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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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만 일어서야 한다. 작별 인사를 하듯 그는 맞은편 실루엣을 잠시 응시한다.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 누추한 자루 속에 담긴 한 생애의 모든 시간, 추억, 풍경 들 그리고 이야기들도 함께 지워지고 있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작고 이름 없는 세계 하나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p.152 <세상의 모든 저녁>

 

이 아름다운 글귀의 실상은 이러하다. 한 독거노인이 혼자 밥을 차려 먹다가 커다란 냄비 속에 머리를 박고,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시신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다. 이미 몸을 떠난 그의 영혼만이 자신의 주검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누구든 와 주기를 바라지만, 그가 이승을 떠나야 할 때까지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점점 참혹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울 뿐이다.

 

“맞은편 노인은 이미 거의 형체를 잃었다. 햇볕 아래 눈사람처럼 소리도 없이 흐물흐물 뭉개져 흘러내리고 있다. 피부는 시루떡처럼 검붉게 부풀어 오르고, 극도로 팽창한 복부의 압력에 러닝셔츠는 터지기 직전이다. 방바닥 어디에나 희멀겋게 살진 벌레들이 구물구물 기어 다닌다. 모두 곧 쉬파리로 변신할 놈들이다.” p. 148 <세상의 모든 저녁>

 

한 노인은 자신의 참혹한 주검 앞에서 이승을 떠나지도 못하고 울고 있고(세상의 모든 저녁), 또 한 노인은 언제 홀로 죽음을 맞을지 모를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아무도 몰래 죽을 수 있을 곳을 찾아 떠난다(흔적).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 당신을 두렵게 했다.” p.39 <흔적>

 

내내 우울하게 했던 이 소설집을 읽으며 나는 늙음과, 죽음과, 사라져간 것들과,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는 소설가와, 아픈 상처를 핥듯 자꾸만 아픈 이야기들을 읽는 나와, 무너져가는 작은 세계들을 생각했다.

 

나는 늙음을 겪지는 못했지만 늙음의 모든 단계를 보고 있다. 나는 죽음을 겪지는 못했지만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지는 못하지만,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는 소설가의 글을 감사히 읽을 줄을 안다.

 

“헐겁게 반쯤 벌어진 입. 이마와 입 주위의 굵고 깊게 팬 주름. 듬성한 머리. 목덜미의 검버섯들........지금, 하나의 생애가 저기 앉아 있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그 혼자만의 시간들이 저 망가진 소파 위에 고여 있다.” p.300 <물 위의 생>

 

그 소설가 덕에 “아무도 모르는, 그 혼자만의 시간”들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젊은 옹기장이(세상의 모든 저녁)의 삶과, 뗏사공(물 위의 생)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집을 통해 듣는다. 또한 강의 물길에 존재하는 여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한다.

 

“바귀미여울, 범여울, 새범여울, 왕바우서리, 웃바우, 열두절, 황새여울, 된꼬까리, 상산암, 제남문......각 여울마다 특징도 천차만별이었다. 물길이 돌연 치솟는 여울, 쑥 가라앉는 여울, 오르내리기를 열두 번 하는 여울도 있었다.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빨아들이는 바위, 뱉어내는 바위, 소용돌이치는 바위, 물길이 역류하는 바위도 있었다.” p.332 <물 위의 생>

 

“임철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시간들을 현재 순간으로 되불러 오는 자, ‘기억의 발굴자’였다.” (김형중, 해설 중) 큰언니의 책장에서 작가의 전작 <봄날>을 진작 봐왔지만, 꺼내 읽을 생각도 하지 못한 건 무겁고 아플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아, 임철우의 책은 무겁고 아팠지만, 또한 고맙고 따뜻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사라져간 초라한 삶들, 지상에서 자꾸만 사라져 가는 “작고 이름 없는 세계”들을 이렇듯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알라딘의 복돌성이 찍은 할머니의 손 사진을 생각했다. 찍은 이는 진작 서재를 떠났지만, 나는 이 사진을 간직하며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미 돌아와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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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깜언 창비청소년문학 64
김중미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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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절이 그렇지만 특히 봄은, 처박혀 책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볕은 적당히 따뜻하고 (그래서 실내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빛은 적당히 강하고 (그래서 실내는 자연광으로 책읽기에 충분하고), 거리는 적당히 조용하다. 모처럼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 오전,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밥 한 술을 입에 떠넣고 침대 아래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방구석에 방석을 깔고 쪼그리고 앉아 <모두 깜언>을 읽기 시작한다.

