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그날은 심야의 영화관에 혼자 가게 되었을까. 보고나면 오랜 친구와 함께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어질 거라던 이 영화. 그러나 그런 기분을 함께 나누고 싶은 친구는 멀리 있었고, 가까이 있는 친구들은 이 영화를 보고싶어 하지도 않았거니와 같이 가준다고 했어도 내가 거절했을 것이다. 보고나서 정말 누군가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어진다면, 내 속의 많은 나 중에서 하나를 불러내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나름대로는 강단지게 마음먹고 혼자 나선 길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사실 쓸쓸했다. 후에, 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벌거벗은 이얼이 기타를 치는 모습과 함께, 관객도 많지 않던 심야의 영화관에 혼자 앉아 있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지곤 했다.

하지만 그 가슴아림은 이제 잊혀질 것 같다. 얼마 전 TV로 다시 접한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이전 영화관에서 느꼈던 삶의 어떤 남루함이나 고단함이 아니라, "사랑밖에 난 몰라" 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을 어떤 희망이었던 것이다. 예전엔 미처 봐내지 못한 희망을 새로이 느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오늘 이들은, 그날의 쓸쓸했던 나를 잊을 수 없노라고, 정말 고맙다고, 당신이 있어 영화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또 이 음반도 나올 수 있었노라고, 그러니 이제 당신을 위해 특별한 공연을 시작할 거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아, 나는 정말 영광스럽게도 이 영화를 본 15만 관객 중 한사람이었고, 지금 뒤늦게 이 사운드트랙을 구입해 나를 위한 그들의 특별 공연을 만끽하는 중이다)

쉿, 이제 시작한다. "야간업소의 비틀즈, 와이키키 부라더스"가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를 부른다. 아, 이런 뽕스런 노래가 이렇게 귀에 착착 감겨드는 것을 보니 나도 어느새 나이가 든 것인가. 한때는 귀에 꽉 차고 들어와 내 속에서 끓어올라 나를 아예 폭발시킬 것 같은 음악만을 들었는데, 이렇게 좀 빈 듯하고, 그 빈 부분을 노랫말과 또 나의 상념이 채우고 드는 음악이 좋아지는 걸 보니 기호란 게 정말 영원하진 않은가 보다. 다른 노래들은 배역을 맡은 배우가 직접 노래를 하는데, 이얼은 노래실력이 좀 아닌가, 이건 김진석이라는 가수가 부르고 있다. 하, 이거 부클릿에 가사만 떡 있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아쉽다. 가사를 제대로 몰라 따라 부르는데 애로가 상당하다.

오, 벌써 한 곡이 끝났다. 우리의 착한 스쿨밴드, 훗날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되는 충고보이스가 부르는 송골매의 노래 "세상만사"다. 이 곡을 부르는 목소리는, 고교시절의 성우를 연기한 박해일이다. 연주와 목소리에서 고등학생의 치기와 열정이 느껴진다. (고 하면, 내가 뭐 음악을 썩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으로부터 이맹(耳盲)이란 소릴 듣는 사람이다. 그러니 제대로 알고 들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느낌이 고등학생의 연주와 노래 같다는 거다) 박해일은 이거, 분위기만 좋은 줄 알았더니 <질투는 나의 힘>에서의 연기도 썩 좋았고 노래도 곧잘 부른다. 키워주고 싶다. 무슨 수로 -_-;;

아, 다음 곡이다. I love Rock & Roll 이 곡을 부른 여자애는 서울예대의 "디기딥밴드"의 보컬이던 문혜원이란 아이다. 임순례 감독이 어느 TV 프로에서-나도 봤는데, 제목을 잘 모르겠다- 저 디기딥밴드가 나온 걸 보고 이 친구를 인희의 고교시절 배역으로 찜했단다. 연기가 다소 어색하긴 했어도 뭐 원래 그런 친구들이 좀 뻘쭘하고 후까시는 있는대로 잡고 다닌다는 걸 감안하면 그다지 나쁜 연기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래를 이렇게 잘 불러내지 않았는가. 이 친구의 목소리는 살짝 김윤아의 초기시절을 연상케 하는데, 그녀보다 더 앙칼지다. 생긴 것도 꽤 괜찮아서 성공하겠다 싶더니, 곡을 잘 못 만드는가, 팀을 잘못 만났는가, 아직 잠잠하다. 아쉽지 뭐.

