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밤거리에서



 날이 갈수록 할머니는 점점 더 정신이 흐릿해져 갔다. 리나가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설 때면 할머니는 으레 깡통들과 뚜껑 열린 항아리들을 벌여 놓은 채 부엌 찬장을 샅샅이 뒤지고 있거나, 리나의 침대 커버를 찢고, 뼈가 앙상한 팔로 매트리스를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곤 했다. “중요한 물건이었단다. 우리가 잃어버린 물건 말이다.” 할머니가 말했다.

 “그렇지만 할머니도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신다면, 할머니가 찾아냈는지 못 찾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할머니는 이런 리나의 물음에는 대답하려 들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리나의 손바닥을 찰싹 내리치고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신경 쓰지 마. 상관하지 말라고.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계속해서 뒤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머도 부인은 자신의 집보다는 리나네 집 창가에서 꽤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 머도 부인은 할머니에게 친구가 되어 드리려고 찾아올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여자와는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걸” 하고 할머니는 리나에게 툴툴거렸다. 리나는 그런 할머니를 설득했다. “아마 아줌마도 외로운 가 봐요, 할머니. 기쁘게 맞아 주세요.”

 할머니와 달리 리나는 머도 부인이 곁에 있어서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엄마가 다시 생긴 것 같은 기분도 조금 들었다. 사실 머도 부인은 늘 꿈속을 헤매며 넋 놓고 살던 리나의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머도 부인은 엄마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엄마’ 같았다. 부인은 리나네 식구 모두가 제대로 된 아침식사-대개는 버섯 육즙 소스를 곁들인 감자와 사탕무 차-를 했는지 날마다 챙겼다. 비타민 알약을 각자의 접시 옆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으며, 식구들이 완전히 약을 삼켰는지도 꼼꼼히 살폈다. 머도 부인이 집에 있을 때면 신발은 항상 제자리에 정리되었고, 가구에 묻은 얼룩도 말끔히 닦여 있었으며, 포피는 언제나 깔끔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부인이 곁에 있을 때면 리나는 마음이 놓였다. 부인이 모든 것들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 나이의 다른 사람들처럼 리나도 매주 목요일은 휴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쉬는 목요일, 리나는 그날 저녁 스튜를 요리하는 데 쓸 순무 한 봉지를 사려고 가안 광장 앞 야채 가게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이때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리나는 우연히 엿들었다.

“내가 사고 싶었던 건 우리 집 정문에 칠할 페인트였어. 원래는 회색이었는데 몇 년간이나 새로 칠하지 못했더니 칠이 죄다 벗겨져 어찌나 꼴사나운지. 그런데 마침 나이트 가 어딘가에 그런 물건을 파는 상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 뭐야. 파란색을 살 수 있길 바랐지.”

“파란색으로 칠하면 진짜 근사하겠는걸.”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탐난다는 듯 말했다.

“한데 막상 그곳에 찾아갔더니, 글쎄 점원 말이 페인트 같은 건 없다고 하지 뭔가. 심지어 단 한 번도 판 적이 없다며 내몰더라고. 불쾌한 인간 같으니! 그가 가진 건 색연필 몇 개가 고작이라더군.” 첫 번째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

 리나는 자신이 그린 상상 속 도시 그림을 생각하자 색연필이 몹시 갖고 싶어졌다. 그 도시가 어떤 빛깔일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장소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돈을 좀 더 유용하게 쓸 데는 많았다. 할머니의 단벌 외투만 해도 여기저기 헤진 구멍들로 가득했고, 실밥이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최근엔 거의 외출하지 않으시잖아, 리나는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할머니는 주로 집 아니면 털실 가게에 계시니까, 뭐. 사실 새 외투 같은 건 그다지 필요없으시지, 그렇고말고. 게다가 색연필 몇 자루가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 어쩌면 할머니께 드릴 외투를 사고도 색연필 몇 자루 정도는 살 수 있을지 몰라.