 

소쩍새 울면 참깨 심고, 꾀꼬리 울면 고추 모 심고, 뻐꾸기 울면 콩 심고, 보리 베고, 모 심고, 피 뽑고 그러다 보만 여름 가고, 가을 오고, 겨울 오고, 그러만 이 할머이는 칠십을 훌쩍 넘겨서 팔십이 될 거고. 그 전에 하느님이 불러 가실 수도 있고 그런 거야. 그러니 뭐가 반갑겄냐? 살날이 창창한 너나 꾀꼬리 소리 들으면 좋지. p.31

 

꾀꼬리 소리가 좋다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하는 말이다. 계절의 오고감이 이렇듯 명료하고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구나, 싶어 옮겨 적어 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여자아이는 구순구개열, '언청이'라 불리는 기형을 갖고 태어난 아이이다. 엄마가 성병에 걸리면 언청이를 낳는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아이의 아빠는 엄마의 과거를 의심하여 학대하고, 견디다 못한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다. 아이의 아빠도 집을 나갔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한밤중이면 할머니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몰래 일어나 우는 게 아니라 자면서 울었다. 할머니 울음소리는 가을밤 컹컹 우는 너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무서워 할머니를 흔들어 깨우면 할머니는 자기가 울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p.39

 

아비를 잃은 아이 앞에서, 아들을 잃은 어미는 울지 못했지만, 슬픔이 늙은 어미의 잠을 잠식해, 어미는 자면서 울었던가 보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이란 얼마나 큰 것인지 나는 짐작조차 못한다. 그저 살아 생전 어떤 어미도 그런 아픔을 맛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내 뜻대로 흘러가는가.

 

아빠의 죽음도 엄마의 재혼도 그저 딴 세상 일 같기만 한 아이, 유정은 부모의 빈자리를 살갑게 채워주는 할머니와 작은아빠, 베트남인 작은엄마와 잘 지내지만, 할머니의 꿈 속 울음 같은 유정의 상처는 키우던 개가 낳은 무녀리를 대하는 가족들을 보며 터져 나온다.

 

"무녀리구만. 유정아. 너 그가이 제 어미한테 가져다줘라. 그거 못 살아. 넣으 주믄 아마 제 어미가 먹든가 알아서 할 거야. 개나 돼지나 그런 무녀리 한 마리씩 낳을 때가 있어. 그건 사람이 아무리 정성스레 키워도 못살아." p.75

 

뜬금없게도 그 순간, 언청이로 태어난 나를 그냥 굶어 죽으라고 윗목에 내벼려 뒀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유정은 그 무녀리 강아지를 살리고 싶었지만, 강아지는 젖병조차 빨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

 

문득 입천장이 갈라지고 코와 입의 경게가 없어 엄마 젖도 우유병도 빨지 못했다던 내 아기 때가 떠올랐다. 나는 내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나 역시 이렇게 젖 한 방울 제대로 넘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쯤은 상상이 갔다. p.78

 

유정의 곰삭은 상처가 죽은 무녀리 강아지를 통해 터져 나오듯, 이 책은 가난한 농촌의 상처, 학대받는 결혼이민자의 상처, 차별당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상처를 깜찍하고, 따뜻하고,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니, 하지만 상처만 있다면 그게 어디 세상인가.

