의 팔이 리나의 몸을 찔러 댔고, 육중한 몸집이 리나를 밀어붙였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리나는 이 생각뿐이었다.
리나는 사람들 팔 아래로 몸을 웅크리고 들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찾는 대로 돌진해 가며 군중들 뒤쪽으로 뚫고 나갔다. 시장의 목소리는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이 되어 갔고, 모여든 인파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발밑에 깔릴까 두려워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리나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고, 목에 둘렀던 스카프는 절반쯤 풀어져 버렸다. 불과 몇 초였지만 리나는 사람들의 발아래에 짓밟히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다. 마침내 겨우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온 리나는 학교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리나는 경비병들이 시장을 보호하며 공회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군중들은 고함치며, 일부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자갈, 쓰레기, 구겨진 종이, 심지어 자신들의 모자까지도-닥치는 대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리나는 뛰어가고 있었다. 시장의 연설 내용 따위는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 버렸다. 오터윌 가에서 가게 문을 열기 위해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가던 리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믿어 주기를 바라는 거야…….” 누군가 말했다. “시장은 단지 우리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대재앙을 향해서…….”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모든 목소리들이 분노와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리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리나는 보도블록 위를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밟고, 등 뒤로 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렸다. 리나는 그저 빨리 집에 도착해서 식구들과 함께 뜨거운 감자 수프를 만들어 먹고, 그러고 나서 새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털실 가게 옆에 난 계단을 한 번에 두 단씩 뛰어오른 리나는 아파트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섰다. 그런데 문 앞에 놓인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팔과 무릎을 바닥에 사정없이 부딪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리나는 놀라 빤히 쳐다보았다. 훤히 열린 옷장 옆에는 외투와 장화, 가방과 상자 들이 높게 쌓여 있었고, 그것들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은 몽땅 쏟아져 나와 어지러이 엉켜 있었다. 옷장 안쪽에서 쿵쿵대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쿵쾅대는 소리가 몇 번 더 울렸다. 할머니가 옷장 모서리에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오래 전에 이 안을 살펴봤어야 했는데. 그 물건은 여기에 있을 거야, 그렇고말고.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좀 와서 보렴!”
“할머니.” 리나의 가슴이 갑자기 철렁 내려앉았다. “아기는 어디 있어요?”
“아! 포피는 여기 있지!” 옷장 안 깊숙한 곳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할미를 도와주고 있었단다.”
리나는 바닥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포피가 눈에 들어왔다. 엉망진창 어질러진 바닥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 뒤에 앉아 있었다. 포피 앞에는 어둡고 광택이 나는 무언가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경첩으로 연결된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뚜껑은 열린 채 뒤쪽으로 덜렁거렸다.
“포피, 그거 언니가 좀 봐도 될까?” 리나는 허리를 굽히고 내려다보았다. 뚜껑 테두리에는 기계장치로 보이는 게 달려 있었다. 일종의 자물쇠가 아닐까, 리나는 생각했다. 상자는 훌륭하게 만들어졌으나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상자의 표면에는 움푹 들어간 상처와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있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리나는 상자를 집어 들고 확인하려고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었니, 포피? 찾은 거 없어?” 하지만 포피는 좋아서 깔깔 웃기만 했다. 포피는 잔뜩 구겨진 종이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포피는 손에도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찢고 있었다. 포피 주변에 어지럽게 널린 종잇조각들 중 하나를 리나가 집어 들었다. 그 종잇조각은 작고 완벽한 서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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