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1 - 5부 5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올해 처음으로 <토지>를 펼친 후, 때론 ‘과연 내가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하는 의혹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등장인물들이 생생하게 다가와 나의 일상 속으로 불시에 찾아와 말을 걸었고, 결코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과연 나라면?’이란 물음이 또한 마음을 뒤흔들었다. 돈, 권력의 유무를 차치하고, 면면의 인물들의 삶은 그자체로 아름답고도 애달픔 그 자체였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한 고비 넘어 숨을 돌리면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다가도, 끝도 없는 펼쳐진 그 막연한 길에 대해, 그 불안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 때, 불쑥 다가와 조곤조곤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 불안과 두려움,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그리움마저도 온몸으로 끌어안으라고. 그렇게 견디는 삶의 환희를 오롯이 일깨워주었다.

 

생명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마지막을 향해 치달릴수록 명쾌해졌다. 생명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소중한 가치, <토지>를 읽다보니, 나 스스로 참으로 유해졌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졌다. 앙칼지고 모난 마음의 언저리를 자꾸만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그 느낌은 그 누군가의 품처럼 온몸이 짜릿하도록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 결코 잊을 수 있는 따스함이었다. <토지>의 힘은 숱한 시간이 다져낸 생명에 대한 긍정의 힘이 아닐까?

 

이제껏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나와 비슷하게 읽던 누군가와 경쟁을 하기도 하면서. 때론 쫓기듯이 읽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족스럽지가 않다. 자꾸만 곁에 두고픈 마음이 커져, 최근 개정판 <토지>를 꼭 소유하겠다는 마음이 한 가득이다. 2012년, 21권의 <토지>를 꼭 읽겠다는 다짐을 이미 달성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선물해도 좋지 않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간질간질하다. 그만큼 또 읽고 싶다. 아니, 어떤 아쉬움과 시원섭섭함보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들로 가득 차오른다. 월선, 봉선(기화), 김환, 이용 그리고 기억에 가물가물한 수많은 인물들이 그리워지고 또 그리워진다.

<토지 21(5부 5권)>의 마지막을 향하면서 왠지 모를 외로움과 두려움이 나를 괴롭혔던 것도 사실이다. 만주로 떠난 이들(석이, 상현)이 직접 등장하였고, 영광이 만주로 떠났고 그 어미는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현을 데리고 평사리로 돌아온 서희, 잠시 내려온 환국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갈등들이 풀리기보다는 그 다음의 이야기가 또한 궁금해진다. 과연 어떤 책을 펼쳤을 때,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한다.

 

광복을 앞둔 상황 속, 그 암담함과 처절함, 결코 속속들이 들어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고통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박 겉핥기식의 역사를 통해 분개했던 것은 어쩌면 학습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야 비로소 그 숨 막히도록 살벌했던 시대, 그 핍박 받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결코 나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결코 머나먼 나라의 타자일 수가 없고, 그것은 과거의 문제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해, 아니 외면하고 오늘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그 잔인함과 잔혹함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마음과 몸이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 찰 수 있는지도 더욱 뚜렷해지고 명쾌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음하며 좌절하고 움츠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도 가득 찼다. 그래서 스스로를 수시로 돌아보게 된다. 아니, 끊임없이 그들과 호흡하면서 나를 다지고 싶다. 흔들리는 마음들, 갈등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방황하는 그 마음들이 단단하게 묶고, 사람냄새 진하게 풍기고 싶다. 살뜰하게 나의 마음 밭을 다져줄 <토지>의 존재만으로도 풍요로워진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허허헛헛... 내 자랑이 지나쳤습니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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