 

가슴 간질간질한 아이들의 풋사랑이 있고, 그 아이들의 꾸는 다채로운 꿈이 있고, 어려운 가운데 다시 세워지는 농촌의 희망이 또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강화는 역사적으로 많은 부침을 겪은 곳이다. 청동기 시대와 고려 시대의 유적뿐 아니라 근현대사의 질곡이 곳곳에 남아 있고 그곳마다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농촌과 어촌의 삶이 공존하고, 수도권에 자리한 탓에 도시 문화가 유입되면서 사람들이 잇속에 밝고 도시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또한 높다. 그런 강화가 내 삶의 자리로 들어오는데 십 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13년이 되어서야 농촌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329

 

작가 김중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따뜻하고 통찰력 있는 시선 덕에, 오늘, 게으른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뉘늦게 읽으며 울고 웃고 했다. 세상은 넓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이름난 곳들은 차고 넘치지만, 세상은 그만큼 깊고, 우리가 알고 보듬어야 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차고 넘친다는 것을 나는 차츰차츰 알아간다. 이렇게 좋은 책들로 인해.

 

작은아빠가 그랬다. 힘이 약한 존재들은 그렇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거라고. 짝을 찾지 못한 할 살배기 까치들도 가을이 되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매서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겨울을 난다고. 언제나 혼자보다 여럿이 나은 법이라고. p.322

 

'깜언'은 베트남어로 '감사하다'란 뜻이라고 한다. 반나절 빛 잘 드는 방구석에서 이 책을 읽고, 해질녘 잠시 나가 머리를 자르고, 해진 후 집을 나서 슬슬 밤나들이를 했다. 맞은편에 앉아 종알종알 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하는 아이의 표정은 밝고, 종일 침침하던 눈은 그 아이 표정만큼 밝아졌다. 내 게으른 하루와, 모든 사소한 일상과,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새삼 감사했다. 밤이 이미 깊다. 깊게 잠이 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렇게 속삭여주고 싶다.

 

"깜언, 모두 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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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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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의 만화 <이웃사람>은 이렇게 시작한다.

"죽은 딸이 일주일째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문장이 그저 소름끼치기만 했던 때가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잃게 된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죽고 나서도 매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에게 한 번도 따뜻한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그저 두려움에 떨며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을 느끼기만 한다. 아이는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슬프게 보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무섭고도 슬픈 첫 문장, 첫 장면이었다.

 

만화보다 더 무섭고 슬픈 현실을 접하기 전까지, 저 문장은 그저 소름끼치고 인상적인 첫 문장이기만 했는데, 이제는 간절한 문장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죽은 아들, 딸들 때문에. 이제는 인양된 세월호와 함께 돌아올 수 있기를...그 아이들...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읽던 밤들이 생각난다. 나는 평생 울 울음을 이미 다 울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울음들이 남아서 이 책을 읽는 며칠동안 잠을 갉아 먹고, 몸을 무겁게 하고, 머리를 아프게 했다.

 

˝종후야! 올라가자. 나랑 같이 가자.˝
선내로 진입한 잠수사들이 실종자를 찾으면 대부분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 말이 가슴에 머물든 입술을 통해 나오든, 실종자를 찾은 후엔 그 실종자와 함께 어둠을 뚫고 좁은 배 안을 빠져 나와야 하니까요. 잠수사들은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실종자가 돕지 않는다면, 결코 그곳에서 모시고 나올 수 없다고.(...) 떠오르던 종후가 멈췄습니다. 쓰러진 침대 뒤쪽에 실종자가 더 있는 겁니다. 저는 틈 사이로 팔을 더 깊숙이 집어넣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며 그곳 상황을 머리로 그렸습니다. 침대 뒤 그 좁은 공간에 남학생 세 명이 원을 그리듯 어깨동무를 하고 뭉쳐 있는 겁니다. 종후까지 네 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마지막 순간을 맞았을 겁니다. 엇갈려 붙은 어깨와 손을 더듬는데 다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 p.81

 

이 소설은, 세월호 선내에서 실종자들을 수습한 민간잠수사들의 이야기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 잠수사를 위한 탄원서 형식과, 르포 형식이 번갈아 서술되고 있다. 탄원서에는 실종자들의 수습과정이, 르포 형식에는 외부적 상황들이 때로는 인터뷰 형식으로, 때로는 신문 기사나 인터넷 댓글의 형식으로 나와 있다.

