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의 TV 안 영화채널에는 발정난 몸뚱이들이 낑낑대며 부닥치는 영화가 제법 많아 긴 겨울밤을 솔찬한 눈요기로 보낼 수 있어 좋다.그날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공중파 정규 방송으로 접어 든 채널 중 하나에서, 사람처럼 보이는 무엇이 꼬물거리며 문지방을 넘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보니 사람이었고, 여자였고, 다리를 전혀 쓰지 못했다. 더 보니 모두 세 명이었고, 모두 여자였고, 처음 본 사람 외에 다른 한 사람은 앉은뱅이(라고 생각됨), 또 다른 한 사람은 소아마비(라고 생각됨)였다. 세 사람은 함께 살고 있었고, 그것은 그런 그들의 독립 생활기를 그린 [거북이 시스터즈]라는 제목의 단편영화였다. 기억에 음악은 없었던 것 같고, 나레이터는 그녀들 자신이었으며,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우린 이렇게 불편하고 억울하게 살고 있어요, 라고 항변하지 않는 그, 담담해서 당당한 목소리가 나에게 또 하나의 목소리를 생각나게 했다.

“그 아이가 뭘 잘못했니?”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놀려댔어.” “그 아이에겐 잘못이 없어. 아버지는 난장이야.” 십 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행복동 김불이 씨의 목소리. 그 밤으로 당장 나는, 오래되어 책장이 버석거리고 묵은 냄새가 나는 이 책을 꺼내 들었다. 모든 것이 화려하고 장황하기만한 때에 읽는 그들의 어조는 담담하고 건조해서 오히려 더 처연했다. 난장이인 아버지는 아프고, “나”는 곧 공장에서 잘릴 거고, 두 동생은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 앞에서 아픈 아버지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머니가 울었다”(p.74)가 전부다.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수사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건조하고 짤막한 문장들 사이로, 씹어 삼킨 울음과 흘려 내버리지 못한 눈물이 만든 내(川)가 쉼 없이 흐른다. 그 내에 나는 곧 젖어버리고 만다.   


사실, 그들의 담담해서 당당한 목소리가 이 책을 생각나게 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때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앉은뱅이(라는 장애를 가진 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 단편영화를 보고 이 책을 생각해낸 것은 바로 그 앉은뱅이를 태어나 처음으로 봤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 책을 통해 “앉은뱅이”라는 단어를 읽는 것은 꼽추나 난장이를 읽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었다. 꼽추나 난장이를 읽을 때의 잡힐 듯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 앉은뱅이를 읽을 때에는 없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추상명사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앉은뱅이”라는 말은 꽃에도 잘 어울릴 법하게 예쁜 말이 아니냐. 그러다가 그 단편영화를 보고 다시 이 책을 꺼내 읽은 나는 앉은뱅이가 나오는 부분에선 그의 힘든 움직임이 그려져 숨까지 차올랐다. 길들은 그에게 너무 길고도 넓었고, 세상은 그에게 너무 높고 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내에 내가 곧 젖어버린다는 말이나, 그 움직임이 그려져 숨까지 차올랐다는 말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처지와 그들의 외모를 보곤 그들이 바라지도 않는 동정을 날리며 속으로는 “작지 않은 그 여자가 난장이와 어떤 성생활을 했을까”(p.216) 상상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난장이의 말을 믿고 그에게 수도를 맡기는 사람이기보다는 어머, 저 뒷집 여자가 난장이에게 수도를 맡기네..하며 숨어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뒷말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며, “따뜻한 잠자리에서 남자아이를 생각했고, 그 남자아이를 끌어내기 위해 불쌍한 아이들을 파”는 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이어서 이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이불 속에서 과자를 먹으며, 과자 부스러기와 함께 눈물을 흘려내며 읽는, 차라리 그런 사람이다. 4인 가족의 최저 생계비가 83,428원인데 세 명의 자식이 일을 하고도 벌어오는 돈은 고작 80,231원인, 그런 나라는 알지도 못하고, 그런 가정의 형편은 짐작조차 못하는.


그러나 또 사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보는지 모른다. 꽃삽으로 한 삽씩 떠엎어 다져놓은 작지만 알찬 꽃밭처럼, 잡초가 나 있던 표면의 마른 흙과, 땅 속의 젖은 흙이 보기 좋게 섞인 것 같던 그들의 시간. 이제 뿌리 뽑힌 표면의 잡초가 땅속으로 썩어 들어가 거름이 되는 것처럼, 그들의 고단한 현재에 과거의 아버지 말씀과 비참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게 거름이 되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지속될 우리의 현재에 그들의 남루한 생활과 비참한 죽음이 담긴 이 책이 맞춤한 거름이 되어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거북이 그녀들이 힘든 이사를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불콰해진 얼굴로 저마다의 휠체어에 의지해 집으로 향한다. 그들의 휠체어 큰 바퀴를 따라 “절망과 함께 희망이 굴러온다.” (영화 “키즈 리턴”의 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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