잘은 모르지만 송골매와 함께 아마 당시의 스쿨밴드들이 가장 많이 카피했을 옥슨 80(맞나?)의 노래 "불놀이야"가 이어 나온다. 역시 목소리는 박해일이다. 목소리 조오코~

잠시 쉬었다 간다. 충고보이스가 와이키키브라더스로 개명되는 순간의 장면 약간. 비키니 금발이 쭉쭉빵빵 걸어가고...그렇지, 심하게 와닿는다. 한때 내 친구네 밴드 이름은 "립스틱 킬러"였다. 작명이 반이라며 온갖 멋있는 단어들은 다 끌어다대더니 결국 저 이름을 만들어 내고는 오래 못가 해체됐더랬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 밴드 이름 중 최고는 "시나위"다! 더 말해 무엇하랴.

다시 박해일의 목소리로 Come Back이 흘러나온다. 디스코텍에서 꽤 흘러나왔을 노래 같다. 몸이 절로 들썩인다. 내가 가장 아쉬은 것이 왜 우리나라에선 락과 헤비메탈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몸소 다녀보고 판단하건대, 춤추고 놀기에 나이트보다 작은 클럽 공연장이 백배 나은데도 말이다. 낯선 남자의 어깨에 내 팔을 걸고, 낯선 남자의 팔을 내 허리에 감고 그 상태로 방방 뛰며 머리를 흔들고 놀다 보면 바로 오르가즘인데...뛰다보면 덥고, 덥다보니 하나씩 벗어던지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얇은 면티 한 장, 살짝살짝 풍겨주는 건강한 암컷과 수컷의 땀냄새..흐미..걍 로또대박만 터져라. 내가 하나 차린다! (아, 이거 정말 로또나 사볼까..느낌에 샀다하면 바로 대박날 거 같은데 ^,,^;;)

쫘아, 이제부터 뻘쭘한 드러머 황정민의 노래 나가신다. 지금 저 남자는 스테이지 중앙에서 길숨한 몸 흐느적이며 유혹의 눈꼬리 살살 흔드는 때밀이 아가씨를 사로잡아 보겠다고 열심히 오버 중이다. 황정민이란 배우, 바람난 가족에서도 그랬지만 배역에 제대로 녹아들어간다. 게다가, 노래도 잘하네. 김현식의 "사랑사랑사랑"과 신촌블루스의 "골목길" 연달아 나온다. 따라서 좀 불러줘야지, 이런 노랜. 크하하..코러스 죽인다. 샤라라라~~

이제 이어서 나올 노래는 바람둥이 키보디스트 박원상이 부르는 칠갑산과, 김진석의 회상..이건 그냥 조용히 들어주고....

트랙 13번에선 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9초짜리 "서울 야곡" 이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기타 하나, 동전 한 닢으로 평생을 살아온 늙은 기타리스트가 술만 마셨다 하면 불러대는 곡이다. 인희와 함께 하지 못했다면 결국 성우의 테마가 되었을 노래지만, 다행히도 그들을 위해선 다른 노래가 준비되어 있다.

곧이어 김진석이 부르는 "어머님의 자장가" 흘러나오고, 애잔한 그 노래가 끝나자 친구 하나가 우리들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은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 라고 묻는다. 행복?