 

방금 기물이 쏟아졌지만 이젠 벽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목과 뒤통수를 얻어맞는 정도가 아니라 제 목숨까지 위태로울 겁니다. 벌을 서듯 양팔을 든 꼴이었습니다. 목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팔꿈치와 손목과 손끝까지 떨림이 퍼졌습니다. 비수로 관절 마디마디를 저미는 듯 아렸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 희끄무레한 물체가 아주 천천히, 인사라도 건네려는 듯 곧장 다가왔습니다. 선내로 들어선 후 직선의 움직임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종자였습니다.
잠수사인 제가 실종자를 찾은 게 아니라, 실종자가 저를 찾아 다가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 p.121

 

바디팩만 있다면, 민간잠수사가 선내에서 실종자를 발견하자마자 그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바디팩에 담아 옮기는 것이 민간잠수사가 끌어안고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합니다. 여러 번 건의했지만 바디팩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바디팩 삼백 개도 주지 못할 만큼 이 나라가 가난한가 그런 생각도 솔직히 했습니다. - p.134

 

-미안합니다.
그 잠수사는 분명히 내게 미안하다고 했어. 생각들을 해봐. 잠수사가 내게, 나아가 유가족에게 미안할 게 무엇이 있겠어? 그들은 이 불편한 바지선에서 먹고 자며 실종자를 찾기 위해 잠수하는 사람들이야. (...) 나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을 맹골수도에서 잃은 국민이고, 내 앞에 앉은 사내들은 억울하게 숨진 내 아들을 찾고자 매일 잠수하는 국민이라고. 국민과 국민이 만난 거야. 유가족과 잠수사가 서로 사과를 주고받아선 안 돼. 오히려 우린 함께 국민을 우롱하고 상처를 입힌 자들을 찾고 그들에게 공개 사과를 받아야 해. - p.181

 

 

추악한 소문들이 유가족에게만 덧씌워진 것은 아닙니다. 잠수사에 대한 악담도 인터넷에 가득했습니다. 몸값을 올리기 위해 시신을 발견하고도 일부러 선내에 두고 꺼내 오지 않았다는 댓글을 읽었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습니다. - p.264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이 그랬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너무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슬픔과 분노로 솟구쳤다.

작품의 모델이 된 김관홍 잠수사는 2016년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죽음에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소설 쓰는 기술이나마 지녔으니 다행인 걸까.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참혹하다. (...) 김관홍 잠수사라면, 이 여름부터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인양될 때까지, 동거차도 감시 천막 앞 돌 리본 옆에 두 눈 끄게 뜨고 서 있을 것이다.

 

뜨겁게 읽고 차갑게 분노하라."

 

그리고 영화감독 변영주는 또 이렇게 말한다. 변영주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까지 얹어 나도 말한다.

"부디 읽어 주세요."

 

다시, 강물의 만화 <이웃사람>은 살인범의 목소리로 이렇게 끝이 난다.

"죽은 여학생이 일주일째 지하실에서 올라오고 있다."

그들, 계속 살아오라고, 죽인 자들 앞에 계속 이렇게 살아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낱낱이 밝히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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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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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의 TV 안 영화채널에는 발정난 몸뚱이들이 낑낑대며 부닥치는 영화가 제법 많아 긴 겨울밤을 솔찬한 눈요기로 보낼 수 있어 좋다.그날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공중파 정규 방송으로 접어 든 채널 중 하나에서, 사람처럼 보이는 무엇이 꼬물거리며 문지방을 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보니 사람이었고, 여자였고,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더 보니 모두 세 명이었고, 모두 여자였고, 처음 본 사람 외에 다른 한 사람은 앉은뱅이(라고 생각됨), 또 다른 한 사람은 소아마비(라고 생각됨)였다. 세 사람은 함께 살고 있었고, 그것은 그런 그들의 독립 생활기를 그린 [거북이 시스터즈]라는 제목의 단편영화였다. 기억에 음악은 없었던 것 같고, 나레이터는 그녀들 자신이었으며,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우린 이렇게 불편하고 억울하게 살고 있어요, 라고 항변하지 않는 그, 담담해서 당당한 목소리가 나에게 또 하나의 목소리를 생각나게 했다.