 그래서 결국 리나는 그날 오후 포피를 데리고 나이트 가에 있다는 그 상점으로 출발했다. 최근 업히는 요령을 터득한 포피는 다리로 리나 허리를 감싸고, 작고 튼튼한 손가락으로 언니의 목을 꽉 붙잡았다.

 두 블록 더 걸어가자 아무런 간판도 붙어 있지 않은 상점이 나왔다. 이곳이 틀림없이 그곳일 거야, 리나는 생각했다.

 처음엔 가게 문이 닫힌 듯했다. 창문 안쪽이 어둠침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슬쩍 밀자 뜻밖에도 문이 스르륵 열리며 동시에 문손잡이에 달린 종이 소리를 냈다. 가게 뒤쪽 방에서 머리가 까만 남자가 나타났다. 큼지막한 이와 기다란 목이 두드러져 보였다. “무슨 일이죠?” 그가 물었다.

 리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메신저가 되어 근무했던 첫날, 시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배달해 달라고 리나에게 부탁했던 사람이었다. 이름이 후퍼, 아니 루퍼, 그래 루퍼였다.

 “연필을 판다고 들었는데요?” 리나가 물었다. 왠지 미심쩍어 보였다. 상점의 선반들은 재활용 종이 몇 다발 외에는 텅텅 비어 있었다.

 리나의 등에 업힌 포피가 몸부림을 치며 낑낑댔다.

 “이따금씩.” 루퍼가 대답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색연필이에요. 당신이 정말 가지고 있다면요.” 리나가 말했다.

 “몇 자루 있긴 한데, 좀 비싸서 말이야.” 그는 툭 불거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건을 볼 수 있어요?” 리나가 말했다.

루퍼는 뒷방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작은 상자를 갖고 와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리나는 자세히 보려고 상체를 숙였다.

 상자 안에는 색연필이 적어도 열두 자루는 들어 있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보라, 오렌지. 그 연필들은 심지어 단 한 번도 깎지 않은 것들이었다. 연필 끝은 납작했고, 지우개도 달려 있었다. 리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부 얼마죠?” 리나가 물었다.

 “네가 사기엔 아무래도 무리일 텐데.” 남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걸요.” 리나가 말했다. “나도 직업이 있어요.”

 “좋아, 좋아.”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불쾌하게 만들 것까진 없지.” 노랑 색연필을 집어든 그가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휙휙 돌렸다. “색연필 하나에 5달러.” 그가 말했다.

5달러라니! 일곱 자루면 외투를 살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낡고 누덕누덕 기운 게 뻔하지만 어쨌든 따뜻한 외투를 말이다. “너무 비싸요.” 리나가 말했다.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리더니 냉큼 상자 뚜껑을 닫았다.

 “하지만, 어쩌면…….” 리나는 다급히 생각했다. “한 번만 다시 보게 해 주세요.”

그는 뚜껑을 다시 한 번 들어 올렸고, 리나는 색연필들을 보려고 다시 몸을 굽혔다. 리나는 그중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깊고 맑은 푸른색으로 칠해진 연필 표면은 반질반질했다. 연필의 꼭대기 평평한 단면에는 푸른색 연필심이 동그랗고 작은 모습을 내밀고 있었다. 분홍빛 지우개는 빛나는 금속 테두리에 감싸여 연필 끝에 매달려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딱 한 자루만 사도 되잖아, 리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돈을 모으면 다음 달에는 할머니께 외투를 사드릴 수 있을 거야.

 “결정해.” 남자가 말했다. “네가 사지 않아도 이 물건에 관심 있는 다른 고객들이 많거든.”

 “알았어요. 하나만 살게요. 아니, 잠깐만요!” 리나를 사로잡은 건 굶주림 같은 것이었다.

 리나는 아기가 잠든 방에 들어가 주머니에서 색연필 두 자루를 꺼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아까 봤을 때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색연필을 손에 쥐자 그 먼지투성이 가게에서 리나가 느꼈던, 갖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느낌은 이제 공포와 수치심, 그리고 어둠과 마구 뒤섞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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