주점에서 벌거벗고 돈지랄 떠는 인간들 앞에서 돈이 울어 벌거벗고 기타나 쳐대야 하는데, 행복? 차라리 꿈은 "그리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때" (이동진 기자 왈) 가장 아름다운 게 아닐까...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또 앞으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냐고..? 인희를 연기한 오지혜가 노래로 말해 줄 거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땜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인 아무 것도 이제, 할 수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 무심히 버려진 날 위해 울어주던 단 한 사람, 커다란 어깨 위에 기대고 싶은 꿈을 당신은 깨지 말아요. 이날을 언제나 기다렸어요.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주세요. 그리운 바람처럼 사라질까봐 사랑하다 헤어지면 다시 보고 싶은, 당신이 너무 좋아. 프로포즈는..내 주제에..라고 말하던 성우에게 이만한 대답이 어디 있을까. 가슴이 괜히 벅차 올라 눈물이 다 난다. 아, 오지혜..나는 이 여자가 너무 좋다...

엇, 이런 끝인가 했더니 또 한 곡이 남았네. 나이트 삐끼 류승범이, 판돌이가 되어서 부르는 "아가씨"다. 오..이거 혼자만 부른 게 아니네. 어린 시절의 와키 멤버들이랑 다 같이 부른다..오예~신나는구만..근데 역시 이맹이라 어떤 게 누구의 목소린지, 류승범 말고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위에서 계속 들어오던 박해일의 목소리도 분간을 못 해내겠네. 웃차..이제..

사랑밖에 난 몰라의 연주곡을 들으면서, 마무리 체조를 하고..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겠다. 내일도 어김없이 7시 30분에 일어나, 헬스장에 가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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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kitchen 2004-03-3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젠장..왜 이렇게 길어진 거야..읽기 싫게..-_-;; 낼 손봐야겠다. 오늘은 이만 자고..모두모두 즐잠~

비로그인 2004-03-31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전주국제영화제 2회였던가, 3회였던가. 그때 류승범이 영화홍보대사였고 개막상영작이 [와이키키 브러더스]였어. 류승범, 화면에선 삼류양아치처럼 보이쟎아. 그때 사횔 봤는데 상당히 지적인 느낌이 강허도먼. 암튼, 나 구때 임순례 감독 콧구멍만 우러러보면서 숨도 못 쉬고 쳐다보느라 정신없었어. 글고 I love Rock & Roll 부르던 여자배우, 아- 내가 가능성을 점쳤는데 증말 그 이후론 안 보이더군. 그때 내가 좀 짜증이 났던 게 뭐냐면 공연에 참석한 사람들 태도야. 저렇게 이뿌고 괜챦은 여자얘가 노랠 부르는데 왜덜 가만히 있냐고. 사실 전주사람들이 양반승깔이 있는데다 공연문화엔 익숙하지 않으니까 뻘줌, 쳐다보고만 있긴 한데 박수 하나 제대로 쳐주는 사람 없더라고. 악. 진짜, 짜장이더만. 구냥 꼴린대로 하면 되는 것을.(아, 이거 꼴린대로, 라는 형용사, 정말 대단히 철학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어휘 아닌가!) 이건 자만일지 모르지만 소통과 폭발이 어우러져 미쳐버릴 듯한 공연을 한 번 체험해 본 사람들은 다신 저 기계적이고 들척지근한 땀에 젖은 나이트를 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나도 저 영환 이미 영화제에서 봐버렸고 그리고 혼자서 본 영화 중에 생각나는 게 크크...'매트릭스'여. 평일오후에 봤는데 앞 줄의 영상기사 아저씨랑 같이 봤어. 다정하게 담배도 나눠 피면서. 암튼, 쏠키! 이대로 조응게 감상글, 짜브러트릴 생각하지 마..

soulkitchen 2004-03-3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사드 후작 얘기를 다룬 영화, 제목이 "퀼스"던가..그걸 또 혼자 봤는데, 밤 11시 40분쯤에 시작하는 거였는데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사람이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구요. 시작 시간되니 기사아저씨가 들어와서 안에 사람 있습니까? 그러는데, 제가 허리 쭉 펴고 돌아보며 여기요~그래서 혼자 봤죠. 제 생각엔 케이트 윈슬렛도 나오고 조아퀸 피닉스도 나오는 영화라 사람 좀 많을 줄 알았는데..쩝..그렇더라구요. 글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사운드트랙 속지에 배우들이 하도 15만 관객에게 감사드린다고 해싸놔서 괜히 우쭐해지는 거,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크..암튼 이 시점에서 DVD를 살까말까 하고 고민하게 만드누만요. 그 여자애, 성도 찍었었어요? 괜찮지 않았수? 저도 좀 뜰줄 알고 기다렸는데, 잠잠해요. 아쉬워요. 훗..성님, 매트릭스 볼 때도 사람이 아예 없었나 봅니다? 하여간, 따라댕겨보고 싶은 사람이란 말야..^^