“그 아이가 뭘 잘못했니?”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놀려댔어.” “그 아이에겐 잘못이 없어. 아버지는 난장이야.”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행복동 김불이 씨의 목소리. 그 밤으로 당장 나는, 오래되어 책장이 버석거리고 묵은 냄새가 나는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모든 것이 화려하고 장황하기만한 때에 읽는 그들의 어조는 담담하고 건조해서 오히려 더 처연했다. 난장이인 아버지는 아프고, “나”는 곧 공장에서 잘릴 거고, 두 동생은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 앞에서 아픈 아버지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머니가 울었다”(p.74)가 전부다.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수사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건조하고 짤막한 문장들 사이로, 씹어 삼킨 울음과 흘려 내버리지 못한 눈물이 만든 내(川)가 쉼 없이 흐른다. 그 내에 나는 곧 젖어버리고 만다.   


사실, 그들의 담담해서 당당한 목소리가 이 책을 생각나게 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때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앉은뱅이(라는 장애를 가진 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 단편영화를 보고 이 책을 생각해낸 것은 바로 그 앉은뱅이를 태어나 처음으로 봤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 책을 통해 “앉은뱅이”라는 단어를 읽는 것은 꼽추나 난장이를 읽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었다. 꼽추나 난장이를 읽을 때의 잡힐 듯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 앉은뱅이를 읽을 때에는 없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추상명사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앉은뱅이”라는 말은 꽃에도 잘 어울릴 법하게 예쁜 말이 아니냐. 그러다가 그 단편영화를 보고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은 나는 앉은뱅이가 나오는 부분에선 그의 힘든 움직임이 그려져 숨까지 차올랐다. 길들은 그에게 너무 길고도 넓었고, 세상은 그에게 너무 높고 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내에 내가 곧 젖어버린다는 말이나, 그 움직임이 그려져 숨까지 차올랐다는 말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처지와 그들의 외모를 보곤 그들이 바라지도 않는 동정을 날리며 속으로는 “작지 않은 그 여자가 난장이와 어떤 성생활을 했을까”(p.216) 상상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난장이의 말을 믿고 그에게 수도를 맡기는 사람이기보다는 어머, 저 뒷집 여자가 난장이에게 수도를 맡기네..하며 숨어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뒷말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며, “따뜻한 잠자리에서 남자아이를 생각했고, 그 남자아이를 끌어내기 위해 불쌍한 아이들을 파”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이어서 이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이불 속에서 과자를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함께 눈물을 흘려내며 읽는, 차라리 그런 사람이다. 4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가 83,428원인데 세 명의 자식이 일을 하고도 벌어오는 돈은 고작 80,231원인, 그런 나라는 알지도 못하고, 그런 가정의 형편은 짐작조차 못하는.


그러나 또 사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보는지 모른다. 꽃삽으로 한 삽씩 떠엎어 다져놓은 작지만 알찬 꽃밭처럼, 잡초가 나 있던 표면의 마른 흙과, 땅 속의 젖은 흙이 보기 좋게 섞인 것 같던 그들의 시간. 이제 뿌리 뽑힌 표면의 잡초가 땅속으로 썩어 들어가 거름이 되는 것처럼, 그들의 고단한 현재에 과거의 아버지 말씀과 비참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게 거름이 되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지속될 우리의 현재에 그들의 남루한 생활과 비참한 죽음이 담긴 이 책이 맞춤한 거름이 되어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거북이 그녀들이 힘든 이사를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불콰해진 얼굴로 저마다의 휠체어에 의지해 집으로 향한다. 그들의 휠체어 큰 바퀴를 따라 “절망과 함께 희망이 굴러온다.” (영화 “키즈 리턴”의 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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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1~18(완결) 세트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세주문화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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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외갓집에서 잘 거니까, 엄마 아빤 그냥 가도 좋아 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여섯 살 난 조카는 그러나, 새벽3시쯤이 되자 집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그 조카를 데리고 걸어서 10분쯤 걸리는 그 아이의 집으로 갈 때였다. 그런 시간은 아직 집을 찾아 들어가지 않은 취객과 아직 첫손님을 받지 못한 창부들이 골목에 뒤엉켜(우리 동네엔 그런 방석집이 좀 있다) 있게 마련이다. 어린 조카는 한 손을 내게 맡기고 다른 한 손엔 자기가 낮에 만든, 조도가 형편없게 낮아 바로 아래의 아스팔트에도 빛 한 줄기 내뿜지 못하는 그런 손전등을 들고 고개를 떨구고 걷고 있었다. 그러며 입으로는 계속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안 무서워. 안 무서워. 짜이모도(작은 이모, 곧 나다)있고, 손전등도 있고, 집도 다 와 가고, 나쁜 아저씨가 오면 발로 찰 거야. 안 무서워. 난 용감해.”

조카의 그 모습은 내게 “몬스터”에서의 한 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버려진 창녀의 아들로 고아원에 맡겨졌던 아이. 엄마를 찾겠다고 도시를 자주 돌아다니곤 하는 그 아이에게, 요한은 한나의 모습을 하곤 이렇게 말한다. “네가 엄마를 찾는다고 너희 엄마도 널 찾을 것 같니. 넌 왜 버려졌어? 넌 네가 원해서 태어난 거야?” 그러곤 아이를 국경의 사창가로 보내며 여기 엄마가 있을 테니 찾아보라고 한다. “만약 엄마가 널 알아보지 못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지?”라며. 그 사창가를 걸어가는 동안 그 아이가 보는 것을 보며, 그 아이의 변하는 표정을 보며, 이 아이의 이 공포로 가득찬 머릿속을 잠시 내가 떠안을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의 이 무섭고 추악한 기억을 이 아이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었다. 그 기분이 내 조카에 이르러서는 몇 배나 증폭된 것은 물론이었다.

다행히 그 아이도, 우리 조카도 (내가 그 속을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그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런 판에 박힌 말은 낯간지럽지만 주변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렇다면, 엄마에게 버림받고 많은 주검을 목격한 기억을 ‘공유’한 남자 아이가 그 후에 고아원에서 모진 학대와 약육강식의 동물적 생존만을 강요받았다면, 그리고도 사랑은커녕 그 아이의 증오를 살인병기로 사용하고자 하는 이들의 은근한 부추김과 살인에 대한 격려와 찬사만을 받았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그 아이를 몬스터로 만들었다. 사람의 가장 취약한 점을 파고들어 죽음에, 혹은 살인에 이르게 하는 절대자의 위치에 선 교사(敎唆)자, 요한. 그리고 그 몬스터 요한을 응징하려는 사람으로, 그에게 새 생명을 준 (출세를 포기하고 의사의 도리를 다한) 인간적인 의사 닥터 덴마와, 요한과 어두운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나 그 기억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요한의 쌍둥이 여동생 한나를 지목했다. 그렇다고 이 만화가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대립만을 보여주고 있을 거라고 섣불리 판단해 버리시면 안 된다. 당신은 이 만화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맛보실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당신은 이 책을 덮고 나서도 서늘한 몬스터의 기운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몬스터의 그 서늘한 기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었을 때, 당신은 상처입은 한 영혼만을 아프게 기억하실 것이다. 행복한 요한이 될 수도 있었던 한 아이를.

덧붙임)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공포라는 것이 대부분 소리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별것 아니라는 분도 계시겠지만 분명히 나처럼 놀란 분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내 주변의 어떤 아줌마는 심지어 소릴 지르며 만화책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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