비로그인 2004-03-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혜원, 맞따! 그 친구가 빨간 우와기 입고 나와 라이브했었는데. 훔. 그러고보니 쏠키 말대로 김윤아보다 더 앙칼지지. 근데 그 앙칼짐이 사람 확 끌리게 만들더만. 두 팔 높이 뻗어 신나게 박수 쳐주었는데 안 보이다니 아쉬워. 글고 뭐여, 15만 관객. 정말 심하구만. 이러니 독립 저예산 영화들, 어디 해 먹겠냐구. 구냥 묻혀버리기엔 아까운 영화들 참 많은데 말여. '퀼스'는 이름만 들어봤지 못 본 영화여. 케이트 윈슬레, 아...난 타이타닉 볼 때 백치미 같은 거 느꼈는데. 그거 또 끌리는구만. 사드 백작이라니. 케이트 윈슬렛을 막 때리고 그럴 거 같어.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사드에 대해 왜곡된 것이 너무 많다고 하더만. 음...암튼 쏠키가 심야극장을 찾았다니...쩝.. 구때 많이 힘들었군..큭큭...난 심야에 혼자서 ' 원령공주 ' 봤는데 껌껌허니 극장이 좀 무섭더만. 암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겐 미안한데 익산에선 참패했어. 큭...미야자키가 보여주는 메시지. 잘은 모르겠지만 문명과 야만의 대립, 뭐 그런...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그 무언가가 참 괜챦았는데. 상상력과 영상도 뛰어나고. '매트릭스'는 주말엔 좀 붐볐다고 허더만. 아띠, 거그서 마릴린 맨슨이랑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쉰 나오쟎어. 노래땀시 더 흥분해가지고. 그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하니까 다리를 왼쪽 다리 위로 얹었다, 오른쪽으로 얹었다 앞 의자를 껴안았다 머리뒤로 손을 깍지꼈다...전형적인 정서불안 증세를 보인 거여.큭큭...

icaru 2004-04-2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순례의 영화네요...저 영화에서 주인공 고등학교 적 역을 했던 배우가...박해일이라고 해서....뒤적뒤적 다시 보았더니...박해일...맞더군요...

이 영화보고 "사랑밖에 난 몰라"...와..모...연극(남자충동)에서 바보여자동생이 불렀던 "목포의 눈물"이...저리도 구성지고 마음을 야리야리하게 만든다는 걸...나이가 먹고서야 새삼 알았네요...

선인장 2004-04-2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두 시부터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두 정거장이나 되는 길을 걸어가 기어이 소주를 한 병 사왔지요. 겨우 반 병에 정신을 놓고, 조금은 울었던 것도 같습니다.
한 남자의, 벌거벗은 몸이, 저도 참 슬펐어요.
어깨가 유난히 내려앉은 이얼이라는 배우를, 다른 작품에서 볼 때마다 저는 그의 몸이 먼저 생각나고, 그래서 영화 내용과는 상관도 없이 마음이 짠해집니다. 이런 영화를 같이 볼 수 있는 친구 하나가 가까이 있어, 영화가 끝나고 아무 말 없이 술 한 잔 나눌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soulkitchen 2004-04-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밖에 난 몰라"를 저도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좋아하게 됐어요. 첨에는 별 생각이 없더니, 맞어요, 나이가 들어서야 새삼 알겠더라구요. 그리구, 선인장님. 정말 그런 친구 하나 가까이 살면 좋겠어요...가까이는 아니더라두 어딘가 있기만 하다면, 가끔 만나서 별 수다를 떨지 않아도 그